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의 공과를 저울질한 연구자. 토지개혁과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과를 반혁명 진압의 처형, 대약진 후의 기아, 문화대혁명의 참상과 견주며 "나는 마오 개인을 천국으로 보낼지 지옥으로 보낼지보다 그의 사상의 장래 영향에 더 관심이 있다"고 했다.
미네소타 출신의 물리학도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뒤 정치학으로 옮겨 파리에서 가르쳤고, 런던 SOAS 현대중국연구소를 이끌었다. 1963년 『마오쩌둥의 정치사상』으로 마오의 사상을 원문에 근거해 체계적으로 분석한 첫 서구 연구자였으며, 마오 사상이 소련 마르크스주의의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중국의 조건에 맞춘 독자적 변형이라고 주장했다. 만년에는 하버드 페어뱅크센터에서 1912~1949년 마오의 저작을 원문 그대로 모은 『마오의 혁명 노정』을 편찬했다.
가장 널리 읽힌 작품은 1974년 『마스터 타모다』로, 거만하고 식민지적으로 물든 말쟁이 '타모다 선생'은 앙골라 문학에서 하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를 걱정하게 하는 것은 민중의 사회적 처지"라고 말했다.
필명 우안넹가 시투로 알려진 앙골라의 간호 보조원·민족주의자·작가. 1924년 8월 29일 이콜루 이 벵구 주 카롬보로카에서 태어났다. 1947년 딩게에서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을 조직하고 의료 보조원 자격을 취득했으며, 1957년부터 루안다 외곽에서 독립을 위한 비밀 활동을 벌이고 1958년 앙골라 해방군(ELA)에 들어갔다. 1959년 PIDE에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카보베르데 타라팔 수용소에 갇혔으며, 그곳에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1970년 가석방으로 MPLA에 복귀해 루안다 시 조직부를 이끌었고 1974년부터 1988년까지 중앙위원을 지냈다. 2014년 2월 13일 루안다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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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701942년부터 카테테-루안다에서 위생 요원으로 일했고, 1947년 간호 보조원 자격을 취득한 뒤 딩게·쿠이투·칼룸부·문구·카비리·봉 제주스 두 콴자와 벵겔라·루반구 병원의 보건소에서 근무했다. 1947년 딩게에서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을 조직했고, 1959년 PIDE에 체포되어 재판과 유죄 판결 후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카보베르데 타라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57–1958루안다 외곽에서 당시 태동하던 MPLA와 '에스팔랴 브라자스' 그룹과 연결된 전단 위원회를 통해 앙골라 독립을 위한 비밀 정치 활동을 벌였고, 1958년 앙골라 해방군(ELA)에 들어갔다.
1970–19881970년 가석방 후 MPLA에 복귀해 같은 해 루안다 시 조직부(DOM)를 이끌었고, 1974년 중앙위원이 되어 1988년까지 재임했으며 한때 당 지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독립 후 혁명평의회에 임명되었다.
1979–1983루안다 주 위원 1979–1980년, 보건부 장관 1980–1983년.
1983–2000s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동독 주재 앙골라 인민공화국 대사(동독에서는 정치학도 공부)를 역임했고, MPLA 소속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나이를 이유로 물러났다. 2009년에는 MPLA 소속 최고령 의원으로 보도되었다.
몰타에서 고르바초프와 냉전 종식을 선언했지만, 신중함이 거의 역사를 놓칠 뻔했던 미국 대통령
몰타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말했다. '우리는 항구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으며 동서 관계를 지속적 협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 의장과 제가 바로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미래입니다.'
조지 H. W.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해군 조종사에서 석유 사업가를 거쳐 미국 제41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CIA 국장·유엔 대사·중국 주재 대표를 두루 지낸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마지막 4년을 이끌었다. 1989년 취임 직후 대소 정책 재검토라는 '부시 휴지기'로 고르바초프를 조바심나게 했으나, 그해 12월 몰타 회담에서 두 정상은 냉전의 종식을 공동으로 확인했고, 이듬해 독일 통일을 지지하며 유럽의 새 질서를 다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는 다국적군을 조직해 걸프전으로 응수했으나, 불황 속에 '새로운 세금은 없다'는 공약을 깨면서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
사면을 받아들인 이유: "아니면 모스크바 거리의 아스팔트를 탱크로 망가뜨린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테니까."
1941년 열일곱에 나이를 속이고 자원입대해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싸우고 두 차례 부상했으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에 비밀 배치된 연대를 지휘했다.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 뒤 국방장관에 기용되었으나 핵 군축의 속도와 범위를 두고 고르바초프와 갈등했고, 1990년 4월 소련 최후의 원수로 진급했다. 아프가니스탄 철수와 일방 감군 50만을 집행했고,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합류해 모스크바에 전차를 투입했다. 옐친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군을 철수시켰으며, 체포되어 498일간 수감된 뒤 1994년 국가두마 사면으로 풀려났다. 2019년 리투아니아 법원이 1991년 1월 사건으로 궐석 중 10년형을 선고했고, 2020년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노릴스크 콤비나트 사장 시절, 국가 광물매장량 심의위원회의 결론을 기다리지 않고 탈나흐 광구 우안에 산업 건설을 강행했다. '노릴스크는 그 규모에 충격적이었습니다: 탄광, 지하 갱도, 거대한 노천광 두 개, 세 개의 공장 — 니켈, 코발트, 구리, 그리고 거대한 도시.' 광구 '마야크'는 1965년 첫 광석을 냈다.
야금기술자 출신으로 노릴스크 콤비나트 사장 시절 탈나흐 광상을 과감히 개발해 소련 니켈·백금 생산을 비약시켰고, 36세에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1972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된 뒤 16년간 중공업·에너지 부문을 총괄하며 서시베리아 유전 개발과 소련 연료-에너지 복합체의 골격을 설계했다. 정치국 후보위원(1982–1988)으로서 브레즈네프 체제 후기 경제정책의 실무를 관장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개시 3년 뒤인 1988년 전원 퇴진 속에 은퇴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모스크바 시의원·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95세까지 공적 생애를 이어갔다.
1978년 5월 폐쇄 재판의 최후 진술에서 그는 말했다: "이런 재판으로는 헬싱키 그룹의 문서가 증언하는 사회의 병폐와 결함을 없앨 수 없습니다."
입자가속기 물리학자에서 소련 최초의 인권감시 조직을 세운 반체제 운동가로 선 인물. 1956년 당 회의에서 스탈린과 베리야를 '권력을 쥔 살인자'라 칭해 제명·해고당했고, 그로부터 20년 뒤인 1976년 5월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 이행을 감시하는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을 창립했다. 이는 소련 스스로 서명한 제3바스켓의 약속을 내부에서 뒤집어 맞대결시키는 일이었다. 1977년 2월 체포되어 7년 수용소와 5년 유형을 선고받고, 1986년 국적을 박탈당한 채 미국으로 추방되어 코넬대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정치적 패배의 이유를 묻자, 슈트로우갈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반체제 인사들을 과소평가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1970년 1월 올드르지흐 체르니크를 대신해 총리에 오른 뒤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끌었다. 법학을 전공하고 농업장관과 내무장관을 거친 당 관료였으며, 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를 지내다 소련 침공 후 후사크의 반개혁 노선에 합류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며 강경파 야케시 당 총서기와 충돌해 실각했고, 벨벳 혁명 후 KSČ에서 제명되었다. 말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치매로 중단된 채 2023년 98세로 사망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카터는 1980년 1월 국정연설에서 '페르시아만 지역에 대한 외부 세력의 지배 시도는 미합중국의 중대한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루지야 땅콩 농장에서 자란 침례교도로, 해군 핵잠수함 장교를 거쳐 남부의 인종차별 철폐를 공약한 '뉴사우스' 주지사가 되었다. 1976년 워싱턴 아웃사이더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파나마 운하 반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켰다. 1979년 6월 빈에서 브레즈네프와 SALT II에 서명하며 데탕트를 정점으로 이끌었으나, 같은 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조약 비준을 철회하고 카터 독트린을 선언하며 데탕트의 종막을 알렸다. 퇴임 후 카터 센터를 설립해 인권과 공중보건, 분쟁 중재에 헌신했으며,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전면 기습 공격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그것이 역(逆)진주만이 되어 전 세계의 눈에 미국의 이름을 더럽히리라는 점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가장 신임받는 정치 고문으로, 35세에 법무장관이 되어 조직범죄 소탕과 시민권 보호에 앞장섰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초기에는 침공을 선호했으나, 해상 봉쇄 측으로 전환한 뒤 위기 후반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의 비밀 회담에서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 약속을 전하며 타결의 열쇠가 되었다. 형의 암살 후 상원의원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와 빈곤 퇴치에 나섰고, 1968년 대선 경선 중 암살당했다.
자동유도장치가 죽었다. 벨랴예프는 좌석에 비스듬히 누워 보조르 항법기를 들여다보며 캡슐의 자세를 손으로 바로잡았다. 레오노프가 그의 몸을 붙잡고 있었다. 인류 최초의 완전 수동 재진입이었다.
태평양함대 전투조종사 출신으로, 1960년 최초의 우주비행사단에 선발되었을 때 서른넷의 최고령이자 최고 계급(소령)으로 단장이 되었다. 1965년 3월 18일 보스호트 2호의 선장으로서 알렉세이 레오노프의 인류 최초 우주유영을 지휘했고, 귀환 시 자동유도장치가 고장나자 누운 자세로 수동 재진입을 수행해 사상 처음으로 우주선을 사람 손으로 착륙시켰다. 2,000km나 빗나간 착륙 지점은 페름 밀림이었고,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 이틀을 영하의 숲속 캡슐에서 버텼다.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이후 소유스 계획 훈련을 지휘했으나, 위궤양 수술 후 복막염으로 1970년 마흔넷에 사망했다.
「감옥에서는 적의 움직임만 보인다. 감옥은 싸움을 하기에 가장 어려운 곳이다.」 — 《117일》(1965)
남아공 공산당과 ANC에서 활동한 백인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이자 언론인. 진보 매체 《가디언》 편집장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고발했고, 자유헌장 기초위원으로 참여했다. 반역죄 재판 피고를 거쳐 90일 구금법 첫 백인 여성 수감자가 되었고, 독방 체험을 《117일》로 남겼다. 망명 후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연구했으며, 모잠비크에서 아파르트헤이트 경찰의 소포 폭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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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위트워터스랜드 대학 사회과학 학사, 진보학생연맹 창립 참여
1946–1950s《가디언》 편집장 — 신문 금지 후 《클라리온》《뉴 에이지》 등으로 재창간
1966년 2월 재판에서 시냡스키는 무죄를 주장했다 — 소비에트 정치 재판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역사가 프레드 콜먼은 이 재판을 "현대 소비에트 반체제 운동의 탄생"이라 불렀다.
소비에트 문학학자, 비평가, 작가. 필로로기야 학위 후보(1952년)로,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연구원 및 모스크바 국립대·예술극장 학교 강사였다.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의 『노비 미르』에서 주요 비평가로 활약했으며, 당시 가장 자유주의적인 소비에트 합법 출판물이었다. 아브람 테르츠 필명으로 서방에 풍자 소설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1959)를 발표했다. 1966년 율리 다니엘과 함께 순수 창작물로만 유죄 판결을 받은 최초의 소비에트 작가가 되었고, 이 재판은 근대 소비에트 반체제 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6년간 수용소 복역 후 1973년 프랑스로 망명, 소르본에서 러시아 문학 교수로 재직하며 『신탁시스』를 창간했다.
1990년 가을, 동유럽 주둔 정보망이 하나둘 접히던 때 한 장교가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겁니까?'라고 묻자 미하일로프가 답했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무너지고 있을 뿐이다.'
전쟁 말기 블라디보스토크 보병학교 교관으로 군 경력을 시작해, 프룬제 사관학교와 총참모부 사관학교를 거쳐 사단장·군단 참모장·참모총장 보좌관을 두루 역임한 정통 군인이다. 1979년부터 베트남 인민군 총참모부 선임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었고, 귀국 후 총참모부 주작전총국장으로서 소련군의 작전기획을 총괄했다. 1987년 7월 GRU 국장에 임명되어 아프가니스탄 철군,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소련 해체라는 격변 속에서 군사첩보를 지휘했으며, 1990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소련 GRU의 마지막 정규 국장으로서 1991년 10월까지 재임한 후 건강상의 이유로 퇴역했다.
1979년 가을, 코르니옌코는 부하들에게 아프가니스탄 파병 반대 의견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로미코는 서명을 거부하고 중앙위원회에 올리지 않았다.
게오르기 코르니옌코는 40년 넘게 소련의 대미 외교를 실무에서 이끈 외교관으로,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 아래에서 제1차관(1977–1986)을 지내며 1970~80년대 미소 군축 협상의 핵심 의제를 설계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으로 냉전의 최전선에 섰으며, 이후 소련 외무부 미국국장으로서 닉슨·카터·레이건 행정부와의 모든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에 내부 반대했고, 1983년 KAL 007기 격추 사건 때는 진실 공개가 국제적 고립보다 낫다고 주장했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냉전 후에는 회고록 『냉전: 한 참여자의 증언』을 남겨 소련 외교정책 결정 과정의 내막을 기록했다.
"모든 부정의는 싸워야 한다, 비록 자기 마음속에서뿐일지라도 — 그리고 나는 싸웠다." — 『망명』, 안드레 블첵·로시 인디라와의 대화
식민지 감옥에서 첫 소설을 쓰고, 독립 후에는 레끄라(Lekra)에서 문화운동을 이끈 인도네시아 최대의 작가. 1965년 쿠데타 뒤 수하르토에 의해 부루 섬에 14년간 수용되었고, 연필조차 금지된 수용소에서 동료 수감자들에게 구술해 「인간의 대지」로 시작되는 부루 사부작을 완성했다. 평생 금서 작가로 살았으나, 그의 작품은 40개 언어로 번역되며 반식민·반권위주의 문학의 기념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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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947독립전쟁에 참전, 자카르타 주둔 — 반식민 선전 활동
1947–1949네덜란드군에 체포, 부킷두리 감옥에서 첫 소설 『도망자』 집필
1950–1964레끄라에서 활동, 『타락』 등 집필 — 소련·중국 문화교류 참여, 고리키·톨스토이 번역
1960중국계 차별을 비판한 『화교』로 수카르노 정권하 9개월 구금
1965–1979수하르토 쿠데타로 체포 — 부루 섬에서 정치범으로 14년 구금, 구술로 부루 사부작 완성
1989년 3월 정치국 회의에서 솔로비요프는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했다고 보고하며, 유권자들이 후보 개인이 아니라 페레스트로이카 자체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그라드 지하철 건설 현장에서 20년 넘게 일하며 기술 관료로 성장한 후 당 기구로 옮겨갔다. 1985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와 정치국 후보위원에 오르며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소련 제2도시를 책임졌다. 1989년 3월 소련 인민대표대회 선거에서 단독 출마했으나 유권자 60%가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충격적 패배를 당했으며,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한 이 사건은 당 권위 붕괴를 상징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과학은 단일한 살아 있는 유기체이지, 자율적 메커니즘들의 덩어리가 아니다. 불행히도 정치인도 과학계도 국내 과학을 구할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 소련 해체 직후, 1991년 12월 17일
시베리아에 계산수학의 중심지를 세우고 소련 과학행정의 정점에 오른 응용수학자다. 핵반응로 계산, 대기·해양 수치모델링, 면역반응의 수리모델을 개척했으며 분할법과 수반방정식 이론으로 계산수학의 기초를 다졌다. 1964년 노보시비르스크에 소련 최초의 대규모 수치모델링 센터인 계산센터를 설립했고, 1980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과학개혁을 주도했다. 소련 해체와 함께 마지막 총재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산수학 연구를 이끌었다.
그의 지휘 아래 보로네시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가 탄생했고, 로켓·우주·전략핵전력 통제체계에 들어갈 전자장비들이 잇따라 개발되었다.
소련 전자공업의 핵심 인물로, 1960년대 보로네시 반도체소자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를 개발·양산했으며, 1971년부터 1985년까지 전자공업부 제1차관으로서 군수·우주·전략핵무기 체계에 필요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기반을 확충했다.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장관으로 승진하여 몰락 직전까지 소련의 컴퓨터·반도체 산업을 총괄했으나, 서방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소련 해체와 함께 부처도 사라졌다.
원탁회의 합의문 서명 후 키슈차크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폴란드 국민이 승자다'라고 말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공산당 정치인으로, 1981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와 함께 계엄령을 기획·집행하며 연대노조 탄압을 주도했다. 1989년에는 정부 측 원탁회의 공동의장으로서 레흐 바웬사와 협상하여 연대노조 재합법화와 부분 자유선거의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연대가 압승한 후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연대의 거부로 불과 3주 만에 사임했고,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내각에서 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잠시 머문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
작전 직전 유리 안드로포프가 전화로 말했다. "우리도 원하지 않네. 하지만 해야만 하네." — 1979년 12월 27일, 아민 궁전 습격을 앞두고
소련의 대표적 정보장교로, 1956년 KGB에 입문한 후 동독·중국·미국에서 활동하며 냉전기 소련의 해외정보망을 구축했다. 1979년부터 1991년까지 KGB 제1총국 산하 불법정보국(S국)을 지휘하며 위장 신분으로 침투한 '불법 요원' 네트워크를 총괄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아민 대통령궁을 43분 만에 제압한 특수작전 '폭풍-333'을 지휘해 소련-아프간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1년 KGB 정예 특수부대 '빔펠'을 창설했다. 1962년 글리니케 다리에서 루돌프 아벨과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의 포로 교환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벨의 '독일인 사촌'으로 위장한 일화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