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모스크바 협상에서 그는 당의 목표를 “민주적 사회주의, 자치, 의회 민주주의, 경제 민주주의”라고 제시했다.
니에르시 레죄는 헝가리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권 개혁 정치가로, 계획경제를 사회적 통제와 경제적 효율성의 결합으로 바꾸려 했다. 그는 1968년 신경제메커니즘을 이끈 뒤 정통파의 반발로 영향력을 잃었지만,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안고 1989년 정치 전환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1989년 6월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집단 지도체제를 이끌었고, 10월 창당된 헝가리 사회당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그의 경력은 사회주의를 민주화하고 시장기제를 도입하려 한 시도가 당의 해체와 다당제 전환으로 이어진 역사적 긴장을 보여 준다.
1917년 10월에 일어난 것은 대중의 지지 없는 고전적 현대 쿠데타였다... 거짓 구호 아래 현대 국가의 신경 중추를 은밀히 장악한 것이었다.
폴란드 태생의 미국 역사가로, 소련학 '전체주의 학파'의 지적 설계자였다. 그의 2권짜리 대작은 10월 혁명이 대중 봉기가 아니라 권력에 굶주린 소수 지식인들의 쿠데타였으며 볼셰비키 통치는 처음부터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팀B(1976) 책임자와 레이건 행정부 NSC 소련·동유럽 국장(1981~82)을 지내며 자신의 학문을 대소 강경 정책으로 옮겼고, 이는 훗날 소련 붕괴를 앞당긴 요인으로 평가된다.
마흐무트 가레예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참모 업무를 바탕으로 소련군의 작전·교육 체계를 다듬은 군사이론가이자 고위 지휘관이었다. 그는 총참모부 과학·작전 부문에서 군사과학과 훈련을 담당하며 전쟁을 분석하는 실천적 방법을 발전시켰다. 1989년 2월 소련군 철수 뒤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의 수석 군사고문으로 남아, 소련의 원조가 이어지는 동안 정부군 작전과 군사 자문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회고록과 연구서에서 그는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의 전쟁 경험을 군사적·정치적 교훈으로 해석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소련의 마지막 개혁 검찰총장, 스탈린 탄압 피해자 재활을 감독한 법률가
1988년 검찰총장 취임 후 수하레프는 이렇게 말했다: "검사는 민중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가 지휘한 검찰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수십만 명의 정치적 탄압 피해자에 대한 재활 심사를 추진했다.
보로네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항공 공장 선반공으로 일하다 18세에 전선으로 나갔다. 통신장교로 모스크바에서 비스와 강까지 진격하며 4개의 전투 훈장을 받고, 1944년 폴란드 나레프 강 도하 작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전역 후 콤소몰과 당 중앙위원회 기구에서 사법·검찰 분야를 담당하며 법률가로 성장해, 1970년 재창설된 소련 법무부의 제1차관으로 발탁되었다. 1988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어 스탈린 시대 정치 탄압 피해자들의 대대적인 법적 재활을 추진했고, 1990년 퇴임 후에도 러시아 검찰 산하 연구소를 이끌며 법치 강화와 형사사법 개혁에 평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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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4제69소총병사단 통신소대장·중대장·연대통신주임, 대위
1947–1950콤소몰 보로네시 철도지구위 서기, 보로네시 주위원회 부장
1950–1959콤소몰 중앙위원회 국제부 지도원·부장·국제부장
1959–1966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지도원·RSFSR 담당 부부장
1966–1970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검찰·법원·사법 부문장
1970–1984소련 법무부 제1차관
1984–1988러시아 SFSR 법무장관
1988.2–1988.5소련 검찰 제1부총장
1988–1990소련 검찰총장
1991–2006러시아 연방 검찰청 산하 합법성 및 법질서 강화 연구소 부소장·소장·주임연구원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에스토니아인 볼셰비키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어가 모어였고 에스토니아어는 짙은 억양으로만 구사했다. 1978년 28년간 에스토니아를 이끈 요하네스 케빈의 후임으로 제1서기가 되어 극단적인 러시아화를 추진했고, 1979년에는 암살 미수 사건을 겪었다. 1987년 히르베파르크 집회 후 당 기구를 총동원해 '반소비에트 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대대적인 반격을 지시했으나, 이듬해 6월 모스크바에 의해 경질되어 바이노 밸랴스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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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톰스크(오늘날 옴스크) 교통대학 졸업, 전연방공산당 입당, 에스토니아 SSR 철도 기술자로 근무
1972년 파판치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마차 대열을 홀로 앞서 달리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이 낭만적인 캐릭터는 제게 꼭 맞습니다"라고 말해 닉슨을 격노시켰다.
나치 독일을 피해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난민 출신으로, 하버드대에서 현실주의 외교 이론을 정립하고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소련과의 데탕트를 주도하며 '연계' 전략을 고안,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와의 비밀 배후채널을 통해 1972년 SALT I과 ABM 조약을 성사시키는 결정적 외교를 펼쳤다. 중국 비밀 방문으로 미중 화해의 문을 열고 파리 평화협정을 중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캄보디아 폭격과 제3세계 개입으로 전쟁범죄 논란 역시 끌어안은 복합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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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3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 시티칼리지에서 회계학 수학 후 미군 입대
1943–194984보병사단 정보장교로 유럽 전선 참전, 방첩대 요원으로 게슈타포 색출 및 탈나치화 임무
1950–1969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국방연구프로그램 소장; 록펠러·닉슨 캠페인 외교 고문
1969–1975국가안보보좌관: 데탕트·대중국 개방·SALT I 협상 주도, 도브리닌과의 배후채널 운영
1971–1972중국 비밀 방문으로 마오쩌둥·저우언라이와 회담, 닉슨 방중 길을 열다
1973–1977국무장관: 파리 평화협정, 노벨 평화상(1973), 중동 셔틀 외교; 칠레 쿠데타 연루
기 모케는 파리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 청년 활동가로, 아버지의 투옥 뒤 지하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40년 열여섯 살에 체포되어 프랑스 당국의 수감과 행정구금을 거쳤고, 1941년 샤토브리앙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독일 점령군은 낭트의 카를 호츠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인질로 선정해 1941년 10월 22일 처형했으며, 그의 죽음은 점령과 협력 체제가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부과한 대가를 상징했다.
“관념론은 순진한 학생이 유령을 상상한 기본적인 실수가 아니다. 관념론은 이상적 형식의 객관성 — 개인의 의지와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 문화의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 — 에 대한 사변적 해석이다.” — 『이상적인 것의 변증법』, 1976년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유를 남긴 철학자. 『자본』의 논리에서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정식화했고, '이상적인 것'이 개별 뇌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언어·기호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인간 활동의 형식임을 논증하여 격렬한 학술 논쟁을 촉발했다. 빌헬름 다비도프의 발달교육 이론과 메시체랴코프의 자고르스크 농맹아 실험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으며, 주저 『변증법적 논리』(1974)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인식론에서 문화철학으로 확장했다.
말년에 리흐타는 예측 연구팀을 만들려 했으며, 자신의 말로는 "우리를 정치적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회를 공식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과학기술혁명' 개념을 정립하고 60인의 공동연구를 이끌어 『갈림길에 선 문명』(1966)을 출간했다. 이 저작은 중앙집권적 계획은 과학기술 시대에 낡은 방식이라 주장하며 프라하의 봄 행동강령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그가 만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1968년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이후 리흐타는 후사크의 '정상화'에 순응하여 철학·사회학 연구소장으로 동료 학자들의 숙청을 주도했고, 1977년에는 헌장 77과 얀 파토치카를 공격하는 언론 캠페인에 가담했다.
1955년, 코롤료프가 우랄 지부 부수석설계자 자리를 제안하자 서른 살 마케예프는 "수석설계자로만 가겠다. 대리는 안 한다"고 답했다. 코롤료프는 그 배짱에 놀랐지만, 결국 그를 SKB-385 수석설계자로 임명했다.
항공기 공장의 제도공으로 시작해 코롤료프의 눈에 띄어 31세에 SKB-385 수석설계자가 된 로켓 기술자. 30년간 단 한 조직을 이끌며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3세대를 개발: 수중발사, 공장연료주입, 대륙간사거리, MIRV 탑재를 차례로 실현하며 냉전기 해양핵억지력의 전략적 균형을 완성했다. 서방 정보기관은 그의 정체를 몰라 '우랄의 용'이라 불렀고, 그가 만든 R-17은 NATO 코드명 '스커드'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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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44모스크바 및 카잔 항공기 공장에서 제도공·설계사로 Pe-2 생산 참여
1947–55OKB-1/NII-88 주임설계사: R-11 및 최초 해군탄도미사일 R-11FM 개발
1955–85SKB-385 수석·총괄설계자: SLBM 3세대(R-21, R-27, R-29, R-29R, R-39, R-29RM) 개발
“100루블을 가지지 말고, 아주베이처럼 결혼하라” — 1950년대 모스크바를 떠돌던 이 말은 그의 출세가 흐루쇼프의 사위라는 지위와 얼마나 깊이 얽혀 있었는지를 웅변한다.
알렉세이 아주베이는 흐루쇼프 해빙기 소련 저널리즘의 얼굴이었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으로서 관료적 기관지를 생동감 있는 일간지로 탈바꿈시켰고 발행부수를 160만 부에서 600만 부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1959년 소련 언론인 연맹 창설을 주도했고, 1960년 『미국과 정면으로』로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켰다. 1963년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의 금지된 시 「저승의 묘르킨」을 이즈베스티야에 과감히 게재한 판단은 그가 단순한 흐루쇼프의 사위 이상의 언론인임을 증명했다.
「참회」가 봉쇄되었을 때 아불라제는 필름이 파기될까 두려워 유일한 비디오 사본을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했다.
그루지야 출신의 소련 영화감독. 1955년 레조 치헤이제와 공동 연출한 데뷔작 「마그다나의 당나귀」로 칸 단편상을 수상했고, 「기도」(1967)·「소망의 나무」(1976)·「참회」(1984)로 이어지는 삼부작을 완성했다. 1984년 완성 후 2년간 봉쇄되었던 「참회」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 속에서 공개되어 스탈린 시기 테러를 우화적으로 고발한 최초의 소련 영화가 되었고, 그 공개 자체가 글라스노스트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문화적 신호탄이었다. 1987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을 지냈다.
1987년 바이코누르. 고르바초프가 위성들을 보며 물었다. "이걸 다 시베리아에서 합니까?" 레셰트뇨프가 답했다. "시베리아에서 합니다. 하지만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그리고 200개 도시와 함께 일합니다."
코롤료프의 부수석 설계자로 출발해 1961년 시베리아 밀폐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26에서 독자 설계국 OKB-10을 창립한 우주공학자. 몰니야, 스트렐라, 라두가, 에크란 등 통신·방송 위성 계열을 차례로 완성했고, 측지·구난·항법 위성으로 영역을 넓혀 1982년에는 GLONASS 전지구 위성항법 시스템을 궤도에 올렸다. 그가 이끈 NPO PM(응용역학 과학생산연합)은 30여 종의 우주 시스템과 1,000기 이상의 위성을 제작해 소련 전체 위성의 3분의 2를 책임졌으며, 오늘날 ISS 레셰트뇨프 사로 이어져 러시아 위성산업의 중추로 남아 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수상자이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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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42모스크바 항공대학(MAI) 입학, 전쟁으로 알마아타 피난
1942–46세르푸호프 항공정비사 학교 수료, 제26예비전투항공연대 정비사 복무
1950MAI 우등 졸업, 티호미로프 지도로 로켓 주제 졸업논문
1950–57OKB-1(코롤료프) 기술사 → 선임기술사 → R-11 미사일 수석설계자
1958–59OKB-1 부수석설계자, CPSU 입당(1951)
1959–61OKB-1 동부지부장(크라스노야르스크-26), 얀겔로부터 경량발사체 인수
1961–67OKB-10 수석설계자, 코스모스 발사체·스트렐라 위성 첫 발사(1964)
1967–77KB PM(응용역학 설계국) 총설계자, 몰니야·라두가 위성 계열 개발
1977–96NPO PM 총설계자 겸 총괄국장, GLONASS(1982)·에크란·고리존트·루치 등 완성
1980년 8월 22일, 그는 파업 요구안의 서면 접수를 인정하며 정부와 그단스크 사업장간 파업위원회의 공식 협상을 열었다.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산당 관료이자 경제 관료로, 농업 정책과 국가 계획을 담당했다. 1980년 노동자 파업이 확산되자 그는 정부의 협상 대표로 나서 루블린의 7월 파업을 정리하고, 그단스크에서는 독립 노조 인정으로 이어진 합의를 체결했다. 그의 경력은 사회적 요구를 제한된 양보로 관리하려 한 체제가 결국 공개적인 노동자 대표성과 마주한 과정을 보여 준다.
「고르바초프도, 나도, 우리 모두 이중사고자였다. 머릿속에서 진실과 선전을 끊임없이 저울질해야 했다. 반체제냐 굴종이냐, 그게 선택지였다」
바쿠 출신 아르메니아계 정치학자·법학박사. 소련 정치학회를 창립해 17년간 이끌며 사회주의 민주주의 이론을 개척했고, 소비에트 사회 내 이익집단의 다원성을 인정한 초기 이론가 중 한 명이었다. 고르바초프 보좌관으로서 당 독점 폐지·경선 도입·대통령제 전환의 헌법개혁을 설계했으며, 퇴임 후 회고록 『자유의 대가』를 집필하고 SF 작가 '게오르기 샤흐'로도 활동했다.
1985년 가스공업 장관에서 석유공업 장관으로 전보되자,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내 영혼은 가스맨이야. 어쩔 수 없지."
불가리아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대조국전쟁 정찰병으로 참전, 전후 크라스노다르 콜호스 의장을 지냈다. 아제르바이잔 공업대학 졸업 후 크라스노다르 유전 기술자로 출발해 1981년 소련 가스공업 장관에 올랐다. 재임 중 가스 생산량을 세 배로 끌어올리고 우렌고이-포마리-우주고로드 횡단대륙 가스관(4,450km)을 완공해 서유럽까지 잇는 통합가스공급체계를 완성했다. 1985년 석유공업 장관으로 옮겨 1988년 소련 사상 최대 원유 생산량(연 6억 2,400만 톤)을 기록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단일 국가 최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퇴임 후 가스프롬 이사와 텐더위원장으로 시장경제 이행기의 러시아 가스 산업을 이끌었다.
1958년 콤소몰 40주년 대회에서 파스테르나크를 두고 “돼지는 자신이 먹는 곳에 더럽히지 않는다. 파스테르나크는 돼지도 하지 않을 짓을 했다”라고 연설했다. 이 발언으로 파스테르나크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다.
콤소몰에서 두각을 드러낸 셸레핀의 측근으로, 37세에 소련 사상 최연소 KGB 의장이 되었다. 1958년 파스테르나크를 '돼지'에 비유한 연설로 악명을 얻었고, 1964년 흐루쇼프 축출에서 보안·통신·경호를 장악해 쿠데타의 물리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약화시키며 우크라이나 직책으로 밀려났고, 결국 변방의 대중교육 단체에서 경력을 마감했다.
1943년 7월 17일, 첫 전투에서 기관총 소대를 이끌고 적진에 뛰어들어 백병전 끝에 고지를 탈취한 뒤 7차례의 역습을 막아냈다.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자 가족에게는 전사 통지서가 발송되었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기관총 중대를 지휘하며 세 차례 부상을 입고도 카르파티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종전을 함께한 보병 장교로, 전후 두 개의 참모 아카데미를 금메달로 졸업하고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제40군의 작전을 관할했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소련 핵전력 최전성기인 1,400기 이상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체제를 지휘했고, 소련 붕괴 후에도 전략억지군 사령관으로서 CIS 통합 지휘 체계의 이행을 맡았다. 말년까지 한 번도 당과 군을 떠나지 않고 국가 붕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핵무기에 대한 민간 통제라는 헌법적 원칙을 지킨 군인이다.
그는 ‘Z’라는 이름으로 고르바초프가 공산주의의 모순을 넘지 못하리라 썼고, 훗날 그 글의 필자를 인정했다.
마틴 말리아는 러시아와 유럽의 지성사를 연구한 미국 역사가로, 버클리에서 러시아사 연구와 교육을 이끌었다. 그는 《소련의 비극》에서 레닌주의 사회주의의 자기완결적 설계가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함께 잠식해 소련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1990년에는 ‘Z’라는 필명으로 「스탈린 묘에 부쳐」를 발표해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공산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의 해석은 소련 붕괴를 설명하는 강력한 한 극을 이루었지만, 사회주의의 역사적 가능성을 이념 자체의 결함으로 환원한다는 논쟁도 낳았다.
1938년, 14세 소년 블라디미르 고보로프는 학교 친구와 함께 스페인 공화군에 입대하러 모스크바를 떠나 투압세 항구에서 스페인행 화물선에 몰래 올라탔다. 바다 한가운데서 발각되어 송환된 두 소년은 ‘국제여단’에 닿지도 못했다.
소련 원수 레오니트 고보로프의 아들로, 14세 때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러 가출했다가 배에서 발각된 이력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병 장교로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싸웠고, 전후 프룬제 사관학교와 참모대학을 금메달로 졸업하며 승진을 거듭해 1972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고 1977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1986년 소련 민방위 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대응을 지휘했으며, 민방위를 전시 중심 조직에서 평시 비상사태 대응 체제로 재편해 훗날 러시아 비상사태부의 토대를 닦았다.
1991년 6월 17일, 최고소비에트 비공개 회의에서 크류치코프는 개혁파 진영에 서방의 '영향력 공작'이 침투했다고 경고하며 내각에 비상대권을 부여하라는 요구에 동참했다. 두 달 뒤 그가 조직한 쿠데타는 사흘 만에 무너졌다.
1924년 2월 29일 차리친(훗날 스탈린그라드, 오늘날 볼고그라드)에서 태어났다. 1941~43년 스탈린그라드 포병 공장에서 일했고, 1949년 법학을 전공으로 졸업해 1946~51년 스탈린그라드 지역 검사로 일했다. 1955~59년 부다페스트 소련대사관 3등서기관으로 1956년 헝가리 사건을 겪었고, 1967년 안드로포프를 따라 KGB로 옮겨 1974~88년 제1총국장을 지냈다. 1988년 10월 1일 KGB 의장에 임명되어 1991년까지 재임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를 주도했으며, 8월 22일 체포되어 1994년 국가두마 사면으로 재판 없이 종결되었다. 2007년 11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옐친 회고록: KGB 국장이 '당과 우호 협력한다'고 하자 피로시코프가 '코르닐로프 장군, 일어서! 당 기관의 지도 아래 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1942년 18세에 자원입대하여 민스크·바르샤바 해방과 베를린 공방전을 거쳐 베를린 전승 퍼레이드에 참가한 전쟁 세대. 전후 알타이 지역에서 콤소몰과 당 간부로 올라 1968년 제2서기까지 지낸 뒤, 정치국의 결정으로 KGB에 배치되어 인사국장과 당위원회 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부의장직을 수행했다. 안드로포프·페도르추크·체브리코프·크류치코프 4대 의장 아래에서 거의 20년간 자리를 지킨 유례없는 장기 재임자로, KGB 인사정책과 구조 정비, 대테러 작전(알파 그룹 지휘·감독)을 총괄했으며 퇴역 후에는 FSB 재향군인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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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5자원입대, 316근위박격포연대에서 민스크·바르샤바·베를린 전투, 베를린 전승 퍼레이드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