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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비스트롤료토프, 『불멸자들의 향연』 제8부 「고독의 시험」

인물드미트리 비스트롤료토프, 빅토르 아바쿠모프, 이오시프 스탈린, 니콜라이 예조프, 게오르기 주코프, 애나 루이즈 스트롱, 세묜 크리보셰인, 안드레이 예료멘코,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 아돌프 히틀러, 니콜라이 모로조프 용어굴라크, 내무인민위원부(NKVD), 국가보안부(MGB), 국가정치보안부(GPU·OGPU), 대숙청, 제카 (з/к) 사건대숙청

제1장. 푸른 호텔

시블라크 수슬로보 지부에서 모스크바까지의 호송 이송은 고되고 길었다. 한 달 반이 넘게 걸렸다. 시간 감각을 잃어버렸지만, 여정 중간쯤, 아마 옴스크 중계감옥이었을 것이다. 나는 차가운 징벌방에 앉아 위쪽 작은 창문의 철창 너머로 색색의 신호탄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노랫소리와 음악을 들었다. 바깥세상에서는 1948년 새해를 축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유리창은 일부러 깨져 있었다. 나는 얼어 죽어가는 동료 죄수의 몸을 두 팔로 끌어안은 채, 수감된 지 첫 10년이 끝났고 그래도 아직 굶주림에도, 추위에도, 구타에도, 과로에도 죽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동 도중 너무 쇠약해져서 루뱐카 내부감옥의 감방에는 간수 둘이 양쪽에서 부축해 데려가야 했다.

내부감옥은 야생인처럼 변해버린 수용소 죄수인 나를 놀라게 했다. 마룻바닥은 번쩍이도록 닦여 있었고 벽은 부두아르를 연상시키는 푸른색이었다. 감방에는 흰 줄무늬가 들어간 분홍색 비단 잠옷을 입은 풍채 좋은 사내가 등을 대고 자고 있었다. 나는 맞은편 침대에 앉아, 잘 가꾸어진 귀족풍의 옆얼굴과 그의 머리맡 벽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꾸러미, 깡통, 포장물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 중요한 동지는 감옥에서도 주로 연어와 검은 캐비아를 먹는 모양이었다.

아침이 되어 우리는 통성명을 했다. 새 감방 동료는 로마노프 소장으로, 전리품관리국의 전 국장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손을 거쳐 간 것은 수백만이 아니라 수십억이었다. 그는 수사관에게 한 번도 불려가지 않은 채 이미 20개월 넘게 갇혀 있었고, 파괴공작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했다. 독일 도시들을 점령한 뒤 소련군 병사들은 현지 기업들의 설비를 서둘러 뜯어내 철도 화차에 실었다. 그 화차들은 우리 쪽 역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비워졌고, 기계와 장비는 먼지와 진흙바닥에 그대로 내던져져 오랫동안 노천에 방치되었다. 이 작업은 최고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긴급히 이루어졌으므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그런 방식으로 반출된 설비 대부분이 못 쓰게 되었음은 분명했고, 이제 장군은 남의 죄값을 치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사관들도 사건을 어떻게 꾸며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혁명 전에 로마노프는 키예프 상업대학 학생이었으나 당에 입당했고, 훗날 원수가 되는 전 차르군 장교 주코프가 지휘하던 기병부대의 보급 책임자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주코프가 승진할수록 로마노프도 함께 올라갔다.

감방에서는 늘 그렇듯 감옥 이야기, 옛이야기, 추억담이 시작되었다. 내 옛 가족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동료에게 아네치카와 그녀가 내 삶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많이 이야기했다. 장군은 자기에게는 착하지만 의지가 약하고 어리석은 아내가 남아 있으며, 그 지나친 온순함으로 두 딸을 망쳐놓았다고 말했다. 큰딸은 이미 성인이니 어쩔 수 없고 성격도 어머니와 닮았다. 그 아이는 하느님께 맡길 수밖에. 문제는 예쁘고 제멋대로인 막내였다. 장군은 고개를 숙이고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내가 없으니… 길을 잘못 들 거야… 아, 하필 이런 때 나를 떼어놓다니… 하필 이런 때!” 우리는 체스를 두었고, 나는 앉아서 하는 그 게임을 싫어해서 늘 졌다. 그런데 한 번 내가 이기자 손쉬운 승리에 익숙한 장군이 내 승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우리는 주먹다짐까지 했다! 그렇다. NKVD 내부감옥의 감방에서 지식인 두 사람이 체스 때문에 싸웠다. 장군은 문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고, 나는 그의 살찐 옆구리를 주먹으로 찔러댔다. 나중에 간수들이 한참 동안 우리를 타일렀다. 머리를 자르고 면도할 때면 장군은 이발사가 보관하는 자기 향수병으로 내 얼굴도 닦아달라고 부탁했다. 요컨대 그는 누구나와 다름없는 평범한 소비에트 사람이었고, 그에 관해 쓸 이야기는 없어 보였다. 단 하나, 그가 장군이었다는 점만 빼면.

그렇다. 로마노프는 자기 울타리 안에서는 무엇이든 허용되는 대신, 울타리 바깥에서는 비굴하게 복종해야 하는 작은 차르의 심리를 지닌 스탈린식 관료였다. ‘인민의 아버지’와 그 수하들이 정성껏 빚어낸 뒤 자기들의 목적에 이용한 바로 그 심리를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 시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특징 가운데 하나였고, 나 자신이 당한 ‘사건’, 곧 기소와 체포를 낳은 조건에도 간접적으로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

장군은 전쟁 전 시절을 꽤 즐겁게 회상했다. 그 즐거움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에게서 흘러나와 우리의 대화에 묘한 색채를 더했다.

“내가 자유의 몸이 된다면 중고라도 장교용 흰 양가죽 반코트를 하나 사고 싶습니다.” 나는 꿈꾸듯 말했다. “얼마나 멋집니까! 단정하고, 가볍고, 아름답고!”

장군은 너그러운 듯 미소 지었다.

“수용소 생활로 아름다운 물건에 익숙하지 않게 되셨군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정말 좋은 흰 반코트는 아직 못 보셨습니다. 언젠가 흰 반코트 1만 벌 주문을 맡았는데, 그 김에 특별 지시로 100벌을 따로 만들게 했지요. 그게 진짜 반코트였습니다! 겉가죽은 숙녀용 장갑에 쓰는 흰 벨벳 스웨이드 같고, 안쪽 털은 솜털오리 가슴털 같았어요. 새끼손가락 하나로도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100벌이나 왜 필요했습니까?”

장군은 거만하게 오른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라니요? 나, 아이들, 친척들 몫이지요. 무엇보다 상관들 몫이고요. 그분들도 사람이잖습니까? 카프카스에서는 한 번 평범한 검은 코사크 부르카를 대량 주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나와 가족, 상관들 몫으로 은장식을 두른 눈처럼 흰 부르카 스무 벌을 따로 챙겼지요!”

“그런 부르카를 부인과 따님들이 대체 어디서 입었습니까?”

“어디서도 안 입었죠, 당연히! 너무 호화로워서 거리에 입고 나갈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보관해두면 됩니다. 귀중품이잖아요. 말하자면 돈이나 마찬가지지요!”

폴란드 분할에 참가했을 때 로마노프는 예료멘코 장군의 코사크 부대와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말을 타고 폴란드 국경을 넘었다. 병사들은 창과 군도를 들고 있었고, 반대편에서는 히틀러의 국방군이 전차와 장갑차를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사령부는 어느 공업도시의 부유한 교외에 자리 잡았습니다.” 장군이 말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르샤바 부자 하나의 별장을 차지했지요. 집은 비어 있었습니다. 돌아다니며 살펴보니 식기는 별것 없고, 은제품은 주인이 미리 챙겨간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벽에는 그림이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회화를 좋아하고 감상할 줄 알지요. 예술품이라는 느낌은 오고 감탄은 하는데, 값을 어떻게 매겨야 할지, 뭘 골라야 할지는 모르겠더군요. 마침 운이 따랐습니다. 거리를 걷는데 모자를 내밀고 구걸하는 키 크고 잘생긴 노인이 보였어요. 매우 교양 있어 보였습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바르샤바 미술아카데미 교수더군요. 병든 딸 때문에 뒤처지는 바람에 폴란드인들이 서쪽으로 피난 갈 때 기차를 놓쳤고, 이제 부녀가 굶고 있었습니다. 그를 별장으로 데려가 먹이고 딸에게 줄 제법 괜찮은 꾸러미도 싸주었습니다. 그동안 노인은 그림들의 가치를 매겨주었지요. 유명한 폴란드 화가 작품도 있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세잔 두 점과 뒤러 한 점도 있었습니다. 뒤러는 뭐, 작은 소묘였지만 솜씨가 훌륭했어요. 교수에게 공증받은 감정서까지 받아 그림과 함께 포장했습니다. 운전사 이반이 모스크바까지 냅다 달렸고, 그 뒤 전쟁 내내 전선과 집 사이를 순항했지요! 그 교수는 손이 좋았습니다!”

장군은 조국전쟁을 폴란드에서 속옷 차림으로 허둥지둥 도망치며 시작했지만, 끝은 꽤 성공적으로 장식했다.

“나는 크리보셰인 장군과 함께 전차에 타고 있었습니다. 베를린의 고급 교외지역에서 불타는 거리를 지나며 숙소를 찾고 있었지요. 그런데 완전히 멀쩡한 별장 하나가 보였습니다. 부잣집이었어요. 들어가 보니 지하실에 중장 한 사람이 젊은 조카딸과 숨어 있더군요. 참모본부 아카데미 교수였습니다. 둘 다 지저분하고 굶주려 있었어요. 내 부관이 조카딸을 샤워시키러 데려갔고, 하하하하! 나는 빵 한 조각과 비계를 꺼내 장군에게 건네며 독일어로 말했습니다.”

“나와 크리보셰인 장군은 둘 다 유대인입니다. 당신은 히틀러주의자지요. 그러나 전쟁은 끝났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을 이겼습니다. 우리의 음식을 받으시오. 그리고 오늘을 기억하시오. 이것이 당신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 독일인은 울면서 더러운 소매로 눈물을 닦고 음식을 먹었다. 게다가 한쪽 눈에는 단안경까지 끼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짜 봉건 귀족이었다! 그런데 집 안은 책으로 가득했다. 나는 러시아 군사사 관련 박물관급 자료를 200권쯤 찾아냈다. 키예프의 공후들과 모스크바의 차르들부터, 혁명 전에 러시아에서 출판되어 수보로프, 쿠투조프 등 우리 지휘관들에게 헌정된 호화 화집까지 있었다. 놀라운 책들이었어요! 값을 매길 수 없는 희귀한 장서였습니다. ‘헤르 장군’은 책마다 아주 자세한 주석을 달아두었고, 이반은 그 장서를 우리 집으로 날랐지요.”

“전쟁을 아주 알차게 정리하셨군요! 그 많은 물건을 대체 어디에 두셨습니까?”

장군은 만족스럽게 눈을 반쯤 감고 침대에 기대었다. 즐거운 기억이 혈통 좋은 고양이를 간질이듯 그를 간질이는 듯했다.

“카멘니 다리 근처 정부청사 아파트에 제법 괜찮은 집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 좋은 물건은 집에 두지 않아요. 뭐 하러요? 다른 곳에 나눠두는 편이 안전하지요. 독일 왕실 식기 세트를 세 벌 갖고 있습니다. 다른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50인용 세트도 하나 있는데 모스크바에서 5만 루블로 감정받았지요. 아시겠지만 내가 드레스덴에 도착한 때가 마침 우리 사람들이 그 유명한 미술관의 그림들을 구해내던 때였습니다. 이건 내 전문분야이기도 했어요. 첫째 전리품이고, 둘째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예술이니까요. 작은 작품 세 점을 골랐고, 그 그림들이 수록된 카탈로그도 세 권 챙겼습니다. 문서가 있어 나쁠 건 없지요. 나는 미학에서도 질서를 좋아합니다!”

그 뒤 잠깐 우리 감방에 들어온 사람은 작가 안드레예프의 아들이었다. 레닌그라드 출신의 백발 건축기사였다. 그는 그 유명한 ‘교두보’에서 싸웠다. 백병전 중 독일 장교가 그에게 다섯 발을 쐈으나 전부 빗나갔고, 그 장교는 개머리판에 맞아 죽었다. 안드레예프는 자기 군복에서 총알구멍 몇 개를 발견했고, 그 장교의 권총을 행운의 부적 삼아 기념품으로 챙겼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면서, 특별위원회가 폐기 대상으로 골라 각 장마다 표시를 찍어둔 종이를 난로 불쏘시개용으로 집에 가져가곤 했다. 어느 날 월급을 받은 직후 청소부가 재킷에서 돈지갑을 훔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건이 시작되었다. 심문에서 청소부는 안드레예프가 간첩이라고 진술했다. 국유 도면을 어디론가 가져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밤중에 집을 수색해 권총을 찾아냈는데, 그 권총은 미국제였다. 아마 그 독일 장교가 미군과 싸울 때 얻어 기념품으로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덤으로 안드레예프가 젊었을 때 종교적 이유로 병사 복무를 거부하고 위생병으로 군복무를 했다는 사실도 캐냈다. 그것으로 사건은 결정되었다. 그는 어떤 대형 ‘미국 간첩단 사건’에 끼워 넣기 위해 모스크바로 이송되었다. 총살형이 걸린 일이었다. 안드레예프는 하루 종일 백발의 머리를 가슴에 떨군 채 말이 없었다. ‘푸른 호텔’에서 싸우는 것은 전장의 교두보에서 싸우는 것보다 어려웠다.

얼마 뒤 그가 감방에서 나가고, 키예프에서 끌려온 키 크고 시원시원한 사내가 대신 들어왔다. 빨간 코끝과 재빠르게 움직이는 눈이 기억에 남았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장관이었고, 전에는 주코프 원수 사령부의 행정부장을 지냈다. 안타깝게도 성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평범한 가족 이야기 말고도 두 번째 장군에게는 전쟁에 관한 즐거운 추억이 많았다. 나는 큰 관심을 갖고 들었다. 그는 말로 설명하기보다 활기찬 표정과 큼직한 손짓으로 뜻을 보여주었다.

“특히 개 두 마리가 기억나오. 포츠담 궁전 벽난로 위에서 슬쩍한 놈들이지. 내가 포츠담 회담의 조직을 맡았소. 참가자들의 숙소, 식사, 오락까지 말이오. 물론 궁전과 정원을 정돈했지만 어떤 방에는 늘 누군가와 함께 들어가야 했소. 큰 벽난로 위에 도자기 개 두 마리가 눈에 띄더군. 그런 건 어디서도 못 봤소. 크고, 진짜처럼 만들어져서 선반 양 끝에 우리 집 세르카나 주치카 같은 개가 살아 앉아 있는 것 같았지.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보자마자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소! 게다가 회담은 역사적 사건이니 개인적으로도 기념할 필요가 있잖소. 한 마리는 금방 챙겼소. 외투를 입고 와서 들고 나갔지. 그런데 다른 한 마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기회가 안 나더군. 회담이 시작되어 참가자들이 홀에 모였을 때에야, 외교 예절대로 이쪽저쪽에 미소 지으며 살짝 목례하면서 뒷걸음질로 벽난로 쪽으로 갔소. 도착해 뒤로 손을 뻗었는데 벽난로가 너무 높아서 팔이 빠질 뻔했지. 그래도 영웅적으로 장애를 극복했소. 회담을 제대로 마무리한 셈이지. 상관들한테는, 듣자니 샤흐트 장관의 것이었다는 도금 자동차를 집으로 보내고, 나는 개 두 마리를 챙겼으니까!”

이때부터 전리품 담당 장군과 행정 담당 장군 두 사람 모두 심문에 불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로마노프가 설비 운송 과정의 손실 때문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장군과 얽힌 공통 사건 때문에 붙잡혀 있음을 깨달았다. 로마노프는 입을 다물었지만 수다스러운 장관은 곧 떠벌리기 시작했다. 로마노프가 심문에 끌려간 사이 그는 자신이 주코프 원수에 관해 진술하고 있다고 암시했다. 주코프가 미국에 포섭된 배신자이자 간첩이라는 내용이었다. 훨씬 뒤에야 나는 당시 주코프가 질투심 많은 대원수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 대원수는 민중에게 인기 있고 재능 있는 사람을 자기 주변에 두는 것을 참지 못했다. 주코프는 오데사로 전출되었고 그의 목숨은 실낱같이 위태로웠다. 바로 그때 ‘미국의 포섭’ 사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거짓 증인들은 수사관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진술서를 써내려갔고, 러시아의 전쟁 영웅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듯 보였다. 그러나 스탈린에게는 거대한 주방이 있었고, 그는 매운 요리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솜씨도 대단했다. 어떤 새로운 고려가 계획된 살인을 실행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언젠가 이 험악한 시대의 역사가 밝혀줄 것이다.

두 장군은 강도도 도둑도 아니었다. 높은 직위 덕분에 자기들에게는 무엇이든 허용된다고 굳게 믿는 소비에트 고위 관료들이었다. 고골의 시장은 자기 부하 경찰관이 ‘직급에 맞지 않게’ 뇌물을 챙긴다고 분노했지만, 그 부하가 뇌물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당연하게 여겼다. 두 장군은 ‘직급에 맞게’ 챙겼고, 그것이 비난받을 일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우연히 만난 감방 동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떠벌렸다. 그러나 내 가슴을 가장 날카롭게 벤 것은 그들의 무사유적 복종이었다. 그것은 위에서 주입되어 스탈린 시대에 단단히 굳어진 심리의 표현이었다. 그 심리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물리적 강압이 없어도 누구에 대해서든, 심지어 예전 동료들에 대해서도 쉽고 무심하게 거짓 진술을 할 수 있었다. 나를 고발한 케드로프는 무엇인가? 장군이자 고참 볼셰비키의 아들인 그 역시 이 장군들의 복제품 아닌가?

이고리 케드로프는 나와 같은 시기에 INO, 즉 대외정보부에서 근무했지만 나를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했다. 전문 간부들을 제거하기로 계획했을 때, 케드로프와 그 밖에 명령 수행 능력이 확실해 보이는 몇 사람이 수사관으로 뽑혔다. 그는 당시의 방식대로 수사를 했다. 체포된 동료들을 두들겨 패서 꾸며낸 범죄를 자백하게 했다. 대부분은 총살되었고 몇 사람은 살아남았다. 노릴스크에서는 안토놉스키를, 호송 도중에는 코펜하겐 출신 피셰르를, 석방 뒤에는 노타리예프를 만났다. 이고리 케드로프는 중앙위원회에 심문 방식과 사건 조작 기법을 폭로하는 편지를 썼다. 그 사람을 평가하려면 그가 언제 그 진정서를 냈는지가 흥미롭다. 수사관 일을 시작한 초기에 썼는가, 아니면 끝 무렵에 썼는가? 즉 스탈린의 주방에 경악한 새내기로서 쓴 것인가, 아니면 보복이 다가오는 냄새를 맡은 숙련된 요리사로서 쓴 것인가? 그 편지가 그의 체포를 앞당겼을까? 흥미로운 문제다. 어쨌든 체포 때부터 그는 자기 집에서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책임을 벗으려 한 데 대한 보복은 아니었을까? 나는 이 아첨꾼이 총살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섬긴 체제의 필연적인 희생자였다. 그래서 두 장군의 이야기는 내게 흥미로웠고, 당시의 사회관계가 낳은 산물로 보아 기억해두려고 애썼다. 그런 감방 동료들과의 만남은 내게 많은 것을 이해하고 정리하게 해준 유익한 경험이었다.

물론 장관도 곧바로 환자식 대상이 되었고 풍성한 사식 꾸러미를 받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머리맡 구석에도 포장물 더미가 쌓였다.

“여긴 식료품점 지점 같군요!” 내가 말하곤 했다. 그러나 로마노프는 그저 옆 감방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밤낮으로 타자기 소리가 따다닥 쏟아져 나왔다.

“저기에는 만주국 황제 푸이가 갇혀 있습니다! 확실한 소식통에게 들었어요. 점심을 어떻게 가져다주는지 잘 보십시오!”

정말 그랬다. ‘푸른 호텔’에서는 배식 때 간수들이 눈처럼 흰 식당 종업원 재킷을 입고 우리에게 수용소의 멀건 죽이 아니라 제대로 된 수프를 밝은 금속제 식당용 그릇에 담아 주었다. 옆 감방에는, 우리는 문 배식구를 통해 볼 수 있었는데, 재킷과 모자를 쓴 간수가 빳빳하게 다린 냅킨을 팔에 걸고 쟁반에 점심을 올려 들고 갔다. 쟁반 위에는 정식 식기와 잔, 와인병, 과일이 보였다. 그렇다고 내 생활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나는 하루 종일 침대에서 졸았고 장군과 장관은 체스를 두었다. “체크메이트”라는 말이 들리면 나는 눈을 뜨고 손을 내밀었다. 패자는 자기 꾸러미 더미에서 하나를 아무렇게나 집어 내게 밀어주었다. 그것이 그들 사이의 규칙이 되었다. 나는 그 선물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다시 달콤한 졸음 속으로 빠져들었다.

노먼 보로딘 사건 때문에 나는 몇 차례 심문에 불려갔다. 노먼의 아버지 보로딘은 고참 볼셰비키로, 중국에서 혁명을 조직하라는 코민테른의 파견을 받은 사람이었다. 이후 장제스의 배신 때문에 그는 아내, 두 아들, 미국인 스트롱과 함께 사막과 산을 넘어 소련으로 도망쳐야 했다. 스트롱은 ‘보로딘 장군’에 관해 꽤 많이 썼다. 1930년대에 보로딘은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한직에 있었고, 뚱뚱한 어머니는 어떤 군 화학연구소에서 일했으며, 큰아들은 우리 해외공관 가운데 한 곳의 무관으로 근무했다. 막내 노먼은 우리 정보그룹에서 일했다. 그는 전형적인 ‘황금 청년’이었다. 지위와 돈에 타락한 버릇없는 도련님이었다. 그와 젊은 아내 역시 어떤 거물의 딸이었는데, 둘은 상부를 향해 날카롭고 조롱 섞인 말을 거리낌 없이 했다. 내가 체포된 뒤 수사관 솔로비요프 대령은 젊은 보로딘 부부에 관한 정보자료를 확인해달라고 했고, 나는 그렇게 해주었다. 10년이 지나 전쟁 기간을 미국에서 편안히 보낸 N. 보로딘이 귀국해 체포되었고, 내 당시 진술을 다시 조서에 올렸다. 하지만 나를 시베리아에서 불러낸 이유가 이것일 수는 없었다. 그런 확인은 수슬로보의 담당 요원이 한 시간이면 받을 수 있었다. 이런 하찮은 일 때문에 죄수를 모스크바까지 끌고 오는 것은 터무니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침대에 앉아 손을 내민 채 가능한 설명을 수천 번 머릿속에서 검토했지만, 아네치카의 편지 말고는 합리적인 답을 찾지 못했다. 내 전우이자 수용소의 아내인 아네치카는 10월 20일대에 내가 재수사를 위해 불려가 석방될 것이라고 썼다. 내 사건을 맡아 청원하기로 한 법률가가 그렇게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의 수임료는 그녀에게 막대한 부담이었다. 수용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지친 여인은 밤마다 옷을 꿰매 변호사 비용을 벌었다. 드레스 한 벌에 30루블을 받았고, 내야 할 돈은 1만 루블이었다. 나는 10월 23일에 불려왔다.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듯했지만 사건 재검토와 석방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 너무 환상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침내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나는 수사국장 레오노프 소장에게 불려갔고, 마침 그 사무실에는 국가보안부 장관 아바쿠모프가 있었다. 그들은 분명 앞으로 나를 다시 이용할 목적으로 사면을 제안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재수사, 재판 재개, 권리의 완전한 회복을 요구했다. 감방으로 돌아온 뒤 종이 한 장을 달라고 해 아바쿠모프에게 같은 내용을 썼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난 것 같은 일은 어떤 문명국가에서도 상상할 수 없다고 건방지게 덧붙였다.

로마노프는 장관에게 불려가 사면 이야기를 들었다면 바로 그날 밤 석방될 것이라고 권위 있게 설명했다. 그는 자기 주소를 알려주며 가족을 찾아가 달라고 부탁했다. 실제로 한밤중에 나는 “짐 챙겨!”라는 호출을 받았다. 우리는 서로 껴안았다. 미소와 최고의 축복을 받으며 나는 감방을 나섰다.

제2장. 끝을 기다리며

아래층의 ‘콘베르트’에서 두 시간쯤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검은 까마귀’ 호송차에 실려 어디론가 갔다. 어디로? 나는 목욕탕에 불려가 멀쩡한 양복과 서류를 받고 제르진스키 광장으로 나가게 되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대체 어디로 나를 데려가는 거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의 교통 소음이 사라졌다. 나는 체키스트들이 모스크바 근교에 비밀 다차를 여럿 갖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남의 눈에서 감추고 싶은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편안하게 지냈다. 한때 어느 서방 강대국의 참모본부 장교가 우리 쪽으로 망명해 와 그런 다차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는 내가 아는 율리야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우리는 1937년 새해를 함께 맞았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추억이 뜨거운 파도처럼 밀려왔다.

차가 어느 뜰로 들어가 멈췄다. 억눌린 목소리들이 들렸다.

“나와!”

나는 몸을 굽힌 채 서둘러 밖으로 기어나왔다.

내 앞에는 병사들이 있었다. 총검이 내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뒤에는 길고 낮은 건물들. 그 너머에는 교회.

이게 뭐지? 나, 여기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순간 번개처럼 생각 하나가 스쳤다. 여기가 바로 그들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고막이 뚫린 남자가 가슴이 아플 만큼 생생하게 떠올랐다. 옐킨. 작은 탁자와 누비솜옷을 입은 남자. 그자는 그때 감기에 걸려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끝이다. 이제 빠져나갈 수 없다.

끝.

그러나 그들은 나를 지하실로 끌고 가지 않았다. 낮은 건물을 돌아 지하실 계단이 시작되는 문으로 뛰어들어가는 대신, 우리는 ‘검은 까마귀’ 바로 맞은편에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평범한 감옥의 ‘역’, 즉 접수구역이 있었다. 접수대에서 서류 한 장을 작성했고, 그것을 보고서야 내가 번호로만 불리는 특수시설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접수 담당자가 감방 번호를 찾더니, 그들은 나를 좁고 어두컴컴한 복도로 끌고 갔다. 이어 서리가 내려앉은 나무 연결통로를 지나 두 번째 건물로 데려가 새 거처 안으로 밀어 넣었다.

거의 암흑에 가까운 방이었다. 출입문 위의 전구가 내는 흐릿한 빛과, 맞은편 낮은 천장 밑에 달린 작고 얼어붙은 창문에서 새어드는 희미한 빛만이 방을 겨우 밝혔다. 침상은 벽 쪽으로 접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가운데에는 철제 탁자가 있었고 그 앞에는 철도 레일 한 토막이 바닥에서 수직으로 솟아 있었다. 낮에는 의자 역할을 하고 밤에는 펼친 침상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감방은 길이가 약 2.5미터, 폭은 1.5~2미터쯤이었다. 시멘트 벽은 때와 얼어붙은 습기 얼룩으로 검게 변해 있었다. 몹시 추웠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났다. 복도의 간수들이 군용 외투와 발렌키 장화를 신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 감방이 징벌방이거나 임시 ‘콘베르트’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괜찮아.’ 나는 몸을 떨며 손바닥에 입김을 불었다. ‘밤이면 다 끝날 거야.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 시작됐다.’

그러고 나서 말 한마디 없이 배식구로 차와 설탕, 빵을 밀어 넣었다가 컵을 금방 도로 가져갔다. 걸어 다닐 수도 없었다. 공간이 없었다. 나는 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한 시간이 지나 지쳐 레일 위에 앉았지만, 너무 야윈 몸으로는 거기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프고 불편했다. 십 분쯤 지나자 자세를 버티느라 척추가 욱신거리기 시작해 쉬지도 못한 채 다시 일어나야 했다. 기분이라도 바꾸려고 레일을 넘어 반대쪽, 창문 아래에서 제자리걸음을 했다. 반 시간이 지나자 완전히 지쳐 다시 앉았지만 이번에는 5분도 버티지 못했다. 다리가 이미 너무 피곤해져서 15분쯤 뒤 다시 레일 위에 거의 쓰러지듯 앉았지만, 통증 때문에 1분 만에 일어나야 했다. 두 시간이 지나자 나는 제자리걸음도 할 수 없고 레일에 앉아 있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 축축하고 냉랭한 시멘트 관 속에서 보내야 할 하루는 아직 끝도 없이 남아 있었다. 정오에는 말없이 제법 괜찮은 점심을 배식구로 밀어 넣었다가 곧 그릇을 거두어갔다. 엉덩이와 등이 견딜 수 없이 쑤셨다. 몸은 얼어붙었고 절망이 몰려왔다.

‘그래, 됐어. 죽이라고 해! 이런 삶보다는 죽는 게 낫다. 공포스러운 순간은 1분뿐이고, 그다음에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이 레일도, 계속 서 있어야 하는 것도, 이 모든 것도 끝이야. 제발 빨리!’

저녁에는 역시 말없이 수프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배식구로 밀어 넣고는 곧 그릇을 거두어갔다. 이 특수시설에서는 다른 감옥처럼 배식구를 덜컹거리며 거칠게 내리지 않았다. 거의 소리 없이 열고 닫았다. 간수들도 “아침!”, “점심!”, “저녁!” 하고 소리치지 않았다. 그저 가득 찬 그릇과 컵을 조용히 밀어 넣고, 몇 분 뒤 배식구를 열어 손가락으로 그것들을 가리키며 돌려달라는 뜻을 표시했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들리지 않았고, 살아 있는 존재가 내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귀를 바짝 기울이면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옆 감방들에도 죄수들이 있었다. 이 차디찬 돌무덤들 속에는 살아 있는 시체들이 들어 있었다. 저녁이 되자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선임 간수가 들어와 말없이 침상의 자물쇠를 풀고 내려놓은 뒤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나는 옷도 벗지 않은 채 누워 얇은 덮개를 몸에 덮었다. 등이 끊어질 듯 아팠다. 레일에 상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그들이 나를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지하실, 탁자, 누비솜옷을 입은 남자를 떠올려도 두렵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속으로 되풀이했다. ‘빨리 오기만 해. 제발 빨리.’ 스스로를 달래려고 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러다 몸이 따뜻해졌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배식구가 부드럽게 열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깼다. 놀라 눈을 떠보니 팔 하나가 안으로 뻗어 있었고, 때 낀 손톱이 달린 붉은 손가락이 보였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 든 감정은 기쁨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침상은 다시 벽으로 접혀 올라가 잠겼다. 나는 작은 변기통을 들고 화장실에 다녀와 아침을 먹었고, 다시 끝도 없이 긴 하루와 단둘이 남았다. 제자리걸음과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레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왜 나를 총살하지 않는 거지?’ 나는 무기력하게 생각했다. ‘또 무슨 착오인가. 설마? 나는 내부감옥에서 쓰던 내 카드를 직접 봤다. 여기서 작성한 서류에 내 성을 적었을 때도 접수 담당자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아직 데리러 오지 않는 건 단지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일 거야. 요즘은 일거리가 적으니 도살도 정해진 날에만 하는 모양이지. 예전에 나세드킨이 그런 이야기를 해줬던 것도 같다. 산책도 시켜주지 않고 책도 주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가장 확실한 증거다. 나는 그냥 죄수가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수감자의 권리조차 빼앗긴 사형수다. 레오노프 장군이 내가 사면을 거부한 값을 치르게 하는 거야. 개자식. 그래도 상관없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 마지막 순간만큼은 품위를 지키며 버티겠다. 무슨 말을 외칠까? 뭘?’ 나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추위는 이미 뼛속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일어섰다 앉았다 하고,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고, 갈수록 심해지는 등 통증을 견디느라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다. ‘다 엿이나 먹으라지. 오라고 해. 나는 말없이 죽겠다.’ 영영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나간 삶은 이제 애초에 존재한 적조차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내 삶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이 삶에 붙잡아주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고통 하나가 더 늘 뿐이었다. ‘아네치카도 지금 어딘가 여기 거의 가까이에 있을 텐데. 그래도 상관없어. 빨리 죽이라고 해. 제발.’

나는 문 앞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얼어붙은 손에 입김을 불었다. 레일을 넘어가 창문 앞에서 발을 구르고, 레일 위에 앉았다. 한 번, 열 번, 백 번, 천 번. 마침내 모든 동작이 하나의 길고 끝없이 커지는 둔중한 고통으로 합쳐졌다. 죽음을 향해 가는 길에서 기다려지는 이정표라곤 아침 식사, 점심 식사, 저녁 식사, 그리고 취침시간뿐이었다. 그러면 모자와 짧은 양가죽 외투, 발렌키를 신은 선임 간수가 말없이 들어와 침상을 내리고,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이제 곧이야. 아마 오늘 밤. 아무래도 좋아. 빨리 끝나기만 한다면.’

그러나 그날 밤에도, 그다음 밤들에도 나는 총살되지 않았다.

끝나는 날짜도 정해지지 않고, 왜 수용소 대신 엄격통제 감옥으로 옮겨졌는지도 설명되지 않은 채 감옥형 복역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저 산 채로 매장된 것이었다.

제3장. 단식투쟁

그러나 나는 내 권리를 위해 싸우기로 했다. 감옥에서 죄수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는 단식투쟁이었다.

처지가 분명해진 뒤 약 한 달쯤 지나 첫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아침 점검 때 당직 경비책임자에게 내가 왜 독방에 갇혔는지, 얼마 동안 갇혀 있어야 하는지 답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책임자는 주의 깊게 듣더니 말없이 어깨를 으쓱하고 두 손을 벌렸다. 자기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당신도 모른다면 종이 한 장과 연필을 주십시오. 같은 질문을 수사국장 레오노프 장군에게 하겠습니다!”

중위는 눈을 치켜뜨고 나를 보더니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 요구를 거절한다는 뜻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뒤 여느 때처럼 배식구로 빵, 설탕, 차가 들어왔다. 나는 다가가지도 음식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문밖에서 큰 속삭임과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감방의 단식은 비상사태였다. 문이 벌컥 열리고 같은 장교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문턱에서부터 입을 열었다.

“무슨 바보짓을 하려는 겁니까, 수감자? 즉시 식사하세요!”

나는 맞은편 벽에 등을 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령합니다. 식사하세요! 들립니까? 즉시! 그렇지 않으면 당장 징벌방입니다.”

침묵. 나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가 으르렁거렸다.

“자!”

나는 침묵했다.

중위는 3분쯤 기다리더니 간수의 손에서 빵과 설탕, 차 한 잔을 받아 탁자 위에 놓았다.

“드십시오, 수감자!” 그는 친절한 아버지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세요. 차 식겠습니다! 분별 있게 행동하고 건강을 아끼십시오!”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옆걸음으로 빠져나갔다. 다시 큰 속삭임과 새로운 발소리가 들렸다. 감시구가 열리더니 그대로 열려 있었다. 특별 감시자가 붙은 것이다. 그 와중에도 서 있어야 하고 레일에 앉아 있어야 하는 고통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나는 점심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아침 식사 옆에 점심을 올려놓고 식은 차만 뜨거운 것으로 갈아주었다.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치우지도 않고 저녁에는 저녁 식사까지 더했다. 작고 얼어붙은 탁자 위에서 김과 냄새가 피어올랐다.

“드세요, 수감자, 드세요! 바깥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이렇게 자기 몸을 괴롭힐 권리는 없습니다!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어쩌면 사면을 받고 아내와 아이들을 다시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녀가 있습니까?”

나는 얼어붙은 벽에 등을 붙인 채 침묵했다.

“대답하기 싫습니까? 괜한 고집입니다. 난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임무를 할 뿐이에요. 먹어요. 당신도, 나도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 죽이 뜨거울 때 드세요!”

그날 밤 내내 감시구는 닫히지 않았다.

사흘째가 되자 나는 환자식으로 바뀌었다. 향기롭고 진한 육수가 등장했고, 죽에는 버터를 끼얹고 그 위에 군침 도는 구운 고기 한 점을 올렸다. 이제 장교와 함께 의사도 들어왔다.

“드십시오, 수감자. 몸을 약하게 만들지 마세요!” 두 사람은 눈을 들여다보며 애처로운 미소를 짓고 다정하게 으르렁거렸다.

“그만 건강을 망치십시오! 남자답게 행동하세요! 부인과 어머니가 이런 모습을 보시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이고, 이게 뭡니까! 얼마나 어리석어요! 자식들을 생각하세요. 아이들에게 좀 더 친절해지십시오. 한 입만 드세요!”

허기는 차츰 무뎌졌다. 처음 며칠 동안 코를 괴롭혀 미친 듯 침이 나오게 하던 음식 냄새도 점점 매력을 잃었다. 닷새째에는 냄새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엿새째가 되자 백발의 대령, 특수시설장이 나타났다. 회유. 협박. 부탁. 나는 돌처럼 버텼다. 진수성찬으로 뒤덮인 탁자 주위를 무기력하게 빙빙 돌았다.

엿새째 저녁, 당직 간수가 들어와 침상을 내리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슨 뜻인지 몰라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갑자기 병사들이 들이닥쳐 나를 뒤로 넘어뜨렸고, 어디선가 나타난 의무병이 고무관을 코에 집어넣어 뜨겁고 진한 고기국물을 위 속으로 붓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벌떡 일어났을 때 텅 빈 배가 팽팽히 불러오르고 기분 좋게 따뜻해진 것이 느껴졌다. 간수가 거칠게 내뱉었다.

“단식은 끝났어, 알겠나? 이미 먹였어! 이제 굶어봐야 소용없다. 그냥 앉아서 먹는 게 낫지. 알아들었어? 어?”

“알아들었냐고 묻잖아! 먹어! 안 그러면 이런 수작이 쓸모없다는 걸 알 때까지 필요한 만큼, 하루 세 번씩 코로 먹여줄 테다! 곧 아주 싫어질 거야.”

그들은 남아 있던 진수성찬을 모두 치우고 초라한 저녁 식사만 남겼다. 모두 나간 뒤 나는 탁자 앞에 앉아 식욕 좋게 먹었다. 단식으로 내 목표, 종이 한 장과 연필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성과는 없었어도 간접적인 성과는 있었다. 교도소 측이 쓰는 수법에 관해 귀중한 정보를 얻은 것이다. 얼마 동안 금식을 허용하는지, 강화감시를 어떻게 하는지, 회유에서 협박으로 언제 갑자기 전환하는지 알게 되었다. 모든 세부를 검토한 뒤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확인했다. 단식투쟁을 선언한 뒤에는 죄수를 몸수색하지 않았다. 이것은 상황을 바꾸었다. 곧 싸움이 쉬워졌다는 뜻이다. 괜히 내가 전직 정보요원이겠는가! 내 눈은 훈련되어 날카로웠다. 정보요원은 적의 요새에서 틈을 빨리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식사량을 줄여 하루에 빵 한 조각과 설탕 한 조각씩 모으기 시작했다. 빵은 숟가락 손잡이로 잘라, 감시구에서 보이지 않게 낡은 모자 속에서 조심스럽게 말렸다. 설탕 한 조각은 주머니에 넣었다. 목표는 마른빵 18조각과 설탕 18조각을 비축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단식을 선언하고, 감시자 몰래 하루 세 번씩 마른빵 한 조각과 설탕 한 조각을 먹으면서 6일을 버틴다. 강제급식 직전까지 가면 정상 식사로 돌아가고, 곧바로 다음 단식을 위한 비밀 식량을 다시 모으는 것이다.

자, 더러운 모자 속에는 마른빵 18조각이 가지런히 들어갔고, 주머니에는 손때 묻은 설탕 18조각이 굴러다녔다.

준비 완료. 전투 개시!

아침이 되자 나는 얼어붙은 작은 창 바로 아래 벽에 등을 붙이고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배식구에서는 빵과 설탕과 차를 든 손이 들어왔다.

또 똑같았다. 문밖의 급한 발걸음, 큰 속삭임. 비상사태! 감시구는 더 이상 닫히지 않았다. 강화감시에 들어간 것이다. 문이 열렸다. 그들이 들어왔다. 쉰 목구멍에서 억지로 달콤한 말이 흘러나왔다. 거친 얼굴에는 동정과 친절을 연기하려는 애처로운 표정이 붙어 있었다. 좋아, 이건 이미 다 아는 수법이다. 회유하던 사람들이 감방을 나가면서 문이 잠깐 움직이고, 간수가 감시구 덮개를 내릴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설탕과 빵을 입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제자리걸음을 하며 손가락에 입김을 불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형편없는 감옥빵을 오븐도 없이 말렸더니 마른빵이 아니라 돌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설탕과 함께 그걸 입안에 밀어 넣었지만 몰래 씹을 수가 없었다. 양 볼이 풍선처럼 불룩해졌고, 취침시간 전까지 하루 종일 얼굴을 향하고 있어야 하는 감시구에서 분명히 보일 것 같았다. 침이 입안에 가득 차 입술 밖으로 새기 시작했다. 나는 빌어먹을 돌덩이를 입안에서 돌려 빨리 반으로 깨려고 미친 듯 혀를 움직였다. 어림도 없었다. 새까만 감시구가 나를 꿰뚫어보는 듯했고 이마에는 뜨거운 땀방울이 맺혔다. 무쇠판 같은 빵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침이 가슴으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절망해서 힘껏 발을 굴리고 레일을 넘어 이쪽저쪽으로 움직였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 절망의 순간, 완전히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찰나에 갑자기 감시구 덮개가 내려갔다. 문밖에서 성냥을 긋는 소리가 들렸다. 감시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나는 즉시 손가락으로 입안의 빵돌을 돌려놓고 죽을힘을 다해 반으로 깨물었다. 다시 한 번 반으로 깼다. 입안에 공간이 생겼고 침을 삼켰다. 살았다.

나는 기진맥진해 레일에 주저앉았다. 지금만큼은 그 레일이 깃털베개 같았다.

독자에게 이 싸움에서 실수나 어설픔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 충분히 분명한지 모르겠다. 간수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다고 의심했다면 몸수색을 했을 것이고, 미리 비축한 음식은 틀림없이 들통났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당국을 속인 행위로 규정되었을 것이다. 무서운 것은 징벌방 자체보다 단식을 선언할 가능성을 잃는 일이었다. 나는 이 무기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것은 내 유일한 무기였다.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희망과 싸울 의지, 싸우고 싶은 마음을 함께 잃는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자살뿐이었다.

물론 회유 담당자들도 형식적으로만 일을 했다. 보통 나는 벽에 서 있었고 그들은 반쯤 열린 문에 몸을 붙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고, 그들은 다정한 설득이라는 연극을 거칠게 연기했다. 우리 사이에는 호화로운 미끼가 차려진 탁자가 있었다. 그들이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 음식이었다. 그래서 불룩한 내 볼도 들키지 않았다. 미리 외운 문구를 정해진 만큼 읊고 나면 끝이었다. 옆걸음으로 문밖으로 빠져나가 열쇠를 채우면 다음 당직 장교나 의사의 순찰 때까지 나는 자유였다. 감옥장은 아예 감방 안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문턱 너머 멀리서 선량한 진리를 설교했으므로 내게는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통통하고 볼이 발그레한 어린 중위가 감방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막 일을 시작했는지 모든 것을 ‘100퍼센트’ 해내고 싶은 의욕이 넘쳐 보였다. 그는 곧바로 레일 위에 앉아 반 미터 거리에서 내 얼굴을 보며 말을 시작했다. 나는 평소처럼 벽에 등을 대고 고개를 숙인 자세로 서 있었다. 판에 박힌 말을 다 한 뒤, 인상 좋은 청년은 임무를 초과달성하려는 듯 자기 식대로 말을 보탰다.

“왜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습니까? 왜 아무 말도 안 하죠? 어? 한마디라도 하세요! 고개를 드십시오, 수감자! 고개를 들고 날 보라니까요! 가족 얘기라도 합시다. 자녀가 있습니까?”

나는 입 안이 설탕과 빵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침묵했다.

“아,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다니, 이렇게까지! 벌써 닷새째 한 조각도 입에 안 댔다니! 불쌍한 사람!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왜?”

그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삼키지 못한 돌처럼 굳은 빵 때문에 볼이 혹처럼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왜 음식을 안 먹고 이렇게 자기를 죽입니까? 한마디라도 해보세요! 딱 한마디! 자!”

입안은 벌써 침으로 가득했고 씹을 기회를 얻지 못하면 곧 가슴으로 흘러내릴 것임을 알았다. 긴장과 공포, 그리고 우스움 때문에 뜨거운 땀이 다시 이마에 맺혔다.

“가엾은 단식자! 한 조각이라도 입에 넣으세요!”

마침내 발각되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 상처받은 표정의 중위가 일어나 나갔다. 나는 빵과 설탕을 삼키고 폭소를 터뜨렸다. 지금 회고록을 쓰면서 돌아보면 그 일이 당시만큼 우습지는 않다. 하지만 중위가 나간 뒤 나는 진심으로, 억누를 수 없이, 즐겁게 웃었다. 얼굴이 붉은 젊은 간수가 배식구를 열고 나를 노려보았다.

“뭘 그렇게 낄낄대?”

“너무 웃겨서 못 참겠어! 하하하!”

“웃으면 안 돼. 허가 안 됐어, 알았어?”

나는 다시 불룩했던 볼과 장교의 말을 떠올리고 또 웃음을 터뜨렸다. 레일에 앉아 배를 잡고 웃었다.

“참, 악마 같은 양반이네!” 간수도 나를 보며 웃기 시작했다. “기분 한번 유쾌하십니다, 영감님!”

나는 수사국장과 국가보안부 장관에게 진정서를 낼 종이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두 차례 했다. 또 두 차례는 다른 목적이었다. 감옥에 수감된 사람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책과 산책을 요구했다.

모두 헛수고였다.

완전히 성공한 단식은 단 한 번뿐이었다.

반 년 뒤인 1948년 가을, 모든 감옥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규정에 따라 철저한 몸수색을 받은 뒤 다른 감방으로 옮겨졌다. 첫 번째 건물의 복도, ‘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새 감방은 건조하고 비교적 밝아서 처음에는 크게 기뻤다. 그러나 곧 이 구역의 감방들이 정신이상자들을 모아놓은 곳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돌무덤 같은 정적 속에서 때때로 비명, 흐느낌, 웃음, 상상의 친척들과 나누는 큰 소리가 울렸다.

“엄마, 발류샤에게 내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해줘!” 젊은 목소리가 밤낮으로, 약 30분 간격으로 끊임없이 외쳤다. 그 목소리는 내 신경을 갉아먹었다. 겨우 진정해 다른 생각에 잠기려 하면, 살아 있는 공동묘지의 귀가 울릴 듯한 침묵 속에서 다시 같은 울먹이는 목소리가 터졌다.

“엄마, 발류샤에게 내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해줘!”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떨기 시작했다. 외침을 들을수록 더 강하고 고통스럽게 흔들렸다. 나도 미쳐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네 발로 엎드려 나도 울부짖을 것 같았다. 절망 끝에 나는 단식을 선언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요구했다. 이번에는 정말 즉시 옮겨졌다. 두 번째 건물의 먼 끝, 뜰을 향한 감방이었다. 따뜻했다. 내게는 응접실처럼 느껴졌다. 이사하는 동안 옆문 너머에서 일부러 낮춘 목소리와 웃음소리, “체크메이트!”라는 말, 체스판 위에서 말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모든 소련 감옥이 그렇듯 특수시설도 아주 교묘한 주방이었다. 온갖 종류의 요리를 조리하는 곳. 지금까지 나에게는 그중에서도 가장 매운 요리가 배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특수시설은 결코 ‘죽음의 집’이 아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감옥이라는 관점에서 너무 많은 것을 몰랐고, 끝까지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그는 물러터진 초짜에 불과했다.

결론은?

살아야 한다! 싸워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단식으로 처우를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이 무너진 순간, 오히려 내 기력이 올라왔다는 점이다. 아마 추위가 사라지고 옆 감방에서 인간의 목소리가 들린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래, 나는 독방에 있다. 침묵으로 고문당한다. 하지만 바로 옆에는 두 사람이 함께 있고, 그들은 체스를 둔다. 틀림없이 책도 읽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처우도 어느 날 갑자기 바뀌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가능하다. 그런 조건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시를 하나 쓰고, 그다음에는 곡도 붙이기로 했다. 그것을 내 찬가로 삼자. 시와 음악을 어떻게 만드는지 전혀 몰랐지만 대담하게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꽤 긴 것이 나왔다. 그러나 내게 중요한 것은 길이가 아니라 문구의 각이 잡힌 힘과 간결함이었다. 찬가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내 찬가는 오직 전투가여야 했다. 표현을 고심하고 가차 없이 줄인 끝에 마침내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완성의 경지까지 작품을 다듬었다.

그날은 장엄한 날이었다!

점심을 먹은 뒤 나는 일어나 대형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두 팔을 벌리고, 도전장처럼 울려 퍼지는 내 찬가를 공간을 향해 힘차게 불렀다.

끝까지 싸우리라,
람차 드리차 홉차차!

제4장. 새로운 목표

엄격통제 특수시설의 독방. 고독의 시험 첫해가 끝나가고 있었다.

관광객으로서 나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와 슐리셀부르크 요새의 독방을 본 적이 있었다. 어찌나 건조하고 널찍한지, 수많은 소비에트 가정이 부르기만 하면 기꺼이 들어가 살 만한 곳들이었다. 뜰에는 죄수가 매일 신선한 공기 속에서 육체노동을 할 수 있도록 맡겨지는 텃밭도 있었다. 창 아래 놓인 나무 책상, 걸상, 펜과 잉크병을 보며 나는 차르 시대의 정치범들, 피사레프와 모로조프 등이 독방에서 써낸 문학·학술 저작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은 뒤떨어지고 실로 유치했던 시대였다. 영원히 지나가버린 시대. 이제는 모든 것이 달랐다. 선진적이고 과학적이었다. 세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내가 직접 독방에 들어와 보니 이곳은 전혀 유치하지 않았고, 나를 차르 체제와 싸운 영웅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들은 실제로 법을 어긴 죄로 갇혔고,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내게는 죄가 없었다. 그래서 정신의 균형을 붙들어줄 내적 기둥도 없었다.

그들의 가족은 안전했다. 내 가족은 파괴되었다.

그들은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으며 격리기간이 정확히 얼마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재판도 없이 관리 한 사람의 독단적인 지시로 산 채 무덤에 던져졌고, 독방에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소비에트 기준이라면 죄수 열 명, 스무 명도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방에 갇혀 있었다. 나는 한가운데 레일이 박힌 돌무덤에 있었다. 내 산책공간은 레일 한쪽으로 한 걸음, 다른 쪽으로 한 걸음이 전부였다.

거기는 따뜻했다. 여기는 추웠다.

거기는 건조했다. 여기는 축축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거기서는 산책을 시켜주고 텃밭에서 일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는 며칠, 몇 주, 몇 달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빌어먹을 레일 위에 말뚝처럼 걸터앉아 있어야 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 레일을 떠올리면 척추가 쑤시기 시작한다. 그렇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미리 계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가장 무서운 것.

거기서는 책이 허용되어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읽고 또 읽고 외울 수도 있었다. 더 나아가 죄수에게는 창작의 기쁨, 즉 의식을 붙잡아둘 수 있는 모든 것이 주어졌다. 여기서 나는 완전한 무위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는 무자비한 두 손이, 일에 굶주려 반항하는 뇌를 움켜쥔다. 그 손은 뇌 속에 쇠손가락을 찔러 넣고 비틀어, 섬세하고 고도로 조직된 그 조직, 이 지상에서 자연이 만든 가장 위대한 기적을 죽처럼, 으깬 반죽처럼, 쓰레기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렇다. 나는 합리화되고 치밀하게 설계된, 완전히 현대적인 체제 속에 앉아 있었다. 쇠손가락은 솜씨 좋게 내 뇌 속에 박혀 단단히 자리 잡았다.

언제까지?

고스플란과 그 밖의 계획기관들이 세상에 나오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은 자기 삶의 조건을 미리 계산하는 데 익숙해졌다. 어떤 경우든, 어떤 조건에서든 그렇다. 죄수는 재판에서 형량의 숫자를 듣는 순간 가장 먼저 새 처지 속에서 어떻게든 편하게 자리를 잡을 방법을 머릿속으로 찾는다. 말해 무엇하랴. 교수형 선고를 받은 사람조차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수레 의자에 못이 튀어나와 있다고 해서 태연히 그 못 위에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인간이다. 누구나 시대와 가능성과 성향에 따라 자기 방식으로 그 못에서 몸을 비켜 앉는다. 예를 들어 뒤떨어진 시대의 죄수 피사레프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갇혀 날카로운 문학·시사평론을 여러 편 써냈고 심지어 출판까지 했다. 그의 형량은 애들 장난 같은 수준이었다. 고색창연한 죄수 모로조프는 당시 기준으로 받을 수 있는 형을 몽땅 받고 슐리셀부르크 요새에 갇혔지만 참고서를 산처럼 쌓아놓고 과학의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감방에서 천문학의 몇몇 새로운 명제를 예견하고 근거까지 제시했다. 그리고 우리 계몽된 시대에는 내 친구 전기기사 코탸 유레비치가 부티르카의 판자침상에서 구멍 난 외투를 뒤집어쓴 채 가상의 발전기 도체 단면 직경과 권선 수를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건축기사 골룹초프는 하루 종일 핏기 없는 입술을 달싹이며 1인용·3인용·5인용 표준 아파트로 이루어진 100층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벽돌 수를 계산했다. 부티르카에서 내 옆에 누워 있던 학자, 산부인과 의사, 유명한 항공기 설계자도 쉬지 않고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계산했다. 조용한 사형집행인 나세드킨조차 강제된 무위에 떠밀려 자기 전문분야로 시간을 보냈다. 아무 죄 없이 총살당한 소비에트 사람들을 묻는 공동묘지의 부피를 계산했던 것이다. 모두가 자기에게 할 일을 만들어냈다! 미치지 않기 위해 각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정신적 능력과 시대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자기 엉덩이를 그 못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떼어놓으려 했다.

내게도 내 나름의 능력과 가능성이 있었고, 힘닿는 데까지 그것을 이용하려 했다.

그것은 억누를 수 없는 창작욕이었다. 나의 기쁨이자 저주였다. 평생 나는 창작 구상으로 가득 찬 자루를 메고 다니거나, 임신한 여자처럼 살아왔다. 그러나 삶은 그 자루를 비우게도, 여자가 아이를 낳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 어린 시절은 힘들면서도 쉬웠다. 힘들었던 까닭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크림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옮겨져 외국어와 좋은 예절을 익히도록 남의 집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반대로 쉬웠던 까닭은 아버지가 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양육비로 적지 않은 돈을 계속 보내기로 했고, 그 돈 덕분에 어머니와 내가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중 루블화의 가치가 무너지면서 그 도금한 새장은 깨졌고, 나는 불안하고 고된 노동의 청년기를 맞았다. 열여섯 살부터 바다에서 힘든 육체노동을 하며 생계를 벌기 시작했다. 그래도 열여덟이 될 때까지 김나지움, 해양학교, 사설 미술과정을 모두 좋은 성적으로 마쳤다. 자신감과 결합된 창작계획이 가슴을 터뜨릴 듯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내전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백군에 복무하지 않기 위해 나는 혁명적 성향의 선원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났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시작되었다. 외국에서 보낸 외로운 청춘, 위험, 굶주림, 갑판과 기관실의 혹독한 노동. 나는 떠돌이가 되었고 실업자가 되기도 했으며 폭풍 속에서 배와 함께 침몰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틈만 나면 스케치를 하고 메모를 했다. 그냥 나 자신을 위해서였다. 나중에 구겨 바다에 던져버릴 것들이었다. 고되고 잔혹한 삶이 내게는 가슴 뛰는 기쁨처럼 느껴졌고, 그 빠른 흐름을 단 30분이라도 붙잡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작은 기록과 스케치는 내면의 절박한 필요였다.

그 뒤 나는 프라하의 무역대표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몸을 추스르고 잘 먹게 되었고, 복잡한 공개업무와 비밀업무 덕분에 경험이 넓어지자 내 손에 사회적 의미가 있는 정보가 쌓여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920년대 우리에게는 유럽을 잘 알고 서방의 삶을 기차 창밖에서 피상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 내부, 가장 은밀한 곳까지 직접 들여다본 저자가 많지 않았다. ‘운명이 내 손에 큰 가능성을 쥐여줬다. 활용해야 한다! 나는 글을 쓰겠다! 작가가 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려서도 아니고, 내가 천재라고 착각해서도 아니며, 돈 때문도 아니다. 시민적 의무 때문에 쓴다. 나는 전사다! 전선에 있다. 부르주아 유럽과 서방의 속물근성에 관한 유쾌하고 독한 책을 쓰겠다. 적을 향해 쏘는 한 발의 총탄이 되게 하자.’ 나는 그렇게 결심하고 일을 시작했다. 경험도 조금은 있었다. 백계 러시아 망명자들에 관한 첫 글이 1924년에 출판되었고, 이듬해에는 당대 정치문제와 연결된 문학적 에세이를 여러 편 실었다. 1927년부터는 경제잡지에도 기고했고 동시에 내 책을 위한 자료, 신문 스크랩, 사진, 급히 적은 메모, 날짜와 숫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28년 법학부 국가시험 논문인 「역사적·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본 법의 기본문제」는 거의 황홀경에 빠진 듯한 영감 속에서 썼고 결과도 성공적이었다. 그 논문은 내 떠돌이 청년기의 교훈을 정리하는 작업과도 같았다. 그때는 그저 눈앞을 지나갔고 육체로만 겪었던 모든 것이 이제 내적 의미를 얻었다. 외로운 스무 살 청년의 눈먼 뜨거운 분노가 정치적 근거를 얻었다. 나는 눈을 떴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책을 읽어서 공산주의자가 된 것도, 당 선전원이 그런 사상을 주입해서 된 것도 아니었다. 수년간의 결핍과 고통이 그 생각을 내 머릿속에 두들겨 박았다. 나는 그것을 스스로 깨닫기 훨씬 전부터 이미 공산주의자였다. 내 의식 속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기관실의 벌겋게 달군 쇠지렛대로 새겨졌고, 갑판 위를 넘어오는 얼음 같은 파도의 포효로 굳어졌다.

“원고를 모스크바에서 보내준 겁니까?” 교수가 입을 살짝 벌린 채 겁먹은 듯 물었다. 그 질문은 내게 보상처럼 느껴졌다. 당연하지. 나는 심장의 피로 썼고, 그래서 잘 썼다는 확신이 있었다. 메마른 연구논문이 아니라 전투적인 정치적 호소문이 나왔던 것이다.

1930년 초가 되자 작은 책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나는 모스크바로 돌아가 대외무역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내 책을 세상에 내놓고 싶어 안달이 났다. 아카데미 추천서도 이미 손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1930년 1월의 어두운 밤, 공원에서 열린 비밀 접선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믿기 어려울 만큼 기상천외한 제안을 받았다. 프라하에서 모스크바로 떠난 것처럼 꾸민 뒤 완전한 지하로 들어가 소비에트 정보요원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세계의 모든 나라가 내 앞에 열릴 터였다! 5년쯤 세계를 돌아다닌 뒤 모스크바의 아카데미로 가면 된다. 다만 그때는 더 경험 많고 더 필요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하루 종일 음식에 손도 대지 못한 채 우리 안의 짐승처럼 방 구석에서 구석으로 오갔다. 밤이 되자 원고와 문학자료를 모두 태워버렸다. 다음 비밀 접선에서 말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출발 준비가 됐습니다.”

7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보기만 했다. 그러다 다시 자료를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가 사용하던 여권에 따라 여러 언어로 암호화한 첫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이제 그것은 청년기의 혈기 어린 정치 팸플릿이 아니었다. 여전히 정치적이고 독하고 발랄했지만, 훨씬 높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어진 인생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었다. 내 삽화도 함께 실릴 예정이었다. 삽화는 해외에서 생생한 인상을 받은 직후 바로 준비했다. 말하자면 현장에서 스케치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인쇄용 판까지 주문해 모스크바에 돌아올 때는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친구들과 검토자들은 대체로 글과 그림을 좋게 평가했다. 그들의 지적에 따라 최종 원고를 다듬고 출판사에 넘길 준비를 했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승리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1938년 체포되었다. 원고와 인쇄판은 압수되어 파괴되었다.

수용소에 들어간 지 2년째 되는 해부터 다시 조심스럽게 자료를 모으기로 했다. 처음에는 머릿속에만 담았다. 그 뒤 대담해졌다. 1943년부터 실제로 글을 쓰고 그림도 그렸다. 상부의 어리석음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쓰고 그린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보고 싶다는 사람에게 모두 보여주었다. 내 그림은 압수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간부들이 자기 몫으로 주문까지 했다. 그들은 그것을 잡지 『크로코딜』의 풍자를 흉내 낸 유쾌한 수용소 그림 정도로 보았다. 특히 이런 수채화를 좋아했다. 수용소 누더기를 걸친 초록빛 인간 해골이 거대한 말뼈를 손에 들고 주방 옆 쓰레기더미 위에서 한쪽 다리로 서 있다. 배경에는 감시탑이 있고, 철조망에 걸린 커다란 분홍색 달이 떠 있다. 친절한 아저씨들은 진심으로 웃어대며 자꾸 새 그림을 주문했다. 특히 내가 한 가지 정확하고 생생한 세부를 보탠 뒤에는 더 좋아했다. 뼈를 든 누더기 해골이 자기 발밑에 오줌까지 누게 만들고, 피와 눈물로 충혈된 미친 눈을 가로등만큼 크게 그려놓은 것이다.

“영락없는 장애인 막사의 펠라그라 환자 수용소 놈이군!” 체제담당 책임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하고 그림 구석에 서명과 도장을 찍었다. “딱 『크로코딜』이야! 웃다가 배 터지겠어.”

해마다 도장이 찍힌 자료와 찍히지 않은 자료가 글과 그림으로 쌓여갔다. 나는 갈수록 뻔뻔해져, 도장 찍힌 한 장을 앞에 두고 도장 없는 두 장을 숨겼다. 인간에 관한 기록이 쌓였고, 정리되고, 다듬어졌다. 내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직접 비평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잘 위장하고 순서를 뒤섞은 회고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초고 일부는 나를 동정하던 자유인 의사 Z. N. 노소바에게 수용소 밖으로 빼내달라고 맡겼고, 일부는 내 수용소 아내에게 맡겼다. 바로 그 무렵 안나 미하일로브나는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면서 드레스 밑에 묵직한 꾸러미를 숨겨 검문소를 통과했다. ‘반혁명분자’에게 그것은 목숨을 건 영웅적 행동이었다. 다시 형을 받았다면 그녀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자유인 의사는 나중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아내는 내가 석방될 때까지 모든 것을 보관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조각조각에 불과했다. 전체 원고와 그림은 수용소에서 내가 직접 갖고 있다가 1947년 말 갑작스럽게 모스크바로 호출되었을 때 내 손으로 불태웠다.

이제 엄격통제 특수시설의 독방에서, 11년의 수감생활 동안 천 번 수색당하고 백만 번 심한 굴욕을 겪은 나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선택 앞에 놓여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으로, 무엇을 위해?

단식으로 책과 산책을 얻어낼 희망마저 사라지자 날카로운 절망이 덮쳤다. 나는 얼마 동안 산 채로 묻혀 있는 것인가? 1년? 10년? 14년 전부? 숫자 하나만 알 수 있다면! 그 성스러운 숫자를! 그러면 모든 것이 얼마나 달라질까. 남은 형기 전부를 여기서 보내야 한다는 통보라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안도해서가 아니라 정말 기뻐했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불확실성만 끝난다면 산 하나가 어깨에서 내려가는 기분일 테니까. 3년쯤이라면 어렵게나마 버텼을 것이다. 앞으로 11년을 더 여기서 보내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렇다면 나는 분노로 이를 갈며 자살했을 것이다. 사람은 희망이 있을 때만 살 수 있다. 희망이 사라졌을 때는 죽어야 한다. 하지만 이 악마 같은 불확실성이라니! 합리화 전문가들이 고안한 가장 정교한 고문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렇다고 자살, 즉 무기를 내려놓는 것은 아깝고 너무 이르다. 그것은 비겁함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결심했다. 노동으로 나를 구해야 한다!

아주 긴 회고록을 쓰자. 생생하고, 화려하고, 재미있는 책을. 종이도 펜도 없이. 머릿속에서.

그렇다, 그렇다. 수사관의 망치에 망가졌지만 아직 살아 있는 이 머릿속에서.

출구는 단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햇빛의 세계로 보이지 않게 빠져나가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싸움을 뜻했다.

제5장. 아프리카 여행

우선 작은 단서를 하나 달아야겠다. 이 장은 「감옥성 정신병」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는 특수시설의 독방에 장기간 머문 결과 건강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를 서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순전히 의학적이다. 전문용어를 피할 수 없고, 질병의 증상과 회복 과정을 묘사하는 대목이 많은 독자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쩌겠는가! 나는 그런 묘사가 어울리지 않는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내 임무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환경을 자세히 묘사해놓고 그 환경에 인간의 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침묵하거나 얼버무리는 것은 어리석다. 주제 자체가 나를 지루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앞에서 이미 썼듯이, 이 감방에 들어온 지 7개월째가 되는 첫날 밤이면 죄수는 “짐 챙겨!”라는 말을 듣고 ‘역’으로 끌려나간다. 알몸이 된 뒤 철저한 몸수색을 받고 다른 감방으로 옮겨진다. 첫 두 번의 반년, 즉 1년 동안 나는 아래층의 어둡고 축축하며, 무엇보다 추운 돌무덤 같은 감방들에서 지냈다. 나는 특수시설의 감방은 전부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세 번째 이동 때는 뜰을 가로질러 호텔 형태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가 아주 작은 모서리 감방에 밀어 넣어졌다. 놀랄 만큼 건조하고 따뜻하고 천장이 높고 밝은 방이었다. 아늑한 새집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래층의 얼어붙은 반암흑 돌무덤에서는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며 총살을 기다리기도 하고 단식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 명랑한 새집에 들어온 나는 만족스럽게 손을 비볐다.

이 감방은 원래 건물을 지을 때부터 설계된 것이 아니었다. 수도원 숙박소를 엄격통제 감옥으로 개조하면서 억지로 떼어 만든 방이었다. 원래 창문이 넓었기 때문에 아래쪽을 벽돌로 막고도 위에 충분한 공간이 남아 햇빛이 내 깎은 뒤통수를 비출 수 있었다. 나는 1년 내내 몸에서 떼지 못했던 모자와 두꺼운 겉옷을 기쁜 마음으로 벗어버렸다. 그뿐 아니었다. 접이식 침대는 옆 감방과 맞닿은 칸막이에 붙어 있었고, 비스듬한 모서리는 탁자 맞은편에 삼각형 모양의 작은 산책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정상적인 걸음으로는 한 걸음. 보폭을 절반으로 줄이면 두 걸음, 4분의 1로 줄이면 네 걸음이었다. 이것만 해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처럼 제자리걸음을 할 두 장소도 남아 있었다. 감시구 아래 문 앞과, 밝은 창문 아래였다. 문 앞에서는 코를 감시구 쪽으로 향해야 했고, 창문 아래에서는 얼굴을 방 전체 쪽으로 돌려야 했다. 풍경이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분명한 변화였다. 나는 늘 큰 키와 튼튼한 체격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이번만큼은 처음으로 후회했다. 새집에서는 아무래도 진짜 새가 사는 편이 더 편리했으니까. 그래도 이곳은 밝고 따뜻했다. 기운이 솟았다. ‘내가 왜 풀이 죽었지?’ 나는 스스로에게 되풀이했다. ‘노릴스크에 도착한 첫날 저녁,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에 수감생활이 불멸자들의 향연이 된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빨리 쓰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뭘 쓰지? 흠. 심각한 문제군.’

수감 2년째, 노릴스크에서 다른 곳으로 호송되던 중 내 품에서 죽어가던 한 죄수가 내게 이런 생각을 심어주었다. 아무 죄 없이 유죄판결을 받은 우리 소비에트 사람들은 고문자들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씹고 또 씹는 데서 위안과 버팀목을 찾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본 모든 것을 세심하게 기록하고, 중요한 것을 골라 정확히 기억하며, 일어난 일의 원인과 의미를 더 깊고 더 잘 이해하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것을 넘어 사회적인 차원으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역사의 재판을 위해 소중한 증언자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 석방될 때까지 살아남아 수백만 소비에트 사람들에게 스탈린 시대의 범죄에 관한 진실을 전하고, 그런 일이 미래에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다. 나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수사와 재판에 관한 회고록은 이미 1941년 여름 시블라크 마린스크 지부에서 구상했다. 다만 그것은 석방 뒤에야 쓸 수 있다. 노릴스크와 그곳에서의 호송에 관한 책은 수슬로보에서 이미 구상했고 일부는 실제로 썼다. 마린스크와 수슬로보에 관한 자료는 내면적으로 더 소화해야 한다.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지금 나는 특수시설에 갇혀 ‘고독의 시험’에 관한 책의 자료를 모으고 있다. 내 자료창고는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외부세계와 단절된 생활은 사건이 없기 때문에 묘사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사건을 만들면 된다. 멀고 긴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 선명한 추억의 아름다움과 무덤에 갇혀 앉아 있는 공포를 결합하자. 결정했다. 아프리카에 관한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머릿속으로 먼저 쓰겠다. 언젠가 자유의 몸이 된다면 그 사이를 이어주는 부분을 덧붙이는 것은 오래 걸리지도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책이 나올 것이다. 바로 이 특수시설에 관한 책 속에서 회색빛의 차가운 현재와 밝고 뜨거운 과거를 자연스럽게 교차시키고, 완전히 서로 다른 두 재료를 흥미롭게 엮어낼 수 있다!

그렇게 내게 삶의 목표가 다시 생겼고, 함께 살고 싶은 욕망도 돌아왔다. 나는 서둘러 밥을 먹고 곧바로 벽에 등을 붙여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안드레이 마닌. 러시아인으로, 내전 말기 우연히 터키에 흘러들어간다. 구체적인 소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학 시절 친구 코탸 유레비치의 전기에서 빌린다. 우연히 네덜란드인 한리 마닝 명의의 서류를 얻게 되고 대학을 마친 뒤, 비정치적인 고용인으로 세계를 돌아다닌다. 미국 통신사 「세계뉴스」의 기자이자 화가, 사진가다. 구체적인 소재는 내 삶의 경험과 우리 정보조직에서 일했던 네덜란드 화가 한리 피크의 이야기에서 가져온다. 피크는 아프리카로 가기 전에는 평범하고 조용한 시민이었지만 식민지 현실의 공포를 보고 양심이 깨어나 지상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고 싶어졌으며, 결국 혁명가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현실의 한 피크는 우리 조직에 들어왔다. 소설 속 한 마닝은 마드리드 전선으로 갈 것이다. 나는 마드리드에 가본 적도 있고 스페인도 충분히 알고 있다. 대비를 위해 콩고의 한 젊은이 이야기도 넣어야 한다. 이건 내 직접 관찰을 바탕으로 한다. 책의 첫 번째 층위는 두 주인공의 성격이 발전하는 과정, 두 번째 층위는 콩고의 사람과 자연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소설의 골격이다. 안드레이-한은 왜 아프리카로 가는가? 간단하다. 미국 통신사가 자극적인 기삿거리를 모으라고 그를 콩고 오지로 보낸 것이다. 그는 현대의 검투사처럼 떠난다. 무기는 만년필과 사진기다.

좋아. 됐다.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시작하자!

독자가 이 일의 기술적 어려움을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쓰려는 것은 옛 연대기 작가 피멘처럼 별 고민 없이 그날의 소식을 종이에 옮기는 살아 있는 텔레타이프 같은 연대기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는 본 것을 시간순으로 적는 방식은 버리기로 했다. 아프리카 여행을 진지하게 보고하려면 정확한 자료가 필요하지만 특수시설의 감방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훨씬 더 어려운 과제를 택해야 했다. 잘 골라낸 사례들을 통해 현실 전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정확한 자료가 없더라도 사례를 올바르게 선택한다면 충분한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내 과제는 더 어려워진다.

종이도 펜도 없이 감옥에서 소설을 쓰겠다는 것은 아주 소비에트적인 발상이었다. 그 아이디어를 준 사람은 작가 브루노 야센스키였다. 우리는 1938년 루뱐카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는 다음 심문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내 운명이 걸린 상부와의 면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얻어맞아 만신창이가 된 야센스키는 미치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다음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는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인간은 피부를 바꾼다』와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의 작가는 전문작가였다. 두 편의 소설을 만든 경험이 있는 진짜 작가라면 머릿속으로 세 번째든 열세 번째든 더 쉽게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진짜 작가가 아니었고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다. 그렇지만 내가 만드는 것이 평균적인 문학작품 수준과 너무 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상상의 독자가 내 작품을 읽다 잠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표지부터 주석과 목차까지 모든 세부를 생각해야 했다. 자료를 장으로 나누고, 장을 다시 절로 나눈 다음, 아무것도 잊지 않으면서 머릿속으로 본문을 쓰기 시작해야 했다. 부족한 점을 고치고, 빠진 것을 찾아내고,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완성도를 추구해야 했다. 그러는 내내 전체 구성과 각 장·절의 예정 분량을 머릿속에 유지하고, 등장인물마다 말투를 지키고, 서술자의 문체도 유지하며, 대화를 날카롭게 다듬고, 효과적인 시작과 끝맺음을 찾아야 했다. 엄청난 노동이었다! 상상의 원고가 열 쪽쯤만 되어도 머릿속은 ‘이걸 잊으면 안 돼’, ‘저 대목 뒤에는 이걸 꼭 보태야 해’ 같은 것들로 부풀어 올랐다.

여름이 되자 내 새집에는 내게는 기쁨이자 그들 자신에게는 불행인 두 마리 거미가 자리 잡았다. 이름을 이바노프와 치페로비치라고 붙였다. 무당파인 이바노프는 작고 검고 털이 많았다. 거미줄을 천천히 쳤고, 그물은 성기고 굵어서 작은 날벌레들이 멀리서도 알아보고 경멸하듯 지나갔다. 붉은빛에 다리가 긴 치페로비치는 당원이었다. 그는 모든 계획을 초과달성했다. 순식간에 작업을 끝냈지만 그만큼 질이 나빠 날벌레들이 거미줄을 찢고 씩씩하게 날아갔다. 당원과 무당파 두 동지는 늘 굶주렸다. 나는 직접 날벌레를 잡아 완성된 먹이를 거미줄에 올려주었다. 나는 둘을 아주 잘 알게 되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을 걸었다. 이 바보들은 꿈에도 나왔고, 꿈속에서도 어느 쪽이 이바노프인지 어느 쪽이 치페로비치인지 정확히 구별했다. 자, 머릿속으로 책을 쓰기로 했다면 먼저 어떤 방법을 택할지 결정해야 했다. 이바노프 방식인가, 치페로비치 방식인가? 나는 둘의 중간을 택해 서두르지 않고 질 좋은 재료를 짜고 싶었다. 하지만 특수시설과 이 귀여운 새집의 조건에서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래의 책의 골조를 모든 세부까지 머릿속으로 세우고 나자, 긴장된 기술작업에서 예술창작으로 넘어가는 장엄한 순간이 왔다. 죽은 철제 구조물에 살아 있는 삶의 조직, 떨리는 살을 채워 넣는 순간이었다. 그 유명한 아침에 나는 서둘러 몸을 씻고 아침을 대충 삼킨 뒤 창문에 등을 대고 섰다. 오전 전반에는 철창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불멸자들의 향연 만세!” 나는 자랑스럽게 외치며 열병식처럼 몸을 곧게 세웠다. “아바쿠모프 장관과 레오노프 소장이 지금 나를 보면 좋겠군! 분통이 터져 죽을 텐데, 안 그래? 하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전통에 따라 새날과 깃발 게양은 찬가로 시작해야지. ‘끝까지 싸우리라, 람차 드리차 홉차차!’ 좋아. 출발!”

내 앞에는 더러운 벽과 그 벽에 잠겨 붙어 있는 접이식 감옥 침대가 있었다. 죽은 두꺼비 같은 회녹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침대 앞에는 레일이 솟아 있었고, 레일 앞에는 철제 탁자가 있었다. 나는 탁자 바로 앞,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 이제 현실에서 떨어져 먼 과거로 옮겨가야 했다. 힘을 주고 숨을 골랐다. 시작했다.

“제1장. 신사분들의 오락.”

잠깐 멈추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낮게 이어갔다.

“안드레이는 갑판의자 등받이에 사진기와 쌍안경, 스케치와 메모용 수첩이 든 가죽 케이스를 걸어두고…”

아니, 코앞에서 죽은 두꺼비를 바라보면서 먼 아프리카를 말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눈을 꼭 감고 한참 동안 서서 그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5분이 지났다. 10분. 20분. 30분. 마침내 나는 천천히 이 삶에서 떨어져나와 다른 삶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뒤로는 흘러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통스럽고 힘겹게, 이윽고 넉넉하고 자유롭게.

두 달쯤 지났다.

이제 나는 진심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에 일어났다. 좋아하는 놀이를 빨리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부르고 몰아붙였다. 세수와 식사에 쓰는 1분 1분이 아깝고 되돌릴 수 없는 손실처럼 느껴졌다. 수감생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기분 좋은 흥분으로 온몸이 뛰었다. 앞으로 하루 종일 창작노동을 할 수 있으니까! 시작하자! 눈을 감기만 하면 햇빛과 야자수, 흑인 짐꾼들, 그들의 어깨 위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 들것, 그 위에 누운 수염 난 벨기에인들이 더러운 헬멧을 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벽 앞에서 눈을 감고 서 있기만 해도 바로 코앞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을 묘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말이 자연스럽고 쉽게 흘러나왔다.

나는 속삭였다.

“네 번째 단편. 카사이의 마을.”

잠깐 멈추었다. 계속했다.

“‘좋아.’ 안드레이는 생각한다. ‘열대 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를 어떻게 캐는지 이제 볼 수 있겠군.’ 그는 가슴에서 사진기를 꺼낸다. 사냥감을 향해 뛰어들 준비가 된 사냥개 같은 표정이다. 아래에는 푸른 계곡이 펼쳐져 있고, 파랗게 반짝이는 개울들이 줄무늬처럼 가로지른다. 안드레이는…”

다시 한두 달이 지났다.

눈을 감는 일은 때가 되어 딱지가 떨어지고 분홍빛의 건강한 살이 드러나듯 어느새 필요 없어졌다. 나는 구석에 등을 대고 서서 앞을 똑바로 보았다. 감옥 벽과 죽은 두꺼비 색 침대가 보였다. 내 눈은 완전히 건강했다. 실제로 바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시신경은 자극을 전달했고 뇌의 시각중추에는 ‘앞에 죽은 두꺼비가 있다’는 신호가 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중추, 왼쪽 관자-두정 부위, 예전에 수사관 솔로비요프의 솜과 붕대로 감싼 망치가 마음껏 돌아다녔던 바로 그 자리에서 이제 꺼지지 않는 자극의 불씨가 점점 더 밝게 타올랐다. 그 힘은 시각중추에서 오는 신호보다 더 강하고 적극적이며 공격적이었다. 지속적인 자극이 순간적인 외부신호를 억눌렀다. 나는 눈을 활짝 뜨고 벽과 침대를 바라보면서도, 적도림 속의 작은 호수를 아주 선명하게, 생활의 가장 작은 세부까지 보았다. 뜨겁고 갈색인 물 위로 나무들이 늘어져 있고, 갈색 피부의 배 나온 작은 사람들이 물에서 놀고 있다. 피그미족, 지구에서 가장 작은 사람들이다.

장면이 너무 선명해 글은 쉽게 써졌다. 얼마나 간단한가! 세부만 기록하고 줄거리를 발전시키면 된다. 결국 이것은 작가의 일이 아니라 묘사자의 일이다. 눈앞을 보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상의 종이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 간단하고 쉽다!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섯 번째 단편. 석기시대의 손님이 되어.”

잠깐 멈추고 계속했다.

“피그미는 물 위로 길게 뻗은 거대한 나뭇가지를 달리다가 한 손으로 매달렸다. 이빨 사이에는 활과 화살을 물고 있었다. 그러다 양치식물 덤불 속으로 뛰어내려 사라졌다. 보초였다. 안드레이는…”

다시 한두 달이 흘렀다.

나는 왼쪽 관자-두정 부위의 둔한 통증 때문에 잠에서 깼다. 이제 머리는 끊임없이 아팠다. 밤에 일하지 않을 때는 조금 가라앉았지만 아침에 눈을 뜨기만 하면 급격히 심해졌다. 방 구석 벽에 등을 대고 서서 일을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그랬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 일했다. 감옥과 죽은 두꺼비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이미 한 번 살았던 것을 깨어 있는 상태에서 다시 살아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의 나는 임무에 관한 생각에 몰두해 주변을 자주 보지 못했고, 미래 속에서 살았다는 점이다. 이제는 과거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 주변을 보지 못했다. 때로는 바지를 머리에 쓰려고 하거나, 신발을 어느 방향으로 신는지, 밑창 쪽으로 발을 넣는지 발이 들어가는 구멍 쪽으로 넣는지 몰라 당황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모든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게는 바지도 신발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여기에는 나 자신도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기계적인 습관, 하루 일과를 무의식적으로 수행하는 자동동작뿐이었다.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더 이상 ‘나’, 즉 내 의식이 아니라 내 몸과 그것을 움직이는 무의식적 신경기제였다. 무언가가 잘되지 않을 때에만 나는 짜증을 내며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억의 필름을 끄고, 감각기관을 켜서 그 신호에 의식적으로 반응해야 했다. 저곳에서 이곳으로 슬프게 돌아와, 자유인에서 죄수가 되어야 했다.

“여덟 번째 단편. 밀림 위의 비행.”

잠깐 멈추고 계속한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아프리카 적도림은…”

“화장실 나갈 준비! 빨리!” 열린 배식구에서 간수가 큰 목소리로 쉭쉭거렸다. 이게 뭐지? 나는 몇 초 동안 그를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 누구인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아침이다. 빨리 옷을 입어야 한다! 누더기 옷 속에서 허둥대며 간신히 몸을 집어넣고 변기통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그러나 문이 닫히자마자 주변세계와 이어진 실이 끊어졌다. 변기통을 손에 든 채 화장실에 서 있었지만 내 눈에는 이미 아래의 짙은 녹색 평원, 거대한 나무 꼭대기들만 보였다. 여기서 보면 살짝 움직이는 얼룩처럼 보이는 그것들.

“왜 멈춰 있어? 볼일 봐! 세수해! 빨리!”

명령은 들렸고 나는 따랐다. 하지만 뇌 속의 자극초점은 이제 거의 전능했다. 외부생활의 신호를 다시 지워버렸다. 내 ‘나’의 주인이 되어버린 어떤 목소리가 보이지 않는 책의 문장을 권위적으로 받아쓰게 했다.

“감방으로 돌아갈 준비! 취침시간까지 화장실에 앉아 있을 셈이야? 나가!”

“왜 변기통을 두고 가? 가져가! 뚜껑은?”

“빵과 아침 받아! 왜 서 있어? 숟가락 들어!”

“점심! 빨리! 자지 마! 그릇 두 손으로 잡아!”

“저녁! 들려? 저녁이라고! 어디 가? 차 받아!”

“취침! 왜 서 있어? 침상 벌써 열어놨어! 누워!”

‘열어놨다고?’ 나는 머릿속으로 어리둥절해했다. ‘그럼 저들이 이미 감방에 들어왔다는 건가. 이상하네! 나는 전혀 못 봤는데. 그리고 하루가 다 지났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다시 한두 달이 지났다.

이제 내 삶은 지옥으로 변했다. 지옥. 지옥. 지옥. 잠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잠들기는 했지만 꿈속에서도 무자비한 목소리가 꺼지지 않았다. 쉬게 해주지 않았다. 고문자이자 사형집행인처럼 계속 말하고 또 말했다. 깨어 있을 때와 잘 때의 차이가 사라졌다. 나는 완전히 그곳, 의식의 저편으로 이주했고, 아주 가끔 엄청난 의지력을 짜내 이곳, 사랑스러운 특수시설로 돌아오려 했다. 저주받은 지옥에서 원하는 감옥으로 탈출하려는 시도였다.

나는 실제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 싸웠고, 거기에 매달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 목소리가 나보다 강했다. 나를 다시 경계 너머로 밀어냈다. 전에는 뇌의 작업을 기계적으로 바꾸면 강박적 사고를 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숫자를 세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암송하면 그 목소리의 입을 막을 수 있었고 잠시 조용해졌다. 세기나 암송, 노래를 멈추는 순간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이제는 달랐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도 그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말했다.

한 명의 나는 그 목소리였다. 내가 보는 것을 묘사하고 과거 그 자체가 된 목소리. 다른 한 명의 나는 의지를 짜내 현재를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탁자 앞에 앉아 죽 한 숟가락을 들고 나는 열에 들뜬 듯 스스로에게 되풀이했다.

“숟가락. 숟가락, 숟가락. 죽, 죽, 죽. 나는 지금 숟가락을 들고 있다. 들고 있다. 들고 있다.”

그러나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열 번째 단편. 카탕가의 광산.”

그리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문장을 받아쓰기 시작했다.

강박적 사고가 생겨나고 강해져 마침내 완전히 자리를 잡는 과정과 나란히, 두 번째 고통스러운 병적 과정도 시작되었다. 언어신호, 즉 단어를 사용해 생각하는 능력이 구체적 사고, 다시 말해 사물이나 상태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직접 떠올리는 방식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인류는 구체적 이미지로 생각해야 하는 필요에서 벗어나 단순화된 체계를 만들어냈다. 이미지가 개념으로 바뀌고, 그 개념은 약속된 소리의 조합으로 신호화된다. 예를 들어 네 개의 다리 위에 평평한 판이 놓인 물건 전체를 머릿속에 매번 구성하는 대신 ‘탁자’라는 짧은 소리로 대신한다. 이제 내 뇌에서는 수천 년 동안 축적된 경험이 사라져, 피곤한 이미지 사고로 되돌아갔다.

통제를 벗어난 뇌는 서투르고 느리게 계속 작동했다. 과거에 내가 보았던 것을 다시 살았다. 내 의지와 반대로. 아니, 의지 자체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뇌는 의지 대신, 의지와 무관하게 혼자 씹어댔다.

다시 반 년이 지났다. 또 감방을 바꾸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이미 감옥에 없었다. 나는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있었다.

제6장. 귀환

저쪽에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1951년 봄, 독방 생활 3년째였다. 회복은 느리고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과로에 지친 뇌가 꺼져버린 뒤 조금씩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회복이 어느 단계에 이르자 의식이 다시 켜졌다. 예전의 자극초점도 다시 타올랐지만 힘이 너무 약해져 외부 자극들이 서서히 그것을 눌러버렸다.

외부 자극이 더 강했던 것은, 아무리 끔찍한 기억도 현실보다 더 끔찍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기억한다. 나는 약품 선반이 놓인 작고 하얀 방에서 걸상에 앉아 있었고, 흰 가운을 입은 두 사람이 내 눈을 들여다보며 이것저것 하고 있었다. 시야가 좋지 않았다. 눈 안쪽에 떠다니는 듯한 갈색의 흐림이 머리를 돌리거나 안구를 움직일 때 함께 흔들렸다. 창밖을 보면 철창살과 창틀이 하늘 가장자리에서 한쪽은 보랏빛 푸른색, 다른 쪽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보였다. 눈은 심하게 아팠고, 안구를 살짝 눌러도 통증이 느껴졌다.

“디오닌을 주세요, 이반 페트로비치.”

“예, 선생님.”

그들이 눈에 액체를 떨어뜨렸다. 눈 위를 칼로 긋는 듯한 통증이 왔다. 나는 아파서 신음했다.

“반응을 잘하네요, 선생님.”

“그래. 요즘은.”

“회복되고 있습니까?”

“말하기 어렵네. 녹내장이 진행 중이야. 적출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두 눈 다요, 선생님?”

“물론.”

나는 멍하니 듣고 있었다. 말들이 어딘가 벽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어왔다. 녹내장. 적출.

‘적출이 뭐였지?’ 나는 둔하게 생각했다. ‘아는 단어인데. 적출… 적출… 안 돼, 다 잊어버렸어.’

병사들이 양쪽에서 팔을 붙잡고 나를 감방까지 데려갔다. 눈 속에서 천천히 흔들리는 갈색 조각 너머로 뜰과 풀, 산책장 울타리, 막 새잎이 돋은 나무들이 보였다. 어딘가 위층으로 끌려 올라가 편안한 걸상에 앉혀졌다.

“드세요. 점심 왔습니다. 환자식으로 바뀌었어요.”

기장죽 위에 놓인 구운 돼지고기 한 조각을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눈은 견딜 수 없이 아팠지만 배고픔은 느껴졌다. 숟가락을 찾아 먹기 시작했다.

‘적출이 뭐지?’

특수시설의 따뜻하고 햇빛 좋은 날이 기억난다. 몸 상태가 조금 나아져 있었다. 병사들이 양팔을 붙잡고 나를 산책장으로 데려가 의자에 앉혔다. 나는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움직이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작은 산책 칸막이 안에서도 길을 잃은 듯 어색하고 불편했다. 쓸쓸한지 무서운지도 분간되지 않았다. 가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눈 속의 갈색 조각들이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려 하늘이 얼룩덜룩해 보였다. 불쾌했다. 회색 감방의 반어둠 속에서는 그런 조각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감방은 더 좁고, 그래서 오히려 아늑했다. 그러다 시야 한쪽이 옅은 초록빛, 다른 쪽이 붉은빛으로 물든다는 것을 문득 알아차렸다.

“내 눈이 왜 이러지.”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프고, 잘 안 보여.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머리는 아직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도 돌아가기 시작했다.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나 녹내장이구나. 그리고 또 뭐가 있었는데…”

뇌를 뒤덮은 회색 거미줄 속에서 갑자기 이상하고 낯선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뜻이 기억났다. 적출, 그것은 안구를 수술로 제거하는 것이다. 메스로 눈알을 안와에서 잘라내는 것.

물론 특수시설에서 보낸 두 번째 해 동안 내가 줄곧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걸어 다녔고, 먹었고, 당연히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사고는 감정이 빠져 평평해져 있었다. 그래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 몇 달은 의식에 구멍이 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회복은 이미 보이지 않게 준비되고 있었고, 이쪽 세계로 돌아온 첫 번째 선명한 기억이 진료실과 녹내장에 관한 대화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실명할 위험에 놓였고 의사가 두 눈을 모두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 순간, 나는 마치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극도로 강한 감정이 솟구쳤다. 마치 사납고 크게 휘두른 채찍이 내려친 것 같았다. 반쯤 죽은 말이 앞으로 튀어나가 수레를 진창 구덩이에서 끌어냈다.

그 순간 내 특유의 삶에 대한 의지가 한꺼번에 돌아왔다.

“안 돼, 안 돼.”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눈은 내가 써야 해. 감옥에서 눈 없이 어떻게 살아? 밟혀 죽을 거야. 쪼여 죽을 거야. 감옥에서 눈이 없으면 큰일이다. 여기서는 무력함이 죽음보다 더 나빠!”

거대한 저항의 충동과 살고 싶은 갈망, 건강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싶은 욕망, 무슨 일이 있어도 모든 것을 이겨내고 다시 승리하겠다는 결심이 나를 휩쓸었다. 뇌 안에 새롭고 강력한 자극초점이 타올라, 사그라들고 있던 이전의 초점을 완전히 눌렀다. 병적인 기억놀이가 끝났다. 뇌는 새롭게 일할 먹이를 얻었고, 나는 서서히 강박적 사고의 지배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내 감방은 예전에 부유한 순례객이 머물던 호텔방이었을 것이다.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선 뒤 큰 창문에 철창을 달았지만, 싱싱하고 향기로운 나뭇잎은 그 사이로 집요하게 감방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공기는 충분했고 공간은 더 넉넉했다. 나는 하루 두 번 찬물로 몸을 닦고, 열 번쯤 체조를 했다. 어느 날 전혀 뜻밖에도 문 배식구로 책 한 묶음이 들어왔다. 나는 하마터면 책들에 입을 맞출 뻔했다! 물론 읽어서는 안 되었지만, 책 더미가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라앉고 기뻤다. 나는 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어루만지며 나무 마룻바닥을 걸어다녔다. 동시에 내 건강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손실을 계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사가 끝난 뒤 레포르토보 감방에서 했던 것과 똑같았다.

맥박으로 보아 혈압이 매우 심하게 올라가 있었다. 200을 훨씬 넘었다. 두통과 걸음의 불안정은 거기서 왔다. 녹내장도 일부는 그 때문이었다. 물론 모든 고혈압 환자에게 녹내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내 경우에는 세 요소가 겹친 결과라고 보았다. 심문 때 머리에 맞은 구타, 수용소 10년과 특수시설 2년이 만든 신경계의 손상, 그리고 머릿속으로 책을 쓰느라 생긴 과도한 긴장.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실인증도 나타났다. 나는 간수나 수프 그릇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사람들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에피소드가 며칠 간격으로 생기는지 세기 시작했다. 관찰해보니 하루나 이틀 간격으로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평균치를 잡아두고 호전되는 경향이 나타나는지 지켜봤다. 두세 번, 에피소드가 3일이나 4일째에야 반복되는 것을 보고는 기운이 솟았다. 또 다른 증상도 찾아냈다. 공간에서 방향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저녁에 불을 켜면 창문으로 모기가 들어왔고, 나는 그들을 실험동물로 삼았다. 모기는 파리처럼 빠르고 지그재그로 움직이지 않고 곧은 선을 따라 천천히 날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작은 모기 하나가 들어와 길쭉한 방 안을 황금빛 점처럼 직선으로 움직였다. 나는 광원이 머리 뒤에 오도록 서서 천천히 움직이는 점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잡을 수는 없었다. 그 점이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 손을 어느 방향으로 휘둘러야 맞힐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특수시설 담장 밖 어딘가에는 소년단 캠프가 있었던 모양이다. 창문으로 아이들의 즐거운 소리와 지도교사의 목소리가 자주 들렸다. “보바, 재킷 입어. 이제 쌀쌀해!” “슬라바, 샌드위치 다 먹고 놀아!” 나는 땀을 흘리며 모기를 사냥했고, 빗나가는 횟수를 기록하면서 정확도가 좋아지는 추세가 언제 나타날지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다. 산책장에서는 처음에는 기어 다니는 법을 익혔고, 그다음 걸었고, 마침내 행진할 수 있게 되었다. 몰래 책도 몇 번 들여다보았다. 많이 읽을 수는 없었지만 ‘나는 이미 읽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크게 안심이 되었다. 때로는 실험 삼아 머릿속 책쓰기를 조심스럽게 조금씩 허용했다. 머리를 과로시키지 않도록 했다. 강박적 사고가 서서히 사라지는 과정을 관찰하고 싶었다. 책에 대한 생각 없이 한두 주가 지나가자 나는 행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짧은 머릿속 집필 세션을 허락했다. 내 의지로, 내가 원하는 만큼만.

사고는 다시 내 명령을 따르기 시작했다. 한때 고문자이자 주인이던 것과 위험한 놀이를 하는 일도 이제는 진짜 즐거움이 되었다. 잠깐 가지고 놀다가 문밖으로 내쫓아버릴 수 있었다.

그해 여름, 뜻밖에도 내게 요양소가 되어버린 특수시설에서 나는 옷 손질에 착수했다. 때가 되었다. 낡은 군용 셔츠와 바지는 몸 위에서 삭아버려 가장 급한 수선이 필요했다.

노예제 같은 감옥·수용소 체계에서는 죄수가 직접 일하는 곳에만 청결과 질서가 있었다. 자유인 직원들은 가장 낮은 ‘말단’부터 가장 높은 상관까지 육체노동을 경멸하는 병에 걸려 있었다. 육체노동은 ‘주인’이 할 일이 아니고 오직 ‘백인 흑노예’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여겼다. 특수시설의 화장실도 그랬다. 청소는 경비병이 해야 했으므로 바닥의 오줌 웅덩이는 마르지 않았고, 그 안에는 누런 담배꽁초와 성냥개비가 떠다녔다. 나는 구석에 젖은 대걸레 하나가 있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배설물과 쓰레기를 구멍으로 밀어 넣을 때 쓰는 것으로, 군복을 찢어 만든 대걸레였다. 이것이 내 옷을 새로 살릴 재료가 되어야 했다. 감시구의 시선을 피해 틈날 때마다 천 조각을 급히 뜯어내려 했다. 쉽지 않았다. 내 손이 약해진 것인지, 천이 아직 충분히 썩지 않은 것인지, 덧댈 만한 크기의 조각을 뜯을 수 없었다. 결국 이를 써야 했다. 이만큼은 아직 좋았다. 짐승처럼 강하고 하얗고 튼튼했다. 솔기를 피해 며칠 동안 필요한 크기와 모양의 천 조각들을 이로 찢어냈다. 동시에 성냥개비들을 주워 말리고 끝을 뾰족하게 깎았다. 천 조각을 말리고 가장자리에서 공장제 실을 조금씩 뽑은 뒤 비누 조각으로 문질러 짧은 철사처럼 빳빳한 꿰맬 실을 만들었다. 성냥개비를 송곳처럼 써서 군용 셔츠와 바지, 그리고 덧댈 천 조각에 구멍을 냈다. 미끄럽고 탄력 있는 철사 같은 실을 그 구멍으로 통과시켜 덧댔다. 물론 덧댄 천은 튼튼하지 않아 금세 다시 수선해야 했다. 덧댄 곳 위에 다시 덧댔다. 옷은 갑옷처럼 변했다. 벗어놓은 군용 셔츠가 이제는 바닥에 혼자 서 있을 정도였다. 잠수복처럼 두 팔을 벌리고 뜨거운 포옹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냄새 면에서는 더 나빠졌지만 보온성은 좋아졌다. 그리고 그 보온성은 곧 필요해졌다. 내가 회복되었다고 판단한 그들은 책을 빼앗고 환자식도 일반식으로 되돌렸다. 반 년의 주기가 끝나자 다시 차갑고 어둡고 축축한 감방으로 집어넣었다. 목욕탕에 더 가깝고 ‘역’에서는 더 멀리 떨어진 건물이었다. 그 건물은 합판 연결통로로 ‘역’ 건물과 이어져 있었다. 특수시설에서 보낸 여섯 번째 반년, 여섯 번째 감방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마 첫 번째 감방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경험이 생겨 불평하지 않았다. 이 감방은 꽤 넓었다. 문 앞에서 접힌 침대 한쪽 끝에 등을 대고 출발해 레일과 탁자를 따라 앞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꺾고, 탁자를 지난 뒤 다시 왼쪽으로 돌아 침대 반대쪽 끝까지 갈 수 있었다. 내 키로는 그 길 전체가 작은 걸음 세 번이었다. 하지만 걸음 하나를 다시 셋으로 쪼개면 아홉 걸음이 되었다. 산책공간으로 아홉 걸음이면 소비에트 사람은 자기에게 배당된 지상의 시간을 꽤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다. 내 경우에는 앞으로 12년의 수감생활이 남아 있었다. 나는 유배형마저도 독방으로 바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제7장. 다시 사람들 사이로

겨울이 시작되었다. 여섯 번째 감방은 특별히 춥지도, 비좁지도 않았다. 가을부터 나는 가진 옷을 전부 몸에 껴입고 이 누더기 갑옷 속에서 봄까지 버틸 준비를 했다. 공간도 앞서 말했듯 조금은 있었다. 매일 16시간 동안 나는 작은 걸음으로 탁자 주위를 꺾인 반원 모양으로 돌았다. 침대 머리맡에서 반대쪽 끝까지. 작은 창은 얼음으로 뒤덮였고, 문 위의 흐릿한 전구가 붉은빛을 내며 하루 종일 감방을 밝혔다. 이 분홍빛 반어둠 속에서는 감시를 위해 늘 얼굴을 감시구 쪽으로 보이게 해야 했다. 그래서 걸을 때 고개를 계속 돌려야 했고 저녁이면 목이 아팠다. 그래도 나는 특수시설에 정착했고 이 존재방식에 적응했다. 다만 정신활동에서 희미한 공백이 느껴졌다. 나는 ‘회복’했고 책 지급은 진작 중단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머릿속으로 글을 쓰는 것도 무서웠다. 뇌를 다시 과로시키고, 그렇게 어렵게 빠져나온 경계 너머로 미끄러져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빈자리가 생겼다. 그런데 내가 그 공백을 자각하자마자 삶이 친절하게 그 구멍을 메워주었다.

규정에 따라 나는 열흘에 한 번, 샤워와 속옷 교체 전에 시멘트 바닥에 붉은 왁스를 바르고 군용 외투 조각으로 반짝이도록 닦았다. 내 ‘대로’를 걸으며 간수가 얼굴을 볼 수 있도록 고개를 돌리다가, 어느 날 내 뒤에서 바닥 조각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갈색 쥐들처럼 나를 따라 달렸다. 그쪽에는 빛이 거의 닿지 않았지만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쥐가 분명히 보였다. 그전에도 눈에 파묻힌 무덤 같은 감방에서 새가 짹짹거리고 노래하는 소리를 아주 뚜렷하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청각 환각에 시각 환각까지 더해진 것인가? 대체 이게 무엇이지? 나는 매독 환자가 아니었으므로 척수매독이나 진전섬망 환자가 보는 ‘악마들’을 볼 이유도 없었다.

나는 낮에 관찰하기 시작했다. 투명한 얼음의 밝은 배경 위로 창문 철창이 그나마 뚜렷하게 보이는 시간이었다. 그 결과 이것은 암점, 즉 안저의 작은 혈관이 경련하면서 생기는 국소적 시야 장애라는 결론을 내렸다. 창문을 배경으로 보면 흐릿한 시야의 작은 부분들이 부풀었다 터지는 거품처럼 보였다. 반쯤 어두운 바닥을 배경으로 하면 순간적으로 시야가 왜곡되어 ‘움직이는 쥐’처럼 보였고, 눈을 감으면 작은 빛나는 점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흐린 흰색과 반짝이는 푸른색 점들이었다.

나는 크라스노야르스크 분류소에서 민체르 박사에게 선물받아 12년 동안 가방 속에 간직한 베를린 비누 한 조각을 꺼냈다. 화장실에서 성냥개비 하나도 주웠다. 비누 표면에 점을 찍기 시작했다. 흰 암점은 한 줄, 푸른 암점은 다른 한 줄. 물론 간수가 알아차리고 장교를 불렀다. 그들은 이것이 누구에게 보내는 무슨 신호냐고 물었다. 나는 설명한 뒤 그들 앞에서 손가락으로 점을 지웠다. 비누는 돌려받았다. 나는 계속 관찰했다. 특히 석 달쯤 지나자 번쩍임의 횟수가 줄어드는 것이 보여 더 열심히 했다. 다시 기운이 솟았다. 고혈압 때문에 머리가 무겁고 눈도 심하게 아팠지만 체조량을 두 배로 늘렸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갔다. 독방 3년째가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일곱 번째 감방으로 옮겨질 때를 기다렸다. 경비병들이 와서 “짐 챙겨!” 하고 부르자 흥분 때문에 이제는 꽤 드물어진 실인증 발작이 다시 나타났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서두르다 레일에 걸려 넘어졌고, 공간에서 내 몸이 어떤 자세로 놓여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워 일어나지 못했다. 젊은 병사들은 웃으면서 내 다리를 잡아끌고는 일으켜 세워주었다. 우리는 합판 복도를 달려 ‘역’으로 갔다. 거기에는 수색실이 있었다. 나는 절차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일곱 번째 반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어맨’의 접수대 앞에 세우더니 서명을 시키고는 ‘검은 까마귀’에 밀어 넣는 것이었다!

나는 멍한 상태였다. 기쁨은 전혀 없었다. 벌어지는 모든 일이 헛것처럼 느껴졌다. 도움 없이는 차에 올라갈 수도 없었다. 차량 안 철제 칸막이 상자에 앉아 겁먹은 채 몸을 웅크렸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문득 내 감방이 아쉬워졌다.

레포르토보 감옥은 바로 알아보았다. 사랑스럽고 고향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익숙해져버렸고, 오래 깃들인 둥지에서 거칠게 떼어내진 사람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헤어진 그 특수시설만큼 사랑스럽고 고향 같지는 않았다.

날이 밝았다. 기상이 시작되었다. 감방은 건조하고 따뜻했는데도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침상에 앉아 떨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작은 보따리를 든 키 큰 군인을 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친근하게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일어나 비틀거리다가 의식을 잃었다.

뇌와 내장, 담낭을 포함한 혈관에 아주 강한 경련이 일어난 것이었다. 뚜렷한 황달이 시작되었다. 예전에 심문을 받으러 끌려갈 때 지나던 바로 그 나선형 계단, 깨진 흰 돌판이 깔린 계단을 따라 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황달은 빨리 가라앉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그 친근한 군인과 같은 감방으로 돌아왔다. 내 꿈이 실현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수시설을 떠난 지 열흘쯤 지나서야 비로소 날카롭고 폭발적인 기쁨을 느꼈다. 육체적인 쾌감에 가까웠고, 감기에 걸려 쉰 상대의 목소리가 내게는 경이로운 음악처럼 들렸다.

“보고드리자면, 친애하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저는 말하자면, 실례지만, 전문적으로는 대령이고 자캅카스 군관구 정치국 직원입니다. 초여름에 일을 잘했다고 레닌그라드의 1년짜리 고등교육과정에 보내졌지요. 도착했습니다. 일했습니다. 공부했습니다. 성장했지요. 하지만 사람이, 실례지만, 이념적으로 성장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친애하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사생활이며 휴식이며 오락은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 자신에게 즐거움을 하나 주기로 했습니다. 둘도 없는 친구에게 속마음을 담은 편지를 쓰는 것이었지요. 옛날에 같은 마을에서, 말하자면, 적군으로 함께 동원됐습니다. 둘이 서두르지 않고 함께 올라가다 마침내 나란히 대령 계급을 달았습니다. 친구는 야전군 사령부에서, 나는 정치국에서 근무했고요.”

“트빌리시에서는 같은 집, 같은 현관, 같은 층에 살았습니다. 친구 집은 40호, 제 집은 실례지만 41호였지요! 어느 날 맥주 두 병을 마셨습니다. 그 전에 한 교육생과 보드카 반 리터를 나눠 마실 일도 있었지요. 보고드리자면 그날이 그 친구 부인의 생일이었습니다. 맥주까지 마신 뒤 펜을 들고 종이를 앞에 놓고, 존경하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시적인 분위기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트빌리시에 있다가 온 제게는 레닌그라드의 자연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지요. ‘보고한다.’ 이렇게 썼습니다. ‘레닌의 도시 위에 먹구름이 모이고 있으며, 나는 번개와 폭풍을 예견한다. 많은 사람의 머리 위로 차가운 비가 내릴 것이다.’ 등등, 기타 등등. 쓰고 또 쓰다 술이 깼습니다. 보니 헛소리를 잔뜩 쓰고 있더군요. 그 종이를 옆에 치우고 다시 시작했습니다. ‘보고하네, 사랑하는 바뉴샤.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햇빛 좋은 조지아 같지 않고, 나는 트빌리시가 몹시 그립네.’ 요컨대 한 톤 낮췄지요. 다 쓰고 봉해서 보냈습니다. ‘좋아, 친구랑 이야기해서 속이 시원하군!’ 생각했지요. 그런데 몇 주 뒤 잡혀갔습니다.”

“크레스티 감옥에서 심문도 없이 석 달쯤 있었습니다. 마침내 모스크바로 끌려가 아바쿠모프 장관 본인 앞에 세워졌지요. 장관은 책상에 앉아 있고 주변에는 수사관이 열 명쯤 서 있었습니다. 보고드리자면 중령들도 있었고 심지어, 실례지만, 대령들도 있었습니다. 장관이 ‘네 편지냐?’ 하고 주소가 적힌 봉투를 보여줬습니다. 자세히 보고 ‘제 것입니다’라고 했지요. 장관이 일어나 머리끝까지 벌게지더니 고함쳤습니다. ‘이 개자식아, 레닌의 도시 위에 무슨 구름이 모인다는 거야? 어떤 사람들의 머리 위로 차가운 비가 내린다는 거고? 말해, 음모자! 어느 조직 소속이야?’ 그제야 그날 술에 취해 종이를 바꿔 넣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바보 같은 초고를 봉투에 넣어 보내고, 더 멀쩡하게 쓴 두 번째 편지는 휴지통에 버린 겁니다. 그런데 트빌리시의 친구는 겁을 먹고 그 편지를 특별부에 갖다 바쳤고요! 내가 설명하려 하자 장관이 책상을 주먹으로 치더니 아주 의미심장하게 묻더군요. ‘들어봐, 대령. 네 얼굴을 누가 진심을 다해, 이 방면을 제대로 아는 솜씨로 패준 적 있나?’ ‘없습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럼 지금 생기겠군!’ 그러자 그 군인들이 처음에는 주먹으로 나를 때렸습니다. 내가 쓰러지자 군화로 찼고요. 나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조금 한 뒤 여기로 데려왔지요. 보고드리자면,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이것이 실례지만 제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그 뒤 나는 부티르카 감옥에 딸린 큰 감옥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실은 밝고 깨끗했으며 공기가 좋았다. 환자는 열 명이었다. 샤리코포드십니크 공장의 나이 든 숙련노동자 한 명,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아카데미 회원 베르크 한 명, 그리고 내게 적으로 느껴지는 이상한 사람 일곱 명. 그들은 막 우리에 갇힌 야생동물처럼 우리 셋을 바라보았다. 몇 마디를 엿듣고 보니 일곱 명 모두 소련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러시아인이 우리를 상대로 어디서 어떻게 싸웠다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백계 망명자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우리와 떨어져 지냈고 말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말할 때도 속삭였다. 대부분 우리 셋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전문의 협진 뒤 집중치료가 시작되었다. 한 달쯤 지나자 건강이 크게 좋아졌다. 눈의 통증은 거의 사라졌고 창문 철창 가장자리에 보이던 붉고 푸른 색도 없어졌다. 암점에 대해서는 아예 잊었다. 물론 가끔 나타났지만 예전보다 드물었고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자극이 너무 많아 더 이상 의식이 둘로 갈라질 틈도 없었다. 나는 이 세계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어떤 자극이었냐고? 평범한 감옥의 일들이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인간 무리. 인간이자 사회적 동물인 나는 다시 그들과 접촉했다.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가까이 느끼는 것이 어떤 약보다, 어떤 의사보다 빠르게 내 건강을 회복시켰다.

아카데미 회원 베르크가 기억난다. 미국인들이 그를 미국의 학회에 초청했는데 우리 당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미국 측에서 여행경비를 보내주겠다고 제안했다는 이유로 갇혀 있었다. 게다가 이 저명한 학자는 유대인이었다. 노인은 심문에서 구타당했고 병원 치료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심장이 버티지 못했다. 그는 의식이 있는 채 누워 자기 주소를 알려주고 가족에게 전할 안부말을 받아쓰게 했다. 다른 환자가 죽은 날도 기억난다. 그는 눈을 감고 기지개를 켰다. 이 끔찍한 세계를 떠나게 되어 기쁘다는 듯했다. 우리는 점심 배식이 막 시작될 때 시신을 문 쪽으로 끌어다 놓았다. 적대적인 태도의 이상한 사람들은 짐승처럼 밥그릇을 받으러 달려들었다. 그들은 받은 그릇을 아직 따뜻한 시체 위에 급히 올려놓았다. 꽤 편리했다. 죽은 사람은 키가 크고 말랐기 때문에 먹을 것을 배급할 때 선반이나 벤치 역할을 했다.

“짐 챙겨!” 급한 악수. ‘검은 까마귀’. 그리고, 기쁨이여! 부티르카다! 이제 곧 호송이고 수슬로보다. 나는 다시 아네치카와 함께 앉았던 바로 그 침상에 앉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 사이에는 멀건 수프 두 사람분과 죽 두 사람분이 담긴 그릇이 김을 내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우리 가족의 점심식사!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집안의 안주인인 그녀를 그곳에서 만나지는 못하겠지만. 괜찮다! 우리가 함께 있었던 장소에 갈 수만 있다면.

나는 넓은 홀로 들어갔다. 가운데에는 당구대 여러 개를 붙여놓은 듯한 넓은 카운터가 있었다. 그 위에 나이 든 붉은 머리 간수가 한 손을 얹고 서 있었다. 벽을 따라 벤치들이 있었고 호송을 기다리는 죄수들이 앉아 있었다. 한눈에 신참임을 알 수 있었다. 더럽고 찢어진 외투와 양복을 입었고, 음식으로 가득 채운 집에서 쓰던 베갯잇과 자유인의 짐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모두 고개를 돌려 겁먹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곧 이유를 알았다. 대걸레 조각으로 덕지덕지 기운 내 셔츠 때문일 것이다. 냄새도 물론이고. 얼굴빛도. 이 사람들도 창백했지만 아마 나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수시설 지하감방에서 3년을 보낸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

간수는 처음에는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네 짐은 어디 있어?”

내가 대답하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훑어보더니 말했다.

“됐어. 넌 벤치에 앉지 마. 이리 와. 도와줘.”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꺼내 내밀었다.

“피워. 얼마나 오래 앉았어?”

“14년째 들어갑니다, 대장.”

벤치 쪽에서 놀란 속삭임이 퍼졌다.

“조용히 해, 풋내기들!” 간수는 신참들에게 거칠게 소리친 뒤 나에게는 말투를 바꿔 물었다.

“노릴스크에 있어봤나?”

“물론이죠. 제1지부에 있었습니다.”

“슈미티하 쪽? 알아. 몇 년도였어?”

“40년대 초였습니다.”

“난 41년과 42년에 있었어. 그럼 동향이군. 내가 수색하는 동안 넌 계속 걸상에 앉아 있어.”

“고맙습니다, 대장.”

그때 간수는 벤치의 몇몇 신참들도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이, 너! 당장 그거 입에서 빼! 여기가 네 장모네 집인 줄 알아? 별걸 다 하네!”

“아니, 저 사람은 허락하시잖습니까, 시민 대장님! 그래서 저도…”

“넌 생각하지 마. 저 사람은 늙은 수용소 죄수야, 알아들어? 14년째야. 넌 어쩌면 얼마 안 가 갓 쪄낸 커틀릿 신세가 될지도 몰라. 차이를 알겠나?”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모든 고통을 견뎌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 뒤에도 여러 번 존중을 담아 ‘늙은 수용소 죄수’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은 언제나 내 몸을 곧게 세우고 어깨를 펴며 턱을 들게 했다. 수용소 죄수는 포도주와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품질과 가치가 올라간다.

수색이 끝나 호송대기 감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존경 어린 감탄의 대상이자 끝없는 정보의 원천이 되었다. 모두 수용소 생활에 대해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많이 알고 싶어했다. 무엇을 먹는지, 어디서 자는지, 어떻게 일하는지. 질문은 끝이 없었고 답할 때마다 놀람과 두려움과 슬픔이 뒤섞인 새 질문이 쏟아졌다. 평범한 사람들이 다른 세계의 생물과 나누는 대화였다. 소비에트 땅의 주민에게 그 세계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의 우습고 순진한 질문에 답하고서야 나도 수용소 생활이 얼마나 비범하고 심지어 이국적이며,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모순되게 구성되어 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밤에 변기통 쪽으로 일어나 가다가 눈을 크게 뜬 사람들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보았다.

“왜 안 자요?”

“당신 이야기 때문에요.”

“뭐가 제일 놀라웠습니까?”

사방에서 뜨거운 속삭임이 들렸다.

“사람을 전혀 안 때린다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수용소에서 사랑하는 아내 아네치카를 만났다는 게요… 정말 놀라워요!”

“전쟁과 기근 중에도 아이들에게 버터를 줬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아요…”

자리로 돌아가며 나는 말했다.

“좋아요. 이제 자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소비에트 수용소는 합리적인 인간애와 무의미한 야만성이 뒤섞인 터무니없는 혼합물입니다. 여러분의 미래는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어요. 늙은 수용소 죄수의 말을 믿으십시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죄수들을 화물칸에 싣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죄수수송용 여객차가 붙었다. 소비에트식 명칭으로는 ‘스톨리핀 객차’였지만 차르 시대에서 남은 것은 구조뿐이었다. 원래 8명용인 2단 객실에 18명을 밀어 넣었으니 생활조건은 전혀 ‘스톨리핀 시대답지’ 않았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는 옛 그림 하나가 걸려 있다. 남자와 여자 죄수들, 그리고 역에서 철창 사이로 참새에게 빵 부스러기를 주는 아이가 그려져 있다. 그것이 스톨리핀 시대였다. 이제는 사람들이 몸을 구부린 채 서로 바짝 붙어 누웠고, 숨막히는 더위에 정신을 잃은 사람은 가만히 쓰러져 있는 동안 주변 사람들이 그의 먹다 남은 빵을 훔치고 가방과 주머니를 뒤졌다. 객실에는 창문도 없었고 우리에게 참새에게 먹이를 줄 기분 따위는 없었다. 그래도 예조프 시대 같은 노골적인 약탈은 사라졌다. 면도칼을 든 범죄자들이 쓰러진 사람들 위를 기어다니며 털어가지 않았고, 경비대가 그들이 훔친 물건을 모아 첫 정차역에서 헐값에 팔아치운 다음 약탈자들에게 푼돈이나 싸구려 담배 한 갑, 빵 한 조각만 던져주는 일도 없었다. 내게는 이것이 놀라운 새 소식, 엄청난 진보처럼 느껴졌다.

첫 중계감옥에서부터 내가 모두의 관심과 호기심을 독차지하던 지위는 무너졌다. 우리 호송대가 거대한 감방의 기존 죄수들과 섞이자 가슴, 등, 모자, 양쪽 바지에 번호를 칠한 검은 제복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소비에트의 카토르가 죄수들이었다. 기록의 나라 소련은 여기서도 기록을 세웠다. 다른 나라에서는 번호 하나면 될 것을 카토르가 죄수에게 다섯 개나 달아준 것이다. 나는 금세 잊혔고 신참들과 함께 그들에게 생활조건을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로 알게 된 것은 없었다. 카토르가 죄수들도 수슬로보에서 우리와 똑같이 살았다. 다만 그때는 아직 번호를 달지 않았을 뿐이다. 여성과의 완전한 격리, 옷의 번호, 강화된 호송. 이것이 그들의 삶을 평범한 제크의 삶과 구별하는 전부였다. 전쟁이 끝나고 1년쯤 지나 카토르가형 선고는 중단되고 특수수용소형으로 바뀌었다. 처우는 카토르가 그대로였지만 불길한 명칭만 수줍게 지워버린 것이다.

신참들은 조잡하게 칠해진 번호를 두려운 눈으로 보며 공포에 빠졌다. 나는 오히려 마음을 놓았다. 내 판결은 교정노동수용소형이었다. 1938년 여름에는 카토르가도 특수수용소도 아직 없었고, 법은 소급적용되지 않는다.

나는 수슬로보로 가고 있었다. 집으로!

모스크바의 호송대기 감방에서도, 시베리아로 가는 길의 중계감옥과 객차에서도 나에게 친숙하고 이해되는 ‘우리’ 소비에트 사람들과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적들의 비율은 비슷했다. 곧 그들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블라소프군 병사들, 반데라파, 히틀러의 무슬림 군단 병사들. 한마디로 조국의 적 편에서 조국에 맞서 싸운 사람들, 전투로 단련되고 검증되었으며 소비에트 정권과 공산주의를 증오하는 완강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서 말없는 그림자처럼 앉아 있었다. 내가 이런 시대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예전 예조프 시대의 우리 ‘반혁명분자’ 앞에는 일반 범죄자들이 있었는데, 이제 거기에 히틀러의 찌꺼기들까지 더해졌다.

모스크바에서부터 두 사람이 내 곁에 붙었다. 나는 판자침상에서 그 둘을 내 오른쪽과 왼쪽에 눕혀 적들과 몸이 닿지 않게 했다. 한 사람은 평범한 모스크바 순경이었다. 그는 장화의 고무 밑창에 “스탈린에게 죽음을!”이라는 문구를 새겨 비 오는 날 젖은 인도 위에 찍고 다녔다. 다른 한 명은 몸집 작은 레닌그라드의 유대인 대학생이었다. 그는 크론슈타트에서 병사로 군복무하면서 반스탈린 전단 인쇄에 참여했다. 사건을 이끈 장교들은 총살되었고, 그 학생은 모스크바 순경과 마찬가지로 ‘25년’을 받았다. 두 사람은 정직하게 의무를 수행했다는 자부심을 품고 씩씩하게,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으러 시베리아로 가고 있었다.

객차 창밖으로 우랄산맥이 지나갔다. 이어 스베르들롭스크 중계감옥, 옴스크 중계감옥, 노보시비르스크 중계감옥, 그리고 수슬로보 역의 자작나무가 보였다. 그런데도 나를 내리지 않았다. 항의했지만 기차는 계속 더 동쪽으로 갔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녁. 젊고 건장한 히틀러 편 복무자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를 자기 발밑으로 밀어냈다. 나는 너무 병들고 약해 저항할 수 없었다. 히틀러의 하수인들 옆에는 독일인들, 전직 장교와 지주, 부르주아들이 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세련된 말을 들으며, 한때 자기 나라를 제멋대로 통치했던 자들의 무가치함을 내 인생에서 세 번째로 본다고 생각했다. 한심한 인간 쓰레기! 시블라크 마린스크 지부의 폴란드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러시아 백군 망명자들과 쌍둥이처럼 닮았고, 이제 이 독일인들은 시블라크의 폴란드인들과 똑같았다. 그들의 무능함이 계급으로서의 정치적·군사적 패배를 낳았고, 그 무능함이 행동에서도 공통된 무언가를 만들었다.

특히 나를 괴롭힌 것은 키 크고 마르고 매부리코인 남자였다. 독일인들은 그를 공손하게 ‘헤르 바론’이라고 불렀다. 그는 절제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고, 이제 굶주림 때문에 녹슨 청어를 탐욕스럽게 먹어치웠다. 자기 몫뿐 아니라 이웃들이 남긴 것까지 먹었다. 그러고 나면 물을 미친 듯 마셨다. 닳아빠진 깃털이 달린 초록색 사냥꾼 모자에 물을 받아주었는데, 수프 배식 직후면 늘 줄 맨 앞에 섰다. 한 모자를 단숨에 비우고 곧 두 번째 물도 받아 다시 모자를 가득 채웠다. 화장실에는 자주 데려가지 않았고, 나는 하필 헤르 바론 바로 아래에 누워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나면 두 모자 분량의 물이 전부 내 위로 되돌아왔다. 블라소프군 출신들은 예전의 주인들을 조롱 섞인 존경으로 대했지만 러시아어로,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했다. 내 자리에서는 그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주로 얼마 전의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었다.

“미국 놈들이 드레스덴을 깨끗이 갈아엎었을 때 우린 도시 밖 수용소에 있었어. 부대 편성 중이었지. 도시는 불타고 모든 게 무너지고 번쩍이고 연기가 났어. 독일인들은 공포와 절망에 미쳐버렸지, 알겠냐? 장님처럼 이리저리 뛰고, 불길과 잔해 사이를 달리다 서로 부딪치고 소리 지르고. 그때 우리 장군이 우리를 집합시켰어. 정치장교들이 천막천에 독일어 구호를 급히 써서 우린 총검 끝에 달고 진군했지. 이야, 볼 만했다니까, 내가 말하는데 정말 볼 만했어! 양옆은 전부 불타고, 독일인들은 타오르는 불길을 따라 몰려서 우리에게서 눈을 못 떼. 여자들은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우리에게 내밀면서 ‘러시아인들이여! 구해주세요!’ 하고 외쳤지. 그런데 우리는 러시아식으로, 붉은광장 행진처럼 발을 딱딱 맞춰 걸었어. 하나같이 잘생기고 고른 놈들, 군대가 아니라 쇳물의 강이었지! 앞에서는 두 놈이 독일어로 쓴 현수막을 들고 갔어. ‘러시아 해방군. 볼셰비즘에 죽음을! 동맹국 독일 만세! 자유 러시아 만세! 지크 하일!’ 독일놈들이 눈물을 펑펑 흘리더라. 소처럼 울었다니까!”

“그래, 브레슬라우 근처에서 빨갱이들한테 제대로 먹였지! 독일군은 다 달아났고 끝까지 버틴 건 SS와 우리뿐이었어. 빨갱이들이 항복하라고 외치고 ‘우라!’ 하며 달려왔지만, 우린 ‘우라’ 따위로 잡을 수 없었지!”

“전쟁 끝 무렵에는 우리 쪽이 300만 명이었다더군.”

“초기에는 700만까지 갔대. 스탈린 아들이 라디오에서 그랬어. 내가 직접 들었지. 히틀러가 우리를 무서워해서 대부분을 공장으로 흩어버렸어. 그 개자식도 꼬리를 말았던 거지. 나는 폴란드에서 황금 떡갈나무 가지 훈장을 받았어. 기사 훈장이었지. 서명은 ‘하우프트만 폰 페트렌코’. 알겠냐?”

“우크라이나인이라면서 왜 반데라파에 안 갔어? 거긴 밥도 더 잘 줬다던데.”

“가봤지. 어디서 왔냐고 묻더군. 미르고로드라고 했어. 그랬더니 안 된대. 안 받아준대. 거긴 배신자들뿐이고 모스크바 놈들한테 팔려갔다더라. 진짜 우크라이나인은 예전에 폴란드령이던 서부에만 산대.”

“어디서 잡혔는데?”

“엘베강에서. 철도 순찰원의 미망인 집에 숨었지. 그 여자는 남자가 필요했어. 아주 절박했지, 알겠냐? 죽은 남편 군복이 나한테 꼭 맞았고 생김새도 좀 비슷했어. 여자는 아는 사람들에게 남편이 전선에서 돌아왔는데 벙어리에 좀 멍청해졌다고 말했지. 다 넘어갔어.”

“그다음은?”

“알잖아. 체키스트들이 제대로 파기 시작했지, 알겠냐? 떡갈나무 가지 훈장은 겨우 화장실 구멍에 버렸어. 계속 기념으로 갖고 있었거든. 그래도 소용없었지. 나도 결국 그 구멍 뒤를 따라갈 뻔했어. 추억조차 못 남겼지. 전쟁에서 남자들이 돌아오자 그 여자에게도 자기 프리츠가 생겼거든. 심문받다 알았어. 모든 게 거대한 화장실 하나 같더군. 이젠 웃음까지 나와, 알겠냐? 헤헤헤, ‘폰 페트렌코’라니! 죽을 맛이지, 정말!”

침대 밑에서 나는 우리 속 짐승들이 이를 가는 듯한 격렬한 이를 가는 소리를 들었다. 마음껏 갈라고 해라. 우리는 튼튼하다. 나를 가둬두는 우리라면 이제 저들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침대 밑에 누워 바론의 오줌이 따뜻한 비처럼 쏟아지는 것을 흠뻑 맞으며 생각했다. 결산을 하고 있었다. 수용소 생활의 또 한 시기가 끝났으니 그 의미를 정리해야 했다.

‘첫 번째 과제는 해냈다.’ 나는 생각했다. ‘독방체제에서 3년을 버텼다. 손실을 입고 크게 망가졌지만 그래도 나왔다. 나는 용서를 빌지 않았고 상부에 대한 내 대답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면은 집어치워라. 판결 재검토 만세! 나는 고독의 시험을 견뎠고 두 발로 버텨냈다. 이제 싸움을 계속하러 간다. 물론이지!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싸우고 있다는 뜻이다!’

어둠 속에서 나는 몸에 따뜻함이 퍼지는 것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앞으로도 버틸 가능성이 충분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딘가에는 나를 기다리는 편지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 둘이 있다. 나와 아내. 그것으로 충분했다.

특수시설은 아네치카의 사랑이 얼마나 한결같았는지를 보여주는 사나운 증거였다. 그녀는 밤마다 드레스를 꿰맸고 변호사에게 줄 돈 1만 루블을 전부 갚을 만큼 많은 옷을 만들었다. 변호사는 약속을 지켰다. 내 사건기록을 문서고에서 꺼내 재검토 절차에 올렸다. 상부가 사건에 주목했고 더 위로 넘겼다. 마침내 수사국장이 내 개인에게 관심을 갖고 장관에게 보고했다. 나는 쓸모 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모스크바 호출이 이어졌다. 포섭 암시와 석방 제안. 그것은 ‘자신의 죄를 뉘우친 범죄자에게 주는 사면’ 형식으로 꾸며졌다. 풍성한 식사, 와인, 새 양복, 여자들, 쉽게 쓰는 돈. 갑자기 모든 것이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내게 특수시설은 내적 완고함과 자유를 거절한 데 대한 대가였다. 자유는 잃었지만,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대하는 태도를 내 안에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내가 진술하면 파멸시킬 수 있었던 사람들을 구했고, 그들을 대신해 고통을 받았다. 3년의 독방은 3년의 ‘불멸자들의 향연’이었다. 나는 축제의 식탁으로 자신 있게, 자랑스럽게 다가갈 완전한 권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게 그토록 많은 불행과 고통을 안겨준 아네치카는?

아, 아네치카.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에게 특수시설은 자기희생적 사랑, 지치지 않는 돌봄, 잠 못 이룬 밤들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였다. 나는 특수시설을 거쳐 그녀가 헌신적인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여자였다면 수용소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우연히 함께 불행을 겪었던 동료를 잊고, 흔히 말하듯 ‘새 삶을 시작’했을 것이다. 내 앞에는 끝도 없이 긴 형기가 남아 있었으니까. 그러나 진짜 사랑은 모든 유혹을 견뎌냈다. 우리는 둘 다 명예롭게 시험을 통과했다.

판자침대 밑에 누워 나는 행복해서 미소 지었다. 그렇다, 소비에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일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동지들이여!

모스크바
1965년 9월~1966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