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갈색책』 3장 「판데르루버, 그 도구」 — 판데르루버와 동성애자 돌격대 지휘관들이라는 서사

인물마리뉘스 판데르루버, 에른스트 룀, 에트문트 하이네스, 헤르만 괴링, 요제프 괴벨스, 아돌프 히틀러,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빌헬름 프리크,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그레고어 슈트라서 용어갈색책 (1933), 독일 국회의사당 화재 (1933), 국회의사당 방화 재판 (1933), 돌격대 (SA), 독일 형법 제175조 사건독일 성개혁 운동과 나치의 파괴 (1897~1935), 나치 집권과 수권법

3 판데르루버, 그 도구

2월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는 밤, 독일 국회의사당의 회의장과 돔이 불길에 휩싸인다. 한 회랑에서 방화범 가운데 한 명인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붙잡힌다.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 “네덜란드 공산당 당원”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라디오, 전신, 전화, 신문과 통신사가 히틀러 정부의 명령을 받아 온 나라에 고함친다. “공산주의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 국회의사당 안에서 이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발견된 일은 히틀러 정부에게 형식상·법률상의 구실이 되었다. 독일 공산당(KPD)과 사회민주당(SPD)과 유대인에 대한 전대미문의 포그롬, 대량 체포, 단체 금지, 고문과 살해의 구실이. 이 일들로 말미암아 온 세계에서 히틀러 독일이라는 이름은 가장 잔혹한 야만이라는 개념과 하나로 묶였다. 이 판데르루버는 누구인가? 그는 어떻게 불타는 국회의사당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3.1 판데르루버의 젊은 시절

1909년 1월 13일, 행상인 프란시스퀴스 코르넬리스 판데르루버가 레이던 호적 사무소에 사내아이의 출생을 신고한다. 증인으로는 실업자 이사크 코르넷과 거리 청소부 헤라르뒤스 뵈르서가 선다.

아이는 마리뉘스라는 이름을 받는다. 어머니 페트로넬라 판한덜에게 프란시스퀴스 코르넬리스 판데르루버와의 결혼은 두 번째였다. 노르트브라반트의 부농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젊은 나이에 식민지군 하사관 판푀터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에게서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낳았다. 판푀터는 식민지에서 얻은 병으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의 미망인은 남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레이던에서 가게를 꾸리던 행상인 판데르루버와 혼인했다. 이 결혼에서 아들 셋이 태어났다. 마리뉘스는 페트로넬라 판한덜의 일곱째이자 막내였다.

판데르루버 부부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다. 남편은 일 때문에 며칠씩, 몇 주씩 근방 마을을 돌며 농민들에게 방물을 판다. 거래는 대개 여관이나 선술집에서 이루어진다. 술에 익숙해진다. 처음에는 거래를 성사시키는 수단일 뿐이던 술이 장사하는 시간 밖에서도 벗이 된다. 프란시스퀴스 코르넬리스 판데르루버는 술에 빠져든다.

코르넬리스 판데르루버는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장사로 번 돈은 대부분 선술집으로 흘러 들어간다. 살림 돈은 어쩌다, 그것도 조금밖에 내놓지 않는다. 아이들을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돈은 어머니가 벌어야 한다. 낮에는 레이던의 작은 가게 계산대 뒤에 서고, 저녁에는 집안 살림을 챙기고 깁고 꿰매고 바느질을 한다. 그녀는 늘 심한 천식에 시달린다. 의사는 기후가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한다. 가족은 브레다로, 나중에는 헤르토헨보스로 이사한다. 이사하고 얼마 안 되어 프란시스퀴스 코르넬리스 판데르루버는 가족을 떠난다. 그는 도르드레흐트에 자리를 잡고 작은 방물 가게를 여는데, 지금도 그 가게를 하고 있다.

페트로넬라 판한덜은 브레다에서, 나중에는 헤르토헨보스에서 작은 장사를 이어 간다. 아이들을 가르칠 시간은 그녀에게 없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아이들에게 신앙을 심어 주는 것뿐이다. 시골에서, 친정에서부터 경건한 생활에 길든 그녀는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소박한 믿음을 심어 주려 애쓴다. 소년 마리뉘스는 헤르토헨보스에서 포르후버 목사의 개신교 학교에 다닌다. 그는 글쓰기를 겨우겨우 배운다. 종교 수업에서는 손꼽히는 우등생이다. 그는 일요일마다 어머니와 형제들 곁에서 터벅터벅 교회로 간다.

판데르루버의 집에는 숨 막히는 분위기가 감돈다. 벽에 걸린 성화들은 경건과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운다. 어머니는 끼닛거리를 살 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헤르토헨보스의 작은 가게로는 아들 여섯을 먹여 살릴 수 없다. 아들들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노동자가 되는 것. 출신과 교육 때문에 그 결심은 쉽지 않다. 판데르루버의 집은 쓰라린 가난에 시달릴 때가 많지만, 그래도 장사꾼의 갈망과 희망이 가득한 소시민의 집이다. 굶주림이 젊은 판데르루버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로 몰아넣는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공장들을 메우고, 농업 노동자로서 농가들을 메우는 수십만 대군 속으로 섞여 든다. 섞여 들기는 하지만 동화되지는 않는다. 오늘날에도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의 형제나 이복형제 가운데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소시민적 환상의 벽에 부딪힌다.

3.2 어머니의 죽음

마리뉘스의 이부누나는 레이던에서 세탁 노동자 스나르데인의 아내로 산다. 1921년 4월 16일 그녀는 어머니가 곧 세상을 떠나리라는 소식을 받는다. 어머니는 마리뉘스가 이부누나의 집에서 자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마리뉘스는 열한 살 소년으로 레이던 근처 우흐스트헤이스트에 있는 세탁 노동자 스나르데인의 집에 오게 된다. 비좁은 집에서 뛰노는 스나르데인네 세 아이에게 마리뉘스가 맏이로 끼어든다.

옛 동급생들의 이야기로 우리는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이미 학교 시절부터 남보다 두드러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안다. 맏이가 대여섯 살인 스나르데인네 아이들 사이에서 첫째가 되기란 쉬운 일이다. 마술 네 가지면 지배권을 손에 넣기에 충분하다. 마리뉘스는 그 지배권을 가혹하게 휘두른다.

누나는 임종하는 어머니에게 마리뉘스를 신앙 안에서 키우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다시 일요일마다 — 이번에는 누나와 그 아이들과 함께 — 교회에 간다. 누나의 말로는 그 무렵 그는 경건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일요일마다 그를 교회로 이끈 것이 정말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뿐이었을까? 혹시 그는 성직자가 신자들 사이에서 누리는 권세에 마법처럼 끌렸던 것은 아닐까? 그 무렵 그의 마음속에서는 성직자가 되겠다는, 자기를 무조건 따르는 신자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자라났다. 열두 살 소년인 그는 자기가 걸으려는 성직의 길에 대해 자주, 길게 이야기한다.

수업 사이 쉬는 시간이면 그는 곧잘 설교자 흉내를 낸다. 친구들은 설교를 좋아하는 그를 놀려 댄다.

친구들은 또 그가 여자아이들을 수줍어하는 것을 두고도 놀린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의 이 특이한 점은 너무나 두드러지고 눈에 띄었기에, 옛 학교 친구들은 지금도 한결같이 그 이야기를 한다. 그는 아무리 해도 여자아이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사랑을 남학생들과 또래 사내아이들 사이에서 찾았다. 성직의 길에 들어서려면 오랜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에는 돈이 든다. 세탁 노동자 스나르데인의 현실 감각 덕분에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열네 살에 돈벌이에 나선다. 그는 어느 가게의 견습생이 되어 그곳에서 두 해 동안 일한다. 가게 문을 닫은 뒤에는 가톨릭 야학에 다닌다. 개신교 교육을 받고 자란 마리뉘스는 여기서 지금까지 낯설던 세계와 만난다.

판데르루버는 가게 일에 만족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장사꾼 기질을 물려받은 것은 분명하고, 계산대 뒤에 서서 손님에게 되도록 많이 파는 일이 즐겁기도 하지만, 앞날의 전망이 너무 보잘것없다. 마리뉘스는 매형 스나르데인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며 새 직업의 가능성을 따져 본다. 매형 스나르데인의 말에 따르면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가장 대담한 계획과 가장 소박한 계획을 나란히 세웠다. 꽃 가게를 차리겠다 — 세계 일주를 하겠다 — 그의 꿈은 그만큼 넓은 폭에 걸쳐 있다. 그 바람들은 미장이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끝난다.

열여섯 살의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땅딸막하고 다부진 소년으로, 체격이 얼마나 우람한지 친구들은 그를 “뎀프시”[b1]라고 부른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자기 힘을 과시한다. 그러니 이제 함께 일하게 된 미장이 직인들로서는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여자들을 그토록 수줍어하는 것이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마리뉘스의 직장 동료들은 그 시절 그와 나눈 대화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물론 그들이 대화를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옮길 수는 없었다. 많은 것을 잊었고, 하찮은 것이 기억에 남기도 했다. 그러나 한 가지에 대해서는 모두 한결같이 말한다. 그들은 모두 남보다 두드러지려는, 남들과 달라 보이려는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의 욕구를 이야기한다. 그들은 무언가 “특별한” 존재가 되려는 그의 광적인 열망을 이야기한다.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든 학교 친구들의 이야기든 친척들의 이야기든 너무나 분명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젊은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허영과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3.3 큰 사고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 노동자들과 날마다 부대끼면서 마리뉘스의 삶에는 여러 변화가 생긴다. 지금까지 그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선 가운데 가장 높은 선이라고 듣고 배웠다. 일요일의 교회 나들이는 그에게 필요한 일이었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는 질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제 그는 다른 견해들과 맞닥뜨린다. 일하다 쉬는 시간에는 하느님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임금 사정 이야기가 훨씬 많이 나온다. 지금의 질서는 당연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그 질서를 뒤엎는 것은 필연이다. 젊은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날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지만 소화하지는 못한다. 그도 형제들과 마찬가지다. 그는 노동자가 되지만 소시민으로 남는다.

우연한 일이 그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점심시간에 동료 둘이 그의 머리에 빈 자루를 뒤집어씌운다. 그러다 석회 덩어리가 그의 눈에 들어간다. 마리뉘스는 세 주 동안 눈병을 앓는다. 얼마 뒤 그는 훨씬 더 심한 사고를 또 겪는다. 양동이에서 다시 석회가 튀어 눈에 들어간 것이다. 그 결과 심한 눈병을 얻어 다섯 달 동안 레이던 병원에 입원한다. 그는 세 번 수술을 받는다. 병원을 나설 때 그의 두 눈은 시력이 크게 떨어져 있다. 실명할 위험이 있다.

눈병은 그의 가장 두드러진 성질인 명예욕과 허영을 더욱 키울 수밖에 없다. 늘 첫째가 되려 애쓰고 남보다 두드러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젊은이 앞에 갑자기 눈이 멀 위험이 닥친다. 그는 삶을 끝까지 살아 보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목표를 이루기도 전에 햇빛이 영영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그를 몰아댄다. 그의 목표?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려는지 알고 있는가? 그는 길을 보고 있는가? 삶의 목표와 의미는 그에게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그를 지배하는 것은 성공에 대한 생각, “세상의 입에 오르내리려는” 욕망이다.

그 큰 사고를 당하기 얼마 전,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레이던의 공산주의 청년동맹에 가입한다. 네덜란드 공산당은 그 무렵 조직을 막 갖추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레이던의 청년동맹도 이제 막 꼴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동맹에 가입한 것은 운동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운동의 힘을 느끼지만, 공산당이 당원들에게 요구하는 꿋꿋함은 지니지 못했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공산주의 청년 조직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는다. 가입하면서 그는 빨리 출세하리라고 믿는다. 그는 조직에서 자기 야심을 시험할 실험장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바람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는 탈퇴서를 쓴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레이던의 공산주의 청년동맹에서 네 번 탈퇴하고 세 번 다시 가입했다. 탈퇴할 때마다 그에 앞서 지도권을 손에 넣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의 첫 탈퇴는 1929년 1월이었는데, 소년단 조직의 책임자로 임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레이던 청년동맹에 써 보낸 수많은 편지 가운데 하나만 여기 싣는다. 이 편지는 판데르루버의 처신을 잘 보여 준다.

레이던, 1929년 12월 13일.

레이던 공산주의 청년동맹 지부
상임위원회 앞

존경하는 동지 여러분,

확대 위원회 회의를 소집해 달라는 저의 요청에 관한 상임위원회의 편지에 이어, 저는 여러분이 확대 위원회 회의를 소집해 달라는 저의 요청을 대체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거부가 의식적이든 아니든 조직의 관점에서 중대한 오류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H. H. 회의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의견입니다. 여러분이 이 거부를 고집한다면 여러분 자신의 입장과 지부의 이익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편지로 여러분에게 일깨워 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보낸 글과 그 밖에 제가 보낸 두 편의 글을 다시 토론하려면(제 생각에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확대 위원회 회의와 이 문제에 대한 최종 표결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제 처지가 어떤지 알게 될 것입니다. 반면 제가 바라는 이 회의가 열리지 않는다면 저는 이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여길 것이고, 그러면 이 문제를 당원 총회에 알리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이는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여러분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음 일요일에 상임위원회 회의(곧 확대 위원회 회의)를 열자고 제안합니다(이것은 조건입니다). 제가 달리 행동한다면 지부 전체의 노여움을 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르크 판로이언의 요구에 대한 제 입장을 담은 성명서를 동봉합니다.

동지적 인사를 보내며

(판데르루버의 서명이 이어진다.)

추신. 이번에 보낸 디르크 판로이언에 관한 성명서만은 빠짐없이 다루어져야 합니다.

3.4 인정을 좇아

큰 사고 이후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의 삶은 인정받으려는 끝없는 사냥이자 비범한 것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다. 이 들뜬 방황 속에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은 거의 없다. 그는 여러 직업에 손을 대 보지만, 단번에 자기를 맨 앞줄에 세워 줄 한 방을 꿈꾼다. 1927~28년 겨울에는 레이던 역 식당에서 임시 웨이터로, 1928년 여름에는 노르트베이크의 ‘호프 판홀란트’에서 호텔 잡역부로 일한다. 그 사이사이 장사도 한다. 몇 주 동안 혼자 감자 장사를 한다. 그다음에는 노르트베이크와 사선헤임 사이로 건축 자재를 실어 나르는 나룻배의 뱃사공으로 일한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늘 큰 한 방에 대한 생각뿐이다. 1929년 12월, 그는 청년동맹과 또 갈등을 빚는다. 제멋대로 전단을 찍어 자기 이름으로 서명해 뿌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무렵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쓴 편지 한 통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거기서 자기비판에 빠진 김에 공산주의에 대한 자기 입장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이 편지에서 말한다.

“이런 것들은 제가 좋은 볼셰비키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지금 저는 분명히 그렇지 않으며(자본주의와 그에 얽힌 모든 것에 대해 저는 매우 급진적인 입장이지만) 어쩌면 영영 그렇게 될 수 없으리라고 느낍니다. 지금 저는 이따금 진영(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안에서 완전히 이방인처럼 느낍니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의 내면은 이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 그의 무정부적 사고, 위로 올라서려는 충동, 규율 없음은 그를 당의 진영 안에서 이방인으로 만든다. 그 당은 당원들에게 가장 엄격한 규율을 요구하며, 대의를 위해 그것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3.5 해협 횡단 수영

1930년 여름 판데르루버는 칼레로 길을 떠난다. 돌아와서 그는 칼레에서 토목 인부로 밥벌이를 하면서 해협을 헤엄쳐 건너려고 몇 번 시도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판데르루버가 정말 그런 시도를 했는지 꼼꼼히 조사했다. 우리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도를 했든 안 했든, 이 일화 전체는 판데르루버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잘 보여 준다. 그에게 결정적인 것은 성취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다. 바라던 명성은 오지 않는다. 칼레에서 돌아온 판데르루버가 늘어놓으며 뽐내려 한 이야기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불신과 비웃음을 산다. 마리뉘스는 1930년에 다시 공산주의 청년동맹에 가입했지만, 그와 다른 동맹원들 사이의 유대는 점점 느슨해진다. 그사이 조직은 훨씬 탄탄해졌다.

판데르루버는 갈수록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모든 것이 그가 머지않아 조직에서 완전히 떠날 수밖에 없음을 가리킨다.

3.6 위테르스터 흐라흐트의 집

위테르스터 흐라흐트 56번지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형적인 네덜란드 집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레이던 사람과 이 집 이야기를 해 보면, 그것이 특별한 집, 기묘한 사람들이 살고 기묘한 일들이 벌어지는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집을 악덕의 소굴로 여기는 레이던 시민들도 있다. 이 집에는 판제이프라는 이름의 고지식한 부부가 산다. 남편은 낮에 일하러 나가고, 제이프 부인은 살림을 맡는다. 그녀는 이 집의 방 몇 칸을 세놓는다. 방들은 매우 소박하고 편안하지 않다. 세가 싸서 주로 학생과 실업자들이 살았고 지금도 산다. 이따금 매춘부도 산다. 판데르루버는 오랫동안 판제이프 부인의 세입자 가운데 하나였고, 이사 나간 뒤에도 거의 날마다 이 집에 드나들었다. 그와 같은 무렵 학생 피트 판알바다와 운전사 이작 핑크가 ‘위테르스터 흐라흐트’에 살았다. 한동안은 “수수께끼 같은” 독일 학생 하나도 판제이프 부인의 세입자였다. 방금 이름을 든 세입자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된 성질로 이어져 있었다. 그들은 동성애자였고, 그 가운데 한두 명은 어쩌면 양성애자였다. 그 자체로는 이 사실이 아무런 의미도 없고 언급할 만한 것도 아니다. 우리 보고에서 이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동성애가 판데르루버를 훗날 독일 여행길에서 나치와 이어 주었기 때문이다.

피트 판알바다는 위테르스터 흐라흐트의 집에서 나간 뒤 결혼했고, 운전사 이작 핑크도 지금은 한 여자와 함께 산다. 그렇지만 판데르루버가 이 두 사람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도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작 핑크는 우리 통신원에게 판데르루버와 자주 한 침대에서 잤다고 말했다. 피트 판알바다는 레이던의 한 대학 교수와 동성애 관계를 맺고 있었다. 판데르루버는 그 본성 전체로 보아 동성애자다. 그의 태도는 계집애 같고, 그가 여자들 앞에서 삼가고 수줍어한다는 것은 수많은 증언으로 뒷받침되며, 남자들에게 기대고 애정을 바라는 그의 욕구는 널리 알려져 있다.

위테르스터 흐라흐트의 집 사정을 잘 알고 판데르루버와 자주 이야기를 나눈 네덜란드의 한 작가는, 판데르루버가 자기에게 다가오고 싶어 하면서도 그럴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느낌을 늘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판데르루버의 동성애에 대한 증거를 하나 더 가지고 있다. 판데르루버는 여행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수많은 떠돌이 직인과 젊은 노동자들과 어울렸다. 국회의사당 화재와 관련하여 그의 이름이 신문에 오르내리자, 독일의 한 젊은 노동자가 우리를 찾아왔다. 이 젊은 노동자는 1931년에 판데르루버와 함께 한 유스호스텔에서 밤을 보냈다. 그는 판데르루버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이 대화에 대해 공증인 앞에서 진술해 조서를 남겼다. 그 조서 가운데 여기서 우리에게 특히 중요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그렇게 우리는 아주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하는 동안 그 네덜란드 노동자는 제 쪽으로 바싹 다가왔습니다. 그는 여러 번 제 성기를 만지려 했습니다. 제가 그런 일에는 응할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나서야 그는 그만두었습니다.”

이 책에 맡겨진 과제는 판데르루버의 삶을 마지막 세부까지 밝혀낼 것을 요구한다. 판데르루버의 동성애는 그의 인정 욕구와 더불어 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여기서 사생활 이상의 것이다.

3.7 유럽 “연구 여행”

해협 횡단 수영은 성취로서도, 유명해질 계기로서도 모든 면에서 실패했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의 머릿속에 레이던 사람들을 감탄시킬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판데르루버는 유럽과 소련을 두루 도는 대규모 “노동자·스포츠·연구 여행”을 계획한다. 그는 자기와 여행 동반자 홀베르다의 모습을 담은 엽서를 찍게 한다. 그에게 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엽서다. 두 젊은이의 머리 위에서는 신비로운 별 하나가 빛난다. 이 엽서에는 판데르루버와 H. 홀베르다가 유럽과 소련을 여행하려 한다는 말이 네 가지 언어로 적혀 있다.

그들은 정말 그럴 생각이었을까?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다. 판데르루버의 친구들은 홀베르다가 레이던에서 판 엽서 대금을 가로챘기 때문에 다툼이 벌어졌다고 주장한다. 홀베르다의 친구들은 판데르루버가 엽서를 판 수입을 제 몫으로 써 버렸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홀베르다가 레이던에 남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판데르루버는 이 여행을 혼자서라도 할 생각이었을까? 그는 실제로 1931년 4월 독일로 갔다. 엽서에는 1931년 4월 14일 레이던에서 여행을 떠난다고 적혀 있다. 우리는 판데르루버가 포츠담에서 홀베르다 집안에 보낸 그림엽서 한 장을 가지고 있다. 이 엽서의 날짜는 1931년 4월 14일, 곧 레이던에서 도보 여행이 시작되었어야 할 바로 그날이다. 1931년 4월 28일 판데르루버는 베스트팔렌의 그로나우에서 체포된다. 자기와 친구 홀베르다가 찍힌 엽서를 길거리에서 팔았기 때문이다. 뮌스터 법원은 무허가 엽서 판매 혐의로 그에게 벌금형을 선고한다. 국회의사당 화재 뒤에 히틀러 정부는 판데르루버가 1931년 그로나우에서 공산주의 문서를 판매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퍼뜨렸다. 그 공산주의 문서란 판데르루버와 홀베르다가 찍힌 엽서 한 장이었다.

5월 초에 판데르루버는 다시 레이던에 와 있었다. 유럽 여행은 “해협 횡단 수영”과 똑같이 끝났다.

3.8 공산주의 청년동맹 탈퇴

1931년 4월 초, 그가 처음 독일로 떠나기 얼마 전에, 판데르루버와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겉으로 드러난 결별도 이루어졌다. 판데르루버는 이미 오래전부터 레이던의 젊은 공산주의자들과 아무것으로도 이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청년 조직과 공산당에서 제명될 처지였다. 그는 그보다 먼저 탈퇴를 선언했다. 그날부터 그는 기회만 생기면 언제나 네덜란드 공산당과 싸웠다.

그가 마음속으로 공산주의 운동과 갈라선 것은 이미 두 해 전이었다. 1929년 1월 21일, 어떤 갈등으로 탈퇴하게 되었을 때 그는 공산주의 청년동맹에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떤 비관주의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저는 온갖 방법으로 그것과 싸우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겉모습이 내면의 상태와 전혀 들어맞지 않는 한 젊은이의 기묘한 모습이 드러난다. 힘세고, “뎀프시”라고 불릴 만큼 힘세고, 건강하고, 겉보기에는 삶을 정복하기 위해 태어난 듯한 그가 삶을 감당할 힘은 전혀 없다. 판데르루버와 자주 상대했던 레이던의 작가 E. 크뉘털은 그를 대략 이렇게 묘사한다.

“판데르루버와 어떤 문제를 놓고 오래 토론하면 그는 동의합니다. 그를 설득했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이튿날 판데르루버에게서 편지가 옵니다. 자기는 원래 입장을 고수한다는 편지가.”

이 고집과 나란히, 동성애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묘한 나약함이 있다. 그 곁에는 거짓말하고 과장하는 버릇이 있다. 판데르루버를 아주 잘 아는 판제이프 부인은 그가 진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인 미장이 하르터펠트, 운전사 이작 핑크와 그 형제 코스 핑크도 판데르루버의 허영을 확인해 주는데, 그 허영 때문에 그는 자주 거짓말과 과장을 한다.

3.9 판데르루버와 벨 박사의 만남

1931년 봄 첫 독일 여행에서 레이던으로 돌아온 판데르루버는 친구들에게 어떤 신사 이야기를 했다. 그 신사가 자기를 자동차에 태우고 먼 길을 함께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판데르루버의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라이프치히에서 왔다는 이 신사를 그가 지어냈는지는 우리도 모른다. 그러나 판데르루버가 이 첫 독일 여행에서 한 사내를 알게 되었고, 그 만남이 판데르루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것만은 안다.

이 무렵 귀화한 스코틀랜드인 게오르크 벨 박사가 민족사회주의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약 1년 뒤 몇몇 친구와 함께 일부 돌격대 지휘관들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아 목숨을 걱정해야 했다. 그가 살해된 경위는 다른 곳에서 서술한다. 그의 친구 몇 사람이 벨 박사의 인맥과 민족사회주의당 안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에 관해 우리에게 중요한 진술을 했다. 벨 박사의 친구 W. S. 씨는 진술조서에서 벨과 판데르루버가 알게 된 경위를 자세히 밝혔다. 조서의 해당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제 기억이 맞다면 1931년 5월이었는데, 벨은 마음에 쏙 드는 네덜란드 젊은 노동자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베를린이나 포츠담 근처를 자동차로 달리다가 마주쳤을 겁니다. 길에서 떠돌이 직인을 만나 차에 태웠다는데, 그게 네덜란드 젊은 노동자였습니다. 그 젊은 네덜란드인은 나중에 뮌헨으로 벨을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벨은 그를 레뉘스 또는 리뉘스라고 불렀습니다. 그와 자주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판데르루버는 벨 박사와 줄곧 편지를 주고받았다. 1931년 9월에는 벨과 직접 만나는 관계를 다시 이어 갔다.

3.10 뮌헨 여행

판데르루버는 레이던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1931년 9월 그는 다시 독일로 길을 떠난다. 그는 친구 코스 핑크에게 자기 앞으로 나오는 주 7휠던의 장애 연금을 대신 받아 맡아 두라고 부탁한다.

라인 지방을 떠돌던 판데르루버는 라인강 변 바하라흐에서 오토바이를 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같은 네덜란드 사람으로, 헤이그 블룸폰테인스트라트 24번지에 사는 전차 운전사 플루흐크였다. 플루흐크는 마리뉘스를 사이드카에 태워 준다. 두 사람은 로텐부르크오프데어타우버에서 밤을 보낸다. 플루흐크는 호텔에서, 마리뉘스는 유스호스텔에서. 플루흐크는 우리 통신원에게 판데르루버와 나눈 대화를 몇 가지 알려 주었다. 플루흐크가 독일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판데르루버는 일자리를 찾는다고 했다. 네덜란드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편이 더 쉽지 않으냐고 되묻자, 판데르루버는 독일에서 일자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차 운전사 플루흐크는 우리 통신원과 이야기하면서, 그 단호함에 몹시 놀랐다는 점을 힘주어 말했다.

플루흐크는 로텐부르크를 거쳐 뮌헨으로 계속 달렸다. 그는 판데르루버를 뮌헨까지 태워 주었다. 두 사람은 시 경계에서 헤어졌다.

판데르루버는 뮌헨에 며칠 머물렀던 것이 틀림없다. 돌아온 뒤 친구들에게 이 도시를 아주 자세하고 길게 묘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 이야기만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겪은 큰일들과 그곳에서 알게 된 많은 사람들 이야기도 여러 번 했다. 그 진술조서를 우리가 이미 한 대목에서 공개한 바 있는 그 청년 노동자는 조서에서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 네덜란드인은 뮌헨에서 아주 잘 지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B. 박사가 자기를 돌봐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B. 박사를 통해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었다는 것을 내비쳤습니다. 그는 이 B. 박사 이야기를 열광하듯 했습니다.”

이 B. 박사는 다름 아닌 벨 박사, 판데르루버가 뮌헨으로 찾아간 그 사람이다. 벨 박사는 그를 민족사회주의자들의 모임에 끌어들였고, 무엇보다 히틀러의 참모장 룀에게도 소개했다. 당시 벨 박사는 아직 히틀러의 참모장 룀의 외교 정책 고문이었고 룀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얼마나 가까웠던지, 나중에 룀은 그에게 국기단 소령 마이어와 줄을 대라는 은밀한 임무를 맡겼다. 당시 룀은 민족사회주의자들의 페메(비밀 처형)에 쫓기고 있다고 느꼈고, 벨의 주선으로 마이어에게서 보호를 구했다. 이 모든 사실은 1932년 10월 룀 대위가 사회민주당 신문 《뮌헨 포스트》를 고소했을 때 공개 법정에서 마이어와 벨의 증언으로 알려졌다.

벨은 룀의 외교 정책 고문이었을 뿐 아니라 연애 문제의 심복이기도 했다. 《뮌헨 포스트》와 다른 신문들은 1932년에 룀이 젊은 남자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공개했고, 거기서 룀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벨 박사는 룀의 뚜쟁이였다. 그는 룀이 젊은 남자들과 맺은 관계를 많이 알고 있었다. 그 대부분을 그 자신이 룀에게 데려다주었기 때문이다. 벨은 자기가 룀에게 데려다준 젊은이들을 모두 꼼꼼히 명단으로 적어 두었다. 벨은 머잖아 자기와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 사이에 불화가 생기리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민족의 관찰자》 편집장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의 심복이었고, 민족사회주의당의 지시로 데테르딩[c1]과 관계를 튼 뒤로는 데테르딩의 끄나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을 적들이 있었다. 벨은 이 명단으로 룀을 영원히 고분고분하게 만들려 했다. 이 명단은 언제든 룀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가 될 터였다.

그 명단은 오늘날 더는 남아 있지 않다. 1933년 4월 벨은 살해 위협을 피해 오스트리아 쿠프슈타인으로 달아났지만, 그곳에서 돌격대 무리의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그때 벨이 지니고 있던, 민족사회주의당을 겨냥해 쓰려던 약점 서류들이 모조리 강탈당했다. 그 명단도 함께.

벨의 친구 W. S.는 그 명단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벨 박사는 비밀 금고에서 서류 몇 장을 꺼냈습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게 룀의 연애 명단이야. 이걸 공개하는 날이면 룀은 끝장이지.’ 그는 내게 명단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름이 서른 개쯤 적혀 있었습니다. ‘리뉘스’라는 이름 하나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 뒤 괄호 안에 ‘판데르’로 시작하는 네덜란드 성이 적혀 있었습니다.”

“리뉘스”는 마리뉘스의 준말이다. 룀의 연애 명단에는 판데르루버의 이름도 있다.

판데르루버는 뮌헨에서 출발해 요란하게 예고했던 그 “노동자·스포츠·연구 여행”의 일부를 실제로 했다. 우리는 그가 크라쿠프에서 보낸 엽서를 한 장 갖고 있다. 우리 통신원은 그가 부다페스트에서 한 친구에게 쓴 편지와 베오그라드에서 보낸 엽서도 보았다. 1932년 1월이나 2월에 레이던으로 돌아온 판데르루버는 여행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는다. 부다페스트로 가는 길에 젊은 떠돌이 직인을 알게 되었는데, 그의 누이가 부다페스트의 사창가에 있었다고 한다. 판데르루버는 그 아가씨를 사창가에서 구해 내려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가씨는 그에게 사랑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그녀와 한방에서 하룻밤을 자면서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그러고는 길을 떠났다고 한다. 구원받아야 할 아가씨 이야기는 전형적인 동성애자의 이야기로, 프로이트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이것을 「파르치팔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3.11 폴란드와 소련 사이의 강

판데르루버의 여행담 가운데, 그의 친구 여럿이 우리 통신원에게 한결같이 전해 준 한 대목은 특히 짚어 둘 만하다. 판데르루버는 자기가 폴란드에 가서 소비에트 러시아 국경까지 갔었다고 말했다. 거대한 강 하나가 폴란드와 소련을 가르고 있다고 했다. 루버는 소련으로 건너가려고 그 강을 헤엄쳐 건너려 했다고 한다. 폴란드 국경 수비병들의 총격에 쫓겨 되돌아왔다고 한다. 그러고는 며칠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거기서 강 건너편의 소련 초병들이 보였다고 한다. 그다음 추방되었다고 했다.

판데르루버의 친구들은 폴란드와 소련 사이에 거대한 국경 강 같은 것은 없다는 이야기를 우리 통신원에게서 듣고 몹시 놀랐다. 이 이야기 역시 루버의 거짓말 버릇과 허풍을 잘 보여 준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판데르루버는 소련 땅을 한 번도 밟은 적이 없다. 그토록 허풍을 떨고 싶어 하던 그조차 자기가 소련에 가 보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우리 통신원이 본 엽서와 편지들은 판데르루버가 1931년 마지막 몇 달과 1932년 초에 실제로 헝가리,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의 몇몇 도시에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 그는 여행하면서 부유한 신사들을 여럿 사귄 듯하다. 돌아와서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어떤 신사가 새 구두를 선물해 주었고,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또 다른 신사가 차표를 사 주었다고 말했다. 벨 박사는 판데르루버를 민족사회주의자들의 모임에 끌어들였고, 루버는 그때부터 그들과 줄곧 연락을 이어 갔다. 그의 지인들은 루버가 독일에서 편지를 아주 많이 받았다고 한결같이 전한다. 루버는 독일에서 온 편지들을 친구와 지인들에게 숨기려고 늘 전전긍긍했다.

3.12 민족사회주의자들의 손님으로

판데르루버는 1932년 1월이나 2월에 레이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놀랄 만큼 빨리 돌아왔다. 판제이프 부인의 말로는, 그가 베를린에서 엽서를 보냈는데 엽서가 도착한 바로 다음 날 그 자신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베를린에서 레이던까지 기차나 자동차로 온 것이 틀림없다. 그 돈을 어디서 구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두 달쯤 뒤 판데르루버는 세 번째 독일 여행에 나섰다. 떠나기 전 그는 구호 기금 사무소와 충돌했다. 연금 인상을 거절한 구호 기금 사무소에 가서 유리창 몇 장을 깨뜨린 것이다. 네덜란드 법원은 그에게 징역 3개월을 선고했다. 그는 형을 살기 전에 독일로 떠났다. 이 여행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베를린과 작센에 갔다는 것이다. 1932년 6월 1일과 2일 그는 쇠르네비츠(작센주 마이센 관구)에서 묵었고, 그곳에서 읍 의회 의원 조머, 원예업자 슈만과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두 사람 다 민족사회주의자다. 국회의사당 화재 뒤 읍 의회 의원 조머는 브로크비츠 읍장에게 판데르루버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고 알렸다. 마이센 관구청의 행정관 헤르틀 박사가 이 사실을 조서로 남겼다. 조서는 작센 내무부로 넘어갔고, 작센 내무부는 제국 내무장관 프리크에게 비망록으로 이를 알렸다. 이 사실은 작센 주의회의 한 사회민주당 의원이 낸 질의로 알려졌다. 어느 쪽에서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이 질의를 보도한 신문들은, 읍 의회 의원 조머가 판데르루버의 쇠르네비츠 체류를 보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도 전했다. 이 보도 역시 반박되지 않았다. 판데르루버는 쇠르네비츠에 머문 뒤에도 며칠 더 독일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네덜란드로 돌아오던 그는 6월 21일 위트레흐트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위트레흐트에서 9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형을 살러 헤이그('s-Gravenhage)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3.13 판데르루버, 공산당 공격의 수위를 높이다

1932년 10월 2일 판데르루버는 헤이그 형무소에서 풀려났다. 그는 레이던으로 왔다. 그해 말까지 그는 여러 차례 여행을 했다. 도르드레흐트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암스테르담과 헤이그에도 갔다. 이 모든 도시에서 그는 여러 집회에 연사로 나섰다. 그의 연설은 공산당에 대한 맹렬한 공격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판데르루버가 공산주의자들과 싸운 증거를 갖고 있다. 1932년 10월 6일 그는 레이던 곡물 거래소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는데, 이 집회의 주 연사는 네덜란드 파시스트 지도자 J. A. 바르스였다. 국회의사당 화재 직후 히틀러 언론이 판데르루버를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자, 이 집회에 왔던 사람 몇이—어느 쪽에도 매이지 않은 이들이다—공증 조서로 이 집회에서 판데르루버가 보인 태도를 증언했다. 판데르루버는 그때 파시스트 지도자가 방해받지 않고 말하게 두자고 나섰다. 그는 장내에 있던 반파시스트들이 바르스의 말을 끊으려는 시도를 모두 막아섰고, 자기 연설에서도 파시스트를 겨냥한 공격은 일절 하지 않았다. 공증 조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c2]

천구백삼십삼 년 삼월 십사일 오늘, 레이던에 주재하는 공증인인 나 헨드릭 마리뉘스 마르퀴서 앞에, 뒤에 이름을 적는 두 증인이 입회한 가운데 다음 사람들이 출석하였다.

1. 피터르 다니엘 하암커 씨, 목수, 레이던 롬복스트라트 11번지 거주.
2. 야코바 마리아 판베이크 양, 가정부, 레이던 레벤달 156번지 거주.
3. 빌헬뮈스 플라스메이어르 씨, 사환, 레이던 레벤달 63a번지 거주.
4. 요하너스 코르넬리스 뵈르서 씨, 배관공, 레이던 드리프트스트라트 13a번지 거주.
5. 야코뷔스 마레이트 씨, 도장공, 레이던 프린선스트라트 36번지 거주.

이들은 공증인인 나와 뒤에 이름을 적는 증인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출석인들은 모두 천구백삼십이 년 십월 육일 레이던 곡물 거래소에서 열린 파시스트 공개 집회에 참석하였으며, 이 집회에서는 파시스트 지도자 J. A. 바르스가 연사로 나섰다.

출석인들은 이 집회에 당시 레이던에 거주하던 마리뉘스 판데르루버 씨가 참석해 있었음을 확인하였으며, 그는 자신들이 보기에 이 집회에서 파시즘에 결코 완전히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출석한 많은 노동자가 파시스트 지도자 바르스의 연설에 불만을 표시하자, 그는 의자 위로 뛰어올라 발언권을 얻은 뒤 그들에게 연사의 말을 조용히 들으라고 당부하였다.

둘째, 그는 결코 네덜란드 공산당의 이름으로 하지 않은 토론에서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며, 파시스트들에 대한 직접적 공격을 일절 삼갔다. 그가 말한 바로는 파시스트들도 결국 노동자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 증서를 작성한다.

원본으로 작성하여 첫머리에 적은 날짜에 레이던에서, 우흐스트헤이스트에 거주하는 공증인 후보 클라스 홀트캄프 씨와 레이던에 거주하는 무직 프레데릭 요하너스 란트자트 씨를 증인으로 하여 집행하였다. 두 증인은 출석인들과 마찬가지로 공증인인 나와 면식이 있다.

낭독한 뒤 곧바로 이 증서에 출석인, 증인, 공증인인 나가 서명하였다. P. D. 하암커, J. M. 판베이크, W. 플라스메이어르, J. C. 뵈르서, J. 마레이트, K. 홀트캄프, F. J. 란트자트, H. M. 마르퀴서.

천구백삼십삼 년 삼월 십오일 레이던에서 등기, 제8권 40장 17번, 한 장, 정정 기재 하나. 수수료 일 휠던 오십 센트(f 1.50) 수령. 수령인, 드코닝.

등본으로 발급함. [공증인 H. M. 마르퀴서 인장, 레이던] [서명]

우리가 다른 곳에 전문을 싣는 또 다른 보고서는 1932년 12월 헤이그에서 열린 파업 운전사 집회에서 판데르루버가 보인 행태를 전한다. 여기서 판데르루버는 앞선 집회들에서보다 한층 더 나아갔다. 그는 공산당을 극렬하게 공격했다. 공산당의 정책을 더없이 날카로운 말로 비난했고, 파업 중인 운전사들에게 공산당의 뜻을 거슬러 테러 행동을 벌이라고 부추겼다. 이 집회 참석자 스무 명가량이 조서를 작성해 판데르루버의 행태를 자세히 증언했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정당에 속해 있다. 몇몇은 당적이 없다. 이들 모두가 이 집회에서 판데르루버가 한 연설이 공산주의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는 데 한목소리를 낸다. 이 참석자들의 보고서는 다음 장에 실려 있다.

네덜란드 공산당에서 떨어져 나온 뒤 판데르루버의 행태에는 한 줄기 곧은 선이 그어져 있다. 그는 집회를 거듭할수록 당에 대한 공격의 수위를 높인다. 1932년 마지막 몇 달 동안 그가 연단에서 내세운 논거들은 뚜렷이 민족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았다. 증인들은 그가 연설에 반유대주의적 언사를 끼워 넣었다고 전한다. 그는 민족사회주의 선전의 어휘에서 그대로 가져온 표현으로 말했다. 그가 연설에서 “약탈하는” 자본과 “창조하는” 자본을 구분했다는, 다시 말해 민족사회주의의 용어와 꼭 맞아떨어지는 용어를 썼다는 진술들이 있다. 적어도 1932년 마지막 몇 달 동안 판데르루버가 민족사회주의의 유혹에 넘어가 있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환멸에 빠진 소시민은 “제 집을 찾아 돌아온” 것이다.

3.14 1933년 2월, 마지막 독일 여행

1933년 1월 판데르루버는 레이던 병원에서 다시 눈 치료를 받아야 했다. 눈병이 더 나빠져 있었다. 그는 4주 동안 입원했다. 그 기간에 그는 독일에서 편지를 많이 받았다. 2월 중순쯤 그는 퇴원했다. 그때 히틀러는 이미 독일 총리였다. 판데르루버는 몇몇 지인에게 독일에 가야 한다고 말했고, 이번 여행에 큰 기대를 걸고 있음을 내비쳤다. 판데르루버의 지인 몇 사람은 그가 독일 친구들이 어서 독일로 오라고 재촉한다고 말했다고 우리 통신원에게 한결같이 밝혔다. 판데르루버가 그때 이미 자기가 “큰일”에 쓰이도록 점찍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그는 민족사회주의자 친구들이 일자리와 자리를 마련해 주리라고 기대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이번 독일 여행에 큰 기대를 걸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떠나기 직전 판제이프 부인과 나눈 대화도 이를 말해 준다. 그녀는 우리 정보 제공자에게 이 대화를 전했다. 판데르루버는 그녀에게 여권 기한이 곧 끝난다고 말했다. 그녀는 꼭 가야 하느냐고, 레이던에 남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판데르루버는 독일에서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고 대답했다. 여권은 이번 한 번, 마지막으로만 쓰면 된다고 했다.

판데르루버는 1933년 2월 중순 레이던을 떠났다. 1933년 3월 2일 자 《포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는 2월 17일 베르더 근처 글린도에서 묵었고 2월 18일 베를린으로 계속 갔다. 베를린에서 그는 벨의 주선으로 알게 된 민족사회주의자 친구들을 만났다. 그는 곧바로 헬도르프 백작을 둘러싼 무리와 다시 연락을 텄다.

3.15 도구 판데르루버

2월 27일 판데르루버는 불타는 국회의사당에서 체포된다. 화재의 불길은 한 편의 기만극의 배경이 되고, 몇 시간 동안 그 주인공은 판데르루버다. 그다음 그는 진짜 주연들에게 무대를 넘겨주어야 한다. 진실의 탐조등이 거짓의 어둠을 찢고, 판데르루버를 도구로 쓰려 했던 자들을 무자비한 빛 속으로 끌어낸다. 괴링과 괴벨스를.

왜 판데르루버가 도구로 골라졌는가? 판데르루버는 1931년 4월까지 네덜란드 공산당원이었다. 괴링과 괴벨스의 하수인들은 이 사실 하나면 국회의사당 화재의 죄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뒤집어씌우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다. 판데르루버가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맺은 동성애 관계,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기대고 있던 처지가 그를 방화범들의 뜻에 매인 고분고분한 종으로 만들었다.

판데르루버의 네덜란드 국적은 바라던 덤이었다. 그 덕에 괴링과 괴벨스는 국회의사당 화재를 국제적 음모로 꾸며 내기가 한결 쉬웠다. 괴링과 괴벨스는 국회의사당 화재를 국제 공산주의의 소행으로 보이게 하려 했다. 그래서 세 불가리아인도 국회의사당 화재와 아무 관련이 없었는데도 체포되어 공범으로 몰렸다.

이 모든 이유로 판데르루버는 방화의 도구로 골라졌다.

음모의 주역들을 보라.

방화 계획을 짜낸 자는 거짓과 도발의 광신적 투사, 괴벨스 박사.

작전을 지휘한 자는 모르핀 중독자, 괴링 대위.

방화조의 인솔은 페메 살인자에게 맡겨졌다. 에트문트 하이네스.

도구는 작고 반쯤 눈먼 남창이었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

1886년 시카고 경찰이 돈으로 산 도발자들을 시켜 폭탄 테러를 연출해 많은 경찰관이 목숨을 잃었을 때, 그 도발이 밝혀지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c3] 도구들을 잘 고른 것이다. 국회의사당 화재 뒤에는 사흘이면 충분했다. 민족사회주의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는 확신을 온 세계에 심어 주기에. 도구 판데르루버는 너무 잘못 고른 것이었다.

4 진짜 방화범들

4.44 방화조

앞에서 말했듯이, 의심을 사지 않고 괴링의 관저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돌격대 지휘관들뿐이었다. 오버포렌[c4]도 비망록에서 엄선된 돌격대·친위대 지휘관들을 이야기한다. 분명한 일이다. 국회의사당 방화 계획을 꾸미고 조직한 민족사회주의 지도부로서는 가장 믿을 만한 친위병들에게 계획의 실행을 맡겨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괴벨스와 괴링은 아무 돌격대 중대에나 제 운명을 맡길 수 없었다. 괴벨스와 괴링은 불만을 품은 돌격대원 하나가 진짜 방화범들을 배신할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 괴벨스와 괴링은 최고위 간부들 가운데서 조력자를 찾아야 했다. 한편으로는 어떤 범죄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함께 저지른 숱한 범죄로 민족사회주의 지도부와 그 운명에 단단히 묶여 있어 배신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내들을 찾아내야 했다. 민족사회주의 지도부에는 이 조건을 갖춘 사내들이 넘쳐난다. 그들 가운데에는 하이네스 중위와 슐츠[c5] 중위 같은 페메(비밀 처형) 살인자, 라이 박사와 카우프만 같은 형사범, 헬도르프 백작 같은 타락하고 도착된 귀족이 있다. 생존과 목숨이 나치 지도부에 떼려야 뗄 수 없이 묶여 있는 이 무리 가운데서 방화조가 꾸려졌다. 오버포렌의 보고로 우리가 알듯이, 지휘는 페메 살인자 하이네스가 맡았다. 그의 첫째 조수는 페메 살인자 슐츠였고, 그의 지휘 아래 베를린 돌격대 지도자 헬도르프 백작이 일했다.

4.45 방화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다음에 싣는 한 형사 전문가의 도식은 방화의 첫 단계를 보여 준다.[c6] 방화조는 괴링의 관저에 모였다. 하이네스, 슐츠, 헬도르프와 나머지는 괴링의 경호대를 아무 제지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경호대는 그들을 돌격대 지휘관으로 알고 있었다. 판데르루버는 아마 헬도르프 백작과 함께 괴링의 관저에 왔을 것이다.

이제 방화조가 처리해야 할 첫 과제는 방화 재료를 나르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방화범들은 괴링의 관저에서 국회의사당으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를 이용했다. 아마 그 길을 여러 번 오가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 의원들이 국회의사당을 떠났다고 알리는 약속된 신호에 맞춰 일을 시작했다. 근무 중인 의사당 직원들에게 들킬 위험은 없었다. 민족사회주의자인 건물 관리 감독관이 근무 시간이 끝나기 전에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방화 재료를 여러 곳에 나누어 놓고, 불붙기 쉬운 재료에 석유와 벤진 따위를 끼얹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적어도 20분은. 그런 다음 발화점들에 불을 붙였다.

경찰과 소방대의 첫 보고들은 방화범이 일곱에서 열 명이고 발화점이 여럿이라고 했다. 방화범들이 보통의 길로 국회의사당에 들어왔다가 보통의 길로 달아났다고 믿는 사람은 독일에 아무도 없었다. 방화범들이 어떻게 빠져나갔는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경찰관이나 소방관이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 신문 기사 하나하나가 언제든 뜻밖의 사실을 드러낼 수 있었다. 괴링은 극도로 궁지에 몰렸다. 그는 낡은 수법을 꺼내 들었다. 다른 누군가가 방화범들이 지하 통로로 달아났다고 말하기 전에 괴링 자신이 먼저 말하려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닥쳐오는 위험을 막고, 몹시 수상쩍은 일을 아무렇지 않은 일로 보이게 하려 했다. 괴링 자신이 방화범들이 지하 통로로 빠져나갔다고 입 밖에 냈다. 그는 이 발언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수법은 실패했다. 그 뒤로 장관 연설에서도, 공식 보고서에서도 괴링의 관저로 이어지는 이 지하 통로 이야기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 괴링의 발언은 잊혀야 했다.

우리는 그 발언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 방화범들은 지하 통로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그 통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괴링의 관저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괴링의 관저란 그들에게 곧 안전을 뜻했다.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는 2월 28일, 방화범들이 그곳 지리를 훤히 알고 있었다고 썼다. 그곳 지리를 훤히 익히고 지하 통로를 구석구석 살피고 연구하기가 제국의회 의장 괴링의 친구들보다 더 쉬운 사람이 누구였겠는가? 그는 국회의사당의 주인이었다. 그는 설계도를 펴 놓고 친구들에게 구석구석을 알려 줄 수 있었다. 그는 제국의회 의장 관저의 주인이었다. 그는 친구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집에 방화 재료를 숨기고 쌓아 둘 곳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프로이센 내무장관이었다. 그는 프로이센 전역의 경찰권을 쥐고 있었다. 국회의사당 방화를 준비할 모든 수단이 괴링의 손에 모여 있었다.

4.46 불타는 국회의사당 안의 판데르루버

프로이센 공보처는 판데르루버가 그곳 지리를 전혀 몰라서 달아나지 못했다고 여론을 속이려 했다. 프로이센 공보처와 괴링의 말대로라면 판데르루버의 다른 조력자들은 모두 그곳 지리에 밝았다. 그렇다면 판데르루버를 데리고 나가 “구해” 주기는 그들에게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판데르루버는 “구해”져서는 안 되었다. 판데르루버는 방화조에 끼어 함께 행진한 동성애자 돌격대 지휘관들이 이 일의 도구로 추천한 자였다. 방화 현장에서 그라는 인물이 공산주의를 대표하게 되어 있었다. 허영심 많고 이름을 날리고 싶어 안달하는, 반쯤 눈먼 이 도구에게 그가 “큰 역할”에 뽑혔다고 납득시키기는 쉬웠다. 판데르루버는 불타는 국회의사당에 남겨져야 했고, 실제로 남겨졌다. 그가 공산주의자들을 옭아맬 증거물이었기 때문이다. 판데르루버는 할 수 있는 만큼 자기 역할을 해냈다. 그는 불타는 국회의사당에서 순순히 체포되었다. 그는 “공산주의 방화범”의 “진짜” 모습을 연출하려고 셔츠와 웃옷을 벗어 던졌다. 그는 국회의사당 방화를 자백했다. 그는 바라는 대로 어떤 방화든 자백했다. 노이쾰른 복지청, 베를린 시청, 베를린 왕궁의 방화까지. 그리고 판데르루버는 앞으로도 배후의 지시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백할 것이다. 그는 민족사회주의자 지시자들이 시키는 대로 토르글러에게 불리한 진술을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는 바라는 대로 디미트로프에게 불리한 진술을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는 민족사회주의자 친구들이 파멸시키려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죄를 씌울 것이다. 그는 민족사회주의자 친구들이 감싸려는 사람이면 누구의 죄든 벗겨 줄 것이다.

7 학대와 고문

7.5 진짜 하등 인간들

졸개들은 그를 서둘러 다루지 않는다. 지친 그들은 한동안 정신적 고문으로 기운을 되찾는다. 그들은 가장 굴욕적인 짓을 궁리해 낸다. 새로 들어온 포로는 제 손으로 옷을 벗어야 한다.

타락한 교사들의 사디즘이 여기서 새로운 변주를 얻는다. 우리 앞에 한 가장이 나타난다. 노동자이자 실업자 무료 급식소를 꾸리던 사람이다. 그는—기억이 떠오르자 목소리가 머뭇거린다—돌격대 지하실에서 어떻게 몸을 숙이고 맨 엉덩이를 내밀어 정확히 겨냥한 매질을 받아야 했는지 이야기한다. 돌격대원들은 그를 한동안 그렇게 세워 두고 그 꼴을 즐기다가 내리친다.

옆방의 포로들은 이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칸막이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 좋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새로 들어온 포로는 강철 회초리의 첫 매에 몸을 일으키지만, 새로운 명령이 그를 다시 굴욕적인 자세로 꺾어 누른다. 몸을 일으킨 것은 “처벌감”이었고, 절차는 더 가혹해진다. 이제 그는 자기에게 떨어지는 매를 큰 소리로 함께 세어야 한다. 숫자는 고통의 비명 속에 흐려지고, 매는 날카롭고, 다섯 번째 매에 살갗이 터진다. 그사이 돌격대원들은 다시 기운이 났다.

이미 둘째 단계는 셋째 단계, 곧 정신적 고문과 하나가 되었다. 그 고문은 부대 지휘관들이 고안한다. 하급 돌격대원들에게는 그나마 곧은 길로 가려던 원시적 복수욕이 있었다면, 지휘관들은 그것을 사디즘이라는 도착으로 비틀어 놓았다. 많은 돌격대 지휘관들의 부자연스러운 성생활이 여기에 얼마나 큰 몫을 했는지는 훗날 밝혀질 것이다. 동성애자인 헬도르프 백작, 지금의 포츠담 경찰청장이 숱한 고문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희생자 가운데 많은 이들이 돌격대 지도부의 도착증에 걸려든 불행한 대상이었다고 결론짓기에 충분한 의혹이 생긴다.

그들은 이때도 세상의 이목을 두려워했다. 베를린 쾨페니크에서 나온 한 문서는 쾨페니크의 돌격대 술집 「데무트」의 실태를 이렇게 전한다.

“이 매질에는 특히 술집 주인의 아들이 앞장섰다. 그 밖에 이 행동들을 늘 지휘한 쾨페니크의 돌격대 지휘관 헤르베르트 샤르지히도. 처음에는 여주인의 아들이 비명을 덮으려고 오토바이 엔진을 돌려 놓았다. 요즘은 희생자들의 얼굴을 천에 처박는다. 이웃 주민들은 여러 차례 경찰에 호소했다. 침실이 마당 쪽으로 난 주민들은 집 안 배치를 바꿔, 비명을 듣지 않으려고 이제는 길 쪽 방에서 잔다. 마당 쪽 창가에는 아무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무장한 돌격대원 하나가 늘 마당에 서 있다. 우리도 목숨이 위태롭다. 우리가 이 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이 눈치채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주석

  1. [옮긴이] 잭 뎀프시. 1919~1926년 세계 헤비급 권투 챔피언이었던 미국 선수. ↩
  2. [옮긴이] 헨리 데테르딩. 로열 더치 셸을 이끈 네덜란드 석유 재벌로, 반소련 활동과 나치 지원으로 알려졌다. ↩
  3. [옮긴이] 원서에는 네덜란드어 공증 조서가 사진으로만 실려 있다. 아래는 그 사진에서 네덜란드어 원문을 직접 옮긴 것이다. ↩
  4. [옮긴이] 헤이마켓 사건. 1893년 일리노이 주지사 존 피터 올트겔드가 살아남은 피고인들을 사면하며 재판이 부당했다고 밝혔다. ↩
  5. [옮긴이] 에른스트 오버포렌. 독일국가인민당의 제국의회 원내대표로, 1933년 5월 숨진 채 발견되었다. 『갈색책』은 국회의사당 방화를 나치의 소행으로 지목한 이른바 「오버포렌 비망록」을 그가 쓴 것으로 인용한다. ↩
  6. [옮긴이] 파울 슐츠. 1920년대 이른바 흑색 국방군의 페메 살인에 연루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풀려났고,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측근으로 나치당 조직 지도부에서 일했다. ↩
  7. [옮긴이] 원서에는 이 절에 도식 두 장이 실려 있다. 설명문은 이렇다. “형사적 조사 결과와 공식 발표에 따른 국회의사당 방화의 도식적 묘사. 1단계. 1. 괴링의 관저. 2. 괴링의 관저에서 국회의사당 건물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 3.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4·5. 괴링의 경호대. 지하 통로를 지나 국회의사당으로 가는 방화범들이 보인다.” “2단계. (번호 설명은 같다.) 방화범들이 발화점에 불을 붙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