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이 이그나티예프를 불러 "의사들에게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면 네 목을 짧게 해주겠다"고 위협했다. 흐루쇼프는 1956년 비밀연설에서 이 장면을 공개 증언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자란 당 조직 전문가. 부랴티야·바시키르·벨라루스 등 민족 공화국에서 당 제1서기를 지내다 스탈린 말기 MGB 장관에 기용되었다. 의사 음모와 밍그렐 사건을 지휘했고, 스탈린의 직접적 위협 아래 복종했으나 체카 출신이 아닌 온순한 당료였기에 처형을 면했다. 실각 후 타타르 공화국 당 서기로 복귀해 타타르어 보존에 힘썼다.
1953년 7월, 샤탈린은 내무성 당 활동가 비공개 회의에서 베리야 체포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중앙위는 이런 악당의 체포를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속임수를 썼다.”
니콜라이 샤탈린은 스탈린 말기부터 후계 투쟁기까지 당 간부국과 조직부를 실무에서 움직인 인물이다. 1938년 중앙위 기구에 들어가 말렌코프 밑에서 간부국 제1부국장으로 일했고, 1946년 조직국원에 선출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직후 중앙위 서기가 되어 내무성(MVD)을 감독하고 베리야 체포 작전에 관여했으며, KGB 창설 과정에서는 말렌코프를 대리해 세로프 임명에 반대했다. 말렌코프가 흐루쇼프에게 패배한 1955년, 샤탈린은 서기직에서 해임되고 프리모리예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되었다.
1941년 6월 21일 저녁, 포스크료비셰프가 속삭였다. '주인께서 방금 티모셴코와 흥분해서 통화하셨소... 독일군 공격이 임박한 것 같소.' 차다예프가 물었다. '우리 말이오?' '그럼 누구겠소?'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고스플란 부의장(1938–1949)으로서 전시 계획경제의 실무를 떠받쳤으며, 1940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을 겸임하며 정부 문서 체계 전체를 관장했다. 그의 서명은 수천 건의 전시 법령에서 스탈린의 서명과 나란히 실렸으며, 대피 산업 조정과 원자력 프로젝트의 초기 자원 배분에도 관여했다. 전후에는 고스플란 RSFSR 의장과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1962–1975)을 지내며 계획 기구에 평생 몸담았고,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 소련의 경제》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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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32우드무르트 자치공화국 고스플란 부의장
1933–1937소련 고스플란 선임경제학자·생산경제 부문 부책임자
1937–1939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인민위원회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1939–1940소련 인민위원회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위원장
1940–1949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1949–1962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 고스플란 RSFSR 제1부의장
『소피 여사의 일기』에서 『태양은 쌍간강을 비춘다』까지, 옌안과 반우파 투쟁을 모두 겪은 작가
1904년 10월 12일 후난 린리에서 태어나 1928년 『소피 여사의 일기』로 이름을 얻고, 반우파 투쟁이던 1958년 당에서 제명되어 1986년 3월 4일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후난 출신으로 1928년 『소피 여사의 일기』로 신여성의 내면을 그려 이름을 얻었고, 남편 후예핀이 1931년 국민당에게 처형된 뒤 입당했다. 1936년 산베이의 홍군 지역에 도착해 마오의 환영을 받았으나 1942년 「3·8절 유감」으로 옌안의 성차별을 지적해 정풍운동에서 비판받았다. 토지개혁을 그린 『태양은 쌍간강을 비춘다』로 1951년 스탈린상을 받았고, 1957년 반우파 투쟁에서 우파로 몰려 북대황 농장에서 20년 넘게 노동했다. 1979년 복권되었다.
1948년 2월 10일 정치국 결의는 "소련 각료회의 예술문제위원회(흐랍첸코 동지)와 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원회가 사실상 소비에트 인민에게 이질적인 형식주의적 경향을 조장했다"고 못 박았다.
스탈린 시대 최고 문화행정가로, 1939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후 각료회의) 산하 예술문제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모든 연극·음악·미술 기관을 총괄했고 스탈린상 예술·문학 분과 위원을 겸했다. 1948년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우정〉을 둘러싼 지하노프의 반형식주의 캠페인 때 '형식주의적 경향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이후 문학연구자로 전향하여 고골·톨스토이 연구의 권위자가 되었고, 1966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에 선출되어 196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문학·언어 분과의 아카데미크-서기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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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스몰렌스크 대학 졸업, 중등학교 교사
1928–1931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보로네시 대학 문학사 강사
1931–1936공산아카데미 문학예술연구소 교무주임, 붉은교수문학연구소 러시아문학 주임
1938–1939소련 인민위원회 예술문제위원회 부의장
1939–1948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예술문제위원회 의장, 스탈린상 예술·문학분과 위원
「문화대혁명은 광기의 시대였고, 그때 나는 미친 사람이었다」 1988년 석방된 뒤 천보다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은 비극이다. 사람들이 내 비극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푸젠 출신으로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배운 뒤 1937년 옌안에서 마오의 정치비서가 되어 마오의 저작을 다듬고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용어를 정착시켰다. 건국 후 『홍기』 편집장과 선전 분야 책임자로 대약진의 이론을 썼고, 1966년 중앙문화혁명소조 조장으로 문화대혁명을 추진했다. 1970년 루산 회의에서 린뱌오 쪽에 서 국가주석직 문제로 마오의 분노를 사 실각했고, 1981년 「린뱌오·장칭 반혁명집단」 재판에서 18년형을 받았다. 1989년 사망했다.
1945년 5월 2일 밤, 베를린. 부관이 루덴코를 깨웠다. "창밖을 보십시오, 저 불빛을! 전쟁이 끝난 게 틀림없습니다." 거리로 나서자 대공포와 소총이 허공에 꽂히고 있었다 — 패배한 제국의 수도 위로 번쩍이는, 즉흥적인 승리의 축포였다.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1923년 붉은군대에 자원입대, 키예프 항공학교를 거쳐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1942년 10월부터 종전까지 제16공군 사령관으로서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서 항공지원을 지휘하며 대전 최고의 소련 공군 지휘관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1944년 벨로루시 공세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고, 1955년 공군원수로 진급했다. 전후에는 공수부대 사령관, 공군 주참모장, 장거리항공대 사령관, 공군 제1부총사령관을 역임했으며, 1968년부터 가가린 공군아카데미 교장을 맡아 교수로도 활동했다. 만년에는 국방부 감찰총감단에서 복무하며 회고록 『승리의 날개』를 남겼다.
«인생에 운, 불운, 행복 중 무엇이 더 많았는지 가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극복해야 할 것이 무척 많았다는 것을.»
1934년 방사성 용액 속 푸른 빛을 목격한 한 실험물리학자가 입자물리학의 새 장을 열었다. 바빌로프의 지도 아래 체렌코프가 발견한 그 발광은 진공 속 광속보다 빠르게 매질을 통과하는 하전입자가 내는 '체렌코프 복사'로 밝혀졌고, 타므와 프랑크가 이론적으로 해명했다. 이 발견은 체렌코프 검출기라는 입자물리학의 표준 장비로 이어져 스푸트니크 3호에도 탑재되었으며, 1958년 세 사람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겼다. 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에서 평생을 바친 그는 고에너지물리학부를 창설해 이끌었고, 싱크로트론 건설과 광핵반응 연구에도 기여했다.
한때 주코프의 군사평의회 위원이었던 젤토프는 1957년 10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주코프를 가장 맹렬히 비난한 정치장교가 되었다.
알렉세이 젤토프 상장은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소비에트 육해군 총정치국(GlavPUR) 국장을 지내며 스탈린 사후 전환기 소비에트 군대의 최고 정치위원이었다. 위대한 조국전쟁 동안 카렐리야·돈·남서·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우크라이나·발칸 해방 작전에서 당정치사업을 지휘했다. 1957년에는 흐루쇼프를 도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를 국방장관직에서 축출하는 반주코프 운동의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로 나섰다. 이후 군·KGB·내무성·검찰·사법 기관을 총괄하는 CPSU 중앙위 행정부장을 거쳐, 12년간 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으로 정치장교 교육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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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27붉은 군대 입대, 제2모스크바 보병학교 졸업 후 소대장
1937–1939제24소총병사단 군사위원 → 프리볼시스크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1941–1944극동·카렐리야 전선군, 제63군, 돈·남서·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시칠리아 철도 폭격 분석에서 그는 기관차와 수리시설을 끊어야 철도망 전체가 멈춘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솔리 주커먼은 영국의 동물학자이자 공무원으로, 과학적 관찰과 실험을 정부 정책에 결합한 운용연구의 선구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폭격 효과를 조사하고 지중해 전선의 경험을 분석해, 노르망디 상륙을 앞두고 프랑스 철도망을 마비시키는 교통계획을 설계했다. 이 계획은 독일군 증원을 늦추는 데 기여했지만 프랑스 민간인 피해와 폭격의 효과를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전후에는 영국 최초의 정부 수석과학고문으로 과학과 국가정책의 관계를 제도화했다.
"7월 20일까지 자진 출두하면 사면한다. 이후의 모든 자는 조국의 배신자로서 체포·엄벌·섬멸될 것이다." — 1945년 5월,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으로서 UPA에 내린 최후통첩.
사마르칸트 출신으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콤소몰·당 경력을 쌓은 뒤 1937년 당 충원으로 NKVD에 들어갔다. 1943년부터 1946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내무인민위원으로서 UPA와 민족주의 지하조직을 무력 진압하는 작전을 지휘했으며, 종전 후에는 대규모 사면 회유와 가족 추방을 병행하는 이중 전략을 폈다. 이후 소련 내무차관, 국가보안차관 겸 MGB 제2총국(방첩) 국장을 거쳐 1952년 후보 중앙위원이 되었으나, 1956년 '장교 명예를 실추시킨 행위'로 해임된 후 건설 부문에서 일했다.
"우리 일에 사소한 것은 없다." 하리톤은 모든 문서의 글자 하나까지 증거를 요구했다. "어차피 전쟁하지도 않을 텐데"라는 말에 그는 분노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의지하는 전부다."
레닌그라드 공과대학과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수학한 물리학자. 1939–1941년 야코프 젤도비치와 함께 세계 최초로 우라늄 연쇄반응을 계산했다. 1946년부터 1992년까지 KB-11(아르자마스-16)의 수석설계자 겸 과학책임자로서 1949년 첫 소련 원자폭탄과 1953년 첫 수소폭탄 개발을 지휘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세 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소련 핵억지력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소련에 대한 미국 정책의 주요 요소는 러시아의 팽창 경향에 대한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으면서도 단호하고 경계하는 봉쇄여야 한다」, 1947년 X 논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역사가로, 1946년 모스크바에서 국무부에 보낸 '장전문'과 1947년 《포린 어페어스》에 발표한 X 논문에서 소련의 팽창을 장기적·인내심 있게 봉쇄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으로서 마셜 플랜의 설계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트루먼 독트린과 NATO로 이어지는 냉전 초기 미국 대외정책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신이 설계한 봉쇄가 군사적 대결로 변질되자 평생 비판자로 돌아섰고, 베트남 전쟁과 NATO 확장에 공개 반대하며 현실주의적 외교를 주장했다.
레닌그라드의 한 교수가 젊은 우글로프의 수술 보고를 듣고 '이건 뮌하우젠 남작의 허풍이다'라고 말했다가, 직접 수술을 검토한 뒤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시베리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사라토프 의대를 졸업하고, 겨울전쟁과 900일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외과의로 복무했다. 식도·종격동·폐·심장 수술을 개척했으며, 102세까지 수술실에 서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랐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반알코올 캠페인에서 '어떤 음주도 용납될 수 없으며 술 취함은 러시아 민족의 본성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전국에 유포한 핵심 선전가였고, 종신토록 금주 운동을 이끌었다. 말년에는 알코올 중독의 배후로 유대인 음모론을 제기하고 록 음악을 마약으로 분류하는 등 러시아 민족주의 우파와 결합한 과격한 주장으로 논란을 낳았다.
예비 조사에서 자신의 특별부서 근무를 이렇게 진술했다. "1934년 가을부터 부서는 체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소규모 반혁명 분자 집단을 적발하고 제거해 왔다. 부서는 거의 항상 백 명의 체포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1922년 GPU에 입문해 군사방첩 특별부서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1937~1938년 '폴란드 작전' 당시 GUGB NKVD 제3(방첩)부서 부책임자로 소련 전역의 폴란드계 시민에 대한 대량 체포·고문·처형을 지휘했다. 1938년 3월부터 10월까지 소련 대외정보국(제5부서) 책임자로 전임되었으나, 예조프 숙청의 파고 속에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되었다. 1957년과 2013년 두 차례 사법 심사에서 사건 조작과 불법 수사 방법을 이유로 재활이 거부된 몇 안 되는 NKVD 고위 간부 중 한 명이다.
본명 아타나시오스 클라라스인 아리스 벨루히오티스는 그리스 공산당 활동가로서 점령기 그리스의 민족해방전선 EAM과 그 군사조직 ELAS를 연결한 핵심 조직가였다. 그는 1942년 루멜리 산악지대에서 소수의 유격대를 꾸려 ELAS의 초기 기반을 세웠고, 규율과 대중정치를 결합해 저항을 전국적 힘으로 키웠다. 고르고포타모스 교량 폭파 같은 연합작전은 점령에 맞선 무장투쟁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지만, EAM-ELAS의 우세는 다른 저항세력 및 영국과의 충돌도 심화시켰다. 바르키자 협정 뒤 무장해제를 거부한 그는 당 지도부와 결별하고 1945년 고립된 채 죽었으며, 이후 그리스 공산주의 운동에서 복권되었다.
나세트킨은 1944년 8월 베리야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전쟁 3년간 GULAG 수감자 97만 5천 명을 붉은군대에 넘겼으며 '다섯 명의 전직 수감자가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적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 간부로, 1941년부터 1947년까지 GULAG(교정노동수용소 본부) 책임자를 지냈다. 교사의 아들로 헤르손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군대에 입대했고 1921년부터 체카-OGPU-NKVD 체계에서 수송·경제 부문 요직을 거쳤다. 독소전쟁 발발 직후 전선 인근 수용소 27곳과 식민지 210곳, 수감자 75만 명을 후방으로 소개시켰으며, GULAG 수감자들을 군수 생산에 총동원했다. 전시 내내 수감자들을 '완전 노동 활용' 원칙 아래 혹사시키면서도 1944년 베리야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GULAG의 전쟁 기여를 상세히 기록했다. 1945년 국가보안 중장이 되었으나 전후 쇠락하여 1948년 예비역으로 밀려나고 1950년 사망했다.
1950년 9월 29일 법정에서 자백을 거부하며: "나는 볼셰비키이며, 내가 받은 판결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로 남을 것이다.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할 것이다."
보로비치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당 간부로, 콤소몰 조직가에서 출발해 대숙청기에 레닌그라드 제2서기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특별 삼인조의 일원으로 스탈린적 탄압에 가담한 책임이 있고,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는 도시 방어를 조직했다. 전후에는 중앙위 서기 겸 간부국장으로 즈다노프와 함께 스탈린 사후 승계 구도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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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32노브고로드·레닌그라드 지역 콤소몰 조직가
1932–1937레닌그라드 시 당 기구에서 승진, 스몰니·제르진스키 구당 서기
1937–1938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 — 대숙청기 즈다노프의 부관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방어위원회 부의장, 방어시설·식량 위원회 주재, 전선군사평의회 위원
1945–1946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즈다노프의 후임
1946–1949중앙위 서기·간부국장·조직국 위원 — 전후 서기국의 실질적 제2인자로 국가보안기관 감독
1949년 8월 13일, 라주틴은 동료 레닌그라드 지도부와 함께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되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페트로파블롭스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을 시작했다. 콤소몰 간부를 거쳐 1937년 레닌그라드로 옮겼고, 포위전 당시 무역·공업 담당 시당 서기로 도시 보급을 책임졌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으로 재임하며 전후 도시 재건 계획, 텔레비전 방송 재개, 아브로라 순양함 기념화를 진두지휘했다. 1949년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동료 지도부와 함께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인 6인 중 하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10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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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5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
1925–1931콤소몰 서기·노동부장 등 카자흐 자치공화국 콤소몰·교육인민위원부 간부
1931–1937레닌그라드 냉동공업대학 수학; 프룬제 구당 위원회 지도원
1937–1941레닌그라드 시당 무역부장, 식품·무역부 부장
1941–1944레닌그라드 시당 무역·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도시 보급 책임
1944–1946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제1부의장
1946–1949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위원장 (사실상 시장)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8월 13일 체포, 1950년 9월 30일 사형 선고, 10월 1일 처형; 1954년 복권
수감자들은 그를 '돌 손님(카멘니 고스티)'이라 불렀다. 낮고 냉담한 목소리, 굳은 표정으로 심문실에 들어서는 그 앞에서 누구도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베리야의 최측근 수사 책임자로, 스탈린 시대 말기 가장 민감한 정치 사건을 도맡았다. 1939년 NKVD 수사부장, 1943년 NKGB 특별중요사건 수사부장으로 적군 공군 지휘부 사건과 메이예르홀트 심문을 지휘했고, 가혹한 심문으로 악명 높았다. 1946년 실각해 6년간 대외재산총국 서류직으로 전락했으며, 1953년 베리야에 의해 MVD 특별수사부장으로 복귀해 의사들의 음모 사건 반전을 맡았다. 베리야 체포 직후 기소되어 그해 12월 총살됐고, 2000년 사후 복권도 거부됐다.
'이 훈장은 후방의 곰보딱지 가오강에게 가야 합니다': 1953년 7월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훈장을 받으며 펑더화이가 한 말
산시성 유격 근거지에서 출발해 만주(둥베이)의 당·정·군을 총괄한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자로, 1949년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둥베이 군구 사령원으로서 중국인민지원군의 후방 기지와 보급망 전반을 책임졌으며, 펑더화이조차 '이 훈장은 곰보딱지 가오강에게 가야 한다'고 인정했을 정도로 참전의 물질적 토대를 조직했다. 1952년 국가계획위원회 주석으로 발탁되었으나, 류샤오치를 대체하려 한 권력 투쟁이 '가오-라오 반당 연맹'으로 규정되며 실각, 1954년 가택연금 중 수면제로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