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
인물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 에른스트 마흐, 리하르트 아베나리우스, 요제프 디츠겐, 이마누엘 칸트,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카를 카우츠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 존 로크,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블라디미르 바자로프, 블라디미르 레닌 용어건신주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제1장. 정직한 비관주의
내 앞에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그 붉은 표지에는 명민한 레미 드 구르몽의 경구가 제사로 버젓이 박혀 있다. “진리를 찾는 일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결국 그것을 찾아내고 만다는 점이다.”
이것은 비관적인 책이다. 내가 읽어 본 책 가운데 가장 슬픈 책의 하나다. 지은이는 생물학의 권위자이자 생물학을 풍요롭게 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통찰력 있고 사람을 끌 만큼 냉철한 펠릭스 르당텍이다. 제목은 『무신론』이다.[1] 지은이는 신성에 대한 자신의 부정에서 나오는 모든 결론을 끝까지 생각해 낸 진정한 무신론자는 극히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는 진정하고 논리적이며 두려움을 모르는 무신론자라면 누구나 불가피하게 이를 수밖에 없는 그 실증주의적 환멸 앞에서 많은 무신론자가 경악하여 등을 돌릴 것이라고 본다!
비관주의는 대체로 우리 시대에 매우 널리 퍼져 있다. 세계관으로서라기보다는 기분으로서 말이다. 어떤 이들은 전체 대차대조표에서 고통이 쾌락을 압도한다는 것을 너무도 뚜렷이, 제 살갗으로 느끼고, 또 어떤 운 좋은 자들은 너무도 명백한 자기 특권에 감사하며 세계에 호산나를 부르기가 어쩐지 양심에 찔린다.
최근 또 다른 위대한 생물학자 메치니코프가 낙관적인 책을 내놓고 아예 제목을 “Essais optimistes”라고 붙였다. 책에는 실로 위안이 되는 대목이 많다. 정상적인 조건에서는 유기체가 삶의 모든 시기에 걸쳐,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존재를 쾌락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 축복받은 정상적인 조건을 한번 찾아보시라! 그리고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혹시 그것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이번에는 당신 자신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과거와 당신의 유전이 제 몫을 할 것이다. 그런데 유전은 너무도 강력해서 이런 의심마저 들 수 있다. 도대체 인간이란 정상적인 존재이기는 한가?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현대의 사회생활은 비정상적이다. 즉 인간 유기체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다. 사회는 “비위생적”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병들어 있다. 따라서 압도적 다수는 비관주의자다. 그러면 낙관주의자는… 그들은 더욱 비정상적이다. 그들이 메치니코프처럼 “일반적으로” 말하는 추상적인 지성이 아니라면, 돼지이거나 편집광이다.
그러므로 비관주의로는 아무도 놀라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온전한 의미의 비관주의자가 되려면 세상살이가 나쁘다는 것을 증명해 낼 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점이라면 온 인류가 탄식하고 있다. 이 처지에서 벗어날 출구가 전혀 없다는 것까지 증명해야 한다. 그러자면 기분이 세계관으로까지 높여져야 한다.
자기 세계관의 확고함과 논란의 여지 없음을 증명하려 애쓰며 그러기 위해 갖가지 궤변을 찾아내는 비관주의자는 몹시 수상쩍은 인물이다. 그에게는 분명히 두 번째 목적이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것을 추구하지 말라고 설득하려 한다. 어차피 아무것도 안 될 거라나. 분명히 그에게는 사람들이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달갑지 않거나 이롭지 않은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천재성을 다 동원해도, 조금이라도 통찰력 있는 눈길에서 그의 두 번째 목적을 감출 수는 없다.
“세계는 고통이요, 삶은 악이며, 더 나은 것은 기대할 수 없고, 가장 좋은 것은 완전한 비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알게 된다. 이 비관주의자가 식사를 마치면 플루트를 불고, 죽은 뒤에는 48년에 이빨을 드러낸 “미쳐 날뛰는 천민”과 싸우라며 자기 재산을 “질서당”에 유증한다는 것을!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가 그토록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의 체계 전체가 매달려 있는 심리학적 갈고리는 일찍이 플라톤이 내세운 명제, 곧 쾌락이란 대체로 욕망의 충족이며 욕망은 그 자체로 고통의 성격을 띤다는 명제이다. 여기서 플라톤과 쇼펜하우어는 똑같은 결론을 끌어낸다. 욕망이 이어지는 동안 인간은 고통을 겪고, 욕망이 일단 충족되면 쾌락이 들어설 자리는 이미 없다는 것이다. 이 궤변은 조잡하고 눈에 거슬리며, 심리학적 비판에 살짝만 닿아도 버티지 못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플라톤은 이 궤변을 순전히 감각적인 쾌락에만 적용했다.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는 의식적으로 반동적인 부르주아지의 꾸며 낸 비관주의이다. 저자의 천재성이 이 사실을 어느 정도 가릴 수는 있어도 바꿀 수는 없다.
이보다 진실한 성격을 띠는 것은 아주 널리 퍼져 있고 수천 년이나 묵은 비관주의이다. 그것에 철학적 표현을 부여한 이가 칸트이다. 칸트는 하나의 윤리적 이상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도덕적 본성의 법칙이 우리의 감각적 천성에서 넘을 수 없는 장애에 부딪히며, 그 때문에 이상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온전히 달성될 수 없다고 확인했다. 최고선이란 절대적 도덕의 명령을 완전히 이행하고 그 보답으로 온전한 지복을 누리는 데 있을 것이다. 받을 자격이 있는 지복, 이것이 이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악인이 승리하고 의인이 십자가의 짐에 눌려 쓰러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이 사태를 바꿀 수 없다.
이 비관주의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도, 진실하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이것이 순전히 소시민적인 비관주의라는 것은 분명하다. 자유로운 진화론자의 눈에는 지상의 불완전함이 결코 바뀔 수 없다는 것이 전혀 증명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진보에는 어떠한 절대적 한계도 없다. 그러나 진보를 이렇게 자유롭게 믿으려면 혁명가여야 하고, 게다가 사회주의자여야 한다. 소시민적 생활 양식과 소시민적인, 혼돈스럽고 이기적인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라면 칸트가 옳다.
칸트의 거짓은 그가 자신의 비관주의를 극복하려 애쓰는 데서 시작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는 의무의 의식이 있다. 그런데 이 의식이 참되려면 의무의 목소리를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다. 만일 명백한 사실과 이성이 이를 반박한다면, 의지는 신비롭고 초감각적인 방식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이상은 지상의 삶에서 달성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상의 삶 너머, 사후의 삶에서 달성될 수 있다. 현실의 목소리에 맞서 우리의 도덕적 요청이 실현되도록 보증해 줄 힘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이다.
무신론자라면 분명 거꾸로 이렇게 선언해야 한다. 나는 보증해 주는 힘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받을 자격이 있는 지복이라는 이상은 인간 두뇌의 환상일 뿐이며, 의지의 자유도 의무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시각의 착시와 비슷한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때 비관주의는 출구 없는 성격을 띠게 된다. 관념론자들이 왜 온 힘을 다해 유물론에 맞서 곤두섰는지 이해할 만하다. 그들에게 유물론은 더할 나위 없이 암울한 것으로 보였다[2].
그러나 문제는 유물론의 담지자로 나선 이들이 새롭고 대담한 계급, 미래를 지닌 계급의 이데올로그들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복잡해진다. 그들은 교회와 특권의 보호자인 신과 연을 끊었지만, 바로 그 같은 일격으로 관념론자들이 진보에 그어 놓은 한계도 끊어 버렸다. 그들은 유토피아주의자다운 열광으로 물질의 무한한 완성 능력을 선포했고, 편견을 깨부수고 이성의 빛 아래 사회생활과 개인 생활을 완성하자고 외쳤다. 모두가 환호하고 혁명적 투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유물론은 너무나 낙관적으로 보였기에, 관념론 까마귀 떼의 까악거림(여기에는 괴테 자신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은 누구도 동요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동요시킬 수도 있었다. 적들의 까악거림은 아니더라도 사려 깊은 지도자들의 몇몇 발언은 그럴 수 있었다. 디드로는 의지의 절대적 결정론을 선언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해돋이만큼이나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상황, 전체의 흐름이 어떤 이는 영광의 길로, 다른 이는 치욕의 길로 이끈다. 수치, 양심의 가책—이것은 강요된 한순간의 공로나 죄를 제 것으로 돌리는 존재의 무지와 허영심이 낳은 유치한 지어낸 이야기다.” 돌바크는 더 멀리 나아갔다. 알려져 있듯이 그는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그리고 더 높은 법칙에 따라 일어나므로 자연에는 질서도 무질서도, 규칙성도 불규칙성도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수치와 양심만이 무지의 열매인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도, 다른 사람들이 행한 선이나 악에 대한 모든 판단도 그러하다.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필연적인 것이 있을 뿐이다. 누구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자동적 과정이 있을 뿐이다. 이런 조건에서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 그리고 무언가를 지향하는 일은 무지한 자나 할 일이다. 디드로도 돌바크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논리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양심의 가책에 빠질 때 무지한 자라면, 이상을 지향할 때도 나는 똑같이 무지한 자다. 그렇다, 하고 유물론자는 말한다, 그러나 당신 안의 이상을 향한 지향 역시 필연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도 필연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현 단계에서 도달한, 양심의 가책이 환상이라는 필연적 인식이 그 가책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다면, 그 인식은 논리적으로 발전하면서 이상을 향한 나의 지향도 필연적으로 약화시키고 나를 수동성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
실로 그렇다. 나는 마침내 세계와 역사가 의지들의 투쟁과 그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나의 표상이 환상임을 인식한다. 실상 세계는 투쟁이 아니라 자동기계이며, 그 안의 모든 것은 숙명적으로 일어난다. 나 역시 나의 욕망들과 함께 숙명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 의지가 환상이라는 나의 인식 역시 숙명적이다. 거대한 기계가 움직인다. 만약 나의 의지와 나의 의식이 아예 없었다 하더라도 거대한 기계는 그것들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한 채 계속 움직였을 것이다. 대체 어떤 악마가 이 불행한 의식을 이 자동기계에 붙들어 맬 필요가 있었단 말인가? 이 과정에 참여하는 태양들, 행성들, 돌들, 기체들, 액체들은 이해가 간다. 그것들은 수동적으로 참여하며, 말하자면 그것들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는 이 희극에 완전히 똑같은 자격으로 참여하며, 우리의 행위는 돌의 낙하나 해돋이만큼이나 필연적이다. 그런데 악마는 우리가 그러면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의식하도록 꾸며 놓았다. 그래도 우리가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을 마치 우리가 자유롭게 스스로 하는 것처럼 의식하는 동안은 그나마 봐줄 만하다! 삶이 아무리 쓰라려도 우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 삶의 살아 있는 참여자다. 그런데 이제 보니 우리는 전혀 살아 있는 참여자가 아니라 꼭두각시이고, 우리의 자유는 환상이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필연성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지를 의식하는 일이 남는다. 수동적인 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먹고 싶어졌다”, “우스워졌다”, “생각이 떠올랐다”고 말해야 할 뿐 아니라, 이렇게 느껴야 할 것이다. 감정과 생각이 왔다가 가고, 그와 평행하는 신경 과정들이 몸을 잡아당기며, 몸은 움직인다고. 전에는 이 모든 것, 즉 감정과 생각과 움직임을 자기 것으로, 자기 자아의 부분으로 여겼던 의식은 이제 구석으로 밀려나, 처음에는 겁에 질린 눈으로, 나중에는 따분해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의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몸과 그 직접적인 환경에 담긴 세계 과정의 한 조각이 비치는 어리석은 거울이다. 그리고 곧 생각과 감정이 점점 드물게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이 눈에 띈다. 특히 욕망이 그렇다. “나는 원한다”라고 거울은 비꼬듯 생각한다. “하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지. 이건 그저 원하는 마음이 드는 것일 뿐이야. 욕망이 왔고, 필연적으로 왔으며, 나는 여기에 전혀 관계가 없어.” 마침내 죽을 듯한 비애가 찾아오고, 이런 생각도 찾아온다. “두개골이라 불리는 이 빌어먹을 상자를 깨 버리는 게 어떨까.” 마지막 순간에 거울은 마치 반사광으로 번쩍 빛나는 듯하다. 그래도 나 역시 무언가 의미가 있구나! 보라, 환상이 간파되고 자아가 제거되어 거울로 만들어지고 나자 사는 것이 불가능해지지 않았는가”. 그러나 자동기계는 가차 없이 작동하고, 카라마조프가 말했듯 뉴런들은 제 “꼬리”를 꿈틀거리고, 전류가 흐르고, 생각이 찾아온다. “아니, 이 모든 것은 현상들의 연쇄이고, 너는 완전한 환상이야, 너는 없어. 너 자신을 죽이는 것은 네가 아니라, 그것이 그것 자신을 죽이는 거야.”
안드레예프의 화가는 세계를 기이하고 형체 없는 괴물의 모습으로, 영혼을 그 위에서 파르르 떠는 나비의 모습으로 그렸다. 그러나 나비는 날아갈 수 있다. 신비가들이 꿈꾼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금욕주의가 나비의 날개를 자라게 하며, 그러면 나비가 형체 없는 물질에서 조용히 떨어져 나와, 태양-신이 빛나고 신의 꽃들이 향기로운 잔을 내미는 정원으로 날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유물론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나비라니 당치도 않다! 의식은 현이 진동할 때 소리가 따르듯 물질적 필연성에 따르는 현상이다. 소리가 어디로 날아가겠는가? 진동 밖에 소리는 없다. 그러나 소리는 진동이 아니라 소리, 질적으로 다른 무엇이다. 게다가 아둔하다.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 군더더기다. 그리고 주목하라. 자연에는 이 보잘것없는 우리의 의식 나부랭이 말고는 군더더기가 아무것도 없다! 소리 그 자체는 자연에 없기 때문이다. 소리 또한 우리 의식의 산물이며, 공기의 진동으로 흥분한 몇몇 신경과 자기 뇌의 몇몇 부분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의식이 그렇게 지각하는 것이다.
소리와 빛, 이 경이로운 현상들이야말로 자연의 가장 큰 매력이건만, 그것들은 자연에 없다. 뇌 속에도 없다. 자연에도 뇌 속에도 원자, 충돌, 필연성, 맹목적인 힘들... (무의식적이기에) 죽어 있는 에너지의 갖가지 등급이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물질이라 이름 붙인, 더없이 따분한 무슨 요물이 있을 뿐인데, 그것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뿐이다. 물질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필연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우리의 터무니없는 두개골에 사는 터무니없는 거주자가 낳은 것이다. 그리고 물질이 미칠 듯이 따분하고 아무에게도 쓸모없다면—물질의 모든 과정은 죽어 있고 무의식적이어서,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 물질도 따뜻하지 않고 가장 꽁꽁 언 물질도 춥지 않으니까—필연성이 낳은 이 거울은 그보다 더욱 터무니없다. 이 거울 덕분에 우리는 밝고, 어둡고, 춥고, 달콤하고, 대개는 괴롭다. 그런데 이 거울은 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더없이 쓸모없는 기록이며, 그것이 바꾸지 못하는 숙명의 대차대조표 역시 더없이 쓸모없다.
쇼펜하우어보다 한술 더 뜬다! 이렇게 “높은” 정신 발달 단계에 이르고 나면 흔히 자살이라는 생각과 행동이 뒤따른다니,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보겠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다른 이들은 덜 논리적이기는 해도 더 기분 좋은 출구를 찾아낸다.
펠릭스 르당텍의 독창성은 무신론과 유물론이 실제로 이러한 결론에 이른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데 있다. 그에게는 이것이 몹시 쓰라리다. 그러나 maior amica veritas! a la 칸트 식으로 속임수를 쓰며 자기 바람에 영합해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환상을 연장하든가, 아니면 정직하고 싶다면 세계의 자동성을, 세계에 의지도 목적도 가치도 없음을, 그리고 그 안에 의식이 있다는 것의 터무니없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르당텍은 자기 책이 대담하게 자신의 한계까지 생각을 밀고 나간 유물론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논리가 실제로 승리를 거두지만, 그 논리가 유물론의 파탄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도덕적 파탄이 아니다. 과학에 도덕적 파탄이 다 무엇인가? 도덕과 과학이 이마를 맞부딪친다면, 물론 도덕의 이마가 산산이 부서져 먼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jaillira la verité, 불꽃 다발이 되어 비천하지만 단단한 진리의 무리 앞에서 “우리를 드높이는 기만”의 허망함을 비출 것이다.
아니다, 여기서의 파탄은 이성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과학적 파탄이다. 그러니 르당텍과 함께 환멸의 심연에 빠져 죽고 싶지 않은 자는 다른 배로 옮겨 타라.
Sauve qui peux!
펠릭스 르당텍은 교활함이나 실천이성의 칭얼거림으로 오염된 관념론자들의 사이비 과학성과 달리, 자신의 학문적 정직성을 스스로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그는 파스퇴르 같은 연구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나약한 마음에 매수된 철학의 성격을 훌륭하게 드러낸다. 다윈이나 파스퇴르 같은 지성의 이러한 추락은 특히 서글프다. “우리 각자의 안에는 두 사람이 있다”고 이 저명한 프랑스 의사는 말한다. “하나는 모든 것을 tabula rasa로 만들고 관찰과 실험과 추론을 통해 자연의 이해에까지 올라가고자 하는 학자이다. 그리고 그 곁에는 감정의 인간, 전통과 믿음 또는 회의의 인간이 있다. 그는 자식들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아아! 자신이 그들과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믿고 그렇게 바라며, 비브리오가 죽듯이 죽고 싶어 하지 않고, 자신의 내적 힘이 변형될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확언하는 인간이다.” 우리의 무신론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파스퇴르는 논리에 떠밀려 이 교설들을 믿지 않게 될까 두려워서 그것들에 관해 논쟁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절대적 비관주의로 향하는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우리 생물학자의 정직성은 그 무엇으로도 멈추게 할 수 없다. 그의 비관주의를 보여 주기 위해, 쓰디쓰고 굽힘 없이 정직한 그의 책 여러 곳에서 몇몇 진술을 인용하겠다.
“만일 내가 신을 믿을 수 있다면, 나는 신학자가 내게 요구하는 숭배도 감사도 그에게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나를 창조했으며, 내가 청하지도 않았고 솔직히 말해 없어도 아주 잘 지낼 수 있었을 호의를 내게 베풀었다고 혼잣말을 할 것이다. 비록 내 개인적 삶은 지금까지 대체로 순탄하게 흘러왔지만 말이다. 아이들에게 ‘나의 어미 거위’ 동화를 들려주는 것을 들을 때면, 나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착한 요정이 내 앞에 나타나 가장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를!’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요, 태어난 자에게는 빨리 죽는 것이 최고의 복이로다.”
이처럼 르당텍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비관적인 문장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깊은 근거가 있다.
그는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소박하고 담담하게 미소 짓는 문체로 말을 잇는다. “나는 천성이 용감한 축에 들지 못한다. 만일 착한 행실에는 영원한 지복으로, 나쁜 행실에는 끝없는 고문으로 갚을 수 있는 절대적 주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아마 유혹을 피해 수도원으로 달아나 내 미래를 쥐고 있는 폭군에게 시편을 노래하며 이승의 삶을 보낼 것이다. 나는 결코 신을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그를 몹시 두려워하기는 할 것이다.”
“나는 완벽한 무신론자가 세상에 없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그런 자에게는 어떤 욕망도, 어떤 목적도, 어떤 노력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러겠는가?” “무신론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가까운 이들에게 슬픔을 안기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논리적인 무신론자는 삶에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지혜이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너무 크다. 그것은 고행자의 무관심이다. 나는 나의 무신론적 논리가 조상에게서 물려받아 내 안에 뿌리박힌 환상들을 이겨 내지 못한다는 것이 기쁘다.”
“죽음은 무신론자의 개선이다… 무신론자는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이해한 대로라면 삶은 무이다. 그런 그가 또 어떤 다른 무를 두려워하겠는가? 살아 있을 때에도 자기 자신을 무로, 즉 유전에 의해 일정한 방식으로 배열된 재료들의 순간적인 운동으로 의식하는 그가 어떻게 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겠는가?”
“무신론자는 자신이 끊임없이 죽어 가고 있으며 결코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여기에 두려움이 들어설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진정한 무신론자들의 사회에서라면 마취를 통한 자살은 매우 존경받을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러한 사회는 아마도 이 길로 나아갔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르트만식 인류의 성숙이다! 환호하라, 관념론자들이여. 과학이 곧장 무덤으로 인도했다! 그렇지 않은가? 르당텍은 당신들에게 훌륭한 동맹자가 아닌가?
“지혜를 더하는 자는 슬픔을 더한다”고 전도자는 말했다 — 기원전 마지막 세기 유대 귀족의 마음속에서 신성이 붕괴한 산물인 이 전도자 말이다. 르당텍은 그를 따라 읊는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밤나무 그늘에서 평화롭게 음매 우는 암소의 행복을 부러워해 보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가? 지식의 나무는 쓴 열매를 맺었다! 그 열매를 맛보는 미심쩍은 쾌락 때문에 아담을 벌한 신은 지나치게 엄격했다”!
그러나 일단 맛보았다면 — 앞으로 나아가자. 슬픈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자!
유물론적 결정론에 근거하여 신을 없애면서 르당텍은 이상도 없애 버린다. 그것도 얼마나 대단한 논리로! — “무정부주의자들은 무슨 말을 하든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만약 그들이 무신론자라면 그들은 자신의 투쟁에서 무기를 잃은 처지가 될 것이다. 박탈당한 이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결코 이기적인 소유자들에 대한 증오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무신론자라면 정의의 절대적 가치를 믿지 않을 것이다! 신은 없다. 그러므로 정의는 선량함과 마찬가지로, 논리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이처럼 끝없고 바닥 모를 비관주의의 원인을 좀 더 가까이 살펴보자. 이 경우 비관주의와 수동성의 뿌리가 결정론이라는 관념이라는 것은 독자에게 이미 완전히 분명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하다. 실제로 비교적 최근에 운터만은 디츠겐의 이름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근거하여 모든 것을 용서하라고 주입하려 애썼다. 그러나 운터만은 물론 보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이해함에 모든 것을 용서함이 뒤따른다면, 모든 것을 용서함에는 무관심과, 르당텍이 이른 바로 그 도덕적 죽음이 뒤따른다는 것을. 디츠겐주의자 운터만은 의지의 자유가 없으므로 우리가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해야 한다고 증명한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을 한다.” 이 정식은 철저히 유물론적이다. 이것은 르당텍의 정식이다. 그리고 이 정식은 가차 없이 비관주의로 이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강제된 것임을 잊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 모든 지혜가 무슨 소용인가 — 아니면 세계가 지극히 따분한 무의미라는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 여기서 나는 독자에게 미리 일러 둔다. 내가 비록 숨겨진 형태로라도 그를 관념론으로 부를 채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아니다, 문제는 오직 유물론적 형이상학의 수많은 근본적 오류 가운데 하나를 드러내고 살아 있는 실재론의 권리를 회복하는 데 있을 뿐이다. 그러나 비판에는 나중에 이르기로 하고, 지금은 우리의 지극히 정직한 생물학자의 논거를 들어 보자.
르당텍에 따르면 결정론은 인간이 스스로 목적을 세울 수 있다는 인간의 환상을 죽인다! “뇌의 주어진 상태에 뒤이어 일어날 사실에 대한 유전된 의식이, 수단이 목적에 종속된다는 환상을 낳는다. 일원론자에게 의식은, 즉 동물이 자기 뇌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갖는 앎으로서의 의식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며, 그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오직 뇌의 생리적 상태뿐이다. 일원론으로서는 목적론을 설명하고 그것에 삶 속의 정당한 자리를 지정해 주는 일이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삶의 목적, 이상이 문제가 되면, 일원론은 삶의 유일한 목적은 죽음이며 그것도 완전한 죽음이라고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것은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무신론자에게는 먼 목적이 있을 수 없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맺으면서 아무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 본성을 따를 뿐이다. 예컨대 내가 이 책을 쓸 때 하는 일도 그와 같다.”
“개체와 그 환경을 속속들이 알면 어떤 행위든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은 자유의 부정일 따름이다.”
“우리가 우리의 도덕적 의식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저지른 오류의 흔적이다.” 여기서 르당텍이 염두에 두는 것은 자기 행위에 책임이 있다는 조상들의 환상이다.
“논리적인 무신론자에게는 자기 존엄에 대한 의식도, 자기 공로에 대한 의식도, 삶에 대한 실제적 관심도, 자기 행위와 남의 행위에 대한 평가도 있을 수 없다.” 르당텍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연법칙의 위대함마저 없애 버린다. 자연의 아름다움? “진화론은 존재하는 것들의 조화라는 문제를 옮겨 놓았다. 사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결코 아니다(대체 그런 문구에 무슨 의미를 담을 수 있겠는가?). 살아 있는 존재들이 사물에 적응하면서 그 존재 형태에 익숙해진 것이며, 그 때문에 ‘사물들 사이에 있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법칙의 위대함? — “나는 법칙이 왜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지 알지 못한다. 나는 법칙의 존재를 확인하고, 생존 투쟁을 위해 그것을 연구한다. 법칙 앞에서의 경탄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법칙을 누군가의 사유의 결과로 설명하던 신학적 설명의 잔재이다.”
자연에는 아름다움도 의미도 없고, 맹목적인 과정이 있을 뿐이다. 우리 자신 안에도 바로 그 과정이 있을 뿐이며, 거기에 쓸모없고 우리를 괴롭히는 의식이 더해져 있을 따름이다. 이 의식은 곧 꺼질 것이며, 그것도 바로 우리라는 조직된 물질 조각이 분해되면서 꺼질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존재는 커다란 어리석음이고, 삶과 사유는 그보다 더 큰 어리석음이다.
이를 깨달은 현자는 제 뇌에 납덩이를 박아 넣고 물러난다.
독자에게 잠시 인내를 청한다. 이 “일원론”에 대한 비판에는 곧 이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르당텍에게 무신론의 선구자와 동조자가 없는지, 있다면 그들이 누구인지 살펴보자.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그의 동조자일 수 있는가?
에피쿠로스주의
르당텍은 아마도 자신이 무신론적 지혜의 암울한 밑바닥에 처음으로 다다랐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 지혜는 아주 오래되었다. 다만 르당텍의 선구자들과 동시대인들은 자기 철학에서 다른 결론을 끌어냈고 지금도 끌어내고 있으며, 내가 보기에 그 결론은 덜 논리적이지 않고 어쨌든 더 유쾌하다. 에피쿠로스 풍조(특정 철학자의 학설로서의 에피쿠로스주의가 아니라, 예로부터 에피쿠로스 풍조라 불러 온 그에 상응하는 기분)의 전성기는 언제나 낡은 사회의 토대가 무너지는 시기와 겹친다. 그 폐허 위에서 옛 귀족의 타락한 후손들이나 새 귀족의 벼락출세자들은 자유사상가 철학자와 시인들의 도움을 받아 모든 욕망의 허망함, 의지의 근본적 부자유, 죽음의 승리를 손쉽게 깨닫는다. 그러나 그들은 르당텍과는 다른 결론을 끌어낸다. 자살이 아니라(자살은 바로 결정론자들, 그것도 깊이 종교적인 결정론자들인 스토아학파에게서 성행했다) 될 수 있는 대로 유쾌하고 즐거운 삶을 결론으로 삼는다. 쾌락은 숙명적이든 아니든 하나의 사실, 실증적인 사실이다! 순간을 붙잡자. 쾌락에는 인식된 삶의 무의미를 잊게 해 주는 힘이 있다 — 망각을 찾자.
에피쿠로스 자신은, 더구나 그의 위대한 제자 루크레티우스는, 일관된 무신론자이자 결정론자로서 망각이 아니라 우아하고 학식 있는 체념을 권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도덕론에서 본질적인 것은 세속의 번잡함에 대한 혐오, 그리고 개인적 행복, 곧 주어진 개인이 이해하는 대로의 즐거운 체험을 최대한 많이 누린다는 의미에서의 행복을 향한 지향이다.
그러나 참된 에피쿠로스주의자들—에피쿠로스 같은 이들—은 잡다한 실천적 에피쿠로스주의자 무리 가운데서 예외다.
기원전 5세기 초 무역으로 번영하던 리디아에서, 그리고 뒤에는 신들조차 시샘한 참주의 궁정에서 우리는 그 우아함으로 위대한 실천적 유물론의 대표자를 만난다. 아나크레온 말이다. 그는 얼마나 자주 죽음을,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을, 암울한 하데스를 떠올리는가.
영원한 memento mori가 그의 춤추는 시구 속에서 앙상한 턱뼈를 드러내며 이를 드러내고, 그는 헐벗은 해골을 서둘러 장미로 꾸민다. 물론 그는 완전한 취기, 짐승으로, 더러운 물건으로 변해 버릴 때까지 마시는 거친 스키타이식 취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주연이나 사랑은 그래도 무엇보다 먼저—자기 망각이며, 슬픈 기조음이 그의 노래에 늘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의 걸맞은 제자, 강철 같은 로마가 5세기에 소아시아 문화를 데웠던 것과 같은 뜨거운 여름에 이르렀을 때 노래한 호라티우스 플라쿠스는 그토록 태평스럽게 자신의 “Carpe diem”을 외치며 같은 철학에 봉사한다. “Carpe diem”, — 이야말로 깊이 유물론적인 구호다. 르당텍은 이를 피하고 묵살하려 애쓰지만, 무의미한 세계 기계 속에 쾌락이 엄연히 있다는 사실이 무신론자를 가르치고, 무신론자는 우리 생물학자에게 즐겁게 대답하여 외친다. 신도 없고, 의지도 없고, 목적도 없고, 관심도 없다 — carpe diem!
“멈추어라, 순간이여”!—알다시피 악마가 우리에게서 얻어내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며, 이것을 노리고 그는 우리 영혼을 영원히 손아귀에 넣어 하늘로 가는 길을 막으려 든다. 술과 사랑, 화려함과 허영—이것이 메피스토펠레스가 쓰는 수단이다. 그리고 일관된 무신론자는 이 모든 것에 자연스럽게 끌린다. 이것은 덧없지만, 덧없기로는 모든 것이, 태양 자체마저 그러하다—그리고 이것은 적어도 즐겁다.
유럽의 중세는 진리를 보기에는 너무나 야만적이었다. 중세는 신을 믿었다. 그러나 중세는 아랍과 페르시아 문화가 꽃핀 시대이기도 했다. 페르시아는 11세기에 저 나름의 위대한 아나크레온을 가졌다. 아나크레온처럼 쾌활한 노인이었고, 게다가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이자 철학자였으며 이름난 국가의 요인이었다. 러시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오마르 하이얌을 두고 하는 말이다. 11세기 이슬람 유물론자의 아름다운 사행시 몇 편을 이탈리아어에서 옮긴 내 번역으로 여기에 인용하는 것을 독자는 허락해 주기 바란다(아아! 페르시아어 원문은 많은 이가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이얌에게 삶은 아무 값어치도 없으며, 그는 이것을 더없이 독창적인 형식으로, 정통 신자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몹시 불경한 형식으로 표현한다.
“배신하듯 우리에게 살아 있는 숨을 불어넣고는, 운명은 우리를 목적 없는 길로 내보냈다! 어서 이리 오라, 나의 금지된 잔이여! 조롱을 잊고 근심을 잠기게 하리라.”
책임을 부정하는 데서 그는 르당텍 못지않다.
“당신은 나를 물과 진흙으로 지었으니, 내가 무엇을 걸치든 모두 당신의 피조물이요, 내가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책임질 이는 오직 당신뿐. 노여워 마시라. 여기서 내가 무슨 상관이랴?”
우리에 대한 심판이라는 신화는 그를 깊이 분개하게 한다.
“죄짓지 않는 자 누구랴? 삶은 죄로 아름다운 것을. 어쩌면 신은 죄를 물어 나를 벌하실까? 나의 악을 하늘의 악으로 갚으실까?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나와 닮았음을 증명할 뿐이리라!”
오마르는 신이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환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당신은 전능한가? 그런데 내가 들고일어난다면? 당신은 전지한가? 그렇다면 나는 어찌하여 죄를 짓는가? 어쩌면 내가 무릎을 펴고 일어설 때, — 내가 하늘을 텅 비게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11세기에 쓰인 것이다. 어쩌면 오마르는 루크레티우스를 읽었던 것일까?
세계는 무의미하다.
“내 보기에 우리 세계는 환등이요, 태양은 그 환등의 불꽃 노릇을 한다. 우리는 그림자. 신은 꿈과 술에 취한 난쟁이들을 바라보며 웃는다.”
확실한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예언자들은 무리 지어 우리에게 왔고 어두운 세계에 빛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눈을 감은 채 하나씩 뒤를 이어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그러면 과학은?
“학자들은 모든 것의 원인을 찾아내고 태초를 두고 논쟁한다… 그런데 보라, 그들은 잠들어 말이 없다… 약간의 진흙과 한 줌의 벌레가 그 지혜로운 입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결론은 바로 그 위안 없음 때문에 오히려 쾌활한 듯하다.
“사키여, 영원하고 고상한 것들을 두고 벌이는 말다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여기 하프가 있다, 사키여, — 사람은 티끌이다! 여기 음계가 있다, 사키여, — 우리는 한순간이다!”
“시인이여, 그대는 앞날을 알고 싶은가? 그대는 모든 것에 분명한 답을 갈망하는가! 차라리 즐거워하라, 마셔라! 세계는 그대와 나의 의견도 묻지 않고 생겨났다!”
고행자의 무관심이라고 르당텍은 말할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거의 기쁨에 찬 우아함과 결합된 무관심이다!
“마셔라! 시간은 날아가라지. 별들은 같은 자리로 돌아오리라… 우리의 티끌은 벽의 회반죽이 되리라. 그 벽 안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죽음을 향해 깨어나리라.”
햄릿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떠올려 보자. 그러나 페르시아의 천문학자는 사랑도 노래할 줄 알며, 그것도 아나크레온 못지않게 노래한다!
“영광의 수정 잔을 산산이 부순다! 그것이 내게 무엇이랴? 새벽이 내게 인사를 보내고, 류트는 황홀하게 노래하며, 술과 사랑스러운 입술의 떨림이 나를 취하게 한다.”
“밤… 그러나 때로 나는 연인과 함께 앉아 밤의 잔치를 벌이고, 이곳에 기쁨이 그토록 환히 빛나니 수탉이 외쳤다. 새벽이다, 새벽이다!”
나팔 소리처럼 기쁨과 승리에 찬 이 사행시로 위대한 페르시아인의 인용을 마치기로 하자. 오, 인류여! 너는 꿰뚫어 볼 수 없는 비관주의의 어둠에서 일어나, 혼돈의 밤 속에서 새벽처럼 빛나는 기쁨에까지 이를 줄 안다. 오, 행복하라, 경이로운 족속이여. 너는 행복하기를 바라고 또 행복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마르와 함께 여전히 비관주의, 유물론, 무신론의 품 안에 머물러 있다. 그는 밤에 불을 밝히지만, 그 밤이 곧 자신을 삼켜 버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인류가 수백 년 야만의 무거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죽음으로 위협당했다. 그 대상은 물론 대개 쾌락과 지식에 끌리기 시작한 귀족들과 부를 쌓아 가던 상인들이었다.
피사의 Campo Santo에 있는 안드레아 오르카냐의 「죽음의 승리」는 문화적 드라마의 위대한 기념비이자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기법은 아직 미숙하지만, 과일나무 그늘 아래의 연주회 장면보다 더 관능적이고, 더 세련되고, 더 매혹적이고, 더 음악적인 장면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곳에서는 꿈꾸는 듯한 귀부인들과 기사들이 기이한 악사의 류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추어 사랑의 유희를 시작한다. 이 오만한 자들, 이 아름다운 자들! 그러나 죽음은 이미 그들 위로 낫을 치켜들었다. 광야로 달아나라, 하고 오르카냐는 우레처럼 외친다! 보라, 죽음을 피한 자들은 바로 이들, 신을 믿고 물질적 삶을 영원한 삶의 제물로 바친 자들이다. 금욕자의 마음에 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어머니 광야 밖에는 오직 죽음의 왕국이 있을 뿐이다. 관, 시체, 부패, 이것이 바로 너희가 밟고 다니는 땅, 금세 시드는 꽃들과 너희의 덧없는 기쁨들이 자라나는 땅의 정체이다.
그리고 르네상스 사람들은 삶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죽음에 자신을 내맡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메디치 가문의 정점이자 이미 타락한 후손이며 이미 퇴화한 자, 위대한 정치가이면서 내면의 체험으로는 이미 기생충이었던 위대한 로렌초는 자신의 “dolce favella”로 호라티우스 못지않게 노래한다.
Viva Bacco, e viva amore; Ciascum suoni, balli, e canti, Arda di dolcezza il core; Non fatica, non dolore, Quel che ha esser, convicu sia: Chi vuol esser lieto, sia Di doman no c' è certezza!
그러나 찬란한 르네상스 시대는, 세대가 바뀌는 가운데 때 이르게 지나치게 무르익은 듯한 인물들이 자주 나타나기는 했어도, 힘이 넘치는 시대였다. 아나크레온풍의 에피쿠로스주의, 어느 보티첼리의 깊고도 지쳐 버린 데카당스, 어둡고 뜨거운 사보나롤라의 열정적인 중세 회귀와 나란히, 이 위대한 시대는 미래의 인간, 우리의 현재에게조차 미래인 인간을 맹아의 형태로 보여 주었다. 이 시대는 이를테면 금욕적 기독교와 삶을 즐기는 방탕 사이에서, 회의적 유물론과 인간 존엄에 대한 고양된 의식 사이에서 갈라져 있었다. 비할 데 없는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인간의 존엄에 관하여」라는 논고에서, 물론 관념론의 은어로이기는 하지만, 이미 인류의 종교를 고백하고 있었다. 르당텍 같은 부류의 비관주의자들이 저주하는 바로 그 운명에 대한 감사로 가득한 이 논고에서 피코는 창조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아담아, 아담아, 내가 너를 세계 한가운데 둔 것은 네가 주위를 둘러보며 모든 것을 보게 하려 함이다. 내가 너를 천상의 존재로도, 지상의 존재로도, 죽을 자로도, 죽지 않을 자로도 만들지 않은 것은 네가 네 삶의 조각가가 되고 승리자가 되게 하려 함이다. 너는 짐승으로 전락할 수도 있고, 신과 같은 존재로 올라설 수도 있다. 짐승들은 어미의 태에서 자신의 운명을 지니고 나오며, 천사들은 태어난 뒤 곧 자신의 운명을 정한다. 그러나 너에게는 발전이, 자유의지의 싹이 주어졌으니, 네 안에는 온갖 삶의 맹아가 있다.”
르네상스에 전형적인 동요를 우리는 라블레에게서 발견한다. 참된 교육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는 아침 햇살이 스며 있고, 그의 파괴적이고 활기찬 웃음 속에서는 아침 해가 빛살로 노닌다. 그러나 라블레는 이미 “진리”를 알아 버렸다. 흔들리기 시작한 중세의 믿음은 그에게 르당텍식의, 하이얌식의 진리를 열어 보였고, “술병의 신탁”은 진리를 갈망하는 팡타그뤼엘에게 영원한 무신론적 “bibite”로 답한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낡은 믿음의 폐허 위에서, 편견에서 벗어난 어떤 이들은 다가올 것에 대한 관심을 잃고 쾌락 숭배에 빠져들며, 다른 이들은 다가올 것을 내다보고 그것을 열광적으로 맞이한다. 그리고 흔히 한 사람이 한 입김으로 가장 깊은 비관주의를 선포하면서 삶으로 부르기도 한다. 볼테르와 디드로가 자주 그랬다.
그러나 결국 이런 물음이 남는다. 논리적인 유물론, 무신론, 결정론은 언제나, 그리고 변함없이 비관주의, 자살에 대한 생각, 수동성, 또는 경박함과 결부되어 있는가? “무신론자”는 정말로 비논리성을 대가로 치러야만 절망의 스킬라와 방탕의 카리브디스를 피할 수 있는가? 피코의 숭고한 희망은 정말로 관념론자들에게만 허락되고, 그들의 입에서만 정당한가? 그러나 신에 대한 믿음은 깨지기 쉬우며, 가차 없는 진리와 부딪치면 반드시 무너지고 만다. 눈을 돌리고 머리를 감싸며 이시스에게 새 베일을 덮어씌워 보라. 그녀는 그것들을 모두 떨쳐 내고, 소름 끼치는 나신의 장엄한 추함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네 앞에 설 것이다. 과학은 편견보다 강하다. 이성의 차가운 흐름은 슬퍼하는 마음의 저항을 이겨 낼 것이다. 유물론은 승리할 수밖에 없고, 그와 함께 무섭고 공허하며 죽은 환멸도 점차 승리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자유와 기계론 사이에 종합, 구원의 종합이 있는가? 이상과 필연성 사이에? 창조와 자동성 사이에?
우리 시대에 무신론은 승리를 거두고 있다. 그것도 무엇보다 “푸르 레 장(남들을 위해)” 믿음을 온갖 방법으로 지키는 자들 사이에서 그렇다. 르당텍은 자신이 무언가 새로운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헛된 생각이다. 지배 계급의 10분의 9가 똑같이 삶의 공허와 무의미를 느끼고 있다. “다만 그것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실천이 보여 준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요즈음, 신문은 호마다 베를린에서 오물의 물결을 실어 나른다. 쾌락에 대한 갈증은 이미 썩은 도착으로 넘어갔다. 나는 파르부스 동지의 『Kolonialpolitik』에서 탁월한 한 쪽을 빌려 온다. 지배 계급의 실천적 “무신론”을 나는 이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와 쾌락을 좇는 진짜 광란이 부르주아지의 모든 층을 사로잡았다. 겸손, 절제, 적은 것에 만족하라는 규칙을 지닌 집안 도덕, 평범함과 그 일상, 가정의 행복, 가족의 기쁨, 그 조심성과 머뭇거림과 단서들, 눈에 띄지 않는 이행들, 옷과 예술의 잿빛 색조, 강렬하고 화려한 효과에 대한 두려움을 지닌 그 도덕은— 내던져져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대담함, 강탈, 위험한 도박, 드잡이, 경주, 일등상을 차지하려는 아귀다툼, 성공에서 정당화를 찾는 파렴치, 돈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모든 지향에 대한 경멸, 아무것으로도 가리지 않은 맘몬 숭배, 그리고 물려받은 가족, 종교, 사회생활의 토대를 해체하여 무로 돌리고, 오직 채워지지 않는 쾌락의 갈증 하나만을, 개인이 자신의 사회적 환경과의 모든 이상적 유대를 잃었기에 그 희생자들을 수도의 소음 속에서 지칠 줄도 쉴 줄도 모르고 한 쾌락에서 다른 쾌락으로 몰아대는 그 갈증만을 불러일으키는 냉소적인 사회적 회의주의,—이것이 새 시대의 정신이다. 모두가 과거도 미래도 없이 순간을 살고, 온 세상이 거대한 증권거래소로 변해 간다.”
여기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르당텍보다 더 논리적이다. 무엇 때문에 수동성인가? 무엇 때문에 자살인가? 쾌락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세계에 쾌락이 있는 이상, 그것이 더 많아지게 하라, 도박과 쾌락의 열병이 그치지 않게 하라. 이상? 우습다, 세계는 기계가 아니던가? 책임, 양심? 집어치워라! 우리는 결정론자다! 도덕, 연민? 모퉁이 너머에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럴 겨를이 없다! 앞으로! 잊어버리자, 취해 버리자...
그러나 이 사실에 주목해 보라. 쾌락! 르당텍, 정직한 르당텍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아니면 퀘이커 교도다운 품행 방정함 속에서 천진하게 그 곁을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쾌락에 대해서라면 생물학자도 철학자도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하다. 쾌락!.. 세계 속에 쾌락이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환멸에 빠진 유물론자들, 곧 아나크레온, 호라티우스, 하이얌, 로렌초 데 메디치, 라블레와 그 밖의 긴 대열을 시인으로, 거의 기쁨에 찬 시인으로 만든다. 그리고 바로 쾌락이 우리의 “진보적” 부르주아를 지금의 그들로 만든다. 쾌락의 숭배는 비관주의 위에 서 있지만, 쾌락 자체는 비관주의로부터 벗어나 어딘가로 이끈다.
북아메리카 이주민들 사이에서 청교도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영국인에게 고유한 비관주의는 브라이언트라는 시인에게서 표현을 얻었다. 그의 시의 몇몇 쪽은 형식에서는 아닐지라도 내용에서는 레오파르디의 소망들 옆에 당당히 자리할 만하다. 르당텍적인 정조는 19세기 초의 이 시인의 시구들 속에 시적인 힘과 비통한 파토스로, 장례식처럼 장엄한 평정으로 흘러나왔다. 그 시구를 여기에 산문 번역으로 옮긴다.
“마지막 시간에 대한 생각이 문득 네 마음 위로 무너져 내리듯 덮쳐 올 때, 음울한 형상들이 네 가슴을 죄어 오고 단말마의 고통과 수의와 관과 밤이... 끝없는 밤이 눈앞에 나타날 때, 그때 밖으로 나가라, 열린 하늘 아래로 나가 귀를 기울여라... 자연의 침묵에 귀를 기울여라, 그 속에서 너는 자연의 가르침을 들으리라. 자연의 고요한 말은 흙과 물에서 솟아오르고, 에테르의 깊은 곳에서, 우주의 네 끝에서 울려 온다. ‘너는 죽어야 한다.’ 그렇다, 그러하다. 그러니 그림자의 왕국으로 가는 대상의 행렬에 합류하여 죽음의 고요한 들판에서 자리를 찾아라. 그때 발에 차여 무덤으로 떠밀려 가는 노예의 모습을 하지 말고, 침착하고 평온하게 무덤으로 다가가라, 마치 잠자리에 들며 이불을 매만지고, 누워서 위안을 주는 잠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러나 지금의 아메리카, 달러와 사치에 대한 고삐 풀린 갈망의 아메리카가 태어나고 있었다. 쾌락이 점잔 빼는 퀘이커 교도들의 손자들을 자기에게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 육체의 시인, 유물론자 시인 월트 휘트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그리고 그 속에 있는 기묘한 관념론의 아름다운 음조를 알아채 보라. 신학자들에게 지친 휘트먼은 르당텍처럼 동물이 되고 싶어 했다.
“나는 동물들 사이에서라면 행복할 것이다!” 휘트먼은 외친다. “그들은 그토록 평온하고 만족스럽다. 그들은 자기 삶의 인습 때문에 피땀을 흘리지 않고, 자기 죄를 되뇌며 어둠 속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며, 주 하느님에 대한 자기 의무를 둘러싼 논쟁으로 병들지 않는다!”
휘트먼은 동물에게로 “자신을 낮췄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인간-동물성의 밑바닥에서 아름다운 것을 많이 발견했다.
“무엇 때문에 내가 기도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무슨 법칙 따위를 존중해야 하는가? 현자들과의 논쟁과 사유의 비상 끝에 깊이 중의 깊이까지, 머리카락을 네 갈래로 쪼개는 데까지 이르러 보니, 내 뼈를 덮고 있는 육체야말로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달콤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숭배한다면, 그것은 내 몸의 사지가 지닌 아름다운 건강이다.”
이것을 어찌하겠는가? 사람이 자기가 잘 지낸다고 여긴다면 말이다. “나는 육체와 그 식욕을 믿는다. 보고, 듣고, 만지는 것, 이것은 기적이다. 내 몸의 모든 부분이 기적이다.”
그리고 자기 나의 경계를 넘어서되 육체의 경계는 넘어서지 않은 채, 휘트먼은 말한다. “신은 내 눈에 나 자신보다 작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공감 없이 열 걸음을 걷는 자는 자기 장례 행렬 속을 걷는 것이다.”
죽음은 공감으로 극복되며, 휘트먼은 손자들을 맞이한다. “나는 새로운 종족을 기다린다. 그들은 와서 선조들을 지배할 것이며, 새로운 투쟁으로 새로운 정치, 문학, 새로운 종교, 새로운 발명과 예술의 걸작에까지 올라설 것이다. 나는 단언한다. 어떤 인간도 자신이 얼마나 신적인 존재인지, 미래의 운명이 얼마나 확실한지 알지 못한다.”
이 몇 안 되는 인용만 보아도 휘트먼 역시 무신론자였음을 알 수 있다. 당분간은 그가 철저하지 못한 무신론자였다고 해 두자. 어쨌든 그의 무신론에서는 비관주의의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는다. 그렇다, 세계 감정의 두 극단이 우리 시대만큼 선명하게 드러난 적은 없다. 한편에는 파르부스가 묘사한 지배계급의 저 광포한 유물론, 삶의 감정과 실천의 유물론이 있다. 이것은 이따금 위선이라는 역겨운 넝마 조각, 오래전에 해체된 종교적 의복의 잔해로 가려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여기서 무화과 잎 노릇을 할 뿐이다. 다른 한편에는 열광과 다가올 것에 대한 사랑과 자기희생과 이상으로 가득 찬 사회주의 운동이 있다!
흠, 흠! 그렇다, 하고 회의주의자가 내게 반박한다. 물론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사회주의는 열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바로 마르크스주의가 여기서 많은 것을 망쳐 놓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아니면 바로잡아 놓았다고 해도 좋다, 각자 좋을 대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에 르당텍식 환멸의 씨앗을 들여왔고, 역사에 숙명을 들여왔다. 마르크스주의자가 그저 숙명적 과정을 지켜보는 처지라면, 어떻게 열광을, 다가오는 미래의 기쁨을, 다가올 세대와 인류의 성장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겠는가? 설령 그 과정에 참여한다 해도 그것은 “glaubt zu schieben und wird geschoben”하는 꼭두각시로서일 뿐이다. 실제로 운터만은 변증론자가 자본가의 모습을 한 역사적 필연성에, 따라서 성직자, 헌병, 밀정 따위의 모습을 한 역사적 필연성에도 분개하는 것은 지극히 철저하지 못한 일이라고 단언하지 않는가.
마르크스주의자는 이 모든 열광, 이 모든 감정의 들끓음이 거품에 지나지 않으며, 물질적으로 필연적인 과정의 비물질적이고 쓸모없는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고 또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것들을 내던지고, 그저 산문적으로, 역사가 예정해 둔 일을 할 것이다. 예언자들이 말한 바가 이루어질지어다.
그러므로 휘트먼의 낙관적 무신론은 진짜가 아니며, 철저하지 못한, 유치한 무신론이다.
열광적이고 예술적이며 종교적인 사회주의는 진짜가 아니며, 과학적이지 못한, 유치한 사회주의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관념론의 냄새가 난다. 그것들은 충분히 유물론적이지 못하다. 양자택일에서는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다. 관념론으로, 반관념론으로,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적 관념론과 위안을 주는 신비주의(신적 요소)의 n—퍼센트 용액으로 자신을 속이든가, 아니면 참된 과학성에 흠뻑 젖어, 슬픔과 찌푸린 이마와 밤나무 아래서 음매 우는 암소에 대한 부러움을 안고 숙명적으로 지루한 길을 서둘러 걸어가서는, 어서 “이불을 여미고” 마지막 침상에 눕든가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제 몸의 전자들이 새로운 춤을 추도록, 그것도 어쩌면 이제는 어리석은 반주 없이, 이 터무니없는 의식이라는 반주 없이 추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종합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근본적인 오류 때문에 당신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종합 말이다. 르당텍 씨, 어쩌면 당신은 사소한 실수를 하나 저지른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 자신이 절제된 슬픔이 어린 수동성으로 “유전적으로 기울어” 있고 사회적으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더없이 훌륭한 사람이지만, “자기 환경과의 이념적 유대를 잃었다”기보다는 그 유대를 너무 교수답게, 너무 실험실 창문 너머로, 너무 중간 부르주아답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바라는 종합에 다가가는 가장 좋은 길은 짧은 조사일 것이다. 에피쿠로스적 세계감정은 세상에서 가진 것을 빼앗긴 자들, 곧 프롤레타리아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며 어떤 열매를 맺는가? 그들 역시 신은 없고, 의무도 없고, 도덕도 없고, 이상도 없으며, 있는 것은 과정뿐이고... 그리고 쾌락뿐이라는 말을 듣고 있지 않은가. 아마 그들도 나름의 결론을 끌어내고 있지 않을까?
프롤레타리아 토양 위의 “에피쿠로스주의”
민중은 오랫동안 본능적으로 무신앙을 두려워했다. 신은 상당 부분 민중이 고안해 낸 것이었고, 민중의 심리적 균형을 지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버팀목이었다. 평민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에게 삶은 너무나 위안이 없었고, 불의는 전갈 채찍으로 그를 너무나 아프게 후려쳤기에 그는 삶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생명력이 있었다. 우리 생물학자의 이론에 따르면 “진리”를 발견한 뒤에 줄어들지만, 우리 견해로는 스스로 쇠퇴하고 있을 때에만 그런 “발견”을 허용하는 바로 그 생명력 말이다. 그리하여 구체적 현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민중은 삶을 거부했지만, 그 삶, 곧 본능과 감정과 의지는—자기를 긍정하려 했고, 실제로 자기를 긍정했다. 바라던 세계, 마땅히 있어야 할 세계를 지어내고, 그 세계에 대한 믿음을 낳고,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선포하고, 진리와 영원한 지복의 승리를 보증하는 힘을 온 자연 위로 높이 들어 올림으로써 말이다. 민중은 신과 헤어질 수 없었다. 민중은 오랫동안 주인들의 회의주의로부터 신을 지켰다. 그러나 경제적 조건이 옛 민중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민중, 프롤레타리아 민중을 만들어 냈다. 사태와 정서가 달라졌다. 이 대조를 특징짓기 위해 카를 카우츠키의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훌륭한 한 쪽을 빌려 온다.
“로마 쇠퇴기와 마찬가지로 중세에도 생산은 아직 모든 사람이 세련된 삶의 향락 수단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보편적 평등을 요구한 사람은 사치뿐 아니라 학문과 예술에서도 필연적으로 악을 보았다. 학문과 예술은 사실상 사치의 하인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는 더 멀리 나아갔다. 짓누르는 빈곤에 비하면 방탕과 음란뿐 아니라 온갖 기쁨, 아무리 순진한 쾌락조차 죄로 여겨졌다.”
“종교개혁이 전개되면서 이 계급들을 억압하는 데로 나아가고 제후 절대주의의 출현이 모든 저항을 희망 없는 것으로 만들었을 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나타나 작은 착취자들의 으뜸가는 미덕을 절약, 곧 “절제”로 만들었을 때—이것이야말로 그들을 다른 어떤 수단보다 빨리 큰 착취자의 대열로 올려 주리라 약속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그때 청교도 정신은 농민층과 하층 소시민층에도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농민과 소시민층에게 청교도주의를 심어 준 바로 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프롤레타리아에게서는 그것을 지워 없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절망과 위로 올라서려는 욕구를 동시에 불어넣는다. 그것은 개인적 노력으로 자기 처지를 크게 개선하려는 모든 시도를 가망 없게 만든다. 그것은 한 개인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에게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모든 희망을 빼앗으며,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현재를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으로 보인다.
Carpe diem, 순간을 누려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오면 하나도 놓치지 마라. 이것이 그의 좌우명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처지는 그를 무사태평하게, 그렇다고 근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경박하게 만드는데, 이 둘은 청교도적 속물의 눈에는 두 가지 큰 죽을죄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프롤레타리아에게 희망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그의 개인적 미래를 갈수록 더 가망 없게 만들면서도 그의 계급의 미래를 갈수록 더 밝은 빛 속에 드러낸다. 희망과 확신은 날마다 자라난다.”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를 분노케 하는 것은 부자들의 사치 그 자체가 아니다. 이미 지적했듯이 사치는 이제 5세기 전만큼 두드러지게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은 그가 온갖 생필품이 넘쳐나는 가운데, 그리고 바로 그 넘쳐남 때문에 궁핍을 겪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현대적 생산양식이 만들어 낸 거대한 생산력이 있으니 모두가 안락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오직 자기 자신의 개인적 운명만을 생각하는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무사태평과 경박함을 낳지만, 자기 계급의 필요에 함께하고 계급의 단결을 생각하며 그 계급과 더불어 느끼는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가장 높은 형태의 쾌활함과 삶의 기쁨을 일깨운다.”
카우츠키의 이 금언을 조금 따져 보자.
그러니까 무신론의 좌우명인 Carpe diem은 프롤레타리아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아, 붙잡을 만한 그 “날들”, 그 “순간들”은 얼마나 드문가.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위로 올라서려는 갈망과 절망을 불어넣는다. 이것은 무거운 드라마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지배자들을 본받아 향락에 몸을 맡기고 싶겠지만, 어떻게 그렇게 한단 말인가? 가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실 것인가? 실제로 알코올 중독은 이 토양 위에서 만개한다. 목자들이 “당신들이 노동자에게서 신을 빼앗으니 노동자는 술집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도 괜한 말이 아니다. 그렇다, 상류 사회의 “무신론자”가 클럽으로, 경마장으로, 극장으로, 무도회로 가고, 여행을 다니고, 룰렛을 하고, 몸 파는 미녀들과 흥청거리러 가듯이 말이다. 성령체 철학자이자 귀부인들의 천문학자인 플라마리옹 씨는 민중에게서 신을 빼앗지 말라고 애원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파치 패거리들의 왕국이 오리라”고 그는 말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강신술사 양반. 실제로, 위로 올라서려는 갈망, 그의 눈을 찌르는 당신들의 향락을 맛보고 싶은 갈망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기 처지가 출구 없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어떤 프롤레타리아는 밤이 되어 잠긴 상점 문을 부수러 나서거나, 당신의 웅변하는 입에 수건을 덮어씌우고 솜씨 좋은 coup de saint François로 당신의 주머니를 털 수도 있다. 요즘 같은 신 없는 시대에는 권총 없이 밤길을 다닐 수가 없다. 경찰과 성직자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 성직자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다... 그런데 교회는 텅 비어 간다. 경찰도 애를 쓰고... 감옥은 채워져 간다. 그러나 사회적 이율배반, 곧 “윗분들”의 본보기가 심어 준 향락에 대한 갈망과 경제적 절망 사이의 이율배반이 낳은 열매를 모조리 감옥에 처넣을 수는 없다.
이런 이율배반은 사람을 광기로 몰아갈 수도 있다. 라바숄과 앙리가 신을 믿기만 했더라면!
사회의 성직자 수호자들과 세속의 수호자들은 무신론자가 투쟁에서 무장해제되어 있다는 르당텍의 말을 믿지 않는다. “아니, 빌어먹을, 당신 말대로 아나키스트가 일관성이 없다고 칩시다. 그래도 그는 당신의 무신론에서 출발하여 이렇게 말하지 않소. 신이 없다면 지상에 정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자리를 부르주아적 건물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다이너마이트를 이리 내놓아라.” 바로 이 때문에 성직의 사제들과 세속의 사제들이 무장해제된 무신론을 지닌 가련한 생물학자에게 맹렬히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처음에는 그 가장 뛰어난 분자들에서, 그 다음에는 점점 더 그 대중 전체에서 이 이율배반의 출구를 찾아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계급에게 빛나는 찬란한 희망으로 개인적 처지의 절망을 이겨냈다. 물론 이로써 플라마리옹의 마음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그는 아파슈를 말하지만 실제로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이다.
그 대신 이로써 프롤레타리아의 마음은 훨씬 가벼워진다. 그는 자기 몫의 향유를 찾아낸다. 그는 배우고, 활동하며, 수많은 동지와 기쁘게, 화목하게 어울린다. 그는 라살이 그토록 훌륭하게 말했던 제4신분의 긍지를 느끼며, 지금껏 인류를 비춘 이상 가운데 가장 높은 이상을 위한 투쟁에 도취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환상, 환상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내게 외친다.
잠깐만. 향유는 결코 환상일 수 없다. 이보다 덜 환상적인 것은 없다. 직접적 경험만이 유일하게 확실하다. 내가 여러분에게 나는 향유한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이 환상이라고 결코 나를 납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보라. 이 향유들, 프롤레타리아의 향유들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들지 않고, 파괴하지 않으며, 병약한 자손으로 나타나지 않고, 생명의 힘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힘을 굳세게 하고 키우며, 모든 것을 다정하고 따뜻한 빛으로 비춘다.
이것이 향유의 실재론이다. 운명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향유가 있으며, 나는 그것에 나의 예를 말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사회적 투쟁에서 자신의 최고의 향유를 찾아냈다. 당신은 필멸의 존재가 자기 생전에 실현되지 않을 목표를 기뻐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는 기뻐한다. 생물학자 양반, 당신이 할 일은 사실들에게 어떠해야 한다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설명해 보라. 프롤레타리아는 신을 믿지 않고, 삶은 하나이며 게다가 실재적(물질적)이라고 여기며, 저세상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미래를 믿으며, 거기서부터 그의 가슴으로 아침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이 현상은 필연적으로 생겨났다. 나는 당신에게 동의한다. 물질적 필연성이 이러한 세계감정의 정조를 벼려냈다. 그러나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프롤레타리아는 삶에 “예”라고 말한다.
당신은 주장한다. 운명이 역사를 지배한다, 운명, 영혼 없는 과정이 실을 잡아당기고, 환상을 먹고 사는 가련한 프롤레타리아여, 너는 그렇게 움직여지는 것이다.
Du glaubst zu schieben, und du wirst geschoben. Perbacco, 그렇다, 나는 내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며, 또한 이 사실을 본다. 나는 자연발생적인 힘이 나를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내게 더없이 자유로운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생각해 보라, 친구 펠릭스여, 나는 바로 그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또 움직일 것이다. 그러므로 woge die Welle, 역사는 나의 의식 또한 지향하는 곳으로 나를 실어 간다. 르당텍이여! 당신은 우리를 태양 쪽으로 실어 가는 것이 거센 물결이라는 소식으로 우리를 슬프게 하려는 것인가? 르당텍이여, 우리는 그것이 기쁘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일원론에 무언가 잘못된 데가 있다고 점점 더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신론적 실천이 그것을 너무도 의기양양하게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생물학자 무신론자에게로 돌아가, 그의 일원론의 토대에 결함은 없는지 살펴보자. 결정론과 창조, 물질과 이상의 종합은 불가능한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야말로 이 종합에 다가서지 않았는가? (그 대변자로서의 마르크스, 엥겔스, 디츠겐.) 지나가는 김에 이런 물음도 던져 보자. 더 나아간 결론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우리의 펠릭스 르당텍도 (본인은 부인하려 하지만) 떠받드는 낡고 녹슨 유물론의 족쇄에 프롤레타리아 일원론을 묶어 두려는 자들이야말로 그것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간략하게나마 따져 보려는 물음은 이렇게 한 무더기다.
유물론적 일원론과 프롤레타리아 일원론
그러면 우리 저자의 “일관된 일원론”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자.
그는 무엇보다 자신이 유물론자가 아니며, 유물론이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고서 유물론자이기를 그만두었다고 스스로 밝힌다. “나는 조금씩 지혜에 이르렀다. 형이상학자이자 유물론자였던 나는 엄밀히 말해 불가지론자로 바뀌었다. 나는 나의 무력함을 깊이 확신하는 만큼이나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조리하다는 것도 확신한다.”
이런 진보는 축하해 줄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유물론자들이 얼마나 쉽게 ignoramus와 ignorabimus로 굴러떨어지는지 알고 있다. 실제로 르당텍은 소크라테스적 겸허에 이르고서도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유물론자로 남았고, 거기에 불가지론자가 하나 더 되었을 뿐이다.
그의 일원론을 그 자신의 말로 서술해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 방정식들, 깁스가 널리 쓰이게 만든 화학 퍼텐셜의 언어는 보편 역학의 승리를 내다보게 해 준다. 그 보편 역학은 이성을 가장 만족시키는, 가장 완전하고 가장 아름다운 일원론을 정초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원론, 곧 이원론에 맞서는 일원론은 이 웅대한 꿈의 실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내게 만족스러워 보이며 형이상학적 개념을 하나도 담고 있지 않은 정식은 다음과 같다. 우주에서는 측정할 수 있는 무언가의 변화 없이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Atheisme 165)
“나에게 외적인 어떤 현상이 문제가 될 때든, 나는 일원론자인 나에게 이원론자들의 온갖 불변량은 측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고 그저 밝혀 둘 뿐이다.”
“내가 일관된 일원론자라면, 나는 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 또한 측정할 수 있는 무언가, 즉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연구가 다가갈 수 있는 무언가의 변화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고, 그러므로 나의 내적 체험이 외부 관찰자에게 절대적으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 관찰자는 나의 내적 체험에 수반되는 측정 가능한 현상들을 측정함으로써 그것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168쪽과 169쪽)
“이원론자와 일원론자 사이의 뚜렷한 차이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전자에게 프레노그래프와 프레노스코프(그것을 이용하면 심리적 체험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수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는 절대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후자에게는 무조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197쪽) 여기까지 르당텍의 일원론에는 특별히 유물론적인 것이 아직 아무것도 없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은 모든 경험론자가 인정하는 정신생리학적 평행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그 다음부터 르당텍은 유물론으로 빗나가는데, 보아하니 그 자신은 이를 분명히 자각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는 귀머거리가 소리의 인상을 어떻게 지각할지를 따져 보다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소리는 흔히 음향 진동이라고 부르는 그 진동들의 부수현상이다. 소리 그 자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귀머거리들은 이 진동들을 똑같이 잘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음향 현상을 눈으로 연구하여 그것의 확고부동한 결정론을 확인한 귀머거리는, 이 현상들이 자기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다른 동료 인간들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우리가 말해 준다면 몹시 놀랄 것이다. 그러나 진동 연구에 자신이 있는 그는 귀머거리들이 알지 못하는 성질들이 음향 현상의 연쇄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주장할 것이다. 파동이 공기 속에서 전파되는 법칙은 그것이 소리를 내든 내지 않든(즉 누군가가 그것을 듣든 듣지 않든) 똑같다. 그러므로 소리는 공기의 파동 모양 진동의 부수현상이며, 우리는 듣는 이가 아무도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진동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인정할 만큼 충분히 겸손해야 한다”(200쪽).
“마찬가지로 관찰되는 개인의 의식도 관찰자에게는 부수현상이며, 관찰자가 기록한 측정 가능한 변화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일원론자에게는 인간 안에서 측정 가능한 무언가가 변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원론자에게 의식이라는 부수현상은 세계의 객관적 역사에 대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어느 익명의 통신원은 르당텍의 이러한 결론에 관해 그에게 이렇게 지적했다. “부수현상론자인 일원론자란 아직 일원론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일원론자다.” 꽤 정확한 지적이다.
르당텍의 첫째 명제는 이렇다. 모든 심리 현상은 생리 현상 속에 저마다 상관물을 가진다. 이것은 모든 실증주의자의 명제다.
둘째 명제. 오직 생리적(그리고 일반적으로 물리적) 현상만을 파악하는 관찰자도 세계의 연속적인 그림을 그려 낼 수 있으며, 그의 눈에서 흔적 없이 숨어 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기계적인 충분근거를 결여한 채 남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첫째 명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둘째 명제도 받아들여야 한다.
셋째 명제. 따라서 심리 현상은 세계의 객관적 역사에 대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이건 또 웬일인가. 이것은 대체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광학적 세계를 (잠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한없이 큰 사진 건판에 비출 수 있다고 하자. 그 세계는 색채를 잃고 잿빛이 되겠지만, 나름대로는 빈틈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색채라는 부수현상이 세계의 객관적 상에서 아무런 객관적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뜻인가? 정반대다. “대물렌즈”로 잡아낸 세계는 “객관적” 세계보다 빈약하고, 시각 경험의 어떠한 실재적 내용보다도 빈약할 것이며, 그것은 도식, 세계의 주관적이고 창백한 반영일 것이다.
세계를 그와 똑같이 끊김 없는 심리적 현상의 사슬로 그려 낼 수 있을까? 세계에 대한 온전한 심리적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지만 그럴 법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여러 면에서 우리와 매우 가까운 경험일원론이 바로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귀머거리가 만든 르당텍의 도식이나, 귀먹고 눈먼 촉각적 인간이 만든 로크의 도식은 인간에게 주어진 세계, 인간적으로 객관적인 세계를 단순화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지극히 주관적인 도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도식에 기대는 것이 편리하다는 데서, 그 도식이 사물의 본질이고 그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은 의미 없는 부수현상이라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 스크린 위의 그림자들을 본다. 그림자들은 끊김 없는 사슬을 이루며 펼쳐지고, 그 안의 모든 것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사람들이 그에게 말한다. “이보게, 자네의 그림자들은 환등기와 스크린 사이에서 움직이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드리우는 걸세.” “그 사람들, 그 부수현상들은 내게 공허한 것이오. 설령 그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그림자들의 놀이에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물론 관찰자는 자기에게 더 이해하기 쉬워 보이는 것, 특히 정확히 측정할 수 있어 보이는 것에서 출발하여 세계의 도식을 세울 권리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세계의 본질이고 나머지는 부수현상이라는 결론을 끌어낸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자—유물론자가 되는 것이다.
르당텍은 몇 가지 단서를 달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형이상학적 유물론자이며, 이것이 그를 논리적으로 비관주의로 이끈다. “정신적인 것”을 악마에게, 또는 “부수현상의 세계로” “보내 버렸으니”, 그가 세계를 매력 없는 것으로 만든 것은 당연하다. 로크의 세계보다 더 잿빛이고 지루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 세계에는 색깔도, 향기도, 소리도—세계의 아름다움이—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객관적 세계란 말인가?
물론 우리의 객관적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계의 모든 현상을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서 그 전체 그림 안에 받아들이며, 사진처럼 찍힌 본체들을 현상들의 반쪽짜리 존재와 갈라놓기를 그만둔다. 세계는 철두철미하게 현상적이다.
심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에는 이 글을 이어 가는 동안 다시 돌아올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르당텍이 유물론으로 기울어 있다는 점을 확인해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경향은 그의 결정론이 왜 지루하고 기계적인 특징을 띠고 있는지도 설명해 준다.
게다가 이는 르당텍이 숙명론과 결정론을 분명히 구별하는 듯 보이는데도 그렇다. “결정론자들은 모든 것이 법칙적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즉 주어진 순간의 세계 상태는 그 앞 순간의 세계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난다고 본다. 그러나 이때 동물도 인간도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며, 그들의 상태와 변화가 우주의 협주곡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숙명론자도 똑같이 추론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열외로 두고 거대한 기계 속의 쓸모없는 바퀴로 여긴다. 그런데 우리의 관념은 우리 행동의 요인이므로, 숙명론자는 바로 자신의 숙명론 때문에 손해를 입는다”(63쪽).
그러니까 우리는 “기계 속의 쓸모없는 바퀴”가 아니란 말인가? 심지어 “우리의 관념”조차 “세계의 객관적 역사”에 아무래도 좋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데도 르당텍의 비관주의 전체는 바로 세계의 무의미한 숙명성과 그 안에서 죽음이 승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 죽음의 승리는 먼 목표를 세울 권리를 주지 않는다.
요점은 우리 저자에게서 실재론적 일원론이 유물론적 일원론을 뚫고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을 이겨 내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그는 또한 상대적 자유의 관념을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자유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자유롭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 자신의 행위와 운명에서 자신의 정신물리적 유기체의 충동에 따라 규정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충동으로부터의 자유, 환경의 개별적 작용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텅 빈 공간에서 반응하는 절대적인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는 형이상학의 가장 터무니없고 가장 공허한 허구 가운데 하나이다. 르당텍은 이것을 안다. “‘자유롭다’는 표현 대신 나는 ‘자유롭게 행동한다’ 또는 ‘자유롭게 인간 노릇을 한다’(hommer librement)는 표현을 택하고 싶다. 곧 우리 안에 담긴 원인에 따라 우리의 본성에 맞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자유는 건강과 같은 뜻이 된다.”
이 마지막 결론으로 르당텍은 자신의 생각을 흉하게 뒤엉클어 놓는다. 아니다, 자유는 건강하고만 같은 뜻인 것이 아니라 힘, 권력과 같은 뜻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나중에 다가갈 것이다. 지금은 다만 르당텍에게서 “hommer”가 아주 많은 것을 뜻한다는 점을 덧붙여 지적해 두자. 그래서 그는 사실 자기 책은 다른 모든 책과 마찬가지로 목적이 없으며, 자기가 그 책을 쓴다면 그것은 사과를 맺으면서 목적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사과나무처럼 행동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hommer”라는 개념을 끔찍하게 깎아내리는 것이다. 『자본』 제1권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노동을 꿀벌의 노동과 훌륭하게 구별한다. 그런데 꿀벌의 생명 발현은 또다시,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사과나무의 생명 발현을 훨씬 넘어선다. 르당텍은 서툰 변증론자답게 모든 것을 한 무더기로 던져 넣는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 자유라는 관념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아직 확신하지 못한 사람이다. 자유라는 말을 실재론적으로 이해하는 실증주의자에게 돌, 나무, 동물, 인간은 자유를 향한 발전의 긴 사다리에서 서로 다른 네 단계이다. 돌은 환경과 부딪칠 때 자신의 본성을 최소한으로 드러내고, 인간은 최대한으로 드러낸다. 돌은 고도로 수동적이고, 인간은 고도로 능동적이다. 이 둘 사이에 원리적인 심연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등급을 잊어서는 안 된다.
hommer라는 개념을 유물론적으로(결코 모든 일원론자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다) 깎아내리는 태도는 르당텍이 유전의 의의를 흉하게 과장하는 데서도 엿보인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도덕적 의식은 나의 조상들이 겪은 사회적 필연성들의 유전된 요약이다. 바로 그것들의 흔적을 나는 나의 도덕적 의식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유전이 변이를 엄청나게 압도하던 어느 혈거인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자이자 20세기 인간에게 이처럼 변이를 잊어버리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각자는 수보로프 원수처럼 이렇게 외칠 수 있다. “조상! 조상! 각하, 저 자신이 조상이올시다!” 그렇다, 우리는 조상들의 일을 이어 가며, 더구나 대단히 기민하게, 따라서 자유롭게 이어 간다. 유전된 토대 위에 새로운 사회적 사실들과 새로운 인식들이 새로운 글자를 쓰고 옛 글자를 지운다.
르당텍을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끈 것은 일원론도 아니고 그 논리도 아니며, 유물론적 도식주의의 잔재이다. “삶의 목적, 이상이 문제가 될 때 일원론자는 삶의 유일한 목적은 죽음, 완전한 죽음이라고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르당텍의 모든 오류는 충분히 넓고 생생하지 못한 실재론으로 귀착한다.
1) 그는 우주 현상들의 상호의존의 본질을 깊이 파고들지 않음으로써 결정론의 분석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다.
2) 그는 인류라는 종과 인간 사회의 생명 발전이 지닌 의미와 본질을 깊이 파고들지 않으며, 그 때문에 그에게 생명은 오로지 개체적 존재들로만 쪼개지고, 이 존재들은 물론 죽음으로 끝난다.
3) 그는 신경계 생리학과 기술이 서로 의존하는 관계의 본질을 깊이 헤아리지 않는다.
그의 오류를 이 세 측면 모두에서 검토해 보자.
I
디츠겐 같은 일원론자가 우주와 그 결정론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 보자. “사물은 변증법적으로, 즉 동시적인 상호 연관과 상호 계기 속에서 고찰해야 한다. 사물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서로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면서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 사물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 물질과 정신, 힘과 질료는 같은 하나의 우주가 지닌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먼저 생겨났고 무엇이 나중에 생겨났느냐가 아니다. 물론 이런 탐구도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서로 없이는 생각될 수 없고, 저마다 따로 떨어져서는 전체 없이 생각될 수 없다는 점이다. 전체에서 떼어 낸 사물은 존재하기를 멈춘다. 사물은 작용하고 발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Das Wesen d. mens. Kopfar.』 65쪽). “우주의 모든 부분은 한계 없는 것의 한정된 부분이다. 그것은 동시에 한정되어 있으면서 한계가 없으며, 모든 부분은 개별적인 부분이지만 전체에서 떼어 놓을 수는 없다. 인간의 정신도 그러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사물은 작용하고 발현하는 한에서만, 즉 다른 사물들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을 변화시키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작용하는 것, 일정한 방식으로 발현하는 것,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자유로운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유롭다.
“잠깐, 서두르지 마시오.” 유물론적 결정론자가 내게 말한다. “우선 주어진 사물(힘이라 해도 마찬가지다)의 작용은 자유롭지 않소. 그것이 다른 사물들에서 발현되는 양상은 그 다른 사물들, 곧 그것이 작용을 미치는 대상들의 속성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만으로도 그렇소.” 전적으로 옳다. — “둘째로, 그 사물의 본성 자체가 과거와, 말하자면 그것을 형성하는, 곁에 존재하는 사물들에 의해 규정되오.” — 이것도 옳다. 그러나 주목하라. 사물 B, C, D가 말하자면 저항을 하며 저마다 제 방식대로 A를 반영하기 때문에 당신이 사물 A에게서 그것들을 마음대로 변화시킬 가능성을 부정한다면, 당신은 사물 A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A 역시 다른 사물들의 작용을 자신의 본질에 맞게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상호적 자유에 묶여 있는 한에서 자유롭지 않다. 영락없는 이상적 민주주의다. “교묘하지만 궤변이오.” 자신을 결정론자로 착각한 숙명론자가 반박한다. “당신은 형이상학적으로 사물 속에 어떤 잔여물, 어떤 정수를 상정하고 그것을 사물의 본성이라 부르지만, 모든 사물은 생겨나는 것이고 그 본성은 생겨난 조건에 의해 철두철미 결정되어 있소.” — “나는 형이상학자로 판명되는 것이 끔찍이도 두려우니, 일체의 정수를 엄숙히 포기하겠소. 아니, 우리에게 사물이란 외적 작용들의 연관일 뿐이오. 이렇게 말해 봅시다. 힘 B, C, D가 상호작용한 결과 그 상호작용의 어떤 독특한 매듭, 그것들의 영향이 교차하는 지점이 생겨났다고. 그런데 A는 생겨나는 순간, 생겨나는 행위 자체로써 자신의 새로운 본질을 드러내기 시작하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A가 아닐 것이오. 그러나 B도 C도 D도 다른 힘들의 그와 같은 교차 지점이오. 가장 복잡한 것도 기본적 현상들의 독특한 조합임이 드러나오.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의 심연으로, 어쩌면 단일한 에너지의 두 변종으로까지 내려가지만, 어디에서도 예속이나 숙명을 만나지 않소. 어디에나 자유가 있소. 힘들은 자유롭게 싸우고, 그들의 ‘투쟁’ 혹은 ‘혼인’에서 새롭고 더 복잡한 현상들, 에너지의 복잡한 형태인 물질, 점점 복잡해지는 화학 원소와 물체 등등의 계열이 태어나오. 그러나 어떤 사물도, 어떤 힘도, 어떤 현상도 ‘영’이 아니며, 모두가 ‘그 자체’요. 사물과 힘이 영이라면 우주 전체가 영일 것이기 때문이오. 나는 우주의 현상들에 의해 결정되오. 그렇다면 그것들은 결정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나도 결정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며, 그렇다면 우주는 자유들의 투쟁이고, 그 자유들로부터 현상들이 서로를 제한한 결과로서 필연성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오. 자연은 투쟁이오. 자유의 정도는 위력의 정도요. 나는 나의 관심을 끄는 결과가 나의 특수한 본성에 의해 더 많이 규정될수록, 그리고 나와 충돌하는 나 외부의 힘과 사물들의 특수한 본성이 나의 본성을 가리는 데 덜 성공할수록 더 자유롭소.” 숙명론적 색채를 띤 결정론자에게 나라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자연은 온통 자유롭다. 그리고 그와 다른 자유는 상상할 수 없다. 모든 이의 자유는 각자의 자유가 제한됨을 뜻한다. 숙명론자와 부르주아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수가 소수를 억압한다고 이따금 징징대는 민주주의자조차 이것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는 자연의 이 비밀을 쉽게 꿰뚫어 본다. 자연은 완전한 자유다. 우리가 예속으로 체험하는 것은 더 낮은 정도의 자유다. 우리는 강제당한다. 우리가 충분히 강하지 않은 것이다. 위력 있는 자는 — 자유롭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위력을 갈망하며, 그 때문에 예속과 필연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우리에게 이미 갖추어진 위력의 정도에서 바라고 고대하는 정도까지의 거리를 의식함으로써 태어난 개념들이다.
르당텍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세계에 더 큰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세계는 투쟁이며, 그 결말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렇다, 하고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그러나 그 결말은 세계의 최초 결합, 곧 힘들의 최초 상호관계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고.
그런데 그 최초의 상호관계라는 것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결정론자-숙명론자는 사실 언제나 상상 속에서 주 하느님을 그려 본다. 힘들의 최초 상호관계를 한번 훑어보고는 주판알을 튕기고 컴퍼스를 돌려 다가올 모든 것의 공식을 계산해 낸 하느님 말이다. 그러나 이 괴물 같은 수학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공식도 무한한 것을 다 품을 수는 없다. 무한한 이성이란 contradictio in adjecto이며, 어떤 유한한 이성에게든 자연은 언제까지나 놀라움으로 가득 찬 것으로 남을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투쟁이, 무수한 존재들로 쪼개진 단일한 에너지의 힘들이 추는 춤이 펼쳐진다—그 단일한 에너지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렇게 덧없는 세기들의 베틀 위에서 “나는 신들의 살아 있는 옷을 짠다.”
그렇다면 신들은 누구인가? 신들은 고대 유대인들이 숭배하던 금 에봇이나 제의처럼 전적으로 자신의 살아 있는 옷으로 환원된다.
II
다른 여러 현상들 가운데서 우리는 생명, 즉 살아 있는 물질, 유기체도 발견한다. 물론 생명은 다른 현상들과 맞닿아 있으며, 여기에 어떤 원리적인 비약도 없다.
결정 및 콜로이드와 살아 있는 원형질 사이에 존재한다는 가상의 심연을 설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진화론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두 가지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첫째, 물리학과 화학 분야의 새로운 발견들 덕분에 다윈의 법칙(선택)을 유기계의 경계 너머로까지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더프리스 등의 연구는 그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던 다윈주의의 매우 흥미로운 측면들을 부각시킨다.
엠페도클레스는 혼돈에 대한 신화적 묘사로 진리에 매우 가까이 다가갔다. 그에 따르면 혼돈이란 온갖 기형적인 형태, 온갖 우연한 조합을 지닌 무수한 물체들이며, 이것들은 바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제 존재를 지켜 내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멸망한다. 서로 적응한 것만이 살아남고, 혼돈은 점차 코스모스가 된다. 이제 우리는 유기체 종들의 안정성이 피상적이고 지나치게 짧은 관찰이 낳은 환상이라는 것만 아는 것이 아니다. 에너지의 형태들과 물질의 기본 원소들 역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종”이라는 것도 안다.
이때 어떤 종들은 (유기계에서든 무기계에서든) 불안정한 상태에 있어서 끊임없이 붕괴하거나 제 본성을 바꾼다. 존재 형태를 이처럼 자동적으로 더듬어 찾아 나가는 과정의 결과는, 말하자면 해당 종의 자기 결정, 곧 그 종이 주어진 조건 아래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형태로 주조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더프리스는 돌연변이 상태의 식물들, 즉 그 씨앗에서 서로 크게 동떨어진 개체들이 나오는 식물들을 관찰했으며, 퀴리 부부 덕분에 우리는 이와 똑같이 불안한 청춘기를 겪고 있는 화학 원소들과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진화하는 물질(에너지)은 때로는 서로 꽤 멀리 떨어진 단들로 이루어진 긴 사다리를 이룬다. 중간 고리들은 불안정했기 때문에 사멸했다.
살아 있는 물질, 즉 매우 복잡한 알부민은 비상한 불안정성 속에서 최고의 안정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수십억의 수십억에 이르는 자식으로 나뉘어 그 하나하나가 저마다 받은 얼굴을 지켜 내는 존재,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이 존재가 찾아낸 천재적이고 변증법적인 발견은—바로 이 결합에 있다. 생명은 그 불안정성 덕분에 안정적이다. 유연하기에 생명은 정복한다. 생명은 주위의 것을 먹어 제 몸으로 바꾸고, 이어서 그것을 자기 존재와 성장의 필요에 맞게 개조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아직 의식에 대해서도, 목적에 대해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사실은 공상 속의 비인간적 관찰자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관찰자는 영양 섭취, 호흡, 운동, 번식과 세대교체, 노동과 진보(즉 현상을 자기 본성에 따라 규정하는 점점 더 커지는 힘, 그 강력한 규정자가 되는 것)라는 이 현상들 위에 심리, 곧 생각, 감정, 의지 등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생명은 그것이 의식을 지녔다는 고려를 떠나서도 매우 놀라운 현상이다. 그리고 나는 르당텍의 훌륭한 저작들에서 생명에 관해 흥미로운 것을 적잖이 발견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물리적 생명에 대한 가장 간결하고 완전한 정식화는 엥겔스가 『반뒤링론』에서 내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서 어디서나 똑같은 생명 현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라고 엥겔스는 묻고 이렇게 답한다.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존재가 바깥에서 가장 알맞은 물질을 만나 그것을 동화하고, 그와 동시에 몸의 다른, 더 낡은 부분들은 분해되어 배출된다는 데 있다. 살아 있지 않은 다른 물체들도 자연 현상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고 분해되고 결합하지만, 그럴 때 그 물체들은 본래의 그것이기를 그친다. 바위는 부서지면서 바위이기를 그치고, 금속은 산화하면서 녹으로 바뀐다. 그러나 살아 있지 않은 물체들에서 파괴로 이어지는 것이 단백질체에게는 생명의 기본 조건이다. 유기체에서 끊임없는 물질대사가 멈추는 순간 그것은 단백질체이기를 그치고, 분해되며, 죽는다. 그러므로 단백질체의 이 존재 형태인 생명은 주로 그것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기를 그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남는다는 데 있다.”
이 존재 양식의 “천재성”은 그 뒤의 성공들이 입증한다.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유기적 진화의 사슬, 인간의 사회경제적 진보, 그리고 미래를 향한 인간의 열망이 그것이다. 그것은 성공적인 조합이었다. 그러나 우주의 다른 현상들 사이에 내던져진 이 조합은 스스로를 지켜 낼 줄 알아야 했다. 유기적 진화 전체는 살 권리를 위한 기나긴 전쟁이다. 단백질체의 적응의 계열은, 의인화라는 비난을 받을까 두렵지만 않다면 나는 차라리 책략의 계열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실로 경이롭다.
그러나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르당텍이 이것을 모르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르당텍의 불행은 그가 진화론자이면서도 현상들을 그 역사적 연관 전체 속에서 고찰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에게서는 과거와 미래가 따로 떨어져 나가고, 모든 것이 끊임없이 죽음으로 끝나는, 그러므로 무의미한 현상들의 연쇄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생명이 성장하는 과정 자체, 세계 속에서 생명이 지니는 의의와 그 힘이 커 가는 과정은 웅대하고 깊이 흥미로우며, 게다가 끊을 수 없이 이어져 있고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그 과정에서 인류의 역사가 자라난다. 그런데 르당텍은 이상하리만큼 인류를 무시하고, 개인을 인류의 운명과 전혀 결부시키지 않는다. 르당텍에게는 유물론자 연구자 일반에 대한 엥겔스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아주 잘 들어맞는다.
“(19세기 연구자들의) 훌륭한 관찰 정신은 유감스럽게도 현상을 그 보편적 연관 밖에서 연구하는 습관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자연의 과정과 현상을 따로따로 고찰하고, 그것들을 운동 속에서가 아니라 정지 속에서,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것으로서, 그 삶 속에서가 아니라 그 죽음 속에서 연구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우리 시대의 가장 철저한 다윈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 현상의 본질적 가변성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현상을 삶 속에서가 아니라 죽음 속에서 연구한다. 사회경제적 진보라는 현상은 그의 눈에서 완전히 빠져나가 버린다. 그런데 유기적 진화의 이 정점을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진화는 불구가 된 채로 남고, 우리의 평가와도, 우리의 희망과 이해관계의 세계와도 연결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비관주의의 무거운 사슬을 끊을 수 없다.
경제적 유물론은 사회적 과정을 (적어도 잠정적으로는) 순수하게 물리적인 과정으로 고찰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조직된 힘들이 인간 밖의 힘들, 곧 환경에 맞서 벌이는 투쟁의 과정이며,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고 원한다면 완전히 측정할 수도 있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놀랍도록 명료하고 정확하게 특징지은 대목 역시 엥겔스에게서 빌려 오자.
“헤겔의 관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더 이상 끊임없는 폭력이 형체 없이 잇따르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사상가에게 하나의 문제가 된다. 사상가는 그 속에서 인류의 발전을 추적해야 하고, 옆길로 빗나가는 일탈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 점진적 과정을 새로이 밝혀내야 하며, 겉보기의 우연들이 얽힌 그물을 뚫고 드러나는 깊은 규제적 법칙들이 존재함을 증명해야 한다.”
“헤겔은 이 과제를 풀지 못했지만, 그가 이 과제를 제기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의 거대한 공적이다.”
그리고 이 과제는 헤겔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길을 거쳐 해결에 다가갔다. 헤겔이 관념론적으로 이해했던 과제를 마르크스는 실재론적인 과제로 고쳐 놓았고, 그러자 다음과 같은 필요가 분명해졌다. “역사 전체를 재검토해야 했다. 이 재검토의 결과로 얻은 확신은 이러했다. 지나간 인류의 역사 전체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며, 이 투쟁하는 계급들 자체가 공업과 상업의 조건들, 한마디로 시대의 경제적 조건들에 따라 형성되었다. 또한 각 시대의 경제 구조는 그 시대의 정치적·법적 형태와 철학적·종교적 표상을 궁극적으로 해명해 주는 참된 근본 원리이다. 이렇게 하여 관념론은 그 마지막 피난처에서 쫓겨났다.”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포이어바흐가 종교를 두고 겪은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의 본질이 인간학임을 증명했다. 신학자의 눈에 이것은 그가 신학을 인간학의 수준으로 끌어내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포이어바흐 자신은 반대로 자기가 인간학을 종교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에서 관념론을 쫓아내고 인류의 이념적 발전을 경제적 발전으로 환원했다. 그러나 바로 그럼으로써 그들은 경제적 진보의 의미와 의의를 고도로 관념론적인 가치로, 말하자면 종교적 가치로 끌어올렸다.
이른바 “객관적” 사실 관찰의 입장에 머물자. 즉 세계상에 의식과 평가를 끌어들이지 말자. 의식에 관해서는 르당텍의 증언대로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하자. 즉 이 낱말을 유기체의 운동을 규정하는 신경계 안의 일정한 과정으로만 이해하자. 르당텍 자신에 따르더라도 자유롭다는 것은 hommer librement, 곧 자신의 인간적 본성을 자유롭게 발현한다는 뜻임을 상기하자. 르당텍은 이러한 전제와 정의 아래에서는 자유라는 낱말이 건강이라는 낱말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 “경제적 위력”, 즉 힘, 자연에 대한 지배력이라는 개념과 같은 뜻임을 지적했다.
이제 엥겔스와 역사적 과정에 대한 그의 일반적 서술로 돌아가자.
“헤겔은 처음으로 자유와 필연성의 관계를 올바르게 서술했다. 그에게 자유란 필연성의 인식이다. ‘필연성은 인식되지 않는 동안에만 맹목적이다.’ ‘자유는 자연법칙으로부터 독립했다는 상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법칙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이 계획, 즉 미리 의도한 목적에 따라 우리에게 봉사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
르당텍이 원한다면 미리 의도한 계획은 제쳐 두자. 그래도 사실은 사실로 남는다. 유기체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 환경을 능동적으로 변형하기 시작하고, 그 결과 그의 “측정 가능한 운동”의 결과는 객관적으로 그의 성장과 생명에 유리한 것으로 드러나며 그로 하여금 “hommer plus librement qu'auparavant” 할 수 있게 해 준다.
당분간 우리가 인식이라는 말로 심리적 행위가 아니라 물리적 행위, 즉 환경의 작용에 대한 유기체의 객관적으로 합목적적인(그리고 점점 더 합목적적인) 반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뜻하기로 한 점을 기억하자. 그러면 이제 엥겔스의 말을 더 들어 보자.
“자유는 자연적 필연성의 인식에 근거한 지배, 곧 우리 자신과 외부 자연에 대한 지배로 귀착하며, 따라서 그것은 역사의 필연적 산물이다. 나머지 동물계와 거의 구별되지 않던 최초의 인간들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갖지 못했지만, 모든 문화적 진보는 자유를 향한 한 걸음이다.” 그리고 이어서 “종교적 경제학”의 경이로운 한 페이지가 나온다. “비종교적 독자”의 미소를 살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이렇게 말해 두겠다.
“인류 역사의 문턱에서 우리는 심리적 운동이 열로 전화된다는 발견, 즉 마찰에 의한 불의 생산을 발견한다. 지금까지 거쳐 온 발전의 끝에는 열이 기계적 운동으로 전화된다는 발견, 즉 증기기관이 있다.”
그러나 증기기관이 사회에서 수행하고 있는, 아직 절반도 전개되지 않은 거대한 해방 과정에도 불구하고, 해방적 의의에서 불의 발견이 증기기관의 발견을 능가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불의 발견은 처음으로 인간에게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주었고, 인간을 동물계로부터 최종적으로 분리했다... 그러나 증기기관은 그것에 기반한 모든 생산력의 대표자로서, 계급적 차이를 포함하지 않고 개인적 생존에 대한 끊임없는 근심을 강요하지 않는 사회 체제, 처음으로 참된 인간적 자유, 인식된 자연법칙과 조화를 이룬 생존을 말할 수 있게 될 사회 체제를 처음으로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리하여 역사적 과정은 경제, 즉 자연에 대한 지배를 매개로 하여 자연의 인식을 통해 자유로 나아가는 실재적 운동이다.
삶을 평가하고 싶다면 개체적 존재와 그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부디 자연의 역사, 생명의 역사, 인류의 역사와 그 전망을 살펴보시라. 그러고 나서야 당신들의 비관주의를 들고 우리에게 오시라.
그러나 의식은? 의식은 그래도 어떤 쓸모없는 관찰자가 아닌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비관주의의 이유는 훨씬 적을 것이다. 우리의 관찰자는 비록 수동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흥미롭고 매혹적인 구경거리를 관찰하는 셈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은 쾌락과 고통, 의지와 신체의 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의식은 수동적이지 않다. 그리고 의식을 부수현상으로 인정하는 것, 그것도 예비적인 방법론적 의미가 아니라 객관적·과학적 의미에서 인정하는 것은 르당텍에게서 전혀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서 있다.
이 문제로, 즉 우리 비판의 세 번째 측면, 비관적 무신론에 우리가 맞세우는 것 — 살아 있는 비판적 실재론으로 넘어가자.
III
자연의 현상들은 인간에게 그 자체로서 지각될 뿐 아니라, 그때 갖가지 평가로 채색된다. 그리고 이른바 가장 노골적이고 공공연히 주관적인 평가와, 인간에게 가능한 한계 안에서 주어진 요소들이 주어진 연관 속에 현존함을 단순하고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것 사이에는 또한 일련의 은폐된 평가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순수 경험”에 귀속시키기가 매우 쉽다. 아베나리우스가 “실존적” 평가라고 이름 붙인 것이 그러하다.
인간은 모든 현상을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실제의 존재와 겉보기의 존재를 구별하며, 게다가 여기서 정도의 차이까지 본다. 예컨대 살아 있는 비스마르크는 실제의 존재였다. 렌바흐가 그린 비스마르크의 놀라운 초상화는 이미 덜 실제적인 존재로서, 예술적 환영, 독일인들 말로 ein Schein이다. 렌바흐의 형편없는 모사본 — 이것은 살아 있는 실제적인 것을 전혀 담고 있지 않은 왜곡된 존재이다. 현실의 공간 밖 어떤 다른 장에서 우리 앞을 떠도는 비스마르크의 희미한 상, 즉 기억은 이미 완전히, 절대적으로 존재를 결여하고 있는데, 그림에는 기체 — 화폭과 물감 — 가 있지만 기억은 물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공기 같은”, “에테르 같은” — 이것들은 존재의 미약한 정도를 나타내야 하는 표현들이다. 마흐의 제자 베어는 세계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감각의 복합체임을 확인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인다. “아마도 이 세계는 독자에게 너무 공기 같은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인간은 무언가에 이마를 부딪쳐 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확실히 실제적인 것으로 인정하려 든다. 사물이 무거울수록 더 실제적이다. 그런데 모든 존재는 존재이다. 그것은 지속적이거나 덧없을 수 있고, 형체가 있거나 없을 수 있고, 속성이 풍부하거나 극도로 빈약하고 희미할 수 있지만, 그것은 존재이다. 그것에 그것이 갖지 않은 속성을 귀속시킬 때 그것은 환영적이며 겉보기의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 존재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렌바흐의 비스마르크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려진 것이다. 그려진 것으로서 그것은 존재한다. 형편없는 모사본은 자신을 비스마르크의 초상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신원 미상의 인물”이다. 그러나 사람을 닮은 얼굴의 묘사로서 그것은 존재이다. 기억은 형체가 없고, 그 자체로는 공간 속에 자리를 차지하지 않지만, 비록 다른 장에서이기는 하나 완전히 의심할 여지 없이 존재한다.
실재성을 “무게로” 규정하는 것은 개념의 혼동이다. 누구나 이를 쉽게 깨닫지만, 실제로는 늘 그 유치하고 겉보기에도 몹시 우스꽝스러운 오류에 빠진다. 확신에 찬 유물론자인 내 탁월한 벗 한 사람은 물질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현상만이 존재한다는 내 말에 반박하겠다며 벽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자, 이것 들리나? 단단한 물질, 진짜 물질 말일세.” 그는 현상이란 기껏해야 묵처럼 흐물흐물한 것일 수밖에 없으며, 내가 물질이라는 이 가장 진정한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바로 단단함을 부정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의 논거에 스스로 폭소를 터뜨렸다.
다른 한편, 자기 안으로 침잠하여 세계는 자신의 표상이라고 마음속으로 정해 버린 철학자들은 실재성의 정도를 대상의 관념성이 얼마나 순수한가로 잰다. 순수한 이념은 진정하고 불변하는 실재이며, 순수한 물질은 그야말로 무다. 17세기의 한 신비가는 이렇게 쓴다. “육체를 사랑할 수는 없다. 오늘 그대가 그것을 껴안아도 그것은 손안의 눈사람처럼 녹아내리고, 주름지고, 거무스름해지고, 등이 굽고, 이와 머리카락을 잃고, 쓰러져 썩어 없어진다. 육체란 꿈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꿈은 곁에 있는 동안에는 느릿느릿 흐르는 듯하지만, 한 발을 무덤에 걸치고 돌아볼 때에는 쏜살같이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혼은 사랑할 수 있다. 주께서 살아 계시고 그 말씀이 굳건하기 때문이다. 거짓된 본성—내 살의 꿈, 내 육신의 눈의 꿈은 너울처럼 벗겨질 것이며, 내 영의 참된 눈은 썩지 않는 거룩한 심장을 에워싼 동료 영혼들의 무리를 보게 될 것이고, 그 소중한 동료 영혼들 가운데서 덧없는 지상의 만남에서 육신을 꿰뚫어 알아보았던 영원히 아름다운 영혼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플라톤에게 물질적 현실은 그림자의 세계였다. 그는 그렇게 느꼈다. 그는 현실을 오직 자신의 이성에서, 가장 추상적인 이념들에서만 발견했다. 그런데 유물론의 기준에 따르면 바로 그 이념들이야말로 모든 존재가 남김없이 걸러져 나가고 오직 무만 남은 것처럼 보일 터이다.
브라만들은 감히 이렇게 말했다. 가장 진정한 존재는 가장 추상적인 이념, 술어 없는 존재이지만, 그것은 “무”와 같은 뜻이며, 따라서 모든 것은 무이고, 도대체 아무것도 없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답한다. 도대체 모든 것이 있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존재 술어를 배 밖으로 내던지고 살아 있는 실재론에 몸을 맡긴다. 모든 것이 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어떤 상호 관계 속에서 공존하는지를 알아야 할 뿐이다.
그런데 의식의 부수현상성과 생리학의 객관성에 관한 유물론적 학설(르당텍도 이 학설을 따른다)에서 우리는 그 낡은 오류의 잔재를 발견한다.
그러나 르당텍에게는 다른 근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는 측정할 수 있는 것을 진정한 실재로 여기고자 한다. 실제로 측정할 수 있는 것만이 완전한 인식, 곧 정밀한 인식에 다다를 수 있다. 거인 다빈치 자신도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인간의 탐구는 수학적 증명을 사용하는 한에서만 과학적 진리라고 불릴 수 있다.” 그리고 현대 과학의 가장 위대한 천재라 해도 좋을 맥스웰도 이에 동조한다. “계산하기에 편리한 공식으로 표현된 것이 인식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 측정할 수 있고 연속적인 것은 이른바 물리적 현상뿐이며, 심리적 현상은 불연속적이고 측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로써 우리는 정신생리학적 평행론, 곧 신경·뇌의 현상과 의식의 현상 사이의 함수적 상호 의존에 기대어, 우리가 현의 진동을 음향 이론의 기초로 삼듯이 전자를 연구의 기초로 삼을 충분한 권리를 얻는다.
그러나 이것은 편리한 방법론적 장치일 뿐이다. 우리가 르당텍처럼 여기서 측정할 수 있는 존재가 참된 존재이고, 그러므로 의식은 toto coelo 다른 것, 낯선 것, 불필요한 것이라고 추론한다면 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비관주의와 내적 분열로 곧장 가는 길이다.
모든 현상이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는 것을 처음으로 자각하고 선명하게 표현한 사람은 아마 디츠겐일 것이다. 디츠겐은 유물론에 날카롭게 항의했다. 그 유물론은 한편으로는 의식을 물질로부터 설명하려 든다. 마치 그것이 가능하고 누군가에게 필요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은 물질로부터 설명할 수 없다고 비통하게 선언한다. 마치 그것이 자명하지 않으며, 거기에 무언가 쓰라린 것이라도 있다는 듯이. 그는 “물질의 유물론”에 사회주의적 유물론을 맞세우고, 이것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사회주의적 유물론은 ‘물질’을 무게를 달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실재하는 모든 것으로, 곧 우주 안에 담긴 모든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우주 안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모든 것과 우주는 같은 하나를 가리키는 두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적 유물론은 모든 것을 하나의 개념, 하나의 낱말, 하나의 부류로 포괄하려 한다. 이 보편적 부류를 현실이라 부르든, 실재라 부르든, 물질이라 부르든 상관없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가 ‘물질’이라는 일반화하는 낱말이 거북하다면 그 대신 ‘현상’이라고 말해도 좋다. 무게가 있든 없든, 물체이든 정신이든, 모든 존재가 속하는 공통의 계열을 물체적 현상, 물리적 현상, 감각적 현상, 물질적 현상이라고 부른다.”
마흐와 아베나리우스는 실재성이라는 의미에서 심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고 거듭 주장했다. 온갖 이원론자들이 정신과 물질 사이에 쌓아 올린 인위적인 장벽을 완전히 허무는 것, 이것이 경험비판론의 주된 과제이다. 유물론자는 공연히 자신을 일원론자라 부른다. 그는 자기 관점에서는 세계를 통일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가장 통찰력 있는 사람들은 의식이 그들의 참된 세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경계 밖에 남아 있음을 알고 있다.
학자로서 그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보편적·기계적 공식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보잘것없는 위로이다. 공식으로 연구되는 세계, 낡은 유형의 유물론자가 인정하고 인식하는 그 세계는 아무런 흥미도 끌지 못한다. 원리상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적 유물론”으로 말하자면, 이것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디츠겐의 전통을 잇는 유물론이고, 다른 하나는 서툴게 위장한 18세기 유물론이다.
이 후자의 유물론자들이 르당텍이나 플로베르의 사탄(『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에 나오는)의 암담하고 철학적으로 빈약한 결론을 피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철학의 깊이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그 표면에서 근심 없이 흔들거리는 다행스러운 능력 덕분일 뿐이다[3].
반면 디츠겐주의 유물론자들, 살아 있는 실재론의 유물론자들은 카우츠키와 디츠겐 자신의 충고를 따라, 살아 있는 실재론을 초월적 유심론에 선명하게 맞세우는 이름으로서 유물론자라는 이름을 기꺼이 간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19세기로 넘어와서는 고집스럽고 완고하게 프롤레타리아 철학 사상의 발전을 붙들어 두려 애쓰는 18세기 교조주의자들과 한 무더기로 뒤섞이지 않으려고 이 즐거움을 자주 포기해야만 한다.
드리슈는 옳게 말한다. “유물론의 교의는 과학의 발전에 교회의 교의보다 더 위험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바로 과학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위험한 까닭은 많은 이들을 과학에 대한 환멸로 이끌기 때문이다. 일관된 유물론자는 자신의 끝없는 기계, 영혼 없는 물질의 순환과 인간의 정념과 희망의 세계 사이에서 무서운 단절을 본다. 과학은 오직 그 거대한 실용적 유용성을 매개로 해서만 삶과 연결된 채로 남을 뿐, 평가와 이상의 세계와의 연결은 서둘러 거부한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이 모든 것은 기이한 환상, 그것과 무관한 유령 같은 부수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유물론적 과학의 이러한 파산을 재능 있는 다르메스테테르가 훌륭하게 표현했다.
“과학은 인간을 무장시키지만 인간을 이끌 수는 없다. 과학은 우주의 마지막 별들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비추어 주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밤을 남겨 둔다. 과학은 중립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무관심하다... 과학은 영혼을 넓히고, 우주의 온갖 아름다움으로 영혼을 고귀하게 하며, 무한한 공간의 평화로 영혼을 달래 준다. 그러나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고 묻는 인간에게 과학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과학은 세계의 여왕이 되었다. 그런데 보라, 그리스도교도가 과학에게 와서 말한다. ‘그대가 나의 그리스도에게 입김을 불자 그는 먼지가 되어 버렸다. 그대는 내 앞에서 하늘로 가는 길을 닫아 버렸고, 내 삶을 목적 없는 무언가로 만들어 버렸다. 과학이여, 빼앗은 것을 내게 보상하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라, 나는 그대에게 복종하리라.’ 그러자 과학은 당황하여 중얼거리며, 두려움 속에 자신의 마지막 결론을 털어놓는다. ‘세계는 의미 없는 사물이다.’ 삶의 길을 가리켜 보이는 것, — 그러나 과학은 그럴 줄도 모르고, 그럴 수도 없고, 감히 그러지도 못한다. 그랬다가는 거짓말을 하게 될 것이다. 과학이 어떤 삶의 질서를 지시할 수 있겠는가? 어떤 권력의 이름으로? 어떤 필연성의 이름으로? 과학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과학의 나라는 존재의 덧없는 형태들이 영원히 회전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 반쯤 열린 무한 앞에서의 황홀경이며, 과학의 나라는 학자가 영원한 무 속으로 떨어질 때까지 숭배하는 자연 앞에서의 환희이다. 그런데 인류는 학자의 발치에 몸을 던지며 외친다. ‘그대야말로 새로운 신의 신탁이요, 현시대의 사제가 아닌가? 그러니 말하라,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러자 학자는 쓰라림과 자기 포기로 가득 찬 조언을 건넨다. 누구에게? — 결코 죽고 싶어 하지 않는 인류에게. 아이러니, 혹은 요람과 무덤 사이에서 즐기라는 조언—그것이 과연 사람들의, 어쩌면 순수 과학의 그 어떤 사제보다도 한없이 더 값진 사람들의 성스러운 물음에 대한 대답이란 말인가?”
이 모든 것은 르당텍에게, 아니 본질적으로는 유물론적 과학에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맞는다.
이론의 여지 없이, 과학은 그 자체로는 평가와 무관해야 하며, 현상을 최소한의 정신적 에너지 소비로 지각할 수 있게 만들면서 현상을 기술해야 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인간의 과학과 인간의 삶 사이에, 인식된 세계와 살아 있는 삶의 세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가?
이러한 심연은 과학적 사회주의에는 흔적조차 없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과학이자 실천 철학이며, 필연성과 이상의 종합이다 [4].
여러 가지 (매우 존중할 만한) 이유로 디츠겐은 사회주의적 세계관에 유물론이라는 이름을 남겨 두고자 했지만, 철학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종합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 바로 유물론의 본질 자체(물자체로서의 물질)를 제거하는 데서였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폭넓은 비판적 경험론의 틀 밖에서는 종합이 불가능하다.
“사회민주주의의 확신은, 하고 위대한 무두장이는 말한다, 진보의 메커니즘에 근거한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선의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안다. 우리의 원리는 기계적이며, 우리의 철학은 유물론적이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적 유물론은 그에 앞선 모든 것보다 더 견고하고 실증적인 토대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반대물인 관념을 여러모로 깊이 꿰뚫어 자기 것으로 삼았다. 개념의 세계를 장악함으로써 그것은 기계와 정신 사이의 모순을 극복했다.”
정신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과학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 선포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사유하는 이성의 현존을 물리적으로 느끼며, 꼭 마찬가지로 바로 그 감각으로 우리 밖의 돌, 진흙, 하늘, 덤불을 감지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안에서 감지하는 것과 우리 밖에서 감지하는 것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이것도 저것도 감각적 현상에, 경험적 재료에 속한다”[5]. 민주주의적 평등, 육체와 영혼의 평등은 철학자들의 머리에 좀처럼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불가분의 통일 속에 주어져 있다. 내가 사유하고, 의욕하고, 즐기고, 괴로워할 때, 르당텍 식 무신론자가 이 모든 것은 신경-뇌 체계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반영”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해도 나는 당황하지 않는다. 제기랄, 나란 결코 내 신경-뇌 체계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안으로부터 직접 아는 그것이, 그것을 “물질”의 모습으로만 보는 국외 관찰자인 당신들보다 자기 본질을 더 잘 알도록 맡겨 두라.
나, 나의 육체, 나의 유기체는 의욕하고, 투쟁하고, 승리에 도취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생생한 감각, 정동, 충동과 나의 운동 및 그 운동이 도달하는 목적 사이에 나를 속이지 않는 실재적 연관이 존재함을 안다.
내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전개되어 가며, 당신들의 이론에 따르면 내가 착각하여 나로 지각한다는 그 “그것”이야말로 바로 나의 자아이며, 나는 다른 어떤 자아도 알지 못하고 원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것이 단일하지도 온전하지도 않으며 여러 과정으로, 몇 개의 심리적 조직으로 나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것의 결함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상적 열망과 실제의 추락 사이의 투쟁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내가 나의 온 존재로, 내 인식의 마지막 섬유 한 올까지 다하여 선이라고 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발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병든 사람들이다. 르당텍이여, 당신 안에는 숙명적인 분열이 있다. 당신은 자기 안에서 또 하나의 자아, 순수한 의식을 구별해 내고는, 그것이 세계와 무관한 부수현상이라고, “도덕적 자의식, 이상, 삶의 목적”은 환상에 불과한 개념이라고 울며 한탄하기 시작한다. 우리 앞에는 숙명적인 운명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러고도 당신들은 일원론자를 자처하는가? 의식의 부수현상설을 지닌 당신들이야말로 더없이 순전한 이원론자다.
아니다, 의식은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 채 한구석에 비켜 앉아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야말로 살아 있는 현실이다. 내 뇌를 연구하는 생리학자에게는 나의 인식이 부수현상이지만, 나 자신에게는 바로 뇌가 부수현상—외적 발현 형식—이며, 근원적 현상은 의식이다. 그리고 둘 다 옳다. 실제로는 통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르주아가, 그가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 해도, 영리한 부르주아가 어떻게 그 사이비 급진적 유물론에도 불구하고 회의론자와 이원론자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에게서는 사회적 전체와의 유대가 끊어져 있다. 발전의 흐름은 그를 사로잡지 못하며, 그는 이 흐름을 두려워한다. Fata volentem ducunt, nolentem trahunt. 의지가 건강하고 가장 강력한 사회적 조류와 합치하는 사람은 “진보의 메커니즘”에 기꺼이 “예”라고 말하며, 자기를 통해, 자기 손과 심장과 두뇌로 자기 종이 완성되어 가고 자기 사회가 조직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이 모든 것과 무관한 사람은 힘없이 저항하다가, 의식과 물질성 사이에 심연이 있다는 환상, 물질이 무력한 의식을 에워싸고 있다는 환상에 빠진다!
물질적 진화와 정신성의 진보는 일치한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철학에서 발견하고 느낀 위대한 진리이다. 프롤레타리아적으로 느끼지 않는 철학자는 끝까지 일원론자일 수 없다. 디츠겐 이전의 자연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의 위대한 철학자인 아베나리우스와 마흐 이전의 자연과학은 두뇌와 그 기능을 떼어 놓았다. 마흐와 아베나리우스는 정신과 물질 사이의 심연을 없앴지만,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에 현대 일원론의 주된 결론에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론이란 필연성과 자유 사이의 심연을 없애는 것, 곧 깊이 결정되어 있고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깊이 정신적이고 자유로운 진보 속에서, 종의 완성 속에서 그 심연을 없애는 것이다.
디츠겐은 이렇게 말한다. “사유 기관 가운데 보이고 무게를 달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하지만, 기능 자체, 곧 사유는 특수한 학문의 관할로 떼어져 있다. 학문의 이 마지막 부서, 곧 정신적 기능에 대한 이해 또는 그릇된 이해는 종교와 형이상학이 태어나는 자리이지만, 반형이상학적 명료함이 태어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여기에 예속된 미신적 노예 상태에서 자유의 역사로 이끄는 다리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인식을 자랑으로 삼는 자유의 왕국에서도 순종, 즉 물질적·물리적 필연성에 대한 복종이 지배한다.”
순종, 복종이라는 말은 물론 비유적 표현일 뿐이다. 이 순종, 이 복종이란 오로지, 인식한 인간의 힘이 마술이나 기적이 아니라 바로 환경의 객관적 속성에 대한 인식, 곧 기술에 근거한다는 데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앞의 절들에서 유기적 생명의 발전이 그리는 최고의 그림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이 이른바 정신적 발전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정신적 발전의 정점에서, 의식이 개체성의 틀을 넘어 자라나 자기 자신을 역사적으로, 자기 종 안에서, 그 종의 발현으로 지각할 때 특히 분명해진다.
진화 과정을 정신적이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과정으로서 그 온전한 모습 그대로 살펴보며, 그것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자.
여기서 우리는 정통 일원론자들과의 어떤 의견 차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이를 지나가며 언급하는 데 그치고, 다른 자리에서 자세히 논하기를 기대한다.
베어 같은 정통 일원론자는 마흐에 관한 자기 강연문의 한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6] “어떤 양반들은 가벼운 전율과 함께 신적인 힘의 자리에 자연력의 총체를 세계 과정의 원인으로 갖다 놓으면 자신이 대단히 진보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공허한 경제적 사변이 낳은 이런 유령들에도 아무런 과학적 의미가 없다. 재능은 뛰어났으나 나중에 정신이 이상해진 첼너가 표현했듯이, 여기서 ‘힘’이란 여러 물체의 공간적·시간적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존경하는 “마흐주의자”의 위협적인 어조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그에게도, “정신 나간” 쵤너에게도 동의하지 않겠다. “힘”이라는 개념은 결코 현상이라는 개념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 공허하고 내용 없는 개념이 아니다. 첫째, 모든 현상은 다른 현상들에 작용한다. 즉 그것들의 존재를 규정한다. 둘째, 그것들의 작용을 스스로 받는다. 게다가 이 상호작용들은 측정할 수 있으며 더 클 수도 더 작을 수도 있고, 그 결과는 주어진 존재 형태의 보존이나 강화일 수도, 그 해체일 수도 있다.
나아가 로크에 머물러 버린 유물론자들과 달리 색, 냄새, 소리 등과 같은 “주관적” 감각을 세계의 요소로 받아들인 이상, 우리에게는 압력, 저항, 노력의 느낌을 그러한 요소로 인정하지 않을 권리가 조금도 없다. 물론 의지, 근육 감각과 신경 자극 감각을 그 모든 복잡성 그대로, 그리고 피로 등은 순전히 인간적인 감각으로서 고도로 발달한 유기체에만 고유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기초적인 형태, 즉 능동성, 힘으로서의 존재는 무리 없이 나타나는 모든 것, 그리고 바로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것의 속성으로 인정할 수 있다. 의식은 우리의 삶을 고된 과정이자 투쟁으로 우리에게 그려 보이지만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의식은 다만 과거와 미래를 폭넓게 통합하고 우리의 본질, 우리의 에너지적 본질을 주관적으로 밝혀 줄 뿐이다. 나는 우리가 세계를 이를테면 요소들과 그 복합체들의 수동적인 교체로 보는 표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에너지”라는 개념이 순전히 상징적인 개념이며 그 구체적 내용은 다만 공존하고 교대할 뿐인 현상들의 보편적 상호의존성과 통약 가능성을 확인하는 데로 귀착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세계관이 자연과학자, 실험실의 관찰자는 만족시킬 수 있겠지만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과 투쟁의 인간은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우주의 자기 교환은 노동 과정 및 사회적 투쟁 과정과 유사한 과정이다. 능동적인 모든 것에 매우 민감했던 니체는 한순간도 형이상학에 빠지지 않고, 힘을 현상을 낳는 무엇으로가 아니라 오직 현상과 동일한 무엇으로 보면서 현상들의 힘적 성격을 인정했다. 디츠겐은 어느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성을 빛, 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 등 모든 힘과 나란히 보편적 힘의 형태나 종류, 또는 부분이나 산물로 인정한다”(강조는 원저자).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사회적 필연성은 상당 부분 계급투쟁이라는 개념과 일치한다. 계급의 처지는 인간과 자연 사이 투쟁의 단계와 계급들 사이의 힘의 관계로 규정된다. 계급은 필연적으로 지금 있는 그대로이지만, 자유롭게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의식하며 자기 이익을 지키려 애쓴다. 모든 계급은 이처럼 필연성의 산물이며, 더 의식적이고 더 강력할수록 더 자유롭다. 그리고 온 세계는 서로 싸우는 힘들의 대양에 다름 아니다. 이 힘들은 복잡한 복합체를 이루고 조직되며 (상대적으로) 통합되어 더 높은 단위를 만들어 내는데, 이는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개인들과 집단들의 사회적 결합과 유사하다. 의식은 여기서도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유기체와 사회는 — 무의식적 투쟁, 적어도 자기의 먼 결과를 의식하지 못하는 투쟁의 산물이다. 그러나 과학적 사회주의는 근본 과정을 의식으로 비추고 미적으로 긍정한다. 그 과정이란 생존 투쟁 속에서, 힘 또는 자유를 향한 의지 속에서 가장 고도로 조직된 살아 있는 힘들이 통합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제 이것은 의식적으로, 즉 한없이 더 합목적적으로 진행된다. 신경-뇌 체계는 과거의 흔적을 제 안에 간직하고, 현실과 구별되는 특수한 장 속에서 그것들을 갖가지로 조합하기 때문이다[7].
그러니까 세계는 투쟁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이 투쟁의 최고 형태이며, 그 속에서 과정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긍정하면서, 우리가 우리의 인격이라 부르는 그 힘들의 결합이 겪는 온갖 모험과 성공을 기뻐한다.
그뿐 아니라, 개체적 성장을 위한 투쟁은 승리에 이를 수 없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개체는 죽음으로 끝난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에 대응하는 것이 투쟁 속에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적응, 곧 사랑과 결합된 번식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를 좁은 개체적 존재의 한계 너머로 이끌어 내며, 이는 처음에는 그 안에 초개체적 본능이 있다는 데서, 나중에는 종적 자기의식, 곧 종에 대한 사랑에서 표현된다.
이 감정은 부르주아에게서는 어쩔 수 없이 약하다. 그는 더 이상 종의 진보를 담지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계급적·개인적 이해관계는 종의 이해관계와 모순에 빠졌다. 이 감정은 프롤레타리아에게서는 매우 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자기의식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초개체적 삶의 또 하나의 대단히 중요한 토대는 협동이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해서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
사회는 협동이며, 개인들과 집단들을 포괄하고 인식과 기술의 영역에서 개별 개인에게는 전혀 닿을 수 없는 지평을 열어 주는 전체이다. 의식의 상대적 통일이 뇌의 여러 부분 체계의 작업을 통합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개별 두뇌들은 협동 속에서 함께 자기들의 집단적 경험과 문화를 세우면서 더 높은 체계, 아베나리우스의 용어로 집합 체계를 이룬다. 생각할 수 있는 최고 차원의 집합 체계는 전 인류의 절대적으로 긴밀하고 합목적적인 협동이다. 이것은 기본적 힘들이 안정되고 승리하는 복합체로 융합되는 과정의 연장이다. 사회주의는 투쟁과 선택을 통해 점점 더 복잡하고 강력한 고차 단위들을 만들어 내는 세계 발전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부르주아 개인주의자에게는 이 모든 것이 낯설다. 그래서 그에게 의식은 공간 속을 무의미하게 맴도는 승리자의 전차에 묶인 가련한 부수현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 승리자란 — 물리학!
그러나 부르주아지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이들, 과학과 예술의 참된 천재들은 개인주의의 사슬에서 벗어나며, 동시에 유물론이나 유심론의 사슬도 끊는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다가오며 풍성한 선물을 가져온다. 물론 몇몇 동지는 그들을 다나오스인으로 여기며, 부르주아 과학의 진영에서 가져온 그들의 선물이라면 다나오스인의 선물로밖에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기이하게도 바로 그 동지들이야말로 부르주아 유물론 사상가들의 헌 옷을 우스꽝스럽게 고쳐 입고 뽐내는 자들이다.
이른바 다나오스인 가운데 한 사람, 다름 아닌 마흐 자신의 말을 들어 보자. 그는 마치 펠릭스 르당텍의 절망적인 개인주의에 답하는 것만 같다.
“우리 의식의 내용(오직 이것만이 본질적이다)은 개인의 칸막이를 부수고, 다른 사람들과 결합하여, 그것을 발전시킨 인격과는 독립적으로 보다 보편적이고 비개인적인, 혹은 초개인적인 삶을 이어 간다. 이에 이바지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 학자, 사회 활동가의 가장 큰 행복이다.” 베어는 이 대목에 주석을 달며 이렇게 말한다. “오직 편협한 철학자만이 죽은 뒤에 유명해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를 이해하지 못한다.” 베어는 다음 구절에서 마흐의 사상을 아주 훌륭하게 전개한다. “마흐의 지적에 따르면 자아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매우 가변적이어서, 깊은 잠 속에서, 창조적 황홀경 속에서, 예술적 향유 속에서, 관능의 순간 등에서, 즉 우리가 크게 고양되는 순간들, 특히 목숨을 거는 순간과 남의 기쁨과 슬픔에 한없이 공감하는 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고 완전히 디오니소스적으로 고양되어 완전한 망아에 이를 수도 있다. 이러한 기분이 누구에게나 가능해질 때—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자아가 뒷전으로 물러나는 관념론적 관점의 정점으로, 보다 자유롭고 밝으며 위대한 행위로, 모든 고통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경멸하는 선하고 힘찬 노동으로 이끄는 삶의 이해와 삶의 실천으로 고양될 것이다. Χαῖρε—기뻐하라—가 다시 이런 사람들의 인사가 될 것이다.”
“마흐주의”의 이러한 사상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사상과 더없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사회주의적 일원론과 이른바 긍정적 무신론을 르당텍의 비관적 일원론에 맞세운 우리의 세 겹의 대비를 요약하기 전에, 한 가지 지적을 더 해 두고 싶다.
투쟁이 반드시 거칠고 맹목적인 증오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적을 존중할 때, 곧 그의 동기를 고결하다고 인정할 때는 적의 없이도 싸울 수 있다. 여기서 고결하다는 것은 그 동기에 개인의 안락을 위해 사회 발전과 종의 발전을 해치게 만드는 비열한 사리사욕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적을 존중하지 않고 그를 진보적 계급의 길에서 치워 버려야 할 열등한 유형으로 판단할 때조차도, 적의 해로운 속성이 진리를 알고 참으로 인간적인 의식의 높이에까지 발전할 기회를 그에게서 빼앗은 숙명적 원인으로 설명된다면, 경멸도 증오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더 유리한 사정이었다면 적이 우리의 협력자가 되었으리라고, 아니면 적어도 자기 나름의 이상 이해를 자기 활동에 깊이 배어들게 했으리라고 가정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사정이 적에게 우리 자신보다 결코 적지 않은 인식과 발전의 자유를 주었고, 그가 모든 것을 따져 보고 평가할 수 있었으며, 문화의 온갖 표상과 감정으로 풍부해진 그의 두뇌가 이기적 성격의 세계관과 처신에 멈추어 섰다면, 우리는 그를 뿌리부터 해로운 유형, 어떤 설득으로도 어떤 다정함으로도 구원하거나 끌어올릴 수 없는 유형으로 단호히 단죄한다. 여기서 우리 앞에 있는 것은 가차 없고 고쳐질 수 없는 적이다. “그래도 당신은 그를 증오할 수 없다. 그가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니까.” 숙명론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잠깐만, 그가 사리사욕에 찬 이기주의자이고, 거짓말쟁이이고, 겁쟁이이고, 약자에게 잔인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것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면, 내가 그 때문에 그를 경멸하는 것도 내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반대로 당신이 나의 더 높은 인식이 나를 모든 것을 용서하는 데로 이끌어야 하며,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나는 잘못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당신은 바로 그로써 인식의 일정한 단계에서는 책임이 있음을 이미 인정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이 그 쓸모없는 개인에게도 충분히 열려 있었다면, 그는 백배나 더 잘못한 것이 아닌가? 잘못이란 무엇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잘못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잘못이 없거나, 모든 악에 대해 자연 전체가 잘못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누구나 자신의 악한 자질에 대해 잘못이 있다. 그는 자기 자질의 총체 말고 다른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자질들 가운데 어떤 것은 우연적이고 일시적이지만, 다른 것은 그의 유형에 근본적으로 고유하며 그의 인격, 그의 본질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력과 같은 힘으로 우리의 미적 판단을 내린다. ‘그는 역겹다!’ 그리고 이 판단의 힘은 ‘역겨운 것’과 반대되는 특징들이 우리 안에 깊이 자리할수록 더 크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계급의 적들을 경멸하고 증오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다는 장담은 내게 비판적이지도 실재론적이지도 않아 보인다. 그들이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나! 마치 문제가 어떤 추상적인 초인격의 형이상학적 잘못에 있는 것이지, 약탈자, 기생충, 전제군주라는 처지의 자연스러운 산물인 해롭고 추악한 특징들의 총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운터만은 변증법의 이름으로 엥겔스의 논쟁에, 모든 열정적 투쟁에 항의하면서 자신이 디츠겐에게서 위대한 결론을 끌어낸다고 상상한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서 필연적이라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그 배후에 어떤 냉정하고 숙명적인 본질도 서 있지 않은 투쟁의 살아 있는 실재론이 아니라, 바로 삶과 감정과 열정을 그것들의 “자동적인” 본질로 환원하는 유물론의 잔재다.”
운터만이 의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는 이 문제를 별도의 저작에서 상세히 다루려 한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는 디츠겐 자신과 절망적으로 갈라섰다. 실제로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이는 논쟁적 열정의 원천을 그들의 “좁은” 변증법에서 찾는다. 그러나 “넓은 변증법”의 아버지인 디츠겐 자신의 말을 들어 보자.
“이 사람들은 자기 지식과 양심이 시키는 대로 행동할 뿐이라고 변명한다. 그들이 아는 것이 매우 적다는 것은 우리도 기꺼이 믿는다. 그러나 짐승 역시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의 미신은 머리보다 코와 훨씬 더 깊은 관계가 있다. 그들의 코는 고귀한 사회의 자유로운 정신이 몰고 오는 위험을 냄새 맡는다. 그들이 두려움에 신경이 곤두서서 공평무사한 연구에 몰두하지 못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그들을 대등한 상대로 대하며 다정하고 정중하게 진리의 길로 이끌려 한다면 그것은 전술적 오류일 것이다. 이들은 — 제 잘못도 없이 길을 잃은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 가장 지독한 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실재론이다. 그렇다면 운터만은 스승을 가르쳐야 할 처지가 되지 않겠는가? [8].
요약해 보자.
1) 르당텍은 세계 전체를 단일하고 미리 예정된 과정으로 본다. 이 과정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 필연성이자 예속이며, 그렇게 보기 때문에 그는 세계 전체를 음울하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세계는 원초적 힘들의 투쟁이다. 이 투쟁에서는 이미 모든 것이 자유이며, 필연성은 힘들이 서로를 제한한 결과로서 자유로부터 흘러나온다.
2) 르당텍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지 못했다. 생명은 힘들의 결합이요 조직이며 힘들의 더 높은 통일이다. 이 통일은 끊임없이 자라나며 자연 전체에 자신의 각인을 찍는다. 우리는 생명의 귀족이요 그와 동시에 자연의 귀족이다. 우리는 — 자유의 확장이요 승리하는 힘이며, 끊임없이 커 가는 우리의 자연 지배가 어디서 한계에 이를지 알지 못한다.
3) 르당텍은 의식과 신경·뇌 중추의 생리 사이의 본질적 통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생명과 종과 사회가 성장해 가는 위대한 드라마가 의식 속에서 그 드라마에 대한 긍정으로 반영된다는 것, 그 드라마의 성공에는 더 높고 반박할 수 없는 기쁨이 뒤따른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의식은 이 드라마의 살아 있는 배우이며, 드라마의 결말에 대한 관심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르당텍의 오류는 그의 사회적 수동성으로 설명된다고 우리는 본다. 이 수동성은 부르주아 사상가 대다수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들은 정직할 때에는 이 수동성 때문에 유물론이라는 미신에 빠진다(유물론은 언제나 숨은 이원론이며, 거기서 의식은 수동적이고 대개는 지워져 있다). 자신을 속일 줄 알거나 남을 속이고 싶어 할 때에는 공공연한 신비주의적 이원론에 빠진다(이때 의식이나 초정신은 물질의 주인이 되거나, 물질은 무슨 반쪽 존재, 순전한 가상, 정신의 텅 빈 경계가 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실재론적이고 일원론적으로 사유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신과 물질의 통일을, 역사와 생명과 자연이 지닌 노동과 투쟁의 성격을 자연스럽게 발견하며, 자신을 자라나는 원초적 힘으로 느낀다. 삶의 온갖 재난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삶을 향해 기쁨에 찬 “예”를 말한다.
사회적 신화
독자는 물론, 이 시론에서 윤곽을 그려 보인 세계관이 저 존경스러운 생물학자의 세계관 못지않게 철저히 무신론적이라는 점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세계관을 종교적이라고 여기고 싶다. 종교적 무신론이라고? 그렇다,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게다가 주목하라, 형이상학을 철저히 부정하며, 따라서 저세상 신의 어떠한 삶도 부정하면서 그렇다는 것이다. 신을 부정하는 자들은 흔히 자기 세계관 속에 신의 그림자를 남겨 두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재론은 이 세상의 신도, 그 모든 그림자도 부정한다. 이 세계관은 범신론과, 오늘날 심지어 일부 가톨릭 신자들마저 신봉하는 저 내재적 범신론과도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우리의 무신론에서 종교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는 되도록 간략하게 답하고자 한다. 더 상세한 답은 《교육》에 실은 글 「종교의 미래」에서, 특히 내 책 『종교와 사회주의』[9]에서 이미 내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종교의 본질은 삶의 법칙(인간의 욕구)과 자연의 법칙 사이의 모순이라는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결하려는 지향에 있다. 옛 종교들과 종교철학 체계들은 세계를 해석함으로써(마르크스의 표현) 이 문제를 해결했다. 곧 세계를 인간을 닮은 의지, 간청에 응하거나 아예 선한 의지가 밖으로 드러난 것으로 표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던 것이다. 새로운 종교는 세계를 개조함으로써(마르크스의 표현) 이 문제를 해결한다. 신화는 과학으로, 주술은 기술로 바뀌었다. 그러나 목적은 예전 그대로다. 자연의 정복과 삶의 최대한의 발전이 그것이다. 이 목적은 거대하며, 심지어 무한하고, 모든 선과 모든 아름다움을 implicite 품고 있다. 이것이 첫째다.
둘째. 유기적 진보와 역사적 진보의 가치 있는 본질로서 이 목적을 의식하는 것(처음에는 무의식적인)은 우리의 인격과 그 주관적 염원을 현상의 객관적 흐름과 융합시킨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넓게 말해서는 현상의 대양으로 내달리며 넓어지는 삶의 흐름과, 좁게 말해서는 가장 충만하고 가장 풍요로운 삶인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융합시킨다.
이때 인격은 가장 강렬하고 가장 다채로운 내용을 얻는다. 그 내용은 인과성의 관점(유기적·사회적 진화의 인식)에서도, 목적의 관점(인간의 최고의 힘을 통한 존재의 가장 충만한 아름다움이라는 이상)에서도 최대한으로 조직된 것이다. 곧 인격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풍부하고 가장 뚜렷한 것, 다시 말해 무엇보다도 인격인 것이 되며, 동시에 인격의 한계를 넘어선다. 이상을 향한 운동의 통일성으로 점점 더 굳게, 또 내적으로 결속되어 가는 세대들의 죽지 않는 사슬 속에서 자신을 하나의 가치 있는 고리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불멸은 종 속에서 얻어진다. 인격은 더 높은 것의 이름으로 자신을 종교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르며, 바로 이 부정의 힘으로 풍요로워지고 꽃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름다움과 선의 승리에 대한, 지복과 힘에 대한 희망, 다른 한편으로는 고립된 삶의 틀을 깨뜨리고 그 덧없음을 영원한 의미로 끌어올리는, 더 높은 것에 대한 기쁜 헌신 — 이것이 종교의 영혼이다. 신 자체는 이 영혼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주의의 감정적 본질을 종교적 무신론이라고 부른다면 꽤 정확하게 이름 붙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세한 것은 다른 곳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로 신이 없는 것일까? 신이라는 표상은 그 안에 무언가 영원히 아름다운 것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이 형상 속에서는(이 관념이 형상으로 표현될 때) 인간적인 모든 것이 최고의 단계로 고양되어 있으며, 그 아름다움은 여기서 나온다(그것이 형상인 동안, 또는 형상인 한에서, 곧 관념을 선명하게 반영하는 상징인 한에서). 이것은 옳다.
종교를 매우 자주 공격하는 요제프 디츠겐 자신은 깊이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세계관이 낡은 형이상학자들에 비하면 한 걸음 전진이었다 하더라도, 종교로서는(디츠겐이 이 “성직자의 용어”를 아무리 손사래 치며 물리친다 해도 그것 역시 종교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한 걸음 후퇴다.
디츠겐의 말을 들어 보자.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써서 물질세계를 오직 형식적으로 지배할 수 있을 뿐이다. 작은 규모에서는 그 변화나 운동을 우리 뜻대로 다스릴 수 있지만, 사물의 실체 전체, 물질 en general은 모든 지성 위에 서 있다. 과학은 기계적 힘을 열, 전기, 빛, 화학적 힘 등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며, 어쩌면 모든 물질을 힘으로, 또는 그 반대로 바꾸어 그것들을 동일한 본질의 여러 형태로 보여 주는 데도 성공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과학이 바꿀 수 있는 것은 형태뿐이며, 본질은 영원하고 사라지지 않으며 파괴될 수 없는 채로 남는다. 지성은 물리적 변화의 경로를 알아챌 수 있지만, 그것은 물질적 경로이며, 오만한 정신은 그것을 뒤따를 수 있을 뿐 그것에 지시할 수는 없다. 건전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자신이 ‘불멸의 영혼’과 자기 인식 능력을 뽐내는 이성과 함께 세계 전체의 종속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철학자들’은 아직도 실재 세계를 인간의 ‘표상’으로 바꾸는 요술에 매달려 있지만 말이다. ‘너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종교의 계명은 사회민주주의의 언어로 이렇게 옮길 수 있다. ‘너는 물질세계를, 육체적 자연 또는 육신의 삶을, 사물의 근원적 원인으로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있었고 있으며 있을 시작도 끝도 없는 존재로서 사랑하고 숭배해야 한다.’”
이것이 종교가 아니고 무엇인가? 신도 찾아냈다. “너는 물질세계를 사랑하고 숭배해야 한다.”
“너는 아빠와 엄마를 사랑하고, 위에 있는 권세를 공경해야 한다 등등.” 무언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 “해야 한다”까지도.
“무엇 때문입니까, 선생님? 무엇 때문에 제가 물질세계를 숭배해야 합니까?”
“그것은 사물의 근원적 원인이니까.”
“그러시든가요. 저는 그것에게 사물을 낳아 달라고, 저를 포함해서 낳아 달라고 부탁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선생님, 만약 그것이 저를 행복하라고 만들었고 저를 이성적으로 보살펴 준다면(성직자들이 신에 대해 가르치듯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그런데 이 제1원인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지만, 멍청하게 저를 낳아 놓고는 자기의 다른 자식 무더기 속에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 자식들은 모두 그것의 무관심 앞에서 평등하고요.”
“그러나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그러나 자연 역시 심장도, 머리도, 사랑도, 기억도 없다. 그 몸은 그 자식들의 몸이요, 그 존재는 유한한 사물들의 존재다. 선생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 보시라. 사물들 가운데 하나인 내가 그것들의 총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런가? 사실 나는 사랑한다. 이 흐름의 다양함과 힘 때문에. 그러나 숭배하라고?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그런데 만일 내가 무한한 사물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이라면? 나는 오히려 인간이 자연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하기야 자연에게는 무릎도 머리도 없다. 내 생각은 이렇다. 만일 돌들에게 혀가 생긴다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호산나, 사람의 아들이여, 오시는 이는 복되도다’ 하고 외쳐야 할 것이다. 물질세계에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다. 그리스도교의 신이 훨씬 낫고 훨씬 선하다. 그에게는 자그마한 결점이 하나 있을 뿐이다. 바로 그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교도가 내게 와서 ‘지고의 선 앞에 엎드려라’ 하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느끼지 못한다. 내가 보는 것은 투쟁으로 가득 차 있고 제 자신에게 내맡겨진 세계 질서다. 네가 신을 보는 하늘에서 나는 차가운 무한과, 태양과 행성들이 끝없이 추는 왈츠를 본다. 그 행성들은 대다수가 무의미하니, 거기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에 절할 것인가?’”
이때 디츠겐이 다가온다. “물질에 절하라, 세계에, 우주에 절하라. 그것은 아주 크고, 가장 큰 그 무엇보다도 더 크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말할 것이다. “유혹하는 자여,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내가 나보다 낮은 것에게 엎드려 절하기를 바라느냐?”
그리하여 나는 신 없이 남는다. 신은 세계 안에도 세계 밖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르주 소렐은 말한다. “총파업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 틀림없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념을 사회적 신화로서, 지도적이고 극한적인 이념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머릿속에 유지해야 한다. 우리의 개념이 전제하는 정도의 힘에 이르려고 끊임없이 애쓰기 위해서이다.”
지독히도 고약한 학설이다. 사회혁명이 grève générale과 동일시되므로 사회혁명마저 신화의 영역으로 보내지고 만다. 그런데 사회혁명이야말로 가장 실재적인 실재, 곧 의심할 여지 없이 닥쳐올 일이다.
그러나 사회적 신화의 이론은 새로운 종교적 의식(귀족-베르댜예프적 의식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적 의식)의 영역에서라면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맞는다. 전지, 지복, 전능, 모든 것을 아우르는 영원한 생명으로서의 신은 실로 인간적인 모든 것을 최고의 잠재력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자. 신은 최고의 잠재력에 이른 인류다. 그러나 최고의 잠재력에 이른 인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룩한 진리다. 그러나 인류는 실재 속에 존재하며 제 안에 자신의 잠재력을 품고 있다. 그러니 인류의 잠재력을, 우리의 잠재력을 숭배하자. 그리고 그것을 더 굳건히 사랑하기 위해 영광의 관을 쓴 모습으로 그려 보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Regnum gloriae, 인간의 신격화, 이성적 존재가 제 누이, 곧 비이성 속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이기는 승리.
“그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끝에서 끝까지, 곧 끝없이 미치는 그의 주인다운 뜻이.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세계들의 옥좌에 얼굴이 인간을 닮은 어떤 이가 앉으리니, 질서 잡힌 세계는 살아 있는 원소와 죽은 원소의 입으로, 제 아름다움의 목소리로 외치리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늘과 땅에 당신의 영광이 가득하도다.”
그러면 인간-신은 둘러보고 미소 지으리라. 보라, 모든 것이 참 좋았으니.
그리고 자신의 거룩한 안식일에 이르러 안식할 것인가? 천만에.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극한적 이념, 곧 사유하고 느끼는 생명이 끝없이 자라난다는 이념의 상징일 뿐이다.
그런데 만약 파르카이가 갑자기 우리 종의 존재의 실을 끊어 버린다면? 고통과 노동과 투쟁의 끝없는 길, 승리의 장미가 흩뿌려진 길 대신에 아래로의 추락, 부패로, 무기물로의 추락, 가치의 파멸이 온다면?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인간의 역사는 신적인 단편이 될 것이다!
만약 세계에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저 세계 바깥의 빈 공간들이 있고, 그가 미소를 지으며 인정했던 경이롭지만 무력하고 의지 없는 신들이 거기 살고 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신답게 크게 뜬 눈으로 환희와 불안에 차서 무섭게 자라나는 신, 곧 인간의 운명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생물학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원형질이 생겨나려면 완전히 예외적이고 완전히 우연한 조건들의 일치가 필요했다. 조금만 더 건조하거나, 더 차갑거나, 더 기름졌더라도 신성의 연약한 씨눈, 거품 같은 단백질 덩어리가 나타날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씨눈은 나타났다. 실이 자아지기 시작해 흘러갔고, 넓어지면서 띠가 되고 줄기가 되고 흐름이 되었으며, 땅을 변모시키고, 스스로 조직되고 또 조직하면서 세계를 사유와 감정의 광채로 넘치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 쾅 —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면 아름답지만 무력한 신들은 절망의 폭풍 속에서 크고 소리 없는 날개를 퍼덕이며 이리저리 날면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빛이 바래지 않는 눈에서 눈물을 쏟으며 흐느껴 말할 것이다. “발데르가 죽었다, 죽었다!” 이 거대한 세계는 텅 비고 어둡고 어리석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슬픔의 광란 한가운데서 문득 멈추어 서서, 저 어딘가 끝없는 평원 사이에 있는 다른 행성, 희망의 제의를 걸친 다른 행성, 우리가 하늘 가운데서 빛나는 것과 같은 에메랄드빛 초록 광선을 두른 행성에 긴장한 시선을 던질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따뜻하게 출렁이는 물결 속에, 바위 틈새에 거품 덩어리가 생겨났고, 새로운 작은 구체가 식물과 생명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번에는 저것이”라고 신들은 속삭인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우리를 두고 그렇게 속삭이고 있다.
우리가 자라나는 신의 원자라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무신론에서는 모든 것이 빛과 생명과 투쟁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이데올로그들을 프롤레타리아 바다의 물결이 위로 들어 올린다. 젊은 자연력인 노동계급의 자신감은 우리 가슴속에 자부심 넘치고 희망으로 가득한 무신론을 낳는다. 잿빛 유물론의 낡은 외투를 벗어 던지자. 우리의 유물론자들이 르당텍과 달리 활기차고 능동적이라면, 그것은 그들의 유물론 덕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다. 그들의 진짜 스승인 백과전서파도 그러했다. 그러나 유물론은 낡은 체제의 해로운 신비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안티테제로서 부르주아적이고 파괴적인 길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필요한 것은 두 대립물을 지양하고, 그것들을 자기 안에서 변형하며, 그것들을 폐기하는 조화로운 종합이다.
우리 모두는 힘닿는 대로 이 종합을 찾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기쁘게 그리고 부지런히 찾고 있다. 공훈 높은 노병 하사들의 성난 호통도 우리를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우리 시절엔 사람다운 사람들이 있었지, 지금 족속과는 달랐어, 장사들이었지, 너희 같은 것들이 아니라.”[10]
하사들은 이렇게 투덜거린다.
“아저씨, 그분들은 죽었어요. 우리는 우리 머리로 살아가야 해요.”
하사들은 구령을 붙인다.
“얘들아, 다 함께 한목소리로: 비읍 아, 비읍 아.”[11]
“아저씨, 언제까지 자모만 외우고 있을 거예요? 적어도 음절 읽기로는 넘어갈 때가 됐어요.”
A. 루나차르스키.
주석
- 엮은이 주: 펠릭스 르당텍(Félix Le Dantec, 1869~1917). 파스퇴르 연구소 출신의 프랑스 생물학자로, 철저한 기계론적 유물론을 내세웠다. 여기서 다루는 책은 『무신론(L’Athéisme)』(파리, 1906)이다. ↩
- 물론 이것이 유물론에 대한 그들의 반감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
- 물론 이미 말했듯이, 변증법적이고 역사적인 유물론자에게 세계 속 의식의 존재는 비역사적인 르당텍에게만큼 암울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유물론자도 기쁨에 찬 생동하는 일원론의 정점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멀었다. ↩
- 적어도 그 안에서 낡은 형이상학적 유물론이 최종적으로 추방된 뒤에는 그것의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
- 이 인용문은 모두 「Philosophie der Sozialdemokratie」라는 저작에서 가져온 것이다. ↩
- 《프라브다》 출판사판, 47쪽. ↩
- 상상과 생각은 맹아적 행위이자 완결되지 않은 반응이며, 생물학적으로 막대한 역할을 한다. 여러 상황을 내적으로 미리 체험할 수 있는 덕분에, 우리가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유기체가 마지막에 내놓는 완전한 반응은 비상한 합목적성을 띠게 되기 때문이다. ↩
- 디츠겐의 “폭넓은 변증법적 관용”을 보여 주는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살이 뒤룩뒤룩 찐 부르주아는 제 기름에 질식할 지경이지만, 노동자에게 정직하게 품삯을 치르기에는 너무나 시기심 많고 탐욕스럽다.” (『사회민주주의의 철학』, 러시아어판 94쪽.) ↩
- “시포브니크” 출판사에서 출간 준비 중이다. ↩
- 엮은이 주: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시 「보로디노」(1837)의 한 구절. 1812년 보로디노 전투에 나갔던 늙은 병사가 젊은이들에게 하는 말이다. ↩
- 엮은이 주: 옛 러시아식 읽기 교습에서 자모의 이름(«буки»는 б, «азъ»는 а)을 외우게 하던 구령. 다음 문단의 “음절 읽기”는 그다음 단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