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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학술·연구 프랑스 프랑스 1918–1990 ○ 사망

마르크스에게서 새 대륙을 발견한 사상가: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이데올로기는 길에서 경찰이 ‘이봐 거기!’ 하고 부르면, 몸을 돌리는 바로 그 순간에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마르크스의 저작에 '인식론적 절단'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와 중층결정 개념을 통해 구조적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했다. ENS 철학 교수로서 데리다·푸코·부르디외·바디우 등 프랑스 지성계 한 세대를 가르쳤다. 스탈린주의의 이론적 공백을 메우려 했으나, 공산당과의 긴장과 정신질환 속에서도 전후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의 중심으로 밀어올렸다. 1980년 정신적 발작 속에서 아내를 살해한 비극은 그의 사상적 유산을 오래도록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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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ENS 입학, 가스통 바슐라르 지도
  • 1948ENS 철학 조교 임명
  • 1948프랑스공산당(PCF) 입당
  • 1954ENS 문학부 서기 — 학교 운영 담당
  • 1965『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 출간 — 구조적 마르크스주의 정립
  • 196868년 5월 당시 우울증으로 병원 입원 — "알튀세르는 무슨 소용인가?"
  • 1970「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발표
  • 1976PCF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포기에 공개 반대
  • 1980정신적 발작 중 아내 엘렌 리트만 교살 — 재판 불능 판정
  • 1990정신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셰르비츠키

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Щербицкий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18–1990 ○ 자연사

17년간 우크라이나를 이끈 브레즈네프 시대의 공화국 건설자, 드네프르 클랜의 핵심

«도대체 어떤 바보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말을 만들어냈나? 집이 무너지지도 않는데 왜 다시 지어야 하나? 우리는 잘 살고 있다!» —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대한 셰르비츠키의 반응.

드네프로제르진스크·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공업 지구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1972년부터 1989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와 18년간 CPSU 정치국원(1971–1989)을 겸했다. 브레즈네프와 드네프르 인맥을 공유하며 17년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진두지휘했고, 공화국 경제 규모를 4배 이상 키웠다. 흐루쇼프의 분권 실험에 반대하여 일시 좌천되었으나 브레즈네프 집권 후 복귀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정보 통제와 키예프 메이데이 행진 강행으로 비판받았으며,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된 마지막 구세대 공화국 수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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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화학방호군 장교, 자캅카스 전선 복무, 대위 제대
  • 1946–1952드네프로제르진스크 코크스화학공장·금속공장 당비서 및 당 간부
  • 1952–1954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55–1957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7–196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61–1963, 1965–1972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72–198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71–1989CPSU 중앙위 정치국 정위원 (1961–1963, 1965–1971 후보위원)

표도르 콘스탄티노비치 모르틴

Фёдо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Мортин

사하롭스키의 13년 오른팔, 데탕트기 KGB 대외첩보의 짧았던 수장

KGB 도청 부서가 감청 중인 스위스 주재원의 전화에 누군가 망을 봐주었다. 추적 결과, 발신자는 다름 아닌 제1총국장 모르틴 자신이었다. 그는 그해 휴가를 떠난 뒤 다시는 루뱐카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하롭스키의 13년 오른팔로 냉전기 KGB 제1총국의 대외첩보 실무를 지휘하다 1971년 총국장이 된 소련의 첩보 장군이다. 재임 중 PGU 본부를 야세네보로 옮기고 과학기술 첩보를 확충하며, 브란트 정부와의 비밀 채널이 가동되던 데탕트 초기의 해외 정보활동을 총괄했으나 부하 간부를 감청에서 지키려 한 전화 한 통으로 불과 2년 반 만에 크류치코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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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시골 학교 물리·수학 교사
  • 1939–1940지구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40–1941지구 중학교 교장
  • 1941–1942지구 당위원회 조직부장
  • 1942–1945현역군 정치장교,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가
  • 1945–1947소련군 군사외교 아카데미에서 중국어·영어 습득
  • 1947–1950KGB 대외첩보 장교, 장기 해외 파견
  • 1950–1954CPSU 중앙위원회 기구 근무
  • 1954–1958KGB 제1총국(PGU) 부국장
  • 1958–1971KGB 제1총국(PGU) 제1부국장
  • 1966–1967KGB 제101학교(고등정보학교) 교장 겸임
  • 1971–1974KGB 제1총국(PGU) 국장
  • 1974–1975소련 각료회의 과학기술 국가위원회 과학기술협력국장
  • 1975–1982KGB 의장 자문단 선임 자문관
  • 1982정년 퇴직

예브게니 필리포비치 이바놉스키

Евгений Филиппович Ивано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벨라루스 1918–1991 ○ 자연사

NATO와 맞선 소련 최전선 전력을 8년간 지휘한, GSFG 최장 재임 사령관

1941년 12월 4일, 독일 전차 부대가 서부전선군 사령부를 포위하기 직전 — 대위 이바놉스키가 지휘하는 27전차대대가 돌파구를 막아 사령부를 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소령으로 시작해 26세에 대령으로 종전한 전차 장교로, 모스크바 방어전부터 동프로이센까지 종군했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군 독일주둔군(GSFG) 총사령관을 역임하며(역대 최장인 8년간) 바르샤바 조약기구 최정예 전력을 지휘해 냉전기 NATO와의 군사적 대치 최전선을 책임졌다. 이후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85년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말년의 재래식 전력 증강을 주도했으며, 같은 해 대조국전쟁과 전후 군사력 건설의 공로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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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전차 소대장 · 중대장, 모스크바 군관구
  • 1939–1940서부 벨라루스 진주 및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1945전차대대 참모장·대대장, 2전차군단 정찰부장·작전부장, 62근위중전차연대장 (서부·브랸스크·보로네시·제1·제2벨로루시 전선군)
  • 1946–1952근위기계화군 정찰부장 · 전투훈련부장
  • 1952–1953벨로루시 군관구 기갑·기계화부대 부사령관 (자주포)
  • 1953–1956기계화사단 참모장 → 전차사단장, 벨로루시 군관구
  • 1958–1961극동 군관구 제1부참모장
  • 1961–1965제1근위전차군 사령관, GSFG
  • 1965–1968모스크바 군관구 제1부사령관 → 사령관 직무대행
  • 1968–1972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72–1980소련군 독일주둔군(GSFG) 총사령관
  • 1980–1985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
  • 1985–1989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 1989–1991국방부 감찰총감단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 알렉산드로프-아겐토프

Андрей Михайл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Агентов

네 명의 서기장을 보좌한 소련 외교정책 실무자

“소련 체제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사람이다” — 도브리닌 대사가 키신저에게 알렉산드로프-아겐토프를 설명하며, 1972년.

스웨덴 문헌학도 출신으로 타스 통신원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주재 스웨덴 소련 공사관 보좌관을 거쳐 외교 경력을 시작했다. 1961년 브레즈네프의 국제문제 보좌관이 된 이래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고르바초프까지 네 명의 서기장을 연속으로 보좌하며 데탕트 시대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실무자로 활약했다. 브레즈네프의 외교 연설문을 직접 집필하고 미소 정상회담과 헬싱키 협정(1975년) 체결에 배석했으며, 자신의 외교 경력 중 최대 성과로 전후 유럽 국경 승인을 꼽았다. 1986년 은퇴 후 회고록 《콜론타이에서 고르바초프까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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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2타스 스톡홀름 특파원
  • 1942–1947주스웨덴 소련 공사관 보좌관 (콜론타이 보좌)
  • 1947–1961외무부 장관 보좌관
  • 1961–1963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브레즈네프 보좌관
  • 1963–1966중앙위 서기·제1서기의 국제문제 보좌관
  • 1966–1986중앙위 서기장 국제문제 보좌관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셸레핀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Шелепин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8–1994 ↓ 실각 1975

청년동맹에서 KGB로 간 야심가

1958년 KGB 의장에 임명될 때 흐루쇼프가 덧붙였다: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 내가 도청당하지 않도록 조치해주게." 6년 후 셸레핀은 KGB를 동원해 흐루쇼프의 통신을 차단하고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콤소몰 지도자에서 KGB 의장으로 옮겨 보안기관의 세대교체를 상징했다. 이후 당 지도부에서 브레즈네프의 경쟁자로 여겨졌고 점차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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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8콤소몰 제1서기, 전후 청년동맹 세대를 대표
  • 1958–1961KGB 의장, 보안기관의 젊은 세대교체를 추진
  • 1961–1967중앙위 서기와 당-국가통제위원회 의장, 셸레핀 그룹 형성
  • 1964흐루쇼프 축출 과정에 참여
  • 1967–1975브레즈네프 체제에서 경쟁자로 여겨져 단계적으로 주변화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키순코

Григорий Васильевич Кисунько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18–1998 ○ 자연사

세계 최초의 작전형 미사일 방어 체계를 설계한 소련 군사과학자

사망 몇 시간 전, 아내에게 "녀석들에게 전화해야겠어. 내가 문제를 풀었는데, 그들이 내게 맡긴 문제 말이야"라고 말했다.

소련의 전파물리학자이자 미사일 방어 체계의 개척자. S-25 베르쿠트와 S-75 대공 미사일 체계 개발에 참여한 후, 1956년부터 세계 최초의 실전형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인 시스템 A의 수석설계자를 맡아 1961년 3월 4일 사상 최초로 비행 중인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A-35 및 A-35M 체계의 총설계자로서 소련의 전략적 방어 우위를 확립했으며, 레닌상과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1975년 무선공업부 지도부와의 갈등 속에 자신이 설계한 체계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해임되었고, 말년에는 은퇴 후 회고록 『비밀 구역』을 집필하며 역사 속에 묻힌 자신의 작업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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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337독립무선대대, 모스크바 방공군 — 소대장 보좌관·소대장·중대 기술장교
  • 1944–1950부됸니 통신사관학교 — 레이더 이론 교관·부학과장
  • 1950KB-1 — 초고주파 부문장, S-25 베르쿠트 체계 유도 레이더 시험 부기술책임자
  • 1953SKB-30 / KB-1 — 특수설계국장, 대미사일 방어 주제 착수
  • 1956시스템 A 수석설계자 — 세계 최초의 실험적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
  • 1958A-35 미사일 방어 체계 총설계자
  • 1961OKB-30 (후일 OKB 빔펠) — 초대 소장 겸 총설계자
  • 1970중앙과학생산연합 빔펠 — 과학담당 부총국장
  • 1975중앙무선전자시스템연구소 — 과학담당 제1부소장 (ABM 작업에서 배제됨)
  • 1979–1987국방부 제45중앙연구소 — 과학 고문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이론문제부 — 연구실장

뱌체슬라프 이바노비치 코체마소프

Вячеслав Иванович Кочемасов

동독 해체를 지켜본 마지막 소련 대사

1989년 11월 9일 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코체마소프는 고르바초프셰바르드나제에게 전화 지시를 구했으나 둘 다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소련의 정치인·외교관으로, 1962년부터 21년간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내며 문화·사회 정책을 총괄했고, 전러시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중앙위원회 의장(1966~1983)으로서 문화유산 보존 운동을 이끌었다. 1983년 동독 주재 소련 대사로 임명되어 1990년까지 냉전 최전선인 동베를린에서 근무했으며,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지 못한 채 현장을 지켰다. 1990년 4월 동독의 로타어 드 메지에르 총리에게 독일 통일에 관한 소련의 11개 조건을 담은 비공식 문건을 전달하며 통일 과정에서 소련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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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8고리키 주 콤소몰 제1서기
  • 1949–1955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55–1960주동독 소련대사관 참사관·공사참사관
  • 1961–1962대외문화교류 국가위원회 부의장·제1부의장
  • 1962–1983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66–1983전러시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의장
  • 1966–1983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83–1990주동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3–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니콜라이 티모페예비치 글루시코프

Николай Тимофеевич Глушков

11년간 소련의 모든 가격을 관리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수석 가격 행정관

소련의 모든 가격을 11년간 관리한 그가 사후에 남긴 자서전의 제목은 『마법 같은 숫자, 혹은 부름받지 못한 러시아』였다.

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1975~1986)으로서, 11년간 계획경제의 도매·소매 가격 체계 전체를 총괄한 인물이다. 뱟카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촌락 회계사로 일을 시작했고, 노릴스크 광산·제련 콤비나트에서 재무 책임자로 성장한 뒤 크라스노야르스크 국민경제회의와 비철금속부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가 가격위원회를 이끌던 시기는 공식 가격이 수십 년째 동결되는 한편 억압된 인플레이션과 만성적 부족이 누적되던 '정체의 시대'였으며, 이 모순을 관리하는 일 자체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과제였다. 퇴임 후 사후 출간된 자전적 저서에 '마법 같은 숫자, 혹은 부름받지 못한 러시아'라는 제목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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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화학임업 생산협동조합 회계사
  • 1936–1940소비자협동조합 체계 수석 회계사 → 주임 회계사
  • 1940–1944세베로니켈 콤비나트 수석 감사관, 노릴스크 콤비나트 부주임 회계사
  • 1944–1949노릴스크 광산·제련 콤비나트 주임 회계사 → 재무부장
  • 1949–1952예니세이스트로이 총국 재무부장
  • 1952–1957소련 비철금속부 광산관리국장
  • 1957–1963크라스노야르스크 국민경제회의 부서장 → 재무경제관리국장 → 부의장
  • 1963–1965크라스노야르스크 국민경제회의 제1부의장
  • 1966–1973소련 비철금속부 계획경제총국장
  • 1973–1975소련 비철금속부 차관
  • 1975–1986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아파나시예프

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фанасьев

미사일과 우주산업의 장기 장관

1950년대 크렘린 회의에서 베리야가 수개월 안에 군용 로켓 생산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젊은 기술자였던 아파나시예프는 비현실적이라며 시간을 더 요구했고, 회의 뒤 한 참석자만이 그를 두둔했다. 체포령이 첫 반응이었다는 세부는 영문 자료에만 있다.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주 클린에서 태어나 1941년 바우만 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한 소련 국가 활동가다. 전쟁 중에는 몰로토프(페름)의 제172포병공장에서 성형작약탄 생산에 참여했고, 국방산업부 기술총국의 선임기사·과장·부국장을 거쳐 국장을 지냈다. 1957~1965년 레닌그라드와 러시아연방 경제회의를 이끌었고 러시아연방 각료회의 부의장을 겸했다. 1965년 3월 2일부터 1983년 4월 8일까지 일반기계공업부 장관, 1983~1987년 중공업·수송기계공업부 장관을 지냈다. 사회주의노동영웅(2회), 레닌상·스탈린상·소련국가상 수상자이며 1961~1989년 당 중앙위원, 1962~1989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이었다. 2001년 5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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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s–1950s포병·미사일 관련 공업 행정에서 성장
  • 1961–1965방위산업 관련 국가위원회에서 로켓·우주 생산 조정
  • 1965–1983일반기계공업 장관, 탄도미사일·발사체·위성 산업 지휘
  • 1970s군사우주와 전략미사일 생산의 비밀 행정가로 활동
  • 1983 이후장기 우주산업 장관에서 물러나 군산복합체 원로로 남음

이반 키릴로비치 야코블레프

Иван Кириллович Яковлев

내부군을 기동타격대로 재편하고 체르노빌 방어선을 친 MVD 장군

1943년 말 키이우 서쪽에서, 야코블레프는 자신의 대전차포 대대와 두 개의 대전차소총 소대로 50대의 적 전차를 포위사격으로 맞아 17대를 격파하고 공세를 저지했다.

소련 내무부(MVD) 내부군 총사령관을 1968년부터 1986년까지 18년간 역임한 육군대장이다. 스타브로폴의 코사크 가정에서 태어나 1939년 붉은 군대에 입대,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중위에서 소령까지 진급하며 여섯 개의 전투훈장을 받고 세 차례 부상당했다. 내부군 사령관으로서 영토 기반의 준군사 조직을 항공·해상 부대까지 갖춘 기동타격 부대로 재편하고 특수차량화경찰부대와 지역 사령부 체계를 도입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1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오염 구역 경계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1986년 12월 우파 공항에서 내부군 호송연대 병사들이 여객기를 납치해 여러 명을 살해한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으나, 말년까지 내부군 고문과 참전용사협의회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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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케메로보 박격포·포병학교 졸업,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부상)
  • 1941–1945대조국전쟁: 소대장→대대장, 중위→소령, 6개 전투훈장, 3차례 부상
  • 1949–1958스탈린 기갑군사학교·참모대학 졸업, 독일 주둔군 전차연대장, 루마니아 주둔 사단장
  • 1958–1965국방부 군사교육국·육군 주참모부·육군 전투훈련본부 근무
  • 1965–1968모스크바군관구 전투훈련 담당 부사령관
  • 1968–1986소련 MVD 내부군 총사령관 (1980년 육군대장 진급)
  • 1986–1992소련 국방부 장성감찰단 군사감찰관·고문
  • 1996–2002러시아 MVD 내부군 총사령관 고문, 참전용사협의회 활동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크류코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Крюк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8–2005 ○ 자연사

R-7의 패킷 구조를 설계한 코롤료프의 핵심 동료

1957년 8월 21일, 크류코프가 설계에 참여한 R-7이 마침내 예정 궤적을 완주했다.

세르게이 크류코프는 소련의 로켓·우주기술 설계자로, R-7의 전체 형상과 중앙 블록 주위에 네 개의 측면 블록을 배치하는 패킷 구조를 구체화한 인물이다. 코롤료프가 총괄 설계자였다면 크류코프는 프로젝트 부문과 설계 조직을 이끌며 구상을 실제 구조와 도면으로 묶었다. 그는 이후 라보치킨 설계국과 에네르기아에서도 자동 행성간 정거장과 우주 운반체 개발을 지휘했다. 이 경력은 우주개발이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전문화된 집단 설계와 생산 체계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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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40바흐치사라이 출생, 스탈린그라드 기계공학연구소에서 수학
  • 1940–1945바리카디 공장과 526번 공장에서 포병 생산을 감독
  • 1946–1947NIИ-88에서 근무, 독일 로켓 자료 조사와 귀환 수송을 담당
  • 1947–1956OKB-1 프로젝트 부문에서 선임 엔지니어와 부문 책임자로 승진
  • 1956–1961제3설계부장, R-7 주임 설계자, 사회주의노력영웅
  • 1961–1970OKB-1 부수석설계자, 이후 중앙설계국 부문장
  • 1970–1977라보치킨 설계국 수석설계자, 자동 행성간 정거장 개발 지휘
  • 1977–1996에네르기아 제1부총설계자와 과학 고문

그리고리 표도로비치 그리고렌코

Григорий Фёдорович Григоренко

SMERSH 라디오 게임에서 KGB 제2총국까지 40년 방첩의 설계자

그리고렌코가 직접 조직하고 수행한 SMERSH 라디오 게임은 181건에 달했다 — '자가드카(수수께끼)', '투만(안개)' 등 암호명으로 압베어와 체펠린을 교란하며 독일군 사령부에 허위 정보를 주입했다.

그리고리 그리고렌코는 소련 방첩 기관의 중추를 40년 넘게 떠받친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SMERSH에서 181건의 라디오 게임을 직접 수행하며 압베어와 체펠린을 상대로 기만 작전을 지휘했고, 이후 MGB와 KGB로 이어지는 방첩 부서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부터 1983년까지 KGB 제2총국장을 맡아 CIA와 서방 정보기관의 심층 침투 요원들을 연쇄 적발하는 체계를 구축했으며, 1978년부터는 KGB 부의장을 겸임하며 유리 안드로포프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의 방첩 시스템은 외국 정보기관의 모스크바 거점을 수년간 마비시켰고,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방첩의 방법론적 토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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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2NKVD 특별부 작전장교, 남서전선 및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
  • 1943–1946SMERSH 3과 선임작전장교, 181건의 라디오 게임 수행
  • 1954–1956헝가리 주재 KGB 대표부 제1부대표
  • 1962–1969KGB 제1총국 대외방첩국장
  • 1970–1983KGB 제2총국장
  • 1978–1983KGB 부의장 (제2총국장 겸임)
  • 1983–1989소련 일반기계제작부 차관

비탈리 바실리예비치 페도르추크

Виталий Васильевич Федорчук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18–2008 ↓ 전보 1982

안드로포프 뒤의 짧은 KGB 의장

1982년 12월 내무장관으로 부임한 페도르추크는 첫 확대 합동회의를 내무부 청사가 아닌 루뱐카의 KGB 건물에서 소집했다. 한 장성은 훗날 '그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우크라이나 빈농 가정 출신의 군 방첩 장교로, 할힌골 전투와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실전을 겪은 뒤 SMERSH와 KGB 군 방첩 계통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부터 12년간 우크라이나 KGB 의장으로 공화국 보안기관을 이끌며 브레즈네프 후기 내내 자리를 지켰고,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소련 KGB 의장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7개월 만에 내무장관으로 이동해 약 9만 명의 경찰 간부를 부패 혐의로 해임하는 숙정을 단행했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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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70s우크라이나와 군 방첩 계통에서 장기 보안 경력 축적
  • 1970–1982우크라이나 KGB 의장, 공화국 보안기관을 지휘
  • 1982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KGB 의장으로 승진
  • 1982–1986곧 내무장관으로 이동, 안드로포프-체르넨코기의 규율 캠페인에 관여
  • 1986고르바초프 집권 뒤 해임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

Александр Исаевич Солженицын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918–2008 → 추방 1974

수용소 군도를 세계에 증언한 죄수 Щ-854

1945년 2월 9일, 동프로이센 전선. 적 포대를 탐지해 훈장을 받은 포병 대위가 부대 본부에서 체포됐다. 전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한(Пахан)'이라는 은어로 스탈린을 조롱한 죄였다. 군복의 계급장이 뜯겨나갔고, 루뱐카로 향하는 호송열차에 올랐다.

포병 대위로 참전 중 사신(私信)에서 스탈린을 비꼬았다가 8년형을 받았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로 해빙의 상징이 되었고, 『수용소군도』로 노벨상과 국외 추방(1974)을 함께 얻었다. 1994년 귀국해 러시아에서 죽었다. 자신이 증언한 체제보다 17년을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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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53사신 검열로 체포, 수용소 8년(마르피노·에키바스투즈)
  • 1953–56카자흐스탄 유형, 교사 생활
  • 1962『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흐루쇼프의 재가로 출간
  • 1970노벨문학상
  • 1973–74『수용소군도』 파리 출간, 국외 추방
  • 1976–94미국 버몬트 은둔, 1994년 귀국

티모페이 보리소비치 구젠코

Тимофей Борисович Гуженко

원자력 쇄빙선대로 북극을 정복한 해운장관

1977년 8월 9일, 해운장관은 무르만스크 부두에서 아르크티카호에 직접 올랐다. 실패하면 모든 책임은 자신의 몫이었다. 8일 뒤 인류 최초로 수상 선박이 북극점에 닿았다.

오룔 현의 농촌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전시 무르만스크 항에서 북극 호송선단 하역을 책임지며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사할린 해운회사를 흑자로 전환시켜 37세에 소련 최연소 해운회사장이 되었고, 1970년 해운장관에 올랐다. 16년 재임 동안 적자 부문이던 해운부를 80여 개 부처 중 외화 수입 5위의 핵심 산업으로 탈바꿈시켰으며, 레닌호 1척에 불과하던 원자력 쇄빙선대를 8척 체제로 확장했다. 1977년 직접 원자력 쇄빙선 아르크티카호에 승선해 세계 최초로 수상 선박의 북극점 도달을 지휘, 사회주의 노동영웅이 되었다. 1986년 여객선 아드미랄 나히모프호 침몰 참사로 경질되었으나, 그가 구축한 북극 항로와 쇄빙선대는 오늘날 러시아 북극 전략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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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9무르만스크 항에서 교대 기사로 시작, 기계화 부서장·항만 주임기사로 승진하며 전시 북극 호송선단 하역 복구 책임
  • 1951–1955홀름스크 항만장 → 코르사코프 항만장 → 사할린 해운회사장, 적자 회사를 흑자로 전환
  • 1955–196037세, 소련 최연소 해운회사장으로 사할린 해운회사 경영 정상화
  • 1960–1962해운부 인사국장
  • 1962–1966CPSU 중앙위원회 교통·통신부 부장
  • 1966–1970해운부 제1차관
  • 1970–1986해운장관: 적자 부문을 외화 수입 5위로 전환, 원자력 쇄빙선대 1척→8척으로 확장, 연중 북극 항로 개설
  • 1977아르크티카호 북극점 원정 직접 지휘, 사회주의 노동영웅 수훈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 데멘체프

Викт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Деменцев

국가재정의 경고자

1985년 4월 4일, 데멘체프는 보드카 생산 축소가 1986년 40억 루블, 1990년에는 150억에서 160억 루블의 예산 손실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빅토르 데멘체프는 지방 재정기관에서 출발해 소련 재무 행정의 고위 관료로 성장한 경제 관리자였다. 그는 알코올 판매 수입에 기대던 국가재정의 구조적 긴장을 드러내며,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의 급격한 생산 축소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경고는 재정 수입 감소뿐 아니라 밀주와 설탕 부족이라는 정책 부작용을 함께 계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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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9치타·캄차카 지역 회계·재정 담당
  • 1944–1947캄차카주 통제·감사기관 감사관
  • 1949–1962고르노알타이·야로슬라블주 재정 책임자, 집행위 부의장
  • 1962–1965러시아공화국 재무부 국가수입관리국장·차관
  • 1965–1973소련 재무부 차관
  • 1973–1986소련 재무부 제1차관
  • 1986–1987소련 국가은행 이사회 의장

예브게니 게오르기예비치 페펠랴예프

Евгений Георгиевич Пепеля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18–2013 ○ 자연사

미그 앨리의 소련 에이스

“열두 번은 확신합니다. 백 퍼센트 확실합니다. 부풀리면 열다섯 번일지도 모릅니다.”

예브게니 페펠랴예프는 소련의 전투기 조종사이자 연대 지휘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극동 전선에서 쌓은 경험을 한국전쟁의 제트 공중전에 투입했다. 그는 196전투비행연대를 이끌어 만주 기지에서 유엔군 항공기와 싸웠고, 공식 19승으로 한국전쟁의 소련 측 최고 수준 에이스가 되었다. 승리 집계는 자료에 따라 19승에서 23승까지 갈리며, 그는 일부 격추를 편대원에게 돌렸다고 전해진다. 1952년 소련 영웅 칭호를 받은 뒤에도 방공 지휘와 연구 업무를 맡았고 1973년 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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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제8군사비행학교 졸업, 극동 배치
  • 1943제162전투비행연대에서 벨로루시 전선 훈련·작전 비행
  • 1945제300전투비행연대 부연대장, 대일전 참전
  • 1949–1952제196전투비행연대장
  • 1951–1952한국전쟁 참전, 미그-15 편대 지휘
  • 1958–1960제133전투항공사단장
  • 1960–1973제78방공전투항공군단 항공대장, 중앙지휘소 근무 후 예편

이반 이바노비치 보듈

Иван Иванович Бодюл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몰도바 1918–2013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측근으로 20년 가까이 몰도바를 통치한 공화국 제1서기

모스크바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작가 이온 드루처에 대해, 보듈은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가 고향에 돌아오면 첫 번째 가로등에 목을 매달아주겠다."

몰도바 공산당 제1서기로 20년 가까이 재임한, 소련 공화국 지도자 중 최장기 집권자 중 하나다. 브레즈네프의 측근으로서 농업 공화국이었던 몰도바에 기계제조·전자·식품가공 등 신산업을 도입하고 유럽 최대 규모의 과수원과 축산단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어 억제, 교회 폐쇄 등 강압적 러시아화를 추진했으며, 작가 이온 드루처에게 '고향에 돌아오면 첫 가로등에 매달겠다'고 위협했다. 1980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전임되었고, 퇴임 후인 2003년 몰도바 공화국 훈장 수여는 작가 8명의 훈장 반납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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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콜호즈 수석 농업기사
  • 1942–1946붉은군대 수의장교 (제127근위포병연대 → 제59근위소총사단 → 제10근위소총군단)
  • 1946–1951몰도바 SSR 각료회의 농업 담당 보좌관·감사관
  • 1951–1956키시뇨프·볼론티롭카·올라네슈티 지역당위 제1서기
  • 1956–1959CPSU 중앙위 고등당학교 수료 후 중앙위 조직당업무부 지도원
  • 1959–1961몰도바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1–1980몰도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0–1985소비에트연방 각료회의 부의장

이반 파블로비치 카자네츠

Иван Павлович Казанец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18–2013 ○ 자연사

우크라이나 총리에서 소련 철강부 장관으로: 20년간 소련 철강을 지배한 드네프르 출신 기술관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카자네츠 동지. 미국보다 더 많이 제련한다고 자랑하지만, 금속 품질은 어떻습니까? 생산된 톤당 40%만 제품이 되고 나머지는 슬래그와 부스러기로 나갑니다!» — 1972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브레즈네프의 질책.

드네프르 강 도선사 집안 출신의 우크라이나인 기술관료로, 전기기사로 시작해 쿠즈네츠크 제철소와 예나키예베 제철소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53년 흐루쇼프의 발탁으로 35세에 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가 되었고, 1960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1963–1965년 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다. 1965년 코시긴 개혁으로 소련 철강부가 재설립되자 초대 장관에 임명되어 20년간 재임하며 소련을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으로 올려놓았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중앙위원을 지냈고, 1985년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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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4쿠즈네츠크 제철소 전기기사·기사·변전소 구역장, 시베리아 야금연구소 졸업
  • 1944–1952예나키예베 제철소 압연공장 교대장·당위 부비서·공장장, 1950년 당조직자
  • 1952–1953예나키예베 시당위 제1서기 → 마케예프카 시당위 제1서기
  • 1953–1960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3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3–1965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65–1985소련 철강부 장관
  • 1961–1986CPSU 중앙위원 (1956–1961 후보위원)

보리스 예브게니예비치 파톤

Борис Евгеньевич Пато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8–2020 ○ 자연사

58년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를 이끈 전기용접의 아버지

“과학은 내 삶의 본질이며, 아카데미는 내 직장이 아니라 나의 유일한 가족입니다.”

보리스 파톤은 소련과 우크라이나의 금속공학자로, 1962년부터 2020년까지 58년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전기용접의 선구자로서 1950년대 초 전기슬래그 용접을 개발해 무제한 두께의 금속 접합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소련 중공업과 조선업을 혁신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고리키의 크라스노예 소르모보 공장에서 탱크 생산 증대에 기여했다. 우주 용접 기술을 주도해 우주비행사들이 궤도에서 용접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으며, 전기용접을 의학에 접목해 생체 조직 용접법을 개척했다.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자 두 차례 사회주의 노동영웅, CPSU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체르노빌 원전의 키예프 인근 건설을 반대하며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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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크라스노예 소르모보 공장 전기기사, 고리키
  • 1942–1953파톤 전기용접연구소 연구원 → 부소장
  • 1953–2020파톤 전기용접연구소 소장
  • 1962–2020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원장
  • 1962–1989소련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연방회의 부의장 1966–1989)
  • 1966–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점령에 맞선 공산주의 무장투쟁의 선구자

“티티의 원수를 갚았다!”

피에르 조르주는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레지스탕스 전사로,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으로 싸우며 일찍부터 반파시즘 무장투쟁을 경험했다. 1941년 8월 21일 파리 바르베 지하철역에서 알퐁스 모제르를 사살한 행동은 프랑스 공산당의 무장 저항을 가시화했지만, 독일 점령군의 인질 처형과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도 격화시켰다. 그는 프레도, 뒤에는 파비앵 대령이라는 이름으로 지하 전투원과 마키를 조직했고, 파리 해방 뒤에는 파비앵 부대를 이끌고 동부 전선으로 향했다. 1944년 지뢰 폭발로 사망하면서, 그의 생애는 점령에 맞선 결단과 그에 뒤따른 가혹한 보복의 긴장을 함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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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전투원
  • 1939–1940프랑스 공산당 청년운동 간부
  • 1940–1941점령 프랑스의 지하 공산주의 조직가
  • 1941–1942조직특별부대 군사위원
  • 1942–1943두 지역 FTP 마키 조직자
  • 1943–1944프랑스 전역 FTP 마키 지휘관
  • 1944파리 해방 전후 FTP·FFI 지휘관
  • 1944파비앵 부대 지휘관, 동부 전선 전사
  • 1941.08.21바르베 지하철역에서 독일 해군 장교 알퐁스 모제르 사살
  • 1944.12.27알자스 합셈에서 지뢰 폭발로 사망

올레그 블라디미로비치 펜콥스키

Олег Владимирович Пеньковский

서방에 5천여 건의 소련 미사일 기밀을 넘겨 쿠바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허세를 벗긴 GRU 대령

런던의 안전가옥에서 펜콥스키는 미국과 영국 육군 대령 군복을 차례로 입어보고 사진을 찍으며 '언젠가 이 제복을 진짜로 입게 될 날'을 말했다.

GRU 대령으로 근무하던 중 흐루쇼프 체제에 환멸을 느껴 1961년 MI6와 CIA에 자진 접촉했다. 18개월간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태, 쿠바 미사일 기지 배치도, 군사교리 등 5천여 건의 기밀문서를 서방에 넘겼다. 그의 정보는 소련의 미사일 전력이 흐루쇼프의 위세와 달리 서방에 크게 뒤처져 있음을 케네디에게 확신시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이 강경하게 대응할 근거가 되었다. 1962년 10월 KGB에 체포되어 이듬해 공개재판 끝에 총살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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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제2키예프 포병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39–1945폴란드 침공·겨울전쟁·독소전 참전, 두 차례 부상,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포병사령관 부관
  • 1945–194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30세에 대령 진급
  • 1949–1953군사외교아카데미 졸업, GRU 제4(중동)국 배속
  • 1955–1956주튀르키예 소련대사관 무관보 겸 GRU 거주자
  • 1960–1962국가과학기술위원회 대외관계국 부국장으로 위장 근무하며 GRU 활동
  • 1961.4–1962.10MI6·CIA 이중첩보원, 런던·파리·모스크바에서 5천여 건 기밀 전달
  • 1963.5.11–16반역죄 사형 선고, 5일 뒤 집행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쿠노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кунов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서 연방회의 의장까지, 브레즈네프 체제의 공보 엘리트이자 최고 입법기관의 얼굴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가 권력을 잡자, 톨쿠노프는 한때 중앙위에서 함께 일했던 그에게 신문 복귀를 요청했다. 안드로포프는 『프라우다』를 제안했지만 톨쿠노프는 『이즈베스티야』를 택했다.

철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38년 『프라우다』 기자로 출발한 소련의 언론인·국가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 특파원으로 여러 전선을 누볐고, 1960년대 초부터 CPSU 중앙위원회 사회주의국가연락부에서 근무하며 당의 대외 선전 라인을 관리했다. 1965년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 취임해 11년간 신문을 이끌었고, 1976년 노보스티 통신사 사장으로 전출된 뒤 1983년 안드로포프 집권과 함께 『이즈베스티야』로 복귀했다. 1984년 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1988년까지 재임하며 입법부의 제도적 수장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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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프라우다』 정보부 기자 → 문예담당, 주필 보좌관
  • 1941–1944전쟁 특파원 (칼리닌·북서·브랸스크·제4우크라이나·제2벨로루시 전선)
  • 1946–1947, 1951–1957『프라우다』 근무
  • 1957–1965CPSU 중앙위 기구 → 사회주의국가 공산·노동자당 연락부 차장·제1차장
  • 1965–1976『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76–1983노보스티 통신사(APN) 이사회 의장
  • 1983–1984『이즈베스티야』 편집장 (재임)
  • 1984–1988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