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월 20일 저녁 오몬의 내무부 공격을 세계에 보여 주려 카메라를 들고 바리케이드로 나섰고, 바스테이칼른에서 촬영하다 총에 맞아 숨졌다.
안드리스 슬라핀슈는 리가 영화 스튜디오에서 활동한 라트비아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촬영기사였다. 리브인의 문화와 라트비아의 역사·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을 만들며, 기록영화가 억눌린 기억과 현재의 투쟁을 잇는 매체임을 보여 주었다. 1991년 1월 20일 리가 내무부 공격을 촬영하던 중 사망했고, 그가 남긴 장면은 라트비아 독립운동의 국제적 기억을 형성했다.
시베리아 튜멘주 출신의 빅토르 바클라노프는 1967년 열여덟 살에 우크라이나 콜호스 '기간트'의 기계화공이 되었고, 37년간 한 농장에서 일하며 노동영예훈장 3개 등급을 모두 받아 완전 수훈자가 되었다.
소련의 농업 노동자이자 국가·정치 인물로, 드네프로페트롭스크주 콜호스 '기간트'에서 기계화공으로 평생 일하며 전연방·공화국 차원의 수확 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노동영예훈장 3급(1975), 2급(1982), 1급(1987)을 차례로 받아 완전 수훈자가 되었고,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콜호스 조합 대표로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에 선출되었다.
미국 출판인·역사가로, 1991년 예일대 출판부에서 냉전 후 공개된 소련 아카이브 자료를 서방에 선보인 『공산주의 연대기』 시리즈를 창설했다. 2003년 블라디미르 나우모프와 공저한 『스탈린의 마지막 범죄』는 이전까지 폐쇄됐던 KGB 및 대통령 문서고 자료를 바탕으로 의사들의 음모 사건을 전면 재구성했으며, 스탈린이 유대인 인구의 대규모 강제 이주와 새로운 대숙청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논제를 제시했다. 2009년부터 YIVO 유대인 연구소의 소장으로서 동유럽 유대인 문서유산 보존에 힘쓰고 있다.
파벨 팔라젠코는 냉전 말기 소련 외교의 핵심 대화 현장을 기록한 통역자이자 저술가다.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의 영어 통역을 맡아 제네바, 레이캬비크, 몰타 등 미소 정상회담에 참여했다. 회고록은 정상들의 발언뿐 아니라 군축 협상과 신뢰 형성이 작동한 실무 현장을 보여 주며, 평화로운 냉전 종식에 대한 소련 측의 해석을 제시한다. 이후 고르바초프 재단에서 국제관계와 언론 업무를 맡으며 통역과 정치 분석을 이어 갔다.
1991년 8월 20일 밤, 그라초프의 동의를 얻은 레베디는 백악관 수비대를 찾아가 '새벽 2시에 공격이 시작된다'고 은밀히 알렸다.
노보체르카스크의 가난한 목수 가정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노보체르카스크 시위대 학살을 목격한 소련 공수군 장군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했고 1991년 2월 공수군 전투훈련 담당 부사령관이 되었다. 8월 쿠데타 당일 파벨 그라초프의 명령으로 툴라 공수대대를 이끌고 백악관을 포위했으나, 다음 날 옐친 진영으로 넘어가 수비대에 새벽 공격 계획을 은밀히 전달하며 쿠데타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역 후 1996년 대선에서 3위에 오르고 안전보장회의 서기로서 제1차 체첸 전쟁 종식을 협상했으며,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사로 재직 중 헬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당조직자가 돈다발을 두 팔로 끌어안고 떨리는 손으로 당원증에 적었다: '1989년 1월 급여, 300만 루블.' 평균 월급이 200루블이던 시절이었다.
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로, 협동조합 '테흐니카'의 창업자이다. 1989년 1월 자신에게 300만 루블의 월급을 지급하고 부하의 당비 9만 루블 납부가 「브즐랴트」에 방영되면서 전국적 스캔들을 일으켰고, 이는 협동조합법이 두 차례 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인민대표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으며, 러시아 초기 자본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티이트 마디손은 에스토니아의 반체제 활동가이자 작가로,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다. 석방 뒤 MRP-AEG를 세우고 1987년 히르베파르크 집회를 조직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비밀 의정서 공개와 그 결과의 청산을 요구했다. 집회는 소련 말기 에스토니아에서 대중이 공개적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낸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당국은 그를 스웨덴으로 추방했다. 귀국 후에는 에스토니아의 독립 회복 과정과 민족주의 정치에 참여했으며, 말년에는 홀로코스트 부정으로 비판받는 저술을 남겼다.
1977년 그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심사받았을 때, 심사 기관인 CPSU 중앙위 산하 사회과학아카데미는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라는 요지의 평가서를 제출했다.
모스크바 태생 타타르계 제도경제학자로, MSU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치며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관한 논쟁적 박사논문으로 주목받았다. 1993년 쿠즈미노프와 함께 고등경제대학(ВШЭ) 설립에 참여해 초대 경제학과장과 초대 부총장을 지냈고, 러시아 제도경제학파의 핵심 구축자로 자리잡았다. 2017년 출간된 집단 논문집 『놓친 기회인가, 마지막 안전판인가?』의 책임편집자로서, 코시긴 개혁을 둘러싼 역사학계의 양극화된 평가를 표제 하나로 응축했다.
J. 아치 게티는 소련 정치사와 스탈린 시대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가로, UCLA에서 러시아·소련사 연구와 교육을 이끌었다. 1985년 저서 『대숙청의 기원』에서 스탈린 체제를 단일한 중앙 통제의 산물로 보지 않고, 취약한 당 조직과 지역의 자율성, 지도부 내부의 갈등이 정책 형성에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이 접근은 흐루쇼프의 비밀연설과 스탈린주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에서 서방 수정주의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지만, 테러에 대한 스탈린과 당 지도부의 책임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소련 기록보관소 개방 뒤에는 동료들과 함께 억압의 규모와 국가 폭력을 새 자료로 재검토했다.
그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정상회담의 신화가 아니라 우발적 사건들이 겹친 시간대별 위기로 다시 펼쳐 보였다.
마이클 돕스는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로, 냉전 종식과 국제분쟁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의 동유럽·파리·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하며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그 국제적 결과를 기록했다. 『자정 1분 전』은 미국·소련·쿠바 자료를 대조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시간대별로 재구성하고, 핵전쟁의 위험이 기존 통념보다 훨씬 컸음을 보여 주었다. 그의 작업은 정상 지도자들의 대결이라는 서사를 넘어 현장 지휘관과 우발적 사건이 위기를 어떻게 증폭했는지 드러낸다.
「고르바초프의 경제학자들」을 분석한 글들에는 '사기꾼'이나 '무식한 자'라는 말이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소련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경제학자로, 노보시비르스크 대학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수학했다. 1988년 논문 「1965년 소련 경제개혁의 교훈」에서 코시긴 개혁에 대한 중앙 부처와 고스플란의 저항이 단순한 관료적 이기심이 아니라, 부분적 시장 개혁이 중앙계획 체계를 파괴하면서도 작동 가능한 대안은 내놓지 못한다는 합리적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엘먼과 함께 『소련 경제체제의 파괴』를 편집했으며, 이 체제 비양립성 테제는 소련 개혁 실패를 둘러싼 역사학적 논쟁의 중심 논거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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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노보시비르스크 대학 경제학 디플로마
1985펜실베이니아 대학 경제학 박사
1984–2002계획경제연구소(Command Economies Research, Inc.) 설립·대표, 미 국방부·CIA 계약 연구 수행
1987–해버포드 칼리지 경제학과 조교수→부교수→정교수
1988「1965년 소련 경제개혁의 교훈」 발표 (Soviet Studies)
1992/1998마이클 엘먼과 『소련 경제체제의 붕괴』·『소련 경제체제의 파괴』 공동 편집
1991년 6월 17일, 회의의 마지막 연사로 나선 알크스니스는 신연방조약이 위헌이며 파블로프 내각을 지지해야 한다고 의원들에게 호소했다. '내각은 소련을 위해, 이 국가의 보존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계 소련 공군 대령으로,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가장 노골적인 강경파였다. 소유즈파 공동의장으로서 계엄령을 요구하고 고르바초프의 퇴진을 촉구했으며, 1991년 6월 17일에는 파블로프 총리의 비상권한 결의안을 즉각 표결에 부치자고 밀어붙여 '헌정 쿠데타 기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하원의원을 두 차례 지냈고, 1993년 옐친에 맞서 의회를 방어하다 진압경찰에 구타당했으며, 끝까지 타협 없는 소비에트 애국자로 살았다.
1995년 개인 재산 백여만 위안을 들여 러시아 해제 문서를 사들여, 중국 냉전사 연구의 토대가 된 아카이브를 학자들에게 무상으로 열었다.
선즈화는 중국 냉전사와 소련사, 중소관계사를 연구해 온 역사학자이며 화둥사범대학 냉전국제사연구센터를 이끌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해제 문서를 직접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소련 문서집을 편찬해 중국 냉전사 연구의 자료 기반을 넓혔다. 그의 연구는 중소분열을 국가이익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관계가 교차한 과정으로 분석하며, 중국의 선택을 이념적 연대만으로 설명하는 공식 서술에 질문을 던졌다. 한국전쟁과 중소동맹에 관한 저술은 중국과 소련, 조선 사이의 상호 계산을 추적해 중국 학계의 냉전 해석을 국제적으로 알렸다.
1991년 1월 12~13일 밤 빌뉴스의 시설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가족과 함께 드루스키닌카이로 스스로 물러나 숨았고, 1월 13일 빌뉴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게디미나스 바그노리우스가 정부를 맡고 있었다.
알베르타스 시메나스는 1950년 2월 17일 아니크슈차이 지역의 파필리아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빌뉴스대학에서 경제수학을 전공하고 1981년 경제학 후보 학위를 받았으며, 국가계획위원회 산하 연구소에서 근무한 뒤 강의했다. 1990년 최고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에 서명했고, 1991년 1월 10일부터 13일까지 총리를 지냈다. 이후 경제장관과 1996~2000년 세이마스 의원, 2000~2017년 리투아니아 철도 간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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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리투아니아 파필리아이에서 출생
1972–1984국가계획위원회 산하 연구기관 경제학자
1984–1989빌뉴스 공학건설대 경제학 강사, 1989년 부교수
1990–1992최고회의 의원,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 서명자
1991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1월 10일~13일)
1991–1992경제장관
1996–2000리투아니아 공화국 세이마스 의원, 경제위원회 위원장
2000–2017리투아니아 철도 개발담당 이사(2006년까지) 및 부총국장(2006~2017)
그 나라의 점령, 1968년 8월의 믿기 어려운 그 연대의 경험, 그것은 누구나 겪을 수 없는 아주 드문 역사적 순간들에 속하고, 그것을 경험한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얀 파우어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목격하고 이듬해 서독으로 이주한 체코 출신 역사가다. 1995년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다룬 표준적 저작 『프라하 1968』을 출간했으며, 브레멘대학 동유럽연구소에서 체코슬로바키아 현대사를 연구했다. 2011년 ENRS 기고문에서 그는 침공이 '시민사회 반대운동의 시작이자 개혁공산주의의 역사적 종말'이었다고 평가하며, 프라하의 봄이 소련의 탱크와 탈냉전기 체코의 기억 정치에 의해 두 번 묻혔다고 주장했다.
에스토니아의 정치가이자 에스토니아 인민전선의 공동 창립자로, 개혁 요구를 대중 정치로 조직한 인물이다. 1988년 4월 13일 생방송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는 인민전선 구상을 제안했고, 이 운동은 곧 민주주의와 에스토니아 독립 회복을 요구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는 독립 이행기의 첫 총리를 지냈지만, 경제적 곤란과 정치적 논란 속에서 권력의 한계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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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타르투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위 취득
1980–1988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기관에서 경제계획 업무
1988–1989마이노르 컨설팅 회사 학술 책임자, 에스토니아 인민전선 공동 창립
1989–1990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1950년 5월 20일 태어나, 1978년 12월 시단 민주의 벽에 「제5의 현대화」를 붙였고 1979~1993년과 1994~1997년 옥살이로 모두 18년을 복역한 뒤 1997년 11월 16일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베이징의 고급 간부 집안에서 자라 홍위병으로 지방을 떠돌며 기근의 흔적을 본 뒤 동물원 전기공이 되었다. 1978년 12월 시단 민주의 벽에 「제5의 현대화 — 민주」를 붙여 덩샤오핑의 4개 현대화가 민주 없이는 공허하다고 주장했고 잡지 『탐색』을 냈다. 1979년 3월 체포되어 「반혁명 선전과 군사기밀 누설」로 15년형을 받았으며, 1993년 석방 뒤 다시 체포되어 14년형을 받았다. 1997년 병 치료를 이유로 미국으로 추방되어 망명 민주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1977년 5월 27일 사건 뒤 동료와 함께 도피했다가 3주 만에 체포돼, 비공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망했다. 정확한 처형 시점은 사료마다 다르다.
앙골라 태생의 의사이자 혁명가다. 포르투갈공산당에 입당해 지타 세아브라와 함께 공산학생동맹(UEC)을 이끌었고, 1974년 카네이션 혁명 당시에는 UEC 대표로 모스크바의 콤소몰 대회에 파견되어 있었다. 1975년 앙골라로 돌아와 니투 알베스·조제 반두넴을 중심으로 한 친소 정통파에 합류했으며, 1977년 5월 27일 사건 뒤 체포돼 비공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망했다. 사망 시점은 사료마다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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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04UEC 대표로 모스크바 콤소몰 대회 참석
1975앙골라 귀환, MPLA 친소 정통파에 합류
1976–1977니투 알베스의 지시로 혁명적 지식인위원회 책임, 대중조직부(DOM) 산하 활동
폭발 직전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22번 펌프 하부 급수를 재충전해야 해… 좋아, 잠깐만…"이라고 말했다. 그게 그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키이우주 크라피브냐에서 태어나 1978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 입사해 주순환펌프(GCN) 운전원으로 일했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안전시험 중 폭발이 일어났을 때 그는 북쪽 GCN 펌프실에 있었고, 건물 잔해에 매몰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시신은 지금도 석관 내부 잔해 속에 남아 있으며, 3호기와 4호기 사이 격벽에는 그의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동료들이 무너진 계측실에서 그를 끌어냈지만, 그는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오전 6시 프리피야티 병원에서 숨졌다.
블라디미르 샤셰노크는 원자력발전소의 계측·자동화 설비를 조정하고 시험하던 기술자였다. 체르노빌 4호기 시험에 참여하던 중 폭발로 척추와 갈비뼈가 부러지고 중화상과 방사선 화상을 입었으며, 동료들에게 구조되어 프리피야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는 사고 당일 숨진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발전소의 기술 노동이 재난의 최전선에 놓였음을 보여 준다.
'주말마다 도끼를 들고 나가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
몰도바의 와인 기술자이자 기업인으로, 1987년부터 2016년까지 29년간 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의 총책임자를 지냈다.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노동자들이 주말에 도끼로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1990년 6월 부쿠레슈티에서 광부들이 반정부 시위대를 폭력 진압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고, 이를 '가장 조잡하고 역겨운 형태의 야만성'에 대한 통찰을 준 경험이라고 기록했다.
루마니아 공산당 엘리트 가정에서 태어나 1981년 망명한 정치학자로, 스탈린주의와 동유럽 공산 체제의 몰락을 비교정치학적 시각에서 분석해 왔다. 2003년 『모든 계절을 위한 스탈린주의』로 루마니아 공산주의사의 결정적 종합을 제시했고, 2006년 루마니아 대통령 직속 공산독재연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공산주의 과거사 청산 보고서를 이끌었다. 1989년 혁명의 원인·의미·결과를 다룬 2009년 논문은 혁명 이후 민족 갈등과 권위주의적 반동에도 불구하고 그 '관대한 메시지'는 훼손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1989년 연구의 기준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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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1981부쿠레슈티 표준건축설계연구소 사회학자
1983–1990필라델피아 외교정책연구소(FPRI) 연구원
1985–1990펜실베이니아대학교 강사
1990–메릴랜드대학교 정치학 교수
1998–2004『East European Politics and Societies』 편집장
2006루마니아 공산독재연구 대통령위원회 위원장
2009「1989년 혁명: 원인, 의미, 결과」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발표
1991년 1월 20일 밤, 소련 특수부대가 라트비아 내무부 청사를 습격해 다섯 명이 사망했다. 고드마니스는 즉시 소련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에게 전화를 걸었고, 푸고는 '나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라트비아의 물리학자 출신 정치인으로, 고체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라트비아대학교에서 강의했다. 1987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에 합류해 1990년 라트비아 최고회의 선거 승리 후 초대 총리에 취임, 독립 회복을 선언한 정부를 이끌며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당시 전략 거점 방어를 지휘하고 소련 내무장관 푸고에게 직접 전화해 공격 개입을 추궁했다. 2007년 다시 총리가 되어 금융위기 속에서 사임할 때까지 라트비아의 시장경제 전환과 유럽 통합을 추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