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인물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로버트 오언 용어독일 이데올로기,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기독교의 본질, 사적 유물론, 청년헤겔파, 소외 계보도독일 고전철학에서 마르크스까지
마르크스의 원고 (1845)
1.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어바흐의 유물론까지 포함하여)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이 오직 객체의 형식이나 직관의 형식으로만 파악되고, 감성적·인간적 활동, 실천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 주체적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활동적 측면은 유물론과 대립하여 관념론에 의해 추상적으로 — 관념론은 물론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활동 그 자체를 알지 못한다 — 발전되었다 포이어바흐는 사유 대상과 실제로 구별되는 감성적 대상을 원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활동 그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의 본질』[1]에서 이론적 태도만을 참으로 인간적인 태도로 여기고, 실천은 오직 그 더러운 유대적 현상 형태[2]로만 파악하고 고정한다. 그래서 그는 “혁명적” 활동, “실천적·비판적” 활동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2. 인간의 사유에 대상적 진리가 주어지는가 하는 물음은 — 이론의 물음이 아니라 실천적 물음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 곧 자기 사유의 현실성과 힘, 차안성[3]을 증명해야 한다. 사유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을 둘러싼 논쟁은 — 그 사유가 실천에서 고립되어 있다면 — 순전히 스콜라적인 물음이다.
3. 환경과 교육을 바꾼다는 유물론의 학설은, 환경이 인간에 의해 바뀌고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러므로 이 학설은 사회를 두 부분으로 — 그 가운데 하나는 사회 위에 솟아 있다 — 나눌[4] 수밖에 없다.
환경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 또는 자기 변화가 하나로 맞아떨어지는 것은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만 파악되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4.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자기소외라는 사실, 곧 세계가 종교적 세계와 세속적 세계로 이중화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업은 종교적 세계를 그 세속적 토대로 해소하는 데 있다. 그러나 세속적 토대가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와 구름 속에 하나의 독립된 왕국으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오직 이 세속적 토대의 자기 분열과 자기모순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토대 자체가 그 자체 안에서, 그 모순 속에서 이해되는 동시에 실천적으로 혁명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지상의 가족이 신성 가족[5]의 비밀이라는 것이 밝혀진 뒤에는, 이제 지상의 가족 자체가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소멸되어야 한다.
5. 포이어바흐는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않고 직관을 원한다. 그러나 그는 감성을 실천적인 인간적·감성적 활동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6.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로 해소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개별 개인에게 깃들어 있는 추상물이 아니다. 그 현실성에서 그것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6]이다.
이 현실적 본질의 비판으로 들어가지 않는 포이어바흐는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역사의 흐름을 사상(捨象)하고 종교적 심성을 그것만 따로 고정하며, 추상적인 — 고립된 — 인간 개인을 전제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질은 오직 “유(類)”로서만, 곧 많은 개인을 자연적으로 묶는 내적이고 말 없는 보편성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다.
7. 그러므로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심성”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분석하는 추상적 개인이 일정한 사회 형태에 속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8.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이끄는 모든 신비는 인간의 실천에서, 그리고 이 실천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합리적인 해결을 얻는다.
9. 직관적 유물론, 곧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 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이 다다르는 최고의 지점은 개별 개인들과 시민사회[7]를 직관하는 것이다.
10. 낡은 유물론의 입장은 시민사회이고, 새로운 유물론의 입장은 인간적 사회 또는 사회적 인류다.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하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엥겔스가 펴낸 판 (1888)
1.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 —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까지 포함하여 — 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이 오직 객체의 형식이나 직관의 형식으로만 파악되고, 인간의 감성적 활동, 실천으로는, 주체적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활동적 측면은 유물론과 대립하여 관념론이 발전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관념론은 물론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활동 그 자체를 알지 못하므로, 추상적으로만 발전시켰다. 포이어바흐는 사유 대상과 실제로 구별되는 감성적 대상을 원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활동 그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이론적 태도만을 참으로 인간적인 태도로 여기고, 실천은 오직 그 더러운 유대적 현상 형태로만 파악하고 고정한다. 그래서 그는 “혁명적” 활동, 실천적·비판적 활동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2. 인간의 사유에 대상적 진리가 주어지는가 하는 물음은 이론의 물음이 아니라 실천적 물음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 곧 자기 사유의 현실성과 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실천에서 고립된 사유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 하는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적인 물음이다.
3. 인간은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고, 따라서 바뀐 인간은 다른 환경과 바뀐 교육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의 학설은, 환경이야말로 인간에 의해 바뀐다는 것, 그리고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러므로 이 학설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기에 이르며, 그 가운데 한 부분은 사회 위에 솟아 있다(이를테면 로버트 오언의 경우).
환경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이 하나로 맞아떨어지는 것은 오직 변혁적 실천으로만 파악되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4.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자기소외라는 사실, 곧 세계가 종교적이고 표상된 세계와 현실의 세계로 이중화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업은 종교적 세계를 그 세속적 토대로 해소하는 데 있다. 그는 이 작업을 마친 뒤에도 가장 중요한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곧 세속적 토대가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와 구름 속에 하나의 독립된 왕국으로 자리를 잡는다는 사실은, 바로 이 세속적 토대의 자기 분열과 자기모순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토대 자체가 먼저 그 모순 속에서 이해되고, 다음에 모순을 없앰으로써 실천적으로 혁명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지상의 가족이 신성 가족의 비밀이라는 것이 밝혀진 뒤에는, 이제 지상의 가족 자체가 이론적으로 비판되고 실천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5. 포이어바흐는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않고 감성적 직관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는 감성을 실천적인 인간적·감성적 활동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6.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로 해소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개별 개인에게 깃들어 있는 추상물이 아니다. 그 현실성에서 그것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
이 현실적 본질의 비판으로 들어가지 않는 포이어바흐는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1. 역사의 흐름을 사상하고 종교적 심성을 그것만 따로 고정하며, 추상적인 — 고립된 — 인간 개인을 전제하게 된다.
2. 그러므로 그에게서 인간의 본질은 오직 “유”로서만, 곧 많은 개인을 그저 자연적으로 묶는 내적이고 말 없는 보편성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다.
7. 그러므로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심성”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분석하는 추상적 개인이 실제로는 일정한 사회 형태에 속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8.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이끄는 모든 신비는 인간의 실천에서, 그리고 이 실천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합리적인 해결을 얻는다.
9. 직관적 유물론, 곧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 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이 다다르는 최고의 지점은 “시민사회” 속 개별 개인들을 직관하는 것이다.
10. 낡은 유물론의 입장은 “시민” 사회이고, 새로운 유물론의 입장은 인간적 사회 또는 사회화된 인류다.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하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8]
주석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1841). 신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유적 본질을 자기 바깥에 내세워 섬기는 것이라고 주장해 청년헤겔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
-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본질』의 유대교 창조관을 다룬 장에서 유대교의 원리를 이기주의와 유용성의 원리로 그리고, 자연을 자기 쓸모에 따라 다루는 실천적 태도를 거기에 결부시켰다. 마르크스의 표현은 이 서술과, 유대교를 돈벌이와 장사에 빗대던 당시의 반유대적 관용어를 그대로 받아 쓴 것이다(마르크스 자신도 1844년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에서 같은 어법을 썼다). 여기서 이 말은 포이어바흐가 실천을 사사로운 이해타산의 행위로만 보고, 세계를 바꾸는 인간 활동으로는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
- 차안성(此岸性, Diesseitigkeit)은 피안(彼岸, Jenseits)의 맞말로, 저 너머가 아니라 이쪽 세상에 속한다는 뜻이다. 사유가 이 세계에서 실제로 힘을 갖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
- 원고에는 「살피다」라는 뜻의 sondieren으로 적혀 있으나, 문맥상 「나누다」라는 뜻의 sondern이다. 1888년 판은 sondern으로 바로잡았다. ↩
- 예수, 마리아, 요셉으로 이루어진 성가족. 포이어바흐는 천상의 가족이라는 표상이 지상의 가족을 하늘에 비춘 것이라고 보았다. 같은 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브루노 바우어 형제를 비판해 펴낸 책의 제목 『신성가족』도 이 말을 비튼 것이다. ↩
- 마르크스는 이 낱말을 프랑스어 ensemble(전체, 총체) 그대로 썼다. ↩
- bürgerliche Gesellschaft. 헤겔이 『법철학』에서 가족과 국가 사이의 영역, 곧 저마다 자기 이익을 좇는 개인들이 시장과 노동으로 얽히는 영역을 가리켜 쓴 말이다. 「시민사회」로도 「부르주아 사회」로도 옮길 수 있고, 마르크스는 두 뜻을 함께 담아 쓴다. 이 문서에서는 「시민사회」로 옮겼다. ↩
- 원고에는 없는 「그러나(aber)」를 엥겔스가 넣었다. 1956년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에 세워진 마르크스의 묘비에는 이 엥겔스 판의 문장이 영어로 새겨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