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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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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레프 마르코비치 볼로다르스키

Лев Маркович Володарский

소련 국가통계의 수호자, 혁명 순교자의 동생으로서 계획경제의 숫자를 관리하다

회고록 『기억의 계산』(1983)에서 통계청장으로서의 평생을 돌아보며: 「숫자는 침묵하지 않는다 — 다만 우리는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소련 국가통계청(ЦСУ СССР) 청장(1975~1985)으로서 브레즈네프 후기와 고르바초프 초기 소련 계획경제의 통계 인프라를 총괄한 경제학자. 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출신으로 고스플란에서 경력을 쌓은 후 30년 가까이 ЦСУ에서 부청장·제1부청장을 거쳐 청장에 올랐다. 그의 재임 기간 소련 통계는 체계적 왜곡과 대외 신뢰도 하락이라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했으며, 그는 『통계가 말하다』(1982)와 영문 회고록 『기억의 계산』(1983)을 통해 통계의 사회적 역할을 대중적으로 옹호했다. 1918년 암살된 페트로그라드 선전 인민위원 V. 볼로다르스키의 친동생으로, 혁명 순교자의 유산과 소비에트 테크노크라시의 접점에 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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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29레닌그라드 제1소비에트학교 콤소몰 책임비서
  • 1934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졸업
  • 1934–40레닌그라드 지방공업 계획 부문에서 선임 경제기사 → 계획부장
  • 1940–42레닌그라드 주재 고스플란 전권위원
  • 1942–48고스플란 소련 부서장 → 국장
  • 1948–67ЦСУ 소련 부청장(1948~53, 1956~67), 통계출판사 주필(1953~55), 공업통계국장(1955~56)
  • 1967–75ЦСУ 소련 각료회의 제1부청장
  • 1975–85ЦСУ 소련 청장 — 소련 각료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Józef Cyrankiewicz
정부·행정 폴란드 국가기관 폴란드 폴란드인 1911–1989 ○ 자연사

저항의 생존자이자 체제의 수호자

1956년 6월 29일 포즈난 라디오에서 그는 인민정부에 손을 드는 자의 손을 잘라버리겠다고 경고했다.

유제프 치란키에비치는 전쟁 전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 저항조직의 지도자였지만, 전후에는 소련과 결합한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핵심 정치가가 되었다. 그는 장기간 총리를 지내며 공산당의 통치와 국가 재건을 조율했고, 독립 사회주의의 소멸과 당의 국가화를 뒷받침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와 1970년 해안 노동자 시위에서 정부의 강경 진압을 지지한 일은 저항의 경험과 권력의 책임이 충돌한 그의 정치적 유산을 드러낸다. 1970년 실각 뒤에도 평화운동과 공식 기구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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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폴란드 사회당과 사회주의 청년운동에 참여
  • 1935–1939크라쿠프 지역 폴란드 사회당 노동자위원회 서기
  • 1942–1945아우슈비츠와 마우트하우젠 수감, 수용소 저항조직 활동
  • 1945–1948폴란드 사회당 중앙집행위원회 총서기
  • 1947–1952폴란드 각료회의 의장
  • 1954–1970폴란드 각료회의 의장
  • 1970–1972국가평의회 의장
  • 1973–1986전국 평화위원회 의장, 세계평화평의회 위원

비더 페렌츠

Vida Ferenc
법률·사법 헝가리 국가기관 헝가리 헝가리계 1911–1990 ○ 자연사

정치재판을 집행한 공산주의 법관

그는 1989년에도 너지 임레를 유죄라고 주장하며 판결을 뉘우치지 않았다.

비더 페렌츠는 불법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뒤 전후 헝가리의 사법·당 관료로 올라선 공산주의 법률가였다. 그는 1956년 혁명 뒤 국가가 조직한 보복 재판에서 가장 많은 사형을 선고한 법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58년 너지 임레 재판에서 대법원 인민법정회의를 주재하며 피고인의 발언과 변호 측 증거 신청을 거듬없이 제한했고, 너지 임레와 기메시 미클로시, 말레테르 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1989년에도 판결의 불법성을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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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세게드 법학원 졸업, 팔레스타인 공산당 창립에 참여
  • 1935–1942헝가리 불법 공산주의 운동 참여, 변호사 수습
  • 1942–1945쇤헤르츠 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독일로 강제 이송
  • 1945–1949헝가리 공산당 지구위원회 서기, 내무부 고문
  • 1951–1953법무부 근무
  • 1953–1972대법원 법관, 인민법정회의 주재 및 법원 평의회 부의장
  • 1958너지 임레 재판 주심 법관, 사형 판결 선고

게오르기 모케예비치 마르코프

Георгий Мокеевич Марков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1911–1991 ○ 자연사

시베리아를 노래하며 문학적 정통을 수호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문학 총감독

1976년 당 대회에서: “브레즈네프 동지의 심오하고 지혜로운 보고서는, 마치 전선을 타고 흐르듯 사람들의 가슴에 뛰어들어 노동과 위대한 성취로 이끄는 거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영감의 에너지를 담고 있습니다.”

톰스크 근교 사냥꾼 집안의 13번째 아이로 태어나 13세에 콤소몰에 가입, 신문기사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스트로고프 일가』 『소금의 땅』 『시베리아』 등 시베리아 농민과 자연을 서사화한 대하소설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다. 1971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되어 15년간 소련 문학정책을 총괄하며 솔제니친·파스테르나크 탄압을 주도했고 브레즈네프 회고록에 레닌상을 수여할 정도로 체제와 밀착했다. 그의 책은 수백만 부 발행되고 TV 드라마로 각색됐지만 지식인들 사이에선 아무도 읽지 않는 책으로 조롱받았으며, 페레스트로이카에 반대하다 1989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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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31톰스크 콤소몰 활동
  • 1931–1941노보시비르스크·옴스크 신문·잡지 편집자
  • 1941–1945자바이칼 전선군 신문 《전투 초소에서》 종군기자
  • 1956–1971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서기
  • 1959–1965RSFSR 작가동맹 모스크바 지부 이사회 의장
  • 1971–1986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제1서기
  • 1971–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6–1989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의장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세묘노프

Владимир Семёнович Семёнов

소련 독일정책의 40년 설계자

1953년 6월 동독 봉기 당시 정치국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리자, 세묘노프는 '소련은 독일 노동자에게 총을 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23년간 소련 외무차관을 지내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일 정책을 거의 40년간 주무른 외교관이다. 2차대전 후 소련군정 정치고문으로 동독 수립과 베를린 봉쇄의 핵심 설계자였으며,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 당시 정치국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 차관으로 서독과의 동방정책을 뒷받침하고 SALT 전략무기제한협상을 이끌었다. 1978년 주서독 대사로 부임해 말년까지 본에서 근무했으며, 러시아 아방가르드 회화 컬렉터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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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주리투아니아 소련 전권대표부 참사관
  • 1940–1941주독일 소련 대사관 참사관
  • 1945–1953주독 소련군정청·통제위원회 정치고문
  • 1953–1954소련 최고위원 겸 주동독 대사
  • 1955–1978소련 외무부 차관
  • 1978–1986주서독 소련 대사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쿠즈네초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Кузнец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1–1995 ○ 자연사

NK-12부터 NK-33까지: 소련 하늘과 우주를 움직인 엔진 총설계자

N-1 달로켓 계획이 취소된 뒤 쿠즈네초프는 NK-33 엔진 수십 기를 폐기 명령을 어기고 사마라 창고에 보관했다. 30년 후 미국 엔지니어들이 시험해 보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효율적인 로켓 엔진'이라 평했다.

소련의 항공기·로켓 엔진 총설계자로, OKB-276을 이끌며 세계 항공사에 남을 터보프롭·터보팬·액체로켓 엔진을 개발했다. 그의 NK-12는 오늘날까지 세계 최강 터보프롭으로 Tu-95 전략폭격기와 An-22 수송기에 동력을 공급하며, NK-32는 Tu-160 초음속 전략폭격기의 심장이 되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요청으로 소련 달로켓 N-1의 1단용 NK-33 엔진을 개발했으며, 폐쇄회로 방식을 채택한 이 고효율 엔진은 계획 취소 후 보존되었다가 1990년대 미국 안타레스 로켓에 사용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에 올랐고, RSFSR 최고소비에트 의원(1963–1990)으로 과학·산업 정책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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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3모스크바 항공기술학교 야간부·제24공장 기계공
  • 1933–1938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38–1942주콥스키 아카데미 교편·연구; 1941년 후보학위 논문 방어
  • 1942제6공군 제239전투기사단 선임기사 (전선 근무)
  • 1943–1949우파 제26항공공장 → 부수석설계자 → 수석설계자
  • 1949–1994OKB-276 (후일 쿠즈네초프 명명 SNTK) 수석설계자·총설계자, 쿠이비셰프/사마라
  • 1963–1990RSFSR 최고소비에트 의원
  • 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밀란 질라스

Милован Ђилас

코민포름에서 서유럽 공산당을 공격하고, 훗날 『새 계급』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해부한 유고슬라비아 반체제 인사

나는 공산주의의 전 길을 걸었다: 젊은 혁명가에서 독실한 스탈린주의자로, 그리고 완전한 환멸에 이르기까지.

몬테네그로 출신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자로, 파르티잔 투쟁과 전후 국가 건설에서 티토의 가장 가까운 동지 중 하나였다. 1947년 코민포름 창설 회의에서 카르델과 함께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의 '의회주의적 기회주의'를 신랄히 비판했으며, 그의 회고록은 이 회의의 내부 동학에 관한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당내 민주화와 관료 특권층 비판을 제기하다 1954년 모든 직위에서 축출되었고, 수감 중 밀반출한 『새 계급』에서 공산당 관료가 착취적 지배계급으로 변했다고 주장해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30년 넘게 투옥과 감시 속에서도 저술을 이어간 동유럽 최초의 저명한 공산권 반체제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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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6유고슬라비아 공산당 활동, 체포 및 수감
  • 1937–1939KPJ 중앙위원 및 정치국 위원
  • 1941–1945몬테네그로 파르티잔 봉기 지도, 최고사령부 선전 담당
  • 1945–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부통령, 민족의회 의장
  • 1953–1954『보르바』에 일당제 비판 연재, 당에서 축출
  • 1956–1966반체제 저술로 두 차례 수감, 『새 계급』·『스탈린과의 대화』 해외 출간
  • 1966–1995베오그라드에서 감시 속 자유, 저술 활동 지속

아나톨리 나우모비치 리바코프

Анатолий Наумович Рыбаков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911–1998 ○ 자연사

20년간 금서였다가 글라스노스트의 상징이 된 작가

『아르바트의 아이들』 속 스탈린은 말한다: "죽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 이 한 문장에 한 시대의 냉혹한 논리가 응축되어 있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자란 유대계 소비에트 작가. 1933년 NKVD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3년 유배, 전쟁 중에는 전차부대 지휘관으로 베를린까지 진격했다. 1960년대에 완성한 『아르바트의 아이들』은 20년 넘게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1987년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로 마침내 빛을 보아 스탈린주의 청산의 문학적 상징이 되었다. 유대인 가문의 나치 점령 하 투쟁을 그린 『무거운 모래』(1979)는 러시아어 최초의 홀로코스트 소설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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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36NKVD 체포, 시베리아 3년 유배
  • 1941–46전차부대 지휘관, 베를린까지 진격
  • 1948–56『코르티크』『청동새』로 아동문학 데뷔
  • 1950『운전사들』로 스탈린상 수상
  • 1960s–87『아르바트의 아이들』 집필, 사미즈다트, 출판 금지
  • 1979『무거운 모래』 — 최초의 러시아어 홀로코스트 소설
  • 1987글라스노스트로 『아르바트의 아이들』 출간, 세계적 센세이션
  • 1989–91소비에트 PEN 센터 회장

토도르 흐리스토프 지프코프

Тодор Христов Живков

동구권 최장 35년 집권, 소련에 가장 충성한 발칸 지도자

「나를 심판하라. 그러나 빵도 명예도 없이 백성이 남게 될 때가 올 것이다」(1990년 체포 당시)

소피아 근교 프라베츠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인쇄공으로 일하며 1932년 불가리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르티잔 '얀코'로 소피아 일대 저항을 조직했고, 1944년 반파시스트 봉기에 참여했다. 전후 체르벤코프의 후원으로 급부상해 1954년 제1서기가 되어 35년간 동구권 최장기 집권했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와 긴밀히 협력하며 공업화와 생활수준 향상을 이끌었고, 1987년 '7월 구상'으로 제한적 시장개혁을 시도했다. 1984년 투르크계 강제동화 정책으로 큰 논란을 남겼으며, 1989년 11월 당내 쿠데타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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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불가리아 공산당(BCP) 입당, 국영인쇄소 당조직 책임자
  • 1941–44대독 저항 — 소피아 제3당구역 책임자, 파르티잔 여단 '차브다르' 정치지도원
  • 1945–49BCP 중앙위 후보위원 → 소피아 시당 제1서기 → 소피아 시장
  • 1950–54BCP 중앙위 서기, 정치국 후보위원 — 농업·집단화 담당
  • 1954–89BCP 제1서기(1954–81) → 총서기(1981–89) — 35년간 국가 최고지도자
  • 1962–71불가리아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총리)
  • 1971–89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
  • 1989.11.10당내 쿠데타로 전격 해임, 이후 BCP 제명

미하일 티모페예비치 예프레모프

Михаил Тимофеевич Ефремов

볼가 강변 고아원 소년에서 코시긴 내각 부의장이 된 당 조직인사 전문가

1952년 11월 19일, 건설이 지연되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간부회의에서 사회를 본 예프레모프는 현 상황을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 규정하고, "성공의 열쇠는 동지적 지원, 즉 팔꿈치 감각에 있다"고 선언했다.

사마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란 예프레모프는 기술학교와 산업대학을 거쳐 전기기술자로 출발했다. 1942년 쿠이비셰프 당 기구에 들어간 뒤 10년 만에 제1서기로 도약했고, 볼가 수력발전소 건설을 진두지휘하며 지역경제 지도자로 입지를 굳혔다. 1959년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당기관부장으로 발탁되어 연방 차원의 간부 인사를 관장했고, 첼랴빈스크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의 제1서기를 거쳐 1965년 코시긴의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임명돼 6년간 경제행정을 총괄했다. 말년에는 동독과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내며 외교무대로 전환했고, 75세까지 현역으로 일하다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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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33사마라 에너지콤비나트 기술전기검사소장
  • 1933–34붉은 군대 복무 (볼가 군관구 사령부)
  • 1934–38쿠이비셰프 목재가공콤비나트 부기계장·주임동력기사
  • 1941–42차파옙스크 제15공장 건설 주임동력기사
  • 1942–51쿠이비셰프 주당: 강사·부서장·서기 대리·중공업부장
  • 1951–52쿠이비셰프 주당 제2서기
  • 1952–59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 (볼가 수력발전소 건설 진두지휘)
  • 1959–61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당기관부장 ·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위원
  • 1961–62첼랴빈스크 주당 제1서기
  • 1962–65고리키 공업주당 제1서기 → 고리키 주당 제1서기 (소브나르호스 분할·통합기)
  • 1965–7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코시긴 내각)
  • 1971–75주동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5–86주오스트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손 산 손

សឺន សាន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캄보디아 캄보디아 1911–2000 ○ 파리에서 사망

캄보디아의 반공 저항세력 지도자

1982년 6월 22일 쿠알라룸푸르에서 시아누크·크메르루주와 함께 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를 세우고 총리를 맡아 캄보디아의 유엔 의석 유지에 기여했다.

캄보디아의 정치가이자 반공 저항세력 지도자다. 1911년 프놈펜에서 크메르 크롬 가문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유학하고 1935년 공직에 들어갔다. 1946~48년 부총리와 재정을, 1950~51년 외무를 맡았고 1955~68년 캄보디아 국립은행 총재를 지냈으며 1967~68년 총리가 되었다. 1970년 쿠데타 뒤 가택 연금되었다가 프랑스로 망명해 1978~79년 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KPNLF)을 결성했고 1982년 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1992년 불교자유민주당을 창당해 1993년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1993년 국회의장을 지낸 뒤 1997년 파리로 떠나 2000년 12월 19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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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8부총리 겸 재정 담당
  • 1950–1951외무장관
  • 1955–1968캄보디아 국립은행 총재
  • 1967–1968캄보디아 총리
  • 1978–1979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KPNLF) 결성 및 지도
  • 1982–1993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 총리
  • 1992불교자유민주당 창당
  • 1993국회의장
정치·당 지도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1–2004 ○ 자연사

핵폐기를 진심으로 믿었으나 SDI만은 양보하지 않았던, 냉전의 마지막 미국 대통령

1986년 10월 12일 오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모든 핵무기를 2000년까지 폐기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40분 뒤, SDI 연구를 실험실에 가두라는 고르바초프의 조건을 레이건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무너졌다.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레이거노믹스와 대규모 군비 증강으로 1980년대를 열었다. 취임 초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대결을 고조시켰으나,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진심으로 염원하여 고르바초프와 네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1986년 레이캬비크에서 전면 핵폐기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전략방위구상(SDI)을 양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협상은 막판에 결렬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하여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을 통째로 폐기했고, 냉전은 그가 퇴임한 지 몇 달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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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일리노이주 탬피코의 아일랜드계 가정에서 출생
  • 1937–1964할리우드 배우, 영화 53편 출연, 영화배우조합 회장 역임
  • 1967–1975캘리포니아 주지사, 대학 시위 진압과 복지 개혁 추진
  • 1981–1989제40대 대통령, 레이거노믹스·군비 증강·'악의 제국' 연설
  • 1986.10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전면 핵폐기 직전까지 갔으나 SDI로 결렬
  • 1987.06브란덴부르크문 앞 '이 벽을 허무시오' 연설
  • 1987.12INF 조약 서명, 중거리 핵미사일 전량 폐기
  • 1994–2004알츠하이머병 진단,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바이바코프

Никола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айбаков

장기 정체기의 고스플란 의장

함께 일했던 이들이 배신하고 나를 '인민의 적'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 더러운 수사를 피해 붉은 군대로 도망쳤다.

바쿠 유전 지대에서 성장한 석유 기술자로, 30대에 소련 석유산업을 이끌며 '바이바코프 공법'으로 불리는 고압 시멘트 주입 기술을 개발했다. 전시에는 코카서스 유전 방어의 극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전후에는 로마슈키노 유전 개발을 주도하며 소련의 산유 대국화에 기여했다. 1965년부터 20년간 고스플란 의장으로 코시긴 개혁 이후의 중앙계획경제를 상징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계획 관료제의 핵심 축으로서 고르바초프 초기까지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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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s석유산업 인민위원/장관으로 전시 에너지 공급을 관리
  • 1942독일 진격기 코카서스 유전 파괴 대비와 석유 생산 이전 임무 수행
  • 1955–1957고스플란 의장으로 처음 중앙계획을 지휘
  • 1965–1985국가계획위원회 의장, 코시긴 개혁 이후 장기 계획경제 운영
  • 1985 이후고르바초프 초기 교체, 장기 정체기 계획관료의 상징으로 남음

세르게이 레오니도비치 소콜로프

Сергей Леонидович Сокол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1–2012 ↓ 해임 1987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으로 해임된 국방장관

1987년 5월 28일, 19세 서독 조종사 마티아스 루스트가 경비행기로 소련 방공망을 뚫고 붉은 광장에 착륙했다. 이틀 뒤 정치국에서 고르바초프가 소콜로프의 해임을 제안하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55년 복무한 원수는 한 소년의 비행 한 방에 물러났다.

하산 호 전투와 독소전에서 기갑부대를 지휘하며 성장한 소비에트 군사 엘리트로, 1967년부터 17년간 국방부 제1차관으로 군부의 제도적 중추 역할을 했다. 1978년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진급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작전조 책임자로서 소련군의 실질적 지휘를 맡았다. 1984년 국방장관에 올랐으나,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붉은 광장 착륙 사건으로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되었다. 101세까지 생존한 유일한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소련군의 전성기와 종말을 모두 목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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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 참전, 기갑·기계화 지휘 경험 축적
  • 1960s–1970s레닌그라드 군관구와 국방부 제1차관으로 승진
  • 1979–1980s아프가니스탄 전쟁 지휘·감독에 깊이 관여
  • 1984–1987국방장관, 고르바초프 초기 군부의 보수적 얼굴
  • 1987마티아스 루스트 모스크바 착륙 사건 뒤 해임

보응우옌잡

Võ Nguyên Giáp
군사·지휘 베트남 국가기관 베트남 베트남 1911–2013 ○ 자연사

정규 훈련 없이 두 제국을 격파한 역사 교사 출신 장군

하노이 사립학교의 젊은 역사 교사 시절, 그는 칠판에 나폴레옹 전역의 상세한 작전도를 그려내곤 했다. 학생들은 그를 '장군'이라 불렀다. 15년 후, 그는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항복시켰다.

정규 군사 교육 없이 게릴라 부대를 창설해 디엔비엔푸 전투(1954)에서 프랑스를 격파하고, 이어진 전쟁에서 미국을 물러나게 한 역사 교사 출신 장군. 제국주의 정규군을 야전에서 무너뜨린 최초의 식민지 해방군 사령관으로, 30년간 인민군을 기계화 연합군으로 키우며 정치적 의지를 꺾는 인민전쟁 전략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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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비엣민 군사 사령관
  • 1946–1947내무장관, 베트남 민주 공화국
  • 1946–1980국방장관, 베트남 민주 공화국 /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 1951–1982정치국 위원, 베트남 공산당
  • 1955–1991부총리
  • 1972현장 지휘관직에서 물러남 (반띠엔중으로 교체), 국방장관직 유지
  • 1982–1991중앙위원회 위원

마리나 미하일로브나 라스코바

Марина Михайловна Раскова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2–1943 ✕ 추락사

여성 전투비행연대를 창설한 소련의 기록비행사

1938년 '로디나' 호 비행 중 연료 부족으로 타이가에 불시착해야 했을 때, 기수 조종석에 탄 라스코바는 충돌 시 가장 위험한 위치였다. 그리조두보바가 낙하산 탈출을 명령하자 그녀는 초콜릿 두 조각만 지닌 채 시베리아 타이가로 뛰어내렸고, 열흘 동안 홀로 생존 끝에 구조되었다.

소련 최초의 여성 항법사이자 1938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영웅 칭호를 받은 3인 중 한 명. 1938년 모스크바-극동 무착륙 비행으로 여성 세계 거리 신기록을 수립했다. 1941년 스탈린에게 직접 여성 전투부대 편성을 설득해 586전투연대·587폭격연대·588야간폭격연대 등 3개 여성 항공연대를 창설했으며, 588연대는 '밤의 마녀들'로 불리며 전설이 되었다. 587폭격연대를 직접 지휘하던 중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선으로 향하던 비행에서 악천후로 추락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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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항법연구소 제도사
  • 1933소련 공군 최초의 여성 항법사 자격 취득
  • 1934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교관 — 여성 최초
  • 1935계기비행 교관 자격 취득, 중앙비행클럽 졸업
  • 1937–1939NKVD 특별과 전속 자문관
  • 1937–1938다수의 여성 세계항공기록 수립 (항법사)
  • 1938'로디나' 호 모스크바-극동 무착륙 비행, 소비에트연방영웅 수훈
  • 1941여성항공연대 창설 — 586·587·588연대 조직
  • 1942–1943587폭격항공연대장, Pe-2 폭격기 전환 훈련 지휘

보리스 키드리치

Boris Kidrič

노동자 자주관리의 경제 이론을 설계한 유고슬라비아의 혁명가

자주관리 도입을 앞둔 어느 연설에서, 노동 대중은 '정당의 전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리고 매일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슬로베니아 해방전선과 파르티잔 저항운동의 주요 조직자였다. 전후 초대 슬로베니아 정부 주석을 지낸 뒤 연방 경제 담당 장관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나,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 소련식 중앙집권 계획에서 노동자 자주관리로의 전환을 설계한 핵심 경제 이론가였다. 그의 1951년 「전환기 경제에 관한 테제」는 상품생산과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작동함을 인정함으로써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정당화한 대표적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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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슬로베니아 해방전선 정치서기 겸 파르티잔 총사령부 정치위원
  • 1945–1946슬로베니아 인민공화국 초대 정부 주석
  • 1946–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경제평의회 의장 겸 산업장관
  • 1947–1952제1차 5개년 계획 입안·집행 총괄
  • 1948–195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치국 위원

파샤 니키티치나 안겔리나

Прасковья Никитична Ангелина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계 그리스인 1912–1959 ○ 자연사

여성 기계화 노동의 선구자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제가 하나를 사면 그들도 하나를 사요.”

파샤 안겔리나는 초기 5개년계획의 농업에서 여성 노동자가 기술을 익히고 생산을 조직할 수 있음을 보여 준 트랙터 운전수이자 여단장이었다. 그녀는 여성 트랙터 여단을 이끌며 스타하노프 운동의 농업 부문을 대표하는 공적 인물이 되었고, 여성의 농촌 기계화 진출을 촉진했다. 그러나 그녀의 명성과 생산 기록은 성별 분업을 넘어선 노동의 가능성과 국가가 노동 영웅을 선전의 상징으로 만드는 방식을 함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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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최초의 여성 트랙터 운전수 중 한 사람
  • 1933최초의 여성 트랙터 여단 조직·지휘
  • 1935전연맹 스타하노프 대회 참가·발언
  • 1938여성 트랙터 운전수 양성 운동 주도
  • 1940모스크바 티미랴제프 농업 아카데미 졸업
  • 1947, 1958사회주의 노동 영웅 두 차례 수훈
  • 1948『콜호스 들판의 사람들』 출간
  • 1937–1958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덩퉈

邓拓
이념·선전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1912–1966 ✕ 자살

『인민일보』 편집장, 『연산야화』로 대약진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문화대혁명의 첫 희생자가 된 언론인

1966년 『연산야화』와 『삼가촌 찰기』가 「반당 독초」로 규정되어 전국적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5월 18일 가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979년 2월 복권되었다.

푸젠 출신 역사학자·언론인으로 항일전쟁기 진차지 근거지에서 신문을 만들고 최초의 『마오쩌둥 선집』을 편집했다. 1949년부터 『인민일보』 편집장·사장을 맡았으나 1957년 마오에게 「서생 논정(書生辦報)」이라 질책받고 물러났다. 베이징시 당위원회 서기로 1961~1962년 『베이징만보』에 연재한 잡문 『연산야화』와 우한·랴오모사와 함께 쓴 『삼가촌 찰기』는 1966년 「반당 독초」로 규정되어 문화대혁명의 서막이 되었고, 그는 그해 5월 자살했다. 1979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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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8『인민일보』 편집장 · 사장

이반 이그나티예비치 야쿠봅스키

Иван Игнатьевич Якубо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 1912–1976 ○ 병사

바르샤바조약군을 9년간 지휘한 벨라루스계 원수

1941년 민스크 방어전에서 야쿠봅스키의 전차부대는 시가로 밀려든 독일 오토바이 부대를 전차로 들이받아 분쇄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의 여섯째로 태어나 1932년 적군에 입대해 1934년 민스크의 칼리닌 벨라루스 통합군사학교를 졸업했다. 독소전쟁 내내 전차부대를 지휘하며 민스크 방어전, 모길료프 방어전,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키예프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까지 싸워 소련영웅 칭호를 두 번 받았다. 1967년 국방 제1차관 겸 소련원수에 올라 바르샤바조약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군사 준비를 총괄했으나, 작전 개시 직전 현장 지휘권은 이반 파블롭스키에게 넘어갔다. 1976년 11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병으로 사망해 유해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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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폴란드 동부 진주·겨울전쟁에 전차중대장으로 참전
  • 1941–1945독소전에서 전차대대장에서 근위전차군단 부사령관까지, 두 차례 소련영웅 수훈
  • 1948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960–1961, 1962–1965독일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 (1961년 8월부터 코네프의 부사령관으로 실무 주도, 1962년 4월 복귀)
  • 1965–1967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67–1976국방 제1차관 겸 바르샤바조약군 총사령관, 소련원수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 즈베레프

Сергей Алексеевич Зверев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재래식 군수 생산을 13년간 총괄한 국방공업장관

1942년, 30세의 공장 수석기사였던 즈베레프는 전시 광학장비 생산 공로로 첫 훈장인 적성훈장을 받았다. 36년 뒤 그가 사망했을 때, 노동자로 출발했던 크라스노고르스크 공장은 그의 이름을 따 '즈베레프 공장'으로 개칭되었다.

광학기사로 출발해 소련 국방공업장관(1965–1978)까지 오른 군수 행정가다. 전시에는 카잔과 요시카르올라 공장에서 붉은군대의 조준경과 광학장비 생산을 이끌었고, 종전 후 군비부 본부장과 차관을 거쳐 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 고체연료 로켓무기와 우주체계 개발까지 관장했다. 1965년 국방공업부 재창설과 함께 장관에 올라 전차·화포·소화기·탄약 등 재래식 무기 생산 전체를 13년간 지휘하며 냉전 군비경쟁의 물적 토대를 관리했다. 국가 과제에서는 원칙에 단호했지만 부하에게는 한결같이 정중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국가상을 수상하고 레닌 훈장만 6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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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노동자로 출발, 레닌그라드 광학기계공장에서 광학기사 훈련
  • 1936레닌그라드 정밀기계·광학연구소(LITMO) 졸업, 광학기사로 설계·기술직 근무
  • 1939–1944카잔·요시카르올라 광학공장 주임기술자·수석기사, 전시 광학장비 생산 주도
  • 1944–1947크라스노고르스크 기계공장 수석기사·부소장
  • 1947–1958군비부·국방공업부에서 본부장, 차관 역임
  • 1958–1963국방기술 국가위원회 부위원장, 제1부위원장
  • 1963–1965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위원장 — 대신급, 고체연료 로켓·우주체계 개발 관장
  • 1965–1978소련 국방공업장관 — 전차·화포·소화기·탄약 생산 총괄

사비트 아타예비치 오루제프

Сабит Атаевич Оруджев

바쿠 유전에서 시작해 소련 가스 산업을 세계 최대로 키운 아제르바이잔인 공학자

1973년, 우렌고이 예정지의 맨땅에 내린 오루제프가 말했다. "나는 표트르 대제가 아니지만 그의 말을 빌리겠소. 여기에 도시가 세워질 것이오." 이 한마디에서 오늘날 '러시아의 가스 수도' 노비 우렌고이가 시작되었다.

바쿠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소련 가스 산업을 세계 최대로 키운 아제르바이잔인 공학자. 1972년 가스공업부 장관에 취임해 서시베리아 우렌고이·메드베지예 초거대 가스전을 개발하고 통합가스공급시스템(ЕСГ)을 구축했으며, 이 시스템은 오늘날까지 러시아 가스 산업의 골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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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오르조니키제네프티 트러스트 기계공, 작업반장
  • 1939–1946아즈네프티 계열 트러스트 관리자·트러스트장
  • 1946–1949크라스노다르네프티 주임기사, 아즈네프테라즈베드카 청장
  • 1949–1955소련 석유공업부 해양·서부지역 총국장
  • 1955–1957소련 석유공업부 차관
  • 1957–1959아제르바이잔 SSR 인민경제회의 의장·각료회의 부의장
  • 1965–1972소련 석유채취공업부 제1차관
  • 1972–1981소련 가스공업부 장관

미하일 포르피리예비치 게오르가제

Михаил Порфирьевич Георгадзе
정부·행정 소비에트 그루지야 1912–1982 ○ 자연사

네 국가원수 아래 25년간 모든 소비에트 법령에 공동 서명한 제도적 닻

1982년 11월 23일, 브레즈네프 사망 13일 만에 최고회의 회의장에 참석했다가 자리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25년의 행정적 연속성이 한 순간에 끊어졌다.

소비에트 최고회의 상무회 서기(1957–1982)로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대 네 명의 국가원수 아래 모든 법령에 공동 서명한 행정 중심축이다. 그루지야 농민 가정 출신으로 농업 공학을 전공했고, 조국전쟁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루지야 공산당 제2서기와 각료회의 제1부의장을 거쳐 모스크바로 올라가 25년간 최고회의 상무회의 제도적 연속성을 체현했다. 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1961–1982)로서 당과 국가 기구 사이의 조용하지만 필수적인 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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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51소련 농업부, 기술자에서 부서장까지 승진
  • 1941–1942위대한 조국전쟁 참전, 중상으로 퇴역, 적성훈장 수훈
  • 1951–1953그루지야 SSR 농업차관
  • 1953–1954그루지야 SSR 농업장관
  • 1954–1956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56–1957그루지야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7–1982소련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
  • 1961–1982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블라디미르 바카리치

Vladimir Bakarić

공화국의 이해와 연방 사회주의를 조율한 공산주의 지도자

1948년 2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의 유고슬라비아 비난을 직접 들은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블라디미르 바카리치는 크로아티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치의 핵심 조정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르티잔 조직과 해방 권력 건설에 참여했고, 전후에는 크로아티아의 국가·당 기구를 이끌었다. 1948년 2월 에드바르드 카르델리와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스탈린의 압박을 직접 마주했으며, 이후 티토의 독자 노선을 지지했다. 그는 공화국의 권한 확대와 자기관리 사회주의를 옹호했지만, 티토의 후원과 당의 권력 구조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신중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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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5자그레브 대학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1933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입당
  • 1941–1943크로아티아 파르티잔 해방운동의 정치위원
  • 1944–1969크로아티아 공산당 및 공산주의자동맹의 최고 지도자
  • 1945–1953크로아티아 인민공화국 집행위원회 의장
  • 1948에드바르드 카르델리와 함께 모스크바 회담에 파견
  • 1953–1963크로아티아 의회 의장
  • 1974–1983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대통령직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