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자협회 창립 선언과 임시 규약 (1864)
인물카를 마르크스, 조지 오저, 요한 게오르크 에카리우스, 로버트 오언, 루이 필리프 1세, 헤르만 융, 프리드리히 레스너, 벤저민 루크래프트, 랜들 크리머, 조지 하월, 피터 폭스, 카를 펜더, 알프레드 탈랑디에, 루이지 볼프,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 나소 윌리엄 시니어, 앤드루 유어, 헨리 존 템플 용어제1인터내셔널, 차티스트 운동, 실질임금 사건제1인터내셔널의 창립과 분열, 제2제정과 노동운동의 재기
국제노동자협회 창립 선언
1864년 9월 28일 런던 롱에이커 세인트마틴 홀 공개 집회에서 창립
노동자 여러분,
노동 대중의 비참이 1848년부터 1864년까지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 시기는 공업의 발전과 상업의 성장에서 유례가 없는 시기다. 1850년, 평균 이상의 정보를 갖춘 영국 중간계급의 온건한 기관지 하나는, 영국의 수출입이 50퍼센트만 늘어나면 영국의 빈민 구호 대상자는 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언했다. 아아! 1864년 4월 7일, 재무장관은 영국의 수출입 무역 총액이 1863년에 “4억 4395만 5000파운드로! 비교적 최근인 1843년 무렵 무역의 약 세 배라는 놀라운 액수로!” 늘어났다고 발표하여 의회 청중을 기쁘게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빈곤」에 대해 웅변을 토했다. 그는 외쳤다. “그 영역의 경계에 있는 이들을 생각해 보라.” “임금은 … 오르지 않았다”, “인간의 삶은 … 열에 아홉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그는 아일랜드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북부에서는 기계에, 남부에서는 양 목장에 차츰 밀려나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하기야 그 불행한 나라에서는 양조차 줄고 있다. 사람만큼 빠르게 줄지는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바로 얼마 전 상류 1만 명의 가장 높은 대표자들이 갑작스러운 공포의 발작 속에 털어놓은 것도 되풀이하지 않았다. 목조르기 강도에 대한 공포가 어느 정도에 이르자 상원은 유형과 징역형에 관한 조사를 벌여 보고서를 내게 했다. 1863년의 두툼한 청서에서 마침내 진상이 드러났다. 공식 사실과 숫자로,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 가운데 최악의 자들, 곧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징역 농노들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농업 노동자보다 훨씬 덜 일하고 훨씬 잘 먹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미국의 남북 전쟁으로 랭커셔와 체셔의 직공들이 거리로 내쫓기자, 같은 상원은 공업 지구에 의사 한 사람을 보내, 가장 싸고 가장 간단한 형태로 공급하여 평균적으로 겨우 “기아 질병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탄소와 질소의 양을 조사하게 했다. 의사 대리인 스미스 박사는 탄소 2만 8000그레인과 질소 1330그레인이 평균적인 성인을 … 기아 질병의 수준 바로 위에 붙들어 둘 한 주 배급량임을 확인했고, 나아가 그 양이 극도의 궁핍에 몰려 면직 직공들이 실제로 먹게 된 보잘것없는 영양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도 알아냈다.[1] 그런데 이제 보라! 이 박식한 박사는 나중에 다시 추밀원 의무관의 위임을 받아 더 가난한 노동계급의 영양 상태를 조사했다. 그 연구 결과는 올해 의회의 명령으로 발간된 「공중보건에 관한 제6차 보고서」에 담겼다. 박사는 무엇을 발견했는가? 견직공, 바느질 여공, 키드 장갑공, 양말 직공 등등이 평균적으로 면직 직공의 궁핍 배급량에도, “기아 질병을 막기에 겨우 충분한” 탄소와 질소의 양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라고 우리는 보고서에서 인용한다. “조사한 농업 인구의 가족들을 보면, 5분의 1 이상이 탄소질 식품의 추정 필요량에 못 미쳤고, 3분의 1 이상이 질소질 식품의 추정 필요량에 못 미쳤으며, 세 주(버크셔, 옥스퍼드셔, 서머싯셔)에서는 질소질 식품의 부족이 그 지방의 평균적인 식사였다.” 공식 보고서는 덧붙인다. “식량의 결핍은 매우 마지못해 견뎌지는 것이며, 대체로 식사가 몹시 빈약해지는 것은 다른 결핍들이 먼저 닥친 뒤의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 청결조차 값비싸거나 어려운 일이 되었을 것이고, 그래도 아직 자존심에서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다면 그런 노력 하나하나가 그만큼 굶주림의 고통을 더할 것이다.” “이는 고통스러운 성찰이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빈곤이 게으름에 따른 마땅한 빈곤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어느 경우에나 그것은 일하는 사람들의 빈곤이다. 실로 그 보잘것없는 식량을 얻게 하는 노동은 대부분 지나치게 길다.”
보고서는 기이하고 꽤 뜻밖의 사실을 드러낸다. “연합왕국의 각 지역 가운데”, 곧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가운데 가장 부유한 지역인 “잉글랜드의 농업 인구가 단연 가장 못 먹는다”는 것, 그러나 버크셔, 옥스퍼드셔, 서머싯셔의 농업 노동자조차 런던 동부의 숙련된 실내 직공 다수보다는 낫게 먹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무역의 천년왕국 시대인 1864년에 의회의 명령으로 발간된 공식 진술이다. 그 무렵 재무장관은 하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 노동자의 평균적인 처지는, 우리가 알기로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역사에서도 비범하고 유례없는 정도로 향상되었다.”
이 공식 축하에 공식 공중보건 보고서의 건조한 한마디가 귀에 거슬리게 부딪친다.
“한 나라의 공중보건이란 그 나라 대중의 건강을 뜻하며, 대중은 그 맨 밑바닥까지 적어도 웬만큼 넉넉하지 않으면 건강하기 어렵다.”
눈앞에서 춤추는 「국민의 진보」 통계에 눈이 먼 재무장관은 광란의 황홀경에 빠져 외친다.
“1842년부터 1852년까지 이 나라의 과세 소득은 6퍼센트 늘었다. 1853년부터 1861년까지 8년 동안에는 1853년을 기준으로 20퍼센트 늘었다! 이 사실은 거의 믿기 어려울 만큼 놀랍다! … 이 도취할 만한 부와 권력의 증대는”이라고 글래드스턴 씨는 덧붙인다. “전적으로 유산계급에 한정되어 있다!”
전적으로 유산계급에 한정된 그 “도취할 만한 부와 권력의 증대”가 노동계급에 의해 어떤 망가진 건강, 더럽혀진 풍기, 정신적 파멸의 조건 속에서 생산되었고 지금도 생산되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지난번 「공중보건 보고서」에 걸린 재봉사, 인쇄공, 여성복 재단사의 작업장 그림을 보라! 1863년의 「아동 고용 위원회 보고서」와 견주어 보라. 거기에는 이를테면 이렇게 적혀 있다.
“도공들은 하나의 계층으로서, 남자든 여자든,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몹시 퇴화한 인구를 이룬다”, “건강하지 못한 아이는 커서 다시 건강하지 못한 부모가 된다”, “종족의 점진적 퇴화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근 농촌에서 끊임없이 사람이 보충되고 더 건강한 종족과 혼인하지 않았다면 스태퍼드셔 인구의 퇴화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제빵 직인들이 호소한 고충」에 관한 트레멘히어 씨의 청서를 훑어보라! 그리고 공장 감독관들이 내놓고 호적 장관이 실례로 보여 준 저 역설적인 진술에 몸서리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랭커셔 직공들이 궁핍 배급량으로 연명하는 동안 오히려 건강이 나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면화 기근 때문에 면직 공장에서 잠시 쫓겨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사망률이 줄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들이 마침내 아이들에게 고드프리 시럽 대신 자기 젖을 물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메달을 뒤집어 보라! 1864년 7월 20일 하원에 제출된 소득세·재산세 보고는 우리에게, 세리가 연 소득 5만 파운드 이상으로 평가한 사람들이 1862년 4월 5일부터 1863년 4월 5일까지 열세 명이 늘어, 그 한 해 사이에 67명에서 80명이 되었음을 가르쳐 준다. 같은 보고는 약 3000명이 해마다 약 2500만 파운드의 소득을 나누어 가진다는 사실도 드러낸다. 이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농업 노동자 대중 전체에게 해마다 찔끔찔끔 내어 주는 수입의 총액보다도 많다. 1861년의 국세 조사를 펼쳐 보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남성 토지 소유자 수가 1851년 1만 6934명에서 1861년 1만 5066명으로 줄어, 10년 사이에 토지 집중이 11퍼센트 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나라의 토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일이 같은 속도로 나아간다면, 토지 문제는 기묘하게 단순해질 것이다. 아프리카 속주의 절반을 신사 여섯 명이 소유하고 있음을 알고 네로가 히죽 웃었던 로마 제국에서처럼.
우리가 “거의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이 사실들에 이토록 오래 머문 것은 영국이 상공업의 유럽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몇 달 전 루이 필리프의 망명한 아들 가운데 하나가 영국의 농업 노동자에게, 해협 건너편의 혈색이 덜 좋은 동료보다 처지가 낫다고 공개적으로 축하한 일이 기억날 것이다. 실로 지방색만 바뀌고 규모가 조금 줄었을 뿐, 영국의 사실들은 대륙의 모든 근면하고 진보적인 나라에서 되풀이된다. 그 모든 나라에서 1848년 이래 공업의 전대미문의 발전과 수출입의 꿈도 꾸지 못한 팽창이 일어났다. 그 모든 나라에서 “전적으로 유산계급에 한정된 부와 권력의 증대”는 참으로 “도취할 만한” 것이었다. 그 모든 나라에서, 영국에서처럼, 노동계급의 소수는 실질임금이 다소 올랐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화폐임금의 상승이 실제 생활의 향상을 뜻하지 않았던 것은, 이를테면 수도의 구빈원이나 고아원에 사는 사람이 생활필수품에 1852년 7파운드 7실링 4펜스 대신 1861년 9파운드 15실링 8펜스가 든다고 해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던 것과 같다. 어디서나 노동계급의 거대한 대중은, 적어도 그들 위에 있는 자들이 사회적 사다리를 오르는 것과 같은 속도로 더 깊은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기계의 개량도, 과학의 생산 응용도, 교통·통신의 발명도, 새 식민지도, 이민도, 시장의 개방도, 자유무역도, 이 모든 것을 한데 합친 것조차도 근면한 대중의 비참을 없애지 못하리라는 것, 오히려 지금의 그릇된 토대 위에서는 노동 생산력이 새로 발전할 때마다 사회적 대조를 깊게 하고 사회적 적대를 날카롭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제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편견 없는 모든 사람에게 증명할 수 있는 진리가 되었고, 남들을 바보의 낙원에 가두어 두는 것이 이익인 자들만이 이를 부정한다. 경제적 진보의 이 도취의 시대에 영국 제국의 수도에서 굶어 죽는 일은 거의 하나의 제도의 지위에 올랐다. 그 시대는 상업·공업 공황이라 불리는 사회적 역병이 더 빨리 되돌아오고, 더 넓게 퍼지고, 더 치명적인 결과를 낸 시대로 세계의 연대기에 기록된다.
1848년 혁명들이 실패한 뒤 대륙에서는 노동계급의 모든 당 조직과 당 기관지가 폭력의 철권에 짓밟혔고, 가장 앞선 노동의 아들들은 절망 속에 대서양 건너 공화국으로 달아났으며, 해방의 덧없는 꿈은 공업의 열병과 도덕적 쇠약과 정치적 반동의 시대 앞에 사라져 버렸다. 대륙 노동계급의 패배는, 그때나 지금이나 페테르부르크 내각과 형제 같은 연대 속에 움직이는 영국 정부의 외교에도 일부 힘입은 것이었는데, 곧 그 전염성 있는 영향을 해협 이쪽에까지 퍼뜨렸다. 대륙 형제들의 궤멸은 영국 노동계급의 기를 꺾고 자기 대의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렸지만, 지주와 금융가에게는 다소 흔들렸던 자신감을 되찾아 주었다. 그들은 이미 공언한 양보를 뻔뻔스럽게 거두어들였다. 새 금광 지대의 발견은 거대한 이주의 물결을 불러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에 메울 수 없는 빈자리를 남겼다. 예전에 활동하던 다른 이들은 더 많은 일거리와 임금이라는 일시적인 뇌물에 걸려들어 「정치적 배신자」가 되었다. 차티스트 운동을 지탱하거나 고쳐 세우려던 모든 노력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노동계급의 언론 기관은 대중의 무관심 속에 하나씩 죽어 갔다. 실로 영국 노동계급이 정치적 무가치 상태와 이토록 철저히 화해한 듯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니 영국과 대륙의 노동계급 사이에 행동의 연대는 없었다 해도, 어쨌든 패배의 연대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848년 혁명 이래 지나온 시기에도 그것을 보상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여기서는 두 가지 큰 사실만 짚어 두겠다.
참으로 감탄할 만한 끈기로 싸워 온 30년의 투쟁 끝에, 영국 노동계급은 지주와 금융가 사이의 일시적인 분열을 이용해 10시간 노동법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공장 직공들이 얻은 막대한 육체적·도덕적·지적 이익은 공장 감독관 보고서에 반년마다 기록되고 있으며, 이제는 모든 쪽에서 인정받는다. 대륙의 정부 대부분이 다소 고친 형태로나마 영국의 공장법을 받아들여야 했고, 영국 의회 자신도 해마다 그 적용 범위를 넓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노동자 법안의 놀라운 성공을 드높인 것은 그 실제적 의의만이 아니었다. 유어 박사, 시니어 교수 같은 그 부류의 현자들, 곧 가장 이름난 과학 기관을 통해 중간계급은, 노동시간을 법으로 제한하면 영국 공업의 조종이 울릴 것이라고 예언했고 흡족할 때까지 증명해 보였다. 영국 공업은 흡혈귀처럼 피를, 그것도 아이들의 피를 빨아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옛날에 아이를 죽이는 것은 몰록 종교의 신비로운 의식이었지만, 그것은 아주 엄숙한 때에만, 아마도 1년에 한 번쯤 행해졌을 뿐이며, 게다가 몰록은 가난한 자의 아이들만 유달리 좋아하지도 않았다. 노동시간의 법적 제한을 둘러싼 이 투쟁이 더욱 맹렬했던 것은, 놀란 탐욕은 별도로 하더라도, 그것이 실로 중간계급의 정치경제학을 이루는 수요·공급 법칙의 맹목적 지배와, 노동계급의 정치경제학을 이루는 사회적 예견이 통제하는 사회적 생산 사이의 큰 싸움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0시간 노동법은 큰 실천적 성공이었을 뿐 아니라 원칙의 승리였다. 중간계급의 정치경제학이 백주에 노동계급의 정치경제학에 굴복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재산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노동의 정치경제학의 더 큰 승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협동조합 운동, 특히 대담한 몇몇 「일손」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힘을 모아 세운 협동조합 공장을 말한다. 이 위대한 사회적 실험의 가치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들은 논증이 아니라 행동으로, 일꾼 계급을 부리는 주인 계급이 없어도 현대 과학의 요구에 맞추어 대규모 생산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것, 열매를 맺기 위해 노동 수단이 노동하는 사람 자신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독점될 필요는 없다는 것, 그리고 노예 노동이나 농노 노동과 마찬가지로 고용 노동도 일시적이고 열등한 형태일 뿐이며, 기꺼운 손과 준비된 정신과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연합 노동 앞에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영국에서 협동조합 제도의 씨앗을 뿌린 것은 로버트 오언이었다. 대륙에서 시도된 노동자들의 실험은 사실 1848년에 발명된 것이 아니라 소리 높여 선포된 이론들의 실천적 결과였다.
동시에 1848년부터 1864년까지의 경험은, 협동 노동이 원칙에서 아무리 훌륭하고 실천에서 아무리 유용하더라도 개별 노동자들의 우연한 노력이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 머문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커 가는 독점을 막을 수도, 대중을 해방할 수도, 그들의 비참한 짐을 눈에 띄게 덜어 줄 수도 결코 없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 없이 증명했다. 그럴듯한 귀족들, 박애주의적인 중간계급 연설꾼들, 심지어 빈틈없는 정치경제학자들까지 갑자기 협동 노동 제도에 메스꺼울 만큼 찬사를 늘어놓게 된 것은 아마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예전에 이 제도를 몽상가의 유토피아라고 조롱하거나 사회주의자의 신성모독이라고 낙인찍어 싹부터 잘라 버리려다 헛수고만 했던 자들이다. 근면한 대중을 구하려면 협동 노동은 전국적 규모로 발전해야 하며, 따라서 전국적 수단으로 육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토지의 영주들과 자본의 영주들은 언제나 자기들의 경제적 독점을 지키고 영구화하는 데 정치적 특권을 쓸 것이다. 그들은 노동의 해방을 촉진하기는커녕 그 길에 온갖 장애물을 계속 놓을 것이다. 지난 회기에 파머스턴 경이 아일랜드 차지인 권리 법안의 지지자들을 어떤 비웃음으로 깔아뭉갰는지 기억하라. 하원은 토지 소유자의 집이라고 그는 외쳤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노동계급의 큰 의무가 되었다. 그들은 이를 깨달은 듯하다.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동시에 부흥이 일어났고, 노동자당을 정치적으로 다시 조직하려는 노력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공의 한 요소, 곧 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수는 결합으로 뭉치고 지식으로 이끌릴 때에만 저울에서 무게를 갖는다. 지난 경험은, 여러 나라의 노동자 사이에 있어야 하며 그들이 해방을 위한 모든 투쟁에서 서로 굳게 곁에 서도록 북돋워야 할 형제애의 유대를 소홀히 하면, 그 앞뒤 없는 노력이 다 같이 좌절하는 것으로 벌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생각에서 1864년 9월 28일 세인트마틴 홀 공개 집회에 모인 여러 나라의 노동자들은 국제협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확신이 그 집회를 움직였다.
노동계급의 해방에 그들의 형제적 협력이 필요하다면, 범죄적 기도를 좇고 민족적 편견을 부추기며 해적 같은 전쟁에 인민의 피와 재산을 탕진하는 대외 정책 아래서 그들이 어떻게 그 큰 사명을 다할 수 있겠는가? 대서양 건너편에서 노예제를 영구화하고 퍼뜨리려는 파렴치한 십자군에 서유럽이 곤두박질치지 않게 구한 것은 지배계급의 지혜가 아니라, 그들의 범죄적 어리석음에 맞선 영국 노동계급의 영웅적 저항이었다. 캅카스의 산악 요새가 러시아의 먹이가 되고 영웅적인 폴란드가 러시아에 암살당하는 것을 유럽의 상층계급이 어떤 파렴치한 찬동과 거짓 동정과 백치 같은 무관심으로 지켜보았는지, 머리는 페테르부르크에 있고 손은 유럽의 모든 내각에 뻗쳐 있는 저 야만적 강국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얼마나 엄청나게 잠식해 왔는지가, 노동계급에게 의무를 가르쳐 주었다. 국제 정치의 비밀을 스스로 익힐 것, 각자 자기 정부의 외교 행위를 감시할 것, 필요하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그것에 맞설 것, 막을 수 없을 때에는 함께 일어나 동시에 규탄할 것, 그리고 개인 사이의 관계를 다스려야 할 도덕과 정의의 단순한 법칙을 민족 사이의 교류를 다스리는 최고의 규칙으로 내세울 것.
그러한 대외 정책을 위한 싸움은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전반적 투쟁의 한 부분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협회 임시 규약
고려하건대,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이 쟁취해야 한다는 것,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계급적 특권과 독점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위한, 그리고 모든 계급 지배의 폐지를 위한 투쟁을 뜻한다는 것,
노동하는 사람이 노동 수단, 곧 생활의 원천을 독점한 자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 모든 형태의 예속, 모든 사회적 비참, 정신적 타락, 정치적 종속의 밑바닥에 있다는 것,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경제적 해방은 모든 정치 운동이 그 수단으로서 종속되어야 할 큰 목적이라는 것,
그 큰 목적을 지향한 모든 노력이 지금까지 실패한 것은 각 나라 안의 여러 노동 부문 사이에 연대가 없었고 여러 나라 노동계급 사이에 형제적 결합의 유대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노동의 해방은 지역적 문제도 민족적 문제도 아니라 근대 사회가 존재하는 모든 나라를 아우르는 사회적 문제이며, 그 해결은 가장 앞선 나라들의 실천적·이론적 협력에 달려 있다는 것,
유럽의 가장 근면한 나라들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노동계급의 부흥은 새로운 희망을 일으키는 한편, 옛 오류로 되돌아가지 말라고 엄숙히 경고하며, 아직 따로 떨어져 있는 운동들을 즉시 결합하라고 요구한다는 것,
이러한 이유로—
아래에 서명한 위원회 위원들은 1864년 9월 28일 런던 세인트마틴 홀에서 열린 공개 집회의 결의로 권한을 받아, 국제노동자협회를 창립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이 국제협회와 이에 가입하는 모든 단체와 개인이 피부색, 신앙, 민족을 가리지 않고 서로에 대해, 그리고 모든 사람에 대해 진리와 정의와 도덕을 행동의 기초로 인정할 것임을 선언한다.
그들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 의무를 다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여긴다. 의무 없는 권리 없고, 권리 없는 의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으로 그들은 다음과 같은 국제협회 임시 규약을 작성했다.
1. 이 협회는 여러 나라에 존재하며 같은 목적, 곧 노동계급의 보호와 향상과 완전한 해방을 지향하는 노동자 단체들 사이에 연락과 협력의 중심 매개체를 마련하기 위해 설립된다.
2. 이 단체의 이름은 「국제노동자협회」로 한다.
3. 1865년 벨기에에서, 국제협회에 가입한 노동자 단체들의 대표로 이루어지는 노동자 총대회를 연다. 대회는 노동계급의 공통된 염원을 유럽 앞에 선포하고, 국제협회의 확정 규약을 정하며, 협회가 성공적으로 활동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검토하고, 협회의 중앙평의회를 임명한다. 총대회는 해마다 한 번 연다.
4. 중앙평의회는 런던에 두며, 국제협회에 대표된 여러 나라에 속하는 노동자로 구성한다. 중앙평의회는 자기 위원 가운데서 의장, 회계, 총서기, 각국 담당 통신서기 등 업무 처리에 필요한 임원을 뽑는다.
5. 총대회는 해마다 열리는 회의에서 중앙평의회의 한 해 활동에 대한 공개 보고를 받는다. 해마다 대회가 임명하는 중앙평의회는 위원 수를 늘릴 권한을 가진다. 긴급한 경우 중앙평의회는 정기 연례 기한 전에 총대회를 소집할 수 있다.
6. 중앙평의회는 협력하는 여러 협회 사이의 국제적 기관이 되어, 한 나라의 노동자가 다른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는 자기 계급의 운동을 늘 알 수 있게 하고, 유럽 여러 나라의 사회 상태에 대한 조사가 공동의 지도 아래 동시에 이루어지게 하며, 한 단체에서 제기된 일반적 관심사를 모든 단체가 함께 논의하게 하고, 이를테면 국제 분쟁 같은 경우처럼 즉각적인 실천 조치가 필요할 때에는 연합한 단체들의 행동이 동시적이고 한결같게 한다. 중앙평의회는 적절하다고 여길 때마다 여러 전국 단체나 지역 단체에 제출할 제안을 앞장서 낸다.
7. 각 나라에서 노동자 운동의 성공은 단결과 결합의 힘으로만 확보될 수 있고, 다른 한편 국제 중앙평의회의 쓸모는 그것이 상대하는 것이 노동자 협회의 몇몇 전국 중심인가, 아니면 서로 떨어진 수많은 작은 지역 단체인가에 크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국제협회의 회원들은 자기 나라의 흩어진 노동자 단체들을 중앙의 전국 기관이 대표하는 전국 조직으로 결합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그러나 이 조항의 적용이 각 나라의 특수한 법률에 따르며, 법적 장애가 없는 한 어떤 독립된 지역 단체도 런던 중앙평의회와 직접 연락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8. 첫 대회가 열릴 때까지 1864년 9월 28일에 뽑힌 위원회가 임시 중앙평의회로서 활동하여, 여러 나라의 노동자 협회를 연결하고, 연합왕국에서 회원을 모으고, 총대회 소집을 위한 준비 조치를 취하며, 그 대회에 내놓을 주요 문제를 전국 단체·지역 단체와 함께 논의한다.
9. 국제협회의 회원은 누구나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거처를 옮길 때 연합한 노동자들의 형제적 지원을 받는다.
10. 국제협회에 가입하는 노동자 단체들은 형제적 협력의 영원한 유대로 결합하면서도 기존 조직을 그대로 유지한다.
임시 중앙평의회의 이름과 국적
영국인: 롱메이드, 월리, 리노, 위틀록, 폭스, 블랙모어, 하트웰, 피전, 루크래프트, 웨스턴, 델, 셔먼, 니어스, 쇼, 레이크, 버클리, 오저, 하월, 오즈번, 카터, 그레이, 휠러, 스테인즈비, 모건, 그로스미스, 크리머, 딕.
프랑스인: 드누알, 르뤼베, 주르댕, 모리소, 르루, 보르다주, 보케, 탈랑디에, 뒤퐁.
이탈리아인: L. 볼프, 폰타나, 세타치, 알도브란디, 라마, 솔루스트리.
스위스인: 누스페를리, 융.
독일인: 에카리우스, 볼프, 오토, 레스너, 펜더, 로흐너, 마르크스, 카우프, 볼레터.
폴란드인: 홀토르프, 리브친스키.
조지 오저, 중앙평의회 의장.
조지 W. 휠러, 명예 회계.
카를 마르크스, 독일 담당 명예 통신서기.
G. P. 폰타나, 이탈리아 담당 명예 통신서기.
J. E. 홀토르프, 폴란드 담당 명예 통신서기.
헤르만 F. 융, 스위스 담당 명예 통신서기.
P. V. 르뤼베, 프랑스 담당 명예 통신서기.
윌리엄 R. 크리머, 명예 총서기.
주석
- 물과 몇몇 무기물 요소를 제외하면 탄소와 질소가 사람 음식의 원료를 이룬다는 것은 독자에게 새삼 일깨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체를 기르려면 이 단순한 화학 성분들은 식물성이나 동물성 물질의 형태로 공급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감자에는 주로 탄소가 들어 있고, 밀빵에는 탄소질과 질소질 물질이 알맞은 비율로 들어 있다.(마르크스의 원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