'실패만큼 확실한 실패는 없다. 혁명 100주년을 맞는 역사가들에게 소련의 소멸은 그늘을 드리운다.' (「What's Left?」, LRB, 2017)
소련사 연구의 수정주의 학파를 이끈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역사가. 1970~80년대 『교육과 사회 이동』, 『러시아 혁명』, 『스탈린의 농민들』, 『일상의 스탈린주의』를 잇달아 내며 국가와 지도자가 아닌 노동자·농민·도시민의 시선으로 소비에트 체제를 읽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개척했다. 2017년 LRB 기고문 「What's Left?」에서 10월 혁명 100주년의 역사서들을 평하며 혁명사 서술의 세 흐름(전체주의 모델, 수정주의 사회사, 포스트소비에트 '역사의 막다른 골목' 합의)을 정리했고, 혁명이 스탈린주의로 귀결된 경로를 숙명이 아닌 사회적 동학의 산물로 분석해 냉전기와 그 후의 학계 모두에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쓰요시 하세가와는 러시아·소련사와 냉전사, 러시아·일본 관계를 연구한 일본계 미국인 역사가다. 그는 러시아혁명, 일소 관계, 태평양전쟁 종결이라는 세 분야를 넘나들며 국가 간 외교와 사회 변동을 함께 분석했다. 대표작 《Racing the Enemy》는 1945년 8월 일본의 전략적 선택에서 히로시마 원폭만이 아니라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중립조약 파기가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해 항복 원인에 관한 논쟁을 다시 열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64도쿄대학교 교양학부 졸업
1969워싱턴대학교 역사학 박사
1970년대뉴욕주립대학교 오스위고 역사학 교수
1980–1981《The February Revolution》 출간
1980년대–1990년대홋카이도대학교 슬라브연구센터 교수
1998《The Northern Territories Dispute and Russo-Japanese Relations》 출간
안드레이 그라초프는 동방학을 전공한 국제문제 전문가이자 기자로, 소비에트 개혁의 국제적 의미와 내부 정치에 관여했다. 그는 1991년 8월 쿠데타 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보좌관 겸 마지막 대통령 공보비서가 되어, 연방을 보존하려는 협상과 국가기구의 해체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그의 회고록과 공개한 개인 문서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민주화 약속이 연방 붕괴의 가속과 맞물린 긴장을 증언한다.
훗날 카잔니크는 그 결정을 이렇게 돌아봤다: "모스크바에서 옐친에게 투표한 사람은 550만 명, 나에게는 170만 명이었다. 옐친이 최고회의 첫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자흐스탄의 건설 노동자와 소련 공병대 복무를 거쳐 이르쿠츠크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법학자로, 1975년부터 옴스크대학에서 환경법과 국가법을 가르쳤다. 1989년 소련 인민대의원으로 당선되었고, 5월 29일 제1차 대회에서 옐친이 최고회의 의원 선출에 실패하자 자신의 당선 자리를 옐친에게 양보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1993년 옐친에 의해 러시아 검찰총장에 임명되었으나, 1994년 2월 국가두마의 사면 결의를 헌법에 따라 집행했다는 이유로 대통령 측의 압력을 받고 사임하며 원칙을 지켰다. 이후 옴스크주 부지사(1996–2003)를 지내고 모교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쓰다 2019년 사망했다.
히틀러 역을 맡은 졸업 공연에서, 구벤코는 부모를 죽인 자를 향한 모든 증오를 배역에 쏟아부었다. 공연을 본 류비모프는 곧바로 그를 타간카 극장으로 영입했다.
전쟁 고아에서 인민예술가로 성장한 배우·영화감독. 루나차르스키 이래 처음으로 현역 예술인이 소련 문화장관(1989–1991)에 오른 인물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좌파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국가두마 문화위원장과 모스크바 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문화유산 수호에 앞장섰다. 타간카 극장 분열 후에는 「타간카 배우 동지회」를 창설해 2020년까지 이끌었다.
보수나 신프랑코주의 역사가 중에 증거를 조작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며, 그들이 파는 것은 뻔뻔한 거짓말이다.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정권에 관한 연구에서 문서고 실증으로 프랑코주의 역사 서사를 체계적으로 허물어 온 역사가이자 경제학자, 외교관이다. 대학원 시절 본에서 나치 독일의 프랑코 지원을 파헤친 것을 시작으로, 「모스크바의 금」 신화의 실체를 밝혔고 4부작 『공화국』 연작에서 무기 금수와 국제 외교가 전쟁의 승패를 어떻게 갈랐는지를 입증했다. 2011년 왕립역사아카데미가 프랑코를 독재자로도 적시하지 않은 『스페인 인명사전』을 내자 30여 명의 역사학자들을 규합해 976쪽의 대항 사전 『역사를 위한 싸움』(2012)을 출간했으며, 이는 스페인 '역사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
예센스키 게저는 1956년 혁명을 경험한 역사학자이자 헝가리의 체제전환기 외교를 이끈 정치가다. 그는 혁명 뒤 처형된 사람을 약 350명으로 추산해 진압의 규모를 기억하는 데 기여했다. 학자로서 국제관계사와 헝가리의 대외 이미지를 연구했고, 민주 헝가리 포럼 창립 세대로서 서방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진했다.
「흐루쇼프는 조국과 자신 모두에게 승리와 비극을 함께 안긴 복합적 인물이었다」고 토브먼은 서문에 썼다.
윌리엄 토브먼은 소련 정치와 냉전사를 연구한 미국 정치학자이자 역사가다. 그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삶과 시대를 장기간 연구해 2003년 전기를 출간했고, 이 책은 2004년 퓰리처 전기상을 받았다. 그의 작업은 흐루쇼프를 스탈린주의의 계승자이자 비판자로 함께 다루며,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을 개인의 성격과 제도적 맥락 속에 놓는다. 또한 고르바초프와 스탈린의 대미 정책을 다룬 저서를 통해 소련 지도부와 국제정치의 관계를 추적했다.
인과의 사슬을 최종적으로 고정시킨 것은 자신의 권위주의적·편집증적·자기애적 성향에 예측 가능하게 반응한 스탈린이었다.
미국의 냉전사가로, 1972년 첫 저서로 후기수정주의 학파를 창시했다. 냉전의 책임이 양측에 있다는 틀을 세웠으나, 소련 붕괴 후 기록보관소가 열리자 1997년 『우리는 이제 안다』에서 스탈린이 냉전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정통주의로 회귀했다. 조지 F. 케넌의 공식 전기로 2012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예일대 교수로 『뉴욕타임스』로부터 '냉전사가들의 학장'이라 불렸다. 그의 궤적은 냉전사 서술이 증거에 따라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레고리가 발굴한 1938년 정치국 최종 회의록에서 스탈린은 대숙청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위대한 과업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명한다.'
폴 R. 그레고리는 미국 경제사가이자 러시아·소련 경제 연구자다. 그는 소련 경제관료제와 계획의 작동을 통계 분석과 현장 인터뷰로 추적했으며, 소련 인터뷰 프로젝트를 이끌어 계획 담당자와 관료의 경험을 연구 자료로 남겼다. 유리 올세비치와 함께 쓴 2000년 소련 계획경제 회고 연구는 코시긴 개혁을 지령적 계획과 이윤 유인의 긴장을 해소하지 못한 시도로 분석했다.
1986년 1월 13일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의 경호원들이 반대파 정치국원들에게 발포했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남예멘의 군인·정치가로 예멘사회당 정치국원과 국방장관을 지냈다. 영국 식민 통치에 맞선 민족해방전선에 참여했고 독립 뒤 군에서 성장했으며, 당 분열 뒤 압둘파타흐 이스마일을 지지하는 알투그마 계열에 섰다. 1986년 1월 13일 아덴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의 경호원들이 반대파 정치국원들에게 발포했을 때 숨졌다. 그의 죽음은 뒤이은 내전의 계기 가운데 하나였다.
상세 이력 보기
1963년대영국 식민 통치에 맞선 민족해방전선(NLF) 참여
1967 이후독립 뒤 남예멘 군에서 성장, 제22보병여단 지휘
1978예멘사회당 창당 당시 이미 당의 고위 인사
1979.08.11당내 분쟁 속에 내무장관직에서 해임
1980.10.16–1981.08.30내무장관 (사료에 따라 1980~1982년으로 기재되기도 함)
1981.08.30–1986.01.13국방장관, 1985년 2월 하이다르 알아타스 내각에서도 유임 (사료에 따라 1982년부터로 기재되기도 함)
「옳은 명령을 내렸다고 나는 영원히 확신한다」 KAL 007 격추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입장.
우크라이나 광부의 아들로 자란 아나톨리 코르누코프는 1983년 9월 사할린 방공 지휘소에서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을 내린 방공 장성이다. 상부가 책임을 거부하자 그는 오시포비치 소령에게 '목표 파괴'를 직접 지시했고, 죽을 때까지 이를 국제법과 소련법에 부합하는 정당한 명령이라 주장했다. 격추 사건으로 상도 벌도 받지 않았고 승진을 계속해 1998년 러시아 공군 초대 총사령관이 되어 공군과 방공군의 통합을 주도했다. 그 결정은 민간인 269명의 죽음과 맞물렸고, 그는 훗날 '옳은 명령을 내렸다고 영원히 확신한다'고 말했다.
원자로 안에서 수톤의 흑연이 타고 있었다. 소방관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헬기로 불구덩이를 끄기로 했다.
모르드바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오렌부르크 군사항공학교를 거친 정찰비행 장교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진압과 1969년 중소 국경분쟁, 1979년 아프가니스탄 상공 정찰에 모두 참전했다. 1986년 4월 26일 키예프 군관구 공군 참모장으로서 체르노빌 폭발 소식을 받고 즉시 현장으로 날아가, 10일간 헬기 조종사들을 이끌며 200m 상공에서 불타는 원자로에 4,925톤의 모래, 납, 붕소를 퍼부었다. 방사선에 노출된 몸으로도 퇴역하지 않고 1998년까지 복무한 뒤 통합 러시아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1993년 10월 백악관 포위 중 옐친이 안전보장을 제안하자, 하스불라토프는 "나는 어떤 보장도 필요 없으며, 오히려 옐친에게 보장을 제공할 수 있다"고 답했다.
루슬란 하스불라토프는 체첸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러시아 정치가로, RSFSR 최고소비에트 마지막 의장이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에는 옐친의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서 「러시아 시민에게 고함」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맞서 의회를 이끌며 대통령과 충돌했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루츠코이와 함께 의회파를 지휘하다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된 뒤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모교에서 세계경제학을 가르쳤다.
1991년 1월 14일, 쿠즈민 장군이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낸 최후통첩은 단순했다. 라트비아가 채택한 법률들을 철회하라. 고르부노우스는 철회하지 않았고, 일주일 뒤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라트비아 동부 루자 인근 필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건설기술학교를 마치고 리가 공과대학과 모스크바 사회과학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이념 담당)까지 올랐으나, 1988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의 출범을 지지하며 개혁파로 전환했고, 1990년 5월 4일 소련을 점령국으로 규정하고 독립 이행기를 개시한 최고회의 회기를 주재했다.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시기 쿠즈민 장군의 최후통첩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1월 21일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와 사태를 논의했다.
"부자유하고 억압받는 자들 가운데 위대한 사람은 오직 억압자를 파괴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뿐이다" —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 (1972)
가이아나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자 범아프리카 운동가로, 1972년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에서 노예무역과 식민주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아프리카의 저발전을 구조적으로 생산했다고 논증해 제3세계 역사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다르에스살람대학과 서인도제도대학 강단에서 탈식민 사회과학의 중심을 세웠고, 가이아나에서 다인종 노동계급 연대에 기반한 사회주의 정치를 전개했다.
“우리가 협상하는 이유는 사회주의를 위한 더 나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 암살 직전 인터뷰, 1993년
남아공 공산당 사무총장이자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참모총장으로, 반아파르트헤이트 무장투쟁에서 협상 전환까지 남아공 해방운동의 좌익을 이끈 혁명가. 1993년 극우 이민자에게 암살되면서 민주이행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1994년 총선을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2002년 12월 28일 사나에서 이슬라흐당 대회 연설을 마친 직후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당시 예멘사회당 부서기장이었다.
1942년 예멘 이브주 쿠할 마을에서 태어나 잠다르와 사나에서 이슬람 법학을 공부했고, 1960년대 사나의 70일 포위전에 참여했다. 1968년 예멘혁명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같은 해 8월 사나 사건 이후 3년간 수감되었고, 1971년 아덴으로 가 1972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1978년 예멘사회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통일 예멘의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인권과 정치적 다원주의를 옹호하며 야당 연합 결성에 힘썼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의 사임 후 핵가방이 옐친에게 이양되던 날 샤포시니코프는 말했다: "핵버튼은 믿음직한 손에 있습니다."
소련 공군에서 30년 넘게 복무하며 전투기 조종사에서 공군 총사령관까지 오른 직업군인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야조프에게 모스크바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비상사태위원회를 해산하라고 제안했으며, 쿠데타 실패 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최후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1년 8월 26일 항공원수 계급을 받아 소련 역사상 마지막으로 '원수' 칭호가 붙은 군인 계급을 수여받은 인물이 되었다. 소련 해체 후 CIS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핵무기 통제권 이양을 감독했으며, 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와 아에로플로트 사장을 거쳐 수호이에서 여생을 보냈다.
누군가 내게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지도자가 될 거라고 말했다면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은하계 전체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단스크 조선소의 전기공으로, 1980년 파업을 이끌어 독립 자주 노조 '연대'를 결성하고 공산 정부와의 그단스크 협정을 이끌어냈다. 계엄령 아래 투옥되었고 198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89년 원탁회의의 비공식 야권 대표로서 폴란드의 평화적 체제 전환을 협상했다. 1990년 폴란드 최초의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시장경제로의 이행과 소련군 철수를 주도했으나, 1995년 재선에 실패하며 정치에서 물러났다. 한 노동운동가의 성공은 소비에트 블록 전체에 균열을 낸 신호였다.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 위에서 소련 TV 기자에게 말했다. "내 뒤에는 단 한 명의 소련 군인도 남아 있지 않다."
소련군 장성으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세 차례 복무하며 마지막 제40군 사령관(1987–1989)으로 소련군 철수를 지휘했다. 1988년 포위된 호스트를 구출한 '마기스트랄 작전'의 성공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를 걸어 소련 영토로 들어온 마지막 소련 군인이 되어, 9년간 지속된 전쟁의 공식적 종결을 상징했다. 이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소련 내무부 제1차관, 러시아 국방차관을 거쳐 1991년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탈냉전기에는 모스크바주 지사로 12년간 재임하며 러시아 권력구조 안에서 군 엘리트의 정치적 전환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동아시아사 학자로, 『한국전쟁의 기원』(1981, 1990) 2권을 통해 한국전쟁을 냉전의 국제적 충돌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배와 해방 후 사회 갈등에서 비롯된 내전으로 재규정했다. 시카고 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미국 학계의 한국전쟁 이해를 근본적으로 전환시켰고, 이 공로로 미국역사협회 존 K. 페어뱅크상과 김대중 학술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업은 전통주의 냉전 서사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현대 한국사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