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ghegelianer (Linkshegelianer) · 1835–1845

청년헤겔파

Young Hegelians

1830년대 후반부터 1840년대 중반까지 헤겔의 변증법을 종교와 프로이센 국가를 비판하는 무기로 돌린 독일의 젊은 지식인들. 헤겔 좌파라고도 하며 슈트라우스, 브루노 바우어, 포이어바흐, 루게, 슈티르너가 대표하고, 젊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한때 이 무리에 속했다. 1840년 이후 탄압과 내부 이견 속에 흩어졌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신성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들과 결별하며 사적 유물론을 세웠다.

상세

청년헤겔파는 누구였나?

청년헤겔파는 정식 조직이 아니라 느슨한 무리였다. 흔히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와 그 동생 에드가 바우어, 테오도어 에히터마이어, 아르놀트 루게, 모제스 헤스, 카를 프리드리히 쾨펜을 꼽고, 막스 슈티르너와 젊은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한동안 가까이 있었다. ‘청년헤겔파’라는 이름 자체가 『예수의 생애』 논쟁에서 자기편을 든 사람들을 부르려고 슈트라우스가 처음 쓴 것이다. 그 반대편이 노헤겔파, 곧 헤겔 우파였다(헤겔학파 항목 참조).

중심은 베를린이었다. 1839년까지 이들은 ‘박사 클럽’이라는 토론 모임에서 만났고, 1841년 무렵 이 모임은 브루노·에드가 바우어, 슈티르너, 쾨펜 등이 술집에 모여 극단적 무신론과 도발적인 언행으로 이름난 ‘자유인들’로 바뀌었다. 할레, 쾰른, 쾨니히스베르크에도 갈래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매체는 루게가 1838년 창간한 《할레 연보》였고, 1841년부터 《독일 연보》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843년 금지되었다. 1842년 쾰른에서 나온 《라인 신문》에도 이들이 깊이 관여했다. 엥겔스는 청년헤겔학파가 《라인 신문》에서 “떠오르는 급진 부르주아지의 철학”으로 정체를 드러냈고, 철학의 외투는 검열을 속이는 데만 썼다고 평했다.

왜 종교 비판에서 출발했나?

1840년대 이전의 프로이센에서는 엄격한 검열 때문에 정치를 대놓고 논할 수 없었다. 비교적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곳은 종교와 예술과 문학뿐이었다. 엥겔스의 말로 “정치는 당시 아주 가시 돋친 분야였고, 그래서 주된 싸움은 종교를 겨누었다.” 그러나 왕권을 신의 인격적 주권에 빗대어 정당화하던 복고 시대에 인격신을 비판하는 일은 곧 정치 비판이기도 했다.

Die Politik war aber damals ein sehr dorniges Gebiet, und so wandte sich der Hauptkampf gegen die Religion

첫 충격은 1835년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였다. 슈트라우스가 복음서의 기적 이야기를 공동체가 무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신화로 본 데 맞서, 브루노 바우어는 복음서 저자들이 그 이야기들을 스스로 지어냈다고 주장했다. 엥겔스는 이 다툼이 “‘실체’에 맞선 ‘자기의식’의 싸움”이라는 철학의 옷을 입고 세계사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이냐는 물음으로까지 부풀려졌다고 비꼬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슈티르너가 나타나 주권적 ‘자기의식’을 주권적 ‘유일자’로 한 번 더 넘어섰다.

포이어바흐는 무엇을 바꾸었나?

종교와 싸우다 보니 가장 단호한 청년헤겔파는 영국과 프랑스의 유물론 쪽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헤겔의 체계에서 자연은 절대이념이 바깥으로 내보낸 것, 이념이 낮아진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유물론과 학파의 체계가 부딪치는 이 모순 속에서 다들 갈팡질팡하던 때 1841년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이 나왔다. 엥겔스는 이 책이 단번에 모순을 날려 버렸다고 회고했다. 자연은 모든 철학과 상관없이 존재하고, 인간 바깥에 있는 더 높은 존재들은 우리 자신의 본질이 환상 속에 비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열광은 모두의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한동안 포이어바흐주의자였다.”

Die Begeisterung war allgemein: Wir waren alle momentan Feuerbachianer.

왜 흩어졌나?

청년헤겔파는 1840년부터 1843년 사이에 가장 활발했고, 이때 그들의 입장은 빠르게 급진화하고 정치화했다. 자유주의적인 문화장관 알텐슈타인 아래서는 묵인되었지만, 1840년 그가 죽고 보수적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즉위하자 대학의 길이 막혔다. 1842년 3월 브루노 바우어가 본 대학에서 쫓겨났고, 《라인 신문》과 《독일 연보》는 1843년 초까지 차례로 금지되었다. 강단도 지면도 잃은 이들은 고립된 지식인이 되었다.

동시에 내부의 이견이 커졌다. 1844년 10월 슈티르너는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포이어바흐와 바우어를 철저하지 못하다고 조롱했다. 신과 국가만이 아니라 포이어바흐의 ‘인간’마저 개인 위에 군림하는 또 하나의 유령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폴란드 철학자 아우구스트 치에시코프스키는 1838년 이미 과거를 해석하는 데 그치는 헤겔 철학을 넘어 미래를 만드는 행동의 철학을 주장하며 ‘프락시스’라는 말을 퍼뜨렸고, 모제스 헤스는 소외 개념을 경제에 적용하며 젊은 엥겔스를 공산주의로 이끌었다. 무리는 1845년 무렵 사실상 사라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왜 등을 돌렸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청년헤겔파와의 결별을 두 권의 ‘청산서’로 남겼다. 먼저 브루노 바우어와 그 추종자들을 겨눈 『신성가족』(1845년 3월)이, 이어 포이어바흐와 슈티르너까지 다룬 『독일 이데올로기』(1845~1846년 집필, 생전 미출간)가 나왔다. 그 사이 마르크스가 노트에 적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는 이 결별의 요점을 압축한 글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비판은 이렇다. 청년헤겔파는 사람들을 묶는 사슬이 관념과 개념, 곧 의식의 산물이라고 믿었으므로 의식을 바꾸라는 도덕적 요구만 내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현존하는 것을 다르게 해석해 인정하자는 요구에 지나지 않는다. “청년헤겔파 이데올로그들은 이른바 ‘세계를 뒤흔드는’ 문구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이 문구들에 오직 문구로 맞설 뿐”이며 현실 세계와는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의 머리말은 사람들의 “머리가 낳은 것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자라 올랐다”며 관념에서 해방되자고 외치는 청년헤겔파의 말투를 흉내 내어 비꼬았다.

Die junghegelschen Ideologen sind trotz ihrer angeblich “welterschütternden” Phrasen die größten Konservativen.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대신 사람들이 노동으로 물질적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현실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보았다. 포이어바흐는 다른 이들과 달리 유물론자였지만 감각적 직관만 알 뿐 현실의 실천적 활동은 몰랐다는 것이 그들의 평가였다. 이렇게 청년헤겔파와의 논쟁 속에서 사적 유물론이 태어났다. 청년헤겔파의 급진적 종교 비판과 국가 비판은 무신론과 국가의 폐지·소멸이라는 요구에까지 이르렀고, 슈티르너는 아나키즘의 한 원천이 되었다.

관련 인물

출처

  1. de.wikipedia.org
  2. 위키백과 (영문)
  3. web.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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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web.archiv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