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는 카스피해로 흐른다
인물보리스 필냐크
47
레닌그라드에서 콜롬나로 가던 그날, 모스크바의 볼샤야 모스콥스카야 호텔 방에서, 피멘 세르게예비치 폴레티카는 정교회 성자 피멘들의 미네이 읽기를 멈추고 현상의 반복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떠오른 것은 어린 시절, 페체르스크 동굴, 언젠가 그가 혼례를 올렸던 스타리 피멘 교회, 아내, 부부 생활, 페테르부르크 아파트의 넓고 차가운 공간이었다. 그 모든 것은 지나갔고, 결코 되풀이될 수 없는 채, 전당포 안으로 물러나 있었다. 전당포, 곧 스타리 피멘 교회에서는 형편없는 카고르 포도주 대신 매점에서 요구르트와 과자를 팔고 있었다. 볼샤야 모스콥스카야 앞의 마부는 삶이 ‘골로먀나’하다고, 안경을 끼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십오 년 전 젊은 기사는 인간의 봄 속에 살고 있었다. 그 자리를 제자 라슬로가 대신했고, 그가, 폴레티카 교수의 봄을 가져갔다. 상념은 화가의 눈으로 본 모스크바 아래의 새 강이라는 환영에 가려졌다가, 골동상 같은 예의를 갖춘 고서상의 전화벨 소리에 흩어졌다. 옛 피멘들은 하나의 형상이 되지 못했다. 삶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 쓸모없음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안토니 동굴에서 그랬다. 골동상이 보내 준 피멘들은 골동상 베즈데토프 형제와 뒤엉켰다. 학자 라자레프는 인간 삶의 물리 법칙을 파고들며, 인간 불멸의 물리적 토대를 세우다가, 인간의 지각이 가장 날카로운 때는 스무 살이라는 사실을 확정했다. 그렇다 치자. 사람은 스무 살까지 받아들인 것을 평생 견주어 본다.
기차는 밤을 더듬으며 교수를 콜롬나의 옛것 속으로, 사회주의를 위한 싸움터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싸움은 폴레티카 교수가 치르는 싸움이었다. 이튿날 아침 건설 현장으로 나온 이는 기운찬 노인, 건설자, 일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되었다.
— 어제 제 아내가 죽었습니다. 저와 헤어진 뒤 라슬로의 아내가 된 사람입니다. 목을 맸습니다. 오늘이 장례입니다, — 사디코프가 크고 힘겹게 말했다.
햇빛은 사디코프의 빡빡 깎은 머리 위에서, 모자가 있던 자리를 반듯하게 잘라 냈다. 햇빛은 아주 밝았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눈을 눈썹 밑으로 숨겼다. 현상의 반복은 사물들의 연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라슬로의 아내, 사디코프의 길 — 그것은 그 자신, 폴레티카 교수의 길이었다. 그들 두 사람에게서 아내를 데려간 사람은 에드가르 이바노비치 라슬로였다. 그러나 사디코프의 길이 더 끔찍했다. 생각은 고통 속으로, 그리고 그 고통 너머 이미 노인의 것이 된 다정함 속으로 엉켰다. 노인은 제 감정을 드러내기 싫어했고, 눈썹은 엄격하게 모였다. 그는 괴팍한 노인이었다. 품위로 자기 삶을 세워 온 사람, 늙어 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듯 특별한 사람이었다.
— 그렇소, 그들은 내 아내와 내 딸이오, — 폴레티카가 엄하게 말하고, 노인의 손톱 끝을 작은 발굽처럼 탁자에 두드렸다. 그러자 다시 페테르부르크 집의 복도, 고요, 넓은 공간, 그리고 피멘 세르게예비치가 마지막으로 올가 알렉산드로브나를 보았던 복도 문턱이 떠올랐다. 문턱 너머에는 라슬로가 올가 알렉산드로브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턱 이쪽에는 피멘 세르게예비치에게 일, 노동, 생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숙박소 식당 문턱에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다. 해진 신발을 신고 기름때 낀 재킷을 걸쳤으며, 거울도 보지 않고 머리를 깎은 사람이었다. 들어온 자의 눈과 동작은 미쳐 있었다. 그는 차례차례 모두에게 황급히 손을 내밀고,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천구백이십일년까지의 진정한 공산주의자 이반 오조고프!” 사디코프는 그 미친 사람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의 생각은 시간 속에서 뒤엉켰다. 인간의 규칙, 곧 고귀해야 한다는 규칙은, 말하자면 더 높은 도덕의 차원에서뿐 아니라 인간에게 단순히 유익하다는 점에서도 필요한 규칙이다. 고귀하게 사는 것이 더 편하고, 더 이롭고, 더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란 무엇보다 높다. 고귀함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은 병리다.
— 어느 분이 늙은 볼셰비키, 피멘 세르게예비치 교수, 폴레티카 동지입니까? 우리 이야기해야 합니다! — 오조고프가 외쳤다.
— 내가 폴레티카요, — 피멘 세르게예비치가 말했다.
— 당신이오!? — 미친 사람의 눈이 다정하고 슬퍼졌다. — 아주 좋습니다. 나는 이십이년에 술 때문에 당에서 쫓겨났습니다. 물론 나는 부랑자입니다. 그래도 나는 공산주의자입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 교수 동지! 우리 코뮌으로, 우리 지하실로 오십시오! 피멘 세르게예비치 교수 동지!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정직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이 말을 윗사람들에게 전해 달라고 말하러 왔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겠습니다, 동지, 우리는 둘 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으니까요. 우리의 첫 혁명, 볼셰비키 혁명, 10월 혁명은 사회혁명이었습니다. 그다음에는 두 번째 혁명, 문화혁명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혁명이 필요합니다. 명예의 혁명, 양심의 혁명, 모두가 정직해지는 혁명.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망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 당신은 누구요? — 피멘 세르게예비치가 물었다.
— 아직 쫓겨나지 않았습니까? — 오조고프가 되물었다.
— 어디서 말이오?
— 당에서요.
— 아니오.
— 그럼 쫓겨날 겁니다. 세 번째 혁명을 하지 않으면요.
— 당신은 누구요?
— 나는 망한 사람입니다. 술꾼이고 부랑자지만, 진정한 공산주의자 이반 오조고프입니다. 라슬로 기사 때문에 표도르 이바노비치의 아내가 목을 맸습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 동지를 보십시오, 얼굴이 얼굴이 아닙니다!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동지를 보십시오, 라슬로의 예전 아내 말입니다. 늘 손수건을 입술에 대고, 입술을 붙잡고, 괴로워합니다! 라슬로는 새 아내를 한 달 반 만에 태워 버렸고, 자기 자신도 난로 속 장작처럼 새까맣게 변했습니다. 누가 죄인입니까? — 명예입니다! 아무도 죄인이 아닙니다! — 피멘 세르게예비치, 교수 동지, 내 공산주의자들이 당신에게 반드시 오시라고 일렀습니다. 우리는 명예에 굶주려 있습니다!……
미친 사람의 눈은 슬픔과 다정함으로 빛났다. 그는 마른 가슴에 두 손을 누르고 외쳤다. 그의 손은 떨렸고, 무릎도 오한 속에서 떨렸다. 이 죽임당하는 자의 부류에 속한, 그러나 죽이는 자의 부류에는 속하지 않은 바보 성자, 가난한 자, 동냥꾼, 소비에트 루시의 바보 성자 나사로 같은 사람 뒤에는, 분국 시대와 차르들의 시대에서부터 이어진 천 년의 바보 성자 전통이 서 있었다. 노인은 경련하듯 몸을 떨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었다. 노인에게 발작이 시작되고 있었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와 무의미 속으로 무너졌다. — “명예, 명예, 명예!” 소비에트의, ‘거룩한’ 루시의 바보 성자들은 이런 순간 예언하고 저주했다. 사디코프 기사가 이반 카르포비치에게 물 한 잔을 들이밀었고, 물은 거울도 보지 않고 서툰 가위로 밭이랑처럼 깎아 놓은 수염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친 사람의 눈은 여전히 선량했다.
— 공산주의 만세, 공산주의 혁명 만세, 명예 만세! — 오조고프가 외쳤다.
— 그래, 아주 옳소, — 교수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지하 저장고에는 칠월까지 눈이 남아 있고, 겨울이 보존된다. 피멘 세르게예비치의 생각은 기억의 겨울 속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었든, 그래도 사람은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사랑해야 하고, 노동 속에서 자기 자리를 정해야 하며, 자기 방식으로 살고 죽어야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과 젊음과 장년과 늙음이 있어야 하며,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의 명예를 가질 권리가 있다. 학생 시절은 지하 활동에 닿아 있었고, 이제 생각들은 시간 속을 떠돌기 시작했다. ‘골로먀나’한 날 하늘을 지나는 구름처럼, 무겁고 급한 구름이 지나가며 땅 위에 햇빛과 먹구름을 번갈아 내리는 것처럼.
— 그래, 그래, 아주 옳소. 아시다시피, 내가 학생이었을 때……
오조고프는 발작에 짓눌린 채 식당 밖으로 실려 나갔다.
48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설계도와 완성된 부분의 표시를 살펴보았다. 트레이싱지와 와트먼지 위의 도면에서 그는 수백만 입방미터의 물을 보았고, 공식은 힘으로 변했다. 인상들이 서로 위에 포개졌다. 올가에 대한 기억, 마리야의 장례, 건설의 모놀리트. 여름은 지하 저장고 안에 있었다. 한때 딸은 어린 계집아이였고,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그때는 건강했던 두 팔로 아이를 안아 어르며 안경으로 겁을 주곤 했다. 이제 딸은 어른이고, 여자이며, 공산당원이다. 수 킬로미터의 건설 현장, 모놀리트, 화강암 콘크리트, 굴착 구덩이, 우회 운하 — 이미 만들어진 것들이 공식으로 돌아왔고, 공식은 더 이상 종이 위의 먹물이 아니라 자연 속의 화강암이 되어 있었다. 하루는 골로먀나하게 지나갔다. 그 말은 마부에게서 붙어 온 것이었다. 햇빛 위로 구름이 기어오르면 모든 것이 잠깐씩 바래다가, 해가 돌아오면 더욱 황금빛이 되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엄격하게 말했고, 노인의 고집으로 털을 세웠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여자들이 손수레를 버리고 도시로 걸어가기 시작했을 때 모놀리트 위에 있었다. 십장이 자전거를 타고 여자들을 뒤쫓았다. 십장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사무소에서는 “파업인가?” 하고 물었다. 십장은 “시위인가?” 하고 짐작했다. 폴레티카는 성난 듯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인간, 인류는 사물의 자연만을 다시 세우고, 강의 흐름을 거꾸로 몰고, 모놀리트를 지질 속에 납땜해 넣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인간, 인류는 개념의 모놀리트도 세운다. 역사를 파헤치고, 인간 안의 무의식을 파헤치며, 새로운 인간 관계를 세운다. 이 여자들의 대열은 미래로 걸어가고 있었다. 파업도 시위도 아니었다. 그런 말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건설 현장의 노동일은 명예의 장례 때문에 끊어졌다. 그리고 이 당혹의 시간에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사디코프를 불러 제 방으로 갔다. 단둘이 있으려는 것이었다. 창밖에는 비가 올 것을 예고하는 칼새들이 날았다. 하늘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창밖의 칼새들은 고요를 확증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지친 몸으로 무겁게 침대에 앉았다. 방은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넓음으로 텅 비어 있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사디코프에게 의자를 가져와 가까이 앉으라고 했다. 사디코프가 앉았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아주 난처한 얼굴로 표도르 이바노비치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의 성난 기색은 사라져 있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어깨를 구부리고 앉아, 흙빛으로 지친 채 음울하게 바라보았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다정하게 웃었다.
노인이 말했다.
— 오늘 내가 당신에게 다가오는 사막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우연이 아니오, 표도르 이바노비치. 물론 그 이야기는 나중에도 할 수 있겠지. 지금 나는 우리 두 사람의 운명이 같다고 생각했소. 사실 그건 옳지 않지만, 나는 반복을 생각하고 있소. 이십오 년 전 나는 올가 알렉산드로브나와 혼례를 올렸소. 일 이야기가 아니라 미안하오. 당신에게서도, 나에게서도 아내를 데려간 사람은 라슬로요. 올가는 나를 떠났고, 마리야 표도로브나가 당신을 떠났을 때 당신이 무엇을 겪었는지 나는 압니다. 그래, 그게 얼마나 아픈지 압니다. 그러나 나는 또 생각하오. 자기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설령 온 삶이 지나갔다 해도 우연이란 없다고. 당신 이야기를 해 주시오. 당신은 우리 집 사람들에게 가곤 하오?
—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자기 본능에 복종했고, 에드가르에게서는 바로 그 본능이 부서져 있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댁에는 어제저녁에 갔습니다. 마리야가 남긴 개를 류보비 피메노브나에게 데려다주었습니다. 개는 울부짖고 제 손에서는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댁에 자주 갑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가 다시 말했다. 그는 눈을 천장으로 들어 올려 자기 지하 저장고를, 그 시각 칼새들이 흩어 놓고 있던 시간과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 따져 보아야 하오. 올가 알렉산드로브나가 나를 떠난 일을 나는 병리로 봅니다. 그러나 내게 모든 것이 보이는 것은 아니오. 나는 묘지로 걸어가던 그 여자들을 보았소. 작업 중단에는 수만 루블이 들고, 라슬로의 파멸도 걸려 있소. 그는 물론 파멸했으니까. 어제 나는 내가 혼례를 올렸던 교회, 내 이름의 교회에 갔소. 그러나 나는 내 안에 전당포를 들이지는 않을 것이오. —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미안한 듯 웃었다. — 표도르 이바노비치, 당신이 나를 올가 알렉산드로브나에게 데려다주는 일을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오. 자기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우연이 있어서는 안 되오. 혹은 그런 우연이야말로 병리겠지. 우리는 올가 알렉산드로브나와 잘 살았소. 이제 우리는 이미 노인들이지 않소? 그리고 나는 류바를, 딸을 보고 싶소. 나는 그 아이를 아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오.
사디코프가 폴레티카처럼 조용하고 난처하게 말했다.
— 예, 갑시다. 그곳에서는 선생님을 반길 겁니다. — 사디코프는 잠시 말이 없었다. — 따님은, 피멘 세르게예비치,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삶은 단순해야 합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몹시 난처한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 표도르 이바노비치, 당신은 이해하겠지…… — 폴레티카가 말하다가, 화가 난 듯 입을 다물고, 뾰로통해지고, 더욱 난처해졌다.
창밖에서는 공기를 베며 날아가는 칼새들이 골로먀나한 하루의 고요와 무더위를 확증하고 있었다.
49
사람이 땅과 우정을 맺어야 하는 날들이 있다. 고통의 무질서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날의 질서가 요구하는 모든 일을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해내는 날들이 있다. 스쿠드린 자매의 집에는 그런 날이 찾아와 있었다. 그런 날에는 러시아 지방의 법도에 따라 아침부터 창문을 열어 두어야 한다. 칠월의 조용한 바람에 밀린 공기가 방들을 떠돌게 하려고. 그러면 방 안에는 낡은 보리수와 단풍나무가 주는 서늘함과 초록빛이 들어오고, 테라스를 둘러싼 야생 포도 덩굴은 하루의 금빛을 가려 준다. 바로 그 금빛은 정원 위로 흩어져 울타리 곁 해바라기들의 머리에 닿아 있다. 올가 알렉산드로브나는 시간을 꿰매고 기워 넣으려는 듯, 정성껏 채마밭 고랑을 파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흙투성이였다. 그녀는 붉은 머릿수건을 쓰고, 흙이 묻지 않게 두 손을 허리에서 떼어 든 채 정원과 집을 오갔다. 그녀는 땅과 우정을 맺고 싶어 했다. 사랑하고, 믿고, 충실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드물고 행복한 우정이었다. 생각과 속뜻이 고귀한 사람들만이 사랑하고, 믿고,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과 속뜻이 고귀한 사람들만이 사랑하고, 믿고,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흙을 파고, 고랑에서 잡초를 뽑아내며, 자신이 심고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이 자라나는 것을 보는 일은 근육을 피로하게 하는 더없이 훌륭한 일이다.
……소녀 알리사에게는 인형들이 있었다. 알리사는 그 가운데 커다란 헝겊 인형 하나에 잉크 연필로 콧수염을 그려 넣었다. 알리사는 아버지를 한 번도 아빠라고 부르지 않고, 어머니처럼 에드가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인형을 알리사는 아버지,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알리사는 이 인형을 모두에게, 심지어 미슈카에게도 몰래 가지고 놀았다. 이 인형의 이름이 아빠라는 것을 알리사가 털어놓은 유일한 존재는 개 볼크뿐이었다. 정원 먼 구석,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숨어서, 햇볕의 무더위 속에, 알리사는 아빠를 제 무릎에 앉히고 흔들고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아빠, 다정한 아빠, 슬퍼하지 마, 우리한테 와, 다정한 아빠, 아빠!” 언젠가 알리사는 에드가르 이바노비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 에드가르, 우리는 살고 있어, 아니면 놀고 있어? 당신하고 엄마, 당신들은 살고 있고, 나하고 미샤는 인형 놀이를 하고 있어. 나하고 미샤는 살고 있는 거야, 아니면 놀고 있는 거야?
끔찍한 잉크 콧수염을 단 육중한 헝겊 인형은 몹시 더럽고 몹시 무서웠다. 밤마다 알리사는 누가 빼앗아 가거나, 아빠에 대해 알게 될까 봐, 모두 몰래 이 인형을 침대 베개 밑에 넣고 잠들었다. 낮에는 무더위 속에서 그 인형을 쓰다듬었다.
하루는 해 질 녘으로 갔고, 비가 떨어질 채비를 했다. 서둘러야 했다. 첫 빗방울이 잎사귀 위에서 소리를 냈다. 올가 알렉산드로브나는 완두를 묶을 노끈을 가지러 테라스로 갔다. 그리고 그녀는 넓은 챙 모자를 쓴 듯하고, 손에 지팡이를 든 듯한 그 사람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찾아온 사람을 혼자 남겨 두려고 테라스에서 정원으로 지나갔다. 올가 알렉산드로브나의 손은 흙투성이였다.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쪽으로 수염 난 노인이 걸어왔다. 노인은 사랑스럽게, 놀랍다는 듯, 다정하게 올가 알렉산드로브나를 바라보았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달리 볼 수 없었다. 테라스에 서 있는 여인은 그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이었고,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선량했으며, 올가 알렉산드로브나도 일찍 머리가 세어 버린 자신처럼 희어져 가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 몇 해 동안이나 당신을 보지 못했소, 올가, — 피멘 세르게예비치가 말하고는 생각을 모으려 입을 다물었다. — 이렇게 내가 당신에게 왔소.
— 얼마나 변했구나, 피멘. 우리가 몇 해 동안이나 보지 못했지! — 올가 알렉산드로브나가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올가 알렉산드로브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고, 그녀는 흙이 묻은 두 손을 어쩔 줄 몰라 비틀었다.
— 나는 당신에게 왔소, 올가, — 영원히.
— 손을 씻고 올게, — 올가 알렉산드로브나가 말했다. 그러고는 피멘 세르게예비치 쪽으로 두 손을 내밀었다. 온 존재로 그에게 뻗어 갔다. 흙 묻은 두 팔이 그의 목을 감았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올가 알렉산드로브나의 손에 묻은 흙에 입 맞추었다. 올가 알렉산드로브나는 손을 거두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삶은 끝날 수도 있고 시작될 수도 있다. 매 시간, 매 순간마다.
— 류바와 당신의 둘째 딸은 어디 있소? 나는 에드가르 이바노비치의 아내를 묻으러 여자들이 갔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 당신에게 가리라 결심했소.
— 손을 씻고 올게, — 올가 알렉산드로브나가 말하고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 나는 설명할 말이 아무것도 없어.
50
정원에서는 울새가 노래했다. 가을비가 천천히, 쓸쓸하게, 잿빛으로 떨어졌다. 나무들은 비 속에서 조용해지고, 입을 다물고, 무거워졌다. 그리고 울새는 아주 쓸쓸하게, 아주 외롭게 노래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빗속의 정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비는 그의 어깨와 그 앞의 땅을 적셨고, 그의 얼굴도 적셨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등을 구부리고 어깨를 움츠린 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의 셔츠 위로 물줄기가 흘렀다. 정원은 어두워졌다. 정원에는 밤이 내려앉았다. 비는 쏟아지고 또 쏟아졌다. 하늘은 나무들과, 땅과 하나로 합쳐졌다.
그때 류보비 피메노브나가 정원으로 왔다. 뒤에서는 볼크가 고개를 떨군 채 터벅터벅 따라왔다. 그녀는 말없이 표도르 이바노비치 곁에 앉았다. 볼크는 그녀의 발치에 누웠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도, 류보비 피메노브나도 오랫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비는 표도르 이바노비치와 마찬가지로 류보비 피메노브나도 흠뻑 적셨다.
— 표도르, — 류보비 피메노브나가 말했다. — 미래를 보려면 뒤를 돌아보아야 해요…… 오카 바닥에서 스키타이의 돌 여인상이 나왔어요. 몇 해 전 나는 그 여인상들의 역사를 연구했지요…… —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 그 돌 여인상은, 몇 해 동안이나 물속에 누워 있었던 걸까요? 나는 지금 언젠가 그 사람의 아내가 되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에게 갔다 왔어요. 그와 작별하러 갔어요. 그는 한 번도 나에게 입 맞춘 적이 없어요. 지금 당신은 내가 왜 당신과 함께 마린킨 탑에 가지 않았는지 이해하게 될 거예요. 기억하지요.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그녀의 머리를 두 손으로 받아 제 무릎 위에 놓고, 빗방울이 류보비의 감긴 눈 위로 흘러내리며 눈물과 섞이는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아니, 눈물은 없었을까?
비 오는 저녁, 야생 포도 덩굴 뒤의 테라스는 언제나 유난히 좋다. 정원에서는 꽃 냄새가 나고, 정원은 어둡고, 정원에는 비가 살랑거린다. 어머니와 딸이 살림을 보러 떠나자, 어머니는 집으로,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무와 상추를 가지러 정원으로 갔다. 그때 테라스에서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비와 정원의 살랑임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 작업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 나는 인류를 향해 다가오는 사막에 대해 말했소, 표도르 이바노비치. 아틀란티스와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와 몽골과 우리의 볼가 건너편 땅을 없애 버린 사막 말이오. 사막은 우리에게, 서시베리아와 유럽 러시아로 밀려오고 있소. 사막은 모스크바 바로 아래까지 다가오고 있으며, 그 전조인 건조풍과 안개 낀 더위는 니즈니노브고로드, 랴잔, 오룔, 키예프에까지 닿소. 사막은 전쟁보다 무섭소. 사막은 열과 습기의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에 생겨나오. 열에 맞설 습기보다 열이 많아지면, 태양은 땅을 태우고 삶을 없애 버리오. 그리고 매년 봄 강들이 얼마나 많은 부식토를 바다로 실어 가는지 생각해 보시오. 땅에서 식물을 먹이는 소금과 화학 성분들을 씻어 내면서 말이오. 강들은 수백 년 동안 땅을 씻어, 모래와 돌만 남기고, 삶을 먹이는 그 필요한 모든 것을 헛되이 바다에 내주었소. —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잠시 말이 없이 저녁에 귀 기울였다. 류보비 피메노브나가 무와 상추 다발을 접시에 담아 들고 정원에서 지나갔다. 그녀의 얼굴은 행복했다. 바람이 나무들 속에서 울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가 다시 말했다. — 나는 우리에게 밀려오는 사막을 멈추는 계획을 연구했소. 이미 지도와 설계를 만들고 검토했소. 카미신 아래에서 모놀리트로 볼가를 파 갈라, 볼가를 볼가 너머 땅으로, 아랄-카스피해의 모래로, 아랄-카스피해 사막의 뢰스 지대로 던져야 하오…… 그 사막에는 새로운 호수와 강들이 생길 것이고, 수천 제곱킬로미터는 물 밑으로 들어가겠지. 그러나 수십만 제곱킬로미터는 사막에서 빼앗겨 되살아날 것이오. 물을 댄 뢰스 지대, 프랑스의 절반만 한 땅은 볼가의 부식토로 가득 차, 목화와 벼 재배지로 넘겨질 것이오. 사막은 비와 호수와 아열대 식물 속에서 옛 메소포타미아로 변할 것이오. 볼가 물의 십분의 일만 바다까지 닿을 것이며, 게다가 볼가는 지금 흘러드는 곳이 아니라 콤소몰원들의 만에서 카스피해로 흘러들 것이오. 나머지 물은 새 강과 운하와 호수로 퍼진 뒤,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사막에 맞서는 증기의 장막을 만들 것이오. 물은 비와 천둥비가 되어 땅으로 돌아가고, 목화와 벼를 위한 부식토를 남길 것이오. 프랑스의 절반만 한 이 땅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땅이 될 것이며, 그 축축한 무더위와 이슬과 안개와 소나기로 사막을 향한 문화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오. 사막으로 던져진 볼가는 사막의 기후와 지리를 다시 만들 것이오. 물길을 바꾼 볼가는 콤소몰원들의 만 근처에서 카스피해로 흘러들 것이고, 카스피해는 제 지형을 바꿀 것이오. 지금 바다가 덮고 있는 땅들이 해저에서 솟아나올 것이오. 특히 지금은 바다에서 인공적으로 빼앗아 쓰고 있는 바쿠 유전 지대가 그렇소. — 노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 나는 이 문제를 여러 해 동안 연구했소. 지도를 만들었고, 노선과 종단면도 검토했소. 사막을 멈춰야 하오. 우리는 사막을 멈출 것이오. 지금은 인류가 그것에서 무엇을 얻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소. 여기 모스크바강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사소한 것이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계획과 이어져 있소. — 노인은 다시 침묵했다. — 바로 이것을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소, 표도르 이바노비치.
노인은 말을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는 담배와 스토크꽃 냄새가 났다. 바람이 지나가자, 그 뒤로 익어 가는 사과들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들은 상을 차렸고, 남자들은 포도 덩굴 아래 난간 곁에 서 있었다. 류보비 피메노브나가 표도르 이바노비치에게 다가와, 남자들의 말을 들으려고 그의 뒤에서 어깨에 팔을 기댔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딸에게 웃어 보이고, 두 사람을 이해한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 카미신 아래에서 볼가를 파 가르는 것, 그곳에서 볼가는 퇴적층 위로 흐르고 왼쪽 기슭은 그 수위보다 낮소. 볼가를 사막으로 던지는 것, 문화의 전초기지를 만드는 것, 사막을 멈추는 것 — 이것이 사회주의의 가능성이오, 표도르 이바노비치. 나는 이미 늙었소, 표도르 이바노비치, 여보게. 이 계획들을 실행에 옮기기에는 힘이 부족하오. 당신에게 부탁이 있소. 내 계획들, 지도들, 설계들, 도면들, 계산들을 당신에게 넘기겠소. 우리 권력이 당신을 도울 것이오. — 노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 그러니 그것들이 삶 속으로 들어가도록 당신이 돌보아 주시오…… 그리고 류바는 당신과 함께 갈 것이오. 거기서도 세기들을 파내기 위해서.
테라스에는 아주 평온했다. 등불 쪽으로 털 많은 나방들이 날아들었다. 남자들은 저녁을 먹으려고 앉았고, 올가 알렉산드로브나는 피멘 세르게예비치 앞에 구운 러스크를 놓았다. 류보비 피메노브나의 발치에는 볼크가 누워 있었다.
51
생선 냄새는 때때로 제비꽃 향기로 변한다.
스쿠드린 자매, 지방의 대대로 내려온 콜롬나 세습 소시민인 두 노파 카피톨리나와 림마의 삶은 서로 다르게 이루어졌다. 콜롬나에서는 종소리가 마지막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삼십 년 전 림마 카르포브나에게는 사랑이라는 온 콜롬나의 수치가 떨어졌고, 그 수치는 평생의 행복으로 남게 되었다. 림마 카르포브나의 사랑에서는 모든 것이 수치가 되었다. 그녀는 가로수길에서 국고 관리 아마추어 배우에게 몸을 내주었고, 마린킨 탑에서 딸들을 잉태했다. 국고 관리 배우의 본처는 림마 카르포브나를 때리러 다녔고, 콜롬나의 법은 본처 편에 서 있었다. 림마에게는 두 딸이 태어났다. 콜롬나의 수치를 보여 주는 산 증거인 그 딸들은 림마 카르포브나의 여권에 “처녀” — “딸 둘 있음”이라고 적어 넣었다. 카피톨리나 카르포브나는 온 콜롬나의 모범이었고, 콜롬나의 명예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만족시킨 사람이었다. 그리고 삼십 년이 지났다. 시간이 가리고, 시간이 걸러 냈다. 림마 카르포브나는 자기 삶에 행복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카피톨리나 카르포브나에게 남은 삶은 오직 하나, 행복도 오직 하나뿐이다. 누이의 삶과 누이의 행복. 강의 여울과 소를 닮은 림마의 명예는 온 콜롬나의 카피톨리나식 명예보다 강한 것으로 드러났고, 수치는 행복으로 변했다. 오카강에서 뗏목을 몰던 나자르 시소예프 노인의 천 년이 그 천 년을 부순 모놀리트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자연은 직선운동을 알지 못한다. 직선운동은 영처럼 추상적이다. 결코 직선적이지 않은 강의 흐름 법칙은 자기 물길을 깎아 내는 법칙을 안다. 폴레티카 교수는 오카의 탈베크에 쥐라기 점토층이 놓인 조건을 연구하다가, 오카 골짜기가 백악기 퇴적이 시작되기 전, 무서운 고대에 이미 생겨나 지금의 윤곽과 사면을 얻었음을 확정했다. 이후 백악기의 모래와 이회암 퇴적물은 쥐라기의 점토를 드러내면서도, 쥐라기 지형의 선을 바꿀 만큼 두껍지 않았고, 백악기의 골짜기와 물길도 예전의 기본 흐름을 따라 나아갔다.
인간, 곧 폴레티카 교수는 새 강을 만들어 오카강의 지형을 부수었다.
부랑자 이반 카르포비치 오조고프는 이 새 강이 생겨난 날, 바로 그 시간에 죽었다.
오룔, 툴라, 칼루가, 모스크바 현에서, 모스크바강과 우그라강, 지즈드라강, 플라바강, 주샤강, 누그라강, 크로마강에서 둑의 물을 풀어놓던 날들이 있었다. 모놀리트 공사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모놀리트는 자연을 떠받치고 있었고, 물을 새로 던져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진 새 강을 만들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자 물들이 모놀리트를 향해 밀려들기 시작했다. 물은 넓게, 위로 기어올라, 모스크바 아래에, 모스크바 근교 운하에 마련된 새 물길을 뚫으려 했다. 물은 보브레네보, 찬키, 파르펜티예보, 호로셰보, 아카티예보 마을이 있던 풀밭을 덮었다. 이 마을들은 새 강에서 물러나 있었다. 물은 자프루디예의 스쿠드린 집을 덮었다. 물은 아카티예보의 나자르 노인 오두막도 덮었다. 새 강의 탄생을 보려고 차를 타고, 걸어서 몰려온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건설의 승리를 축하했다. 전설의 탑, 마리나 므니셰크의 탑은 그 기슭을 물에 씻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날들에 부랑자 이반 오조고프가 죽었다. 그의 머리는 끝내 완전히 부서졌다. 물이 밀려오던 그 시간, 이반 카르포비치는 자기 개 아라프를 데리고 벽돌 공장의 지하실로 갔다. 물은 공장 쪽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모든 부랑자는 지하실에서 떠나갔다. 매 순간 물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물은 공장을 둘러쌌다. 이반 카르포비치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위쪽에 앉아 있었다. 개는 그의 발에 몸을 붙였다. 밤이었다. 물이 몇 사젠 앞까지 왔을 때, 이반 카르포비치는 화덕 쪽으로 내려갔다. 부랑자는 짚 위에 누워 개에게 곁에 누우라고 명하고, 개를 끌어안고, 한숨을 몇 번 쉬고, 눈을 감았다. 개는 고아처럼 이반의 가슴에 머리를 올리고, 밀려오는 물의 살랑임을 들었다. 입구의 틈으로 새벽이 기어들기 시작했다. 느리고 집요한 새벽은 어둠 속에서 식탁판과, 건설 완성을 외치는 신문 한 장을 끌어냈다. 이반은 수염과 목울대를 위로 향한 채, 개의 등에 손을 얹고 누워 있었다. 목울대가 날카롭게 솟았다. 잿빛 새벽은 사람의 얼굴을 아주 창백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새벽은 식탁판 위에 흩어진 마호르카, 해진 신발, 질그릇 세면대, 화덕의 아가리를 어둠에서 끌어냈다. 위쪽에서는 물이 살랑거렸고, 물 냄새와 젖은 너른 공간의 냄새가 났다. 사람도 개도 잠들지 않았다. 지하실은 늪물처럼 팽팽한 초록빛 투명함으로 가득 찼다. 사람과 개는 서로를 노리고 있었다. 갑자기 위쪽에서, 입구의 가로대와 화덕 한 조각 위로, 지하실을 가르며 황금빛 햇살 한 줄기가 떨어졌다. 그러자 개가 견디지 못했다. 개는 위로 뛰쳐나갔다. 둘레를 에워싼 거대한 물의 벌판을 보았다. 개는 다시 아래로 뛰어내려와 부랑자의 가슴에 머리를 붙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그의 어깨를 물고 흔들었다. 부랑자는 움직이지 않았고 눈도 뜨지 않았다. 개가 울부짖었다. 부랑자는 웃었다. 개는 다시 위로 뛰쳐나갔다가, 다시 주인을 흔들었다. 바로 그때, 굉음과 쉭쉭거리는 소리와 함께, 초록빛 물이 지하실로 들이쳤다. 물은 지하실을 두 초 만에, 그 이상도 아니게, 가득 채웠고, 사람과 개를 함께 짓눌렀다.
이렇게 이반 카르포비치 오조고프는 죽었다. 천구백십칠년에서 천구백이십일년까지의 아름다운 시대가 낳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소년 미슈카는 새 강이 생겨나던 그 밤들과 날들에 잠들지 않고 물을 지켜보았다. 새 강의 탄생은 미슈카에게 자연스러운 원초의 창조였다. 오조고프와 사디코프에게 공장 기적 소리가 원초의 창조였던 것처럼. 미슈카는 물이 낡은 급수탑을 덮는 모습을, 마린킨 탑에 다가가고, 다가서고, 그 기슭을 덮고, 그 탑을 자기 안에 담아 넣는 모습을 보려고 뛰어다녔다. 그 탑은 콜롬나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물이었다. 그 곁에는 수백 년 동안 마리나의 영혼이라는 까마귀가 파멸처럼 날아다녔고, 그 안에서 마리나는 죽었으며, 림마는 아이들을 잉태했다. 그리고 오조고프가 죽던 그 시각, 소년 미슈카는 마린킨 탑 곁에 있었다.
얌스코예 폴레,
1929년 2월–8월
주석
- 골짜기나 강바닥에서 가장 낮은 지점을 이은 선. ↩
- 가격 가위. 공산품과 농산물 가격이 벌어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1920년대 소련 경제 용어로, 여기서는 귀리와 직물의 값 차이를 말한다. ↩
- 작업조 하나를 뜻하는 현장 말. ↩
- 솔로비요프는 러시아의 종교철학자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1853~1900)다. 러시아의 메시아적 사명은 그의 사상과 이어지는 관념이다. ↩
- 독일어.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레프 트로츠키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네.” ↩
- 창세기 39장에서 요셉을 유혹한 여인. 원문은 ‘파티파르’(Патифар)다. 일부 판본의 주석은 이를 셈족의 신으로 풀이하지만 이 맥락과 맞지 않는다. ↩
- 나뭇가지를 묶은 다발. 둑이나 강바닥을 보강하는 데 쓴다. ↩
- ‘지혜’의 러시아어 ‘무드로스트’는 그리스어로 소피아다. 믿음(베라)·희망(나데즈다)·사랑(류보프)과 그 어머니 소피야의 이름을 잇는다. ↩
- 프랑스어로 ‘옛’. ↩
- 초판(네드라, 1930)에는 신문 『새 강』이 실려 있었다. 복원본에는 이 문장만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