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2–1918.11

브레스트 강화와 독일의 동방 점령

혁명을 살린 강화는 국경 지대에 무엇을 남겼는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는 군대가 사라진 소비에트 러시아가 독일과 맺은 강요된 평화였다. 1917년 12월 시작된 협상에서 혁명전쟁, 「전쟁도 강화도 아니다」, 즉시 강화의 세 노선이 당을 갈랐고, 1918년 2월 독일의 공세 뒤 레닌은 사임을 내걸고 3월 3일의 조약 수용을 관철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발트·핀란드에 대한 권한과 인구의 3분의 1을 내주었고,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헤트만 정권을 세우고 핀란드 내전에 파병하며 발트에 자국 우산 아래의 공국들을 구상했다. 11월 독일의 패전으로 조약은 폐기되었지만, 정전협정 12조로 발트에 남은 독일군과 붉은 군대, 각국 민족정부, 백군이 마주한 공백은 이듬해 국경 지대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평화 법령에서 휴전까지: 왜 볼셰비키는 협상장에 앉아야 했는가

10월 혁명 다음 날인 1917년 11월 8일(구력 10월 26일),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레닌이 기초한 평화 법령을 채택했다. 모든 교전국 정부와 인민에게 「병합도 배상도 없는 즉각적 민주적 강화」를 제안하고, 비밀 조약을 폐기하며, 3개월 휴전을 요구하는 문서였다. 볼셰비키는 이 호소가 유럽 노동자의 반응을 부를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연합국 정부들은 답하지 않았다. 러시아 총사령관 두호닌이 독일 측에 휴전을 제안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인민위원회는 그를 해임하고 볼셰비키 소위 니콜라이 크릴렌코를 총사령관에 앉혔다. 12월 3일 모길료프 사령부에 도착한 크릴렌코의 병사들은 두호닌을 역 승강장에서 살해했다. 구 제국군의 지휘 체계가 무너지는 방식을 보여 준 장면이었다.

독일이 협상에 응한 것은 혁명에 대한 호의가 아니라 계산이었다. 동부전선의 병력을 서부로 돌려 미군이 대거 도착하기 전에 결판을 내려는 것이 참모본부의 계획이었고, 동부의 곡물과 원료는 봉쇄에 시달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절박했다. 12월 15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독일 동부군 사령부에서 휴전이 체결되었고, 22일부터 강화 협상이 열렸다. 소비에트 대표단은 아돌프 이오페가 이끌었고 카메네프, 소콜니코프, 여성 사회혁명당원 비첸코가 포함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역에서 급히 「인민 대표」로 데려온 농민 스타시코프가 만찬에서 독일 귀족들에게 포도주 종류를 물었다는 일화는 두 세계가 마주한 협상장의 풍경을 요약한다. 상대는 독일 외무장관 퀼만,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체르닌, 동부군 참모장 막스 호프만이었다.

협상장의 힘은 군대의 상태에서 나왔다. 전선의 병사들은 이미 독일군과 어울려 술과 담배를 나누고 있었고, 토지 법령을 들은 농민 병사들은 마을의 토지 분배에 늦지 않으려 무기를 버리고 열차에 올랐다. 소비에트 정부는 전선을 다시 세울 수 없었다. 이오페가 병합 없는 강화의 6개 원칙을 내놓자 체르닌은 12월 25일 이를 「원칙적으로」 받아들이되 연합국도 같은 원칙에 동의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열흘의 유예 뒤 연합국이 침묵하자 호프만은 27일 진짜 조건을 꺼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쿠를란트는 이미 독일 점령 아래 세워진 기구를 통해 「자결」을 행사했으므로 러시아에서 분리된다는 것이었다. 점령군이 인정한 현지 대표기구의 선언과 주민의 자유로운 선택이 같은 것인지가 이 협상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전쟁도 강화도 아니다」: 당 안의 세 시간표

1918년 1월 9일 트로츠키가 대표단장으로 브레스트에 도착했다. 그의 전술은 협상을 최대한 끌면서 매일의 발언을 유럽 노동자를 향한 선전 무대로 삼는 것이었고, 그동안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1월 중순 빈과 베를린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그러나 1월 18일 호프만은 지도를 펼쳐 브레스트에서 발트해까지 그어진 선을 보여 주었다. 독일이 요구하는 국경이었다.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가 당의 결정을 구했다.

당 안에는 세 개의 시간표가 있었다. 니콜라이 부하린좌파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전쟁을 주장했다. 독일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국제 혁명을 배신하는 일이며, 유격전으로 버티는 동안 유럽의 봉기가 뒤따를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레닌은 1월 20일 「테제」에서 정반대로 말했다. 군대가 없는 나라가 전쟁을 계속하면 소비에트 권력 자체가 사라지며, 독일 혁명은 확실히 오겠지만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유럽 혁명이 오기까지 러시아가 버틸 「숨 돌릴 틈」을 사는 대가라면 가혹한 조건도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트로츠키의 노선은 그 사이에 있었다. 전쟁을 일방적으로 끝내되 병합 조약에 서명하지 않는다는 것, 즉 「전쟁도 강화도 아니다」였다. 그는 독일이 다시 공격하기는 정치적으로 어렵다고 보았고, 혹시 공격하더라도 그때는 세계 노동자 앞에서 강요된 평화임이 분명해진다고 판단했다.

1월 21일 당 활동가 회의에서 부하린 안이 32표, 트로츠키 안이 16표, 레닌 안이 15표를 얻었다. 24일 중앙위원회는 레닌의 반대를 무릅쓰고 트로츠키의 노선을 9대 7로 채택했다. 브레스트로 돌아간 트로츠키는 2월 10일 러시아가 전쟁을 끝내고 군대를 해산하지만 조약에는 서명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협상장을 떠났다. 호프만은 「전례가 없다」고 적었다. 독일 지도부는 며칠의 논쟁 끝에 답을 정했다. 2월 16일 독일은 18일 정오부터 휴전이 끝난다고 통보했다.

파우스트슐라크: 열하루 만에 무너진 전선

2월 18일 독일군은 발트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전 전선에서 진격을 시작했다. 작전명은 「주먹 한 방」을 뜻하는 파우스트슐라크였다. 드빈스크가 첫날 떨어졌고, 독일군은 기관총을 실은 열차로 다음 역까지 달려가 몇 명의 보병으로 도시를 접수했다. 호프만은 일기에 「내가 겪은 가장 희극적인 전쟁」이라고 썼다. 열하루 동안 독일군은 약 250킬로미터를 전진했고, 프스코프가 2월 24일, 나르바가 3월 4일 함락되었다. 저항은 거의 없었다. 후대의 기념 서사는 2월 23일 나르바 부근 전투를 붉은 군대 첫 승리로 삼았지만, 실제로 그날 페트로그라드에서 벌어진 일은 대규모 자원병 모집이었다. 2월 23일이 붉은 군대의 날이 된 것은 이 동원의 기억 때문이며, 전장의 승리와는 무관하다.

공세 첫날 저녁 중앙위원회는 7대 6으로 독일 조건 수용을 결의했고, 정부는 다음 날 새벽 무선으로 이를 통보했다. 독일은 진격을 멈추지 않은 채 2월 23일 더 가혹해진 조건을 48시간 시한으로 내놓았다. 그날 밤 중앙위원회에서 레닌은 최후통첩을 던졌다. 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정부와 중앙위원회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기권했고, 표결은 찬성 7, 반대 4, 기권 4로 끝났다. 부하린, 로모프, 우리츠키, 부브노프는 중앙위원회 직책을 내놓았고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별도의 신문 「코뮤니스트」를 냈다.

서명 대표단은 소콜니코프가 이끌었다. 트로츠키가 거부한 자리였고 이오페도 사양했다. 3월 3일 소콜니코프는 조약 내용을 「토론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서명했다. 무력으로 강요된 평화이므로 정당성을 다투는 일 자체를 거부한다는 의미였다. 3월 6일부터 8일까지 열린 제7차 당대회는 30대 12로 비준을 승인했고, 당명을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으로 바꾸었다. 3월 15일 제4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784대 261로 조약을 비준했다. 연립 정부에 참여하던 좌파 사회혁명당은 반대표를 던진 뒤 인민위원회에서 탈퇴했다. 트로츠키는 외무인민위원을 사임하고 전쟁인민위원이 되었다. 강화의 대가로 태어난 군대의 이야기는 러시아 내전 문서로 이어진다.

조약의 조건: 무엇을 얼마나 잃었는가

3월 3일 조약에서 러시아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쿠를란트, 리보니아, 에스토니아에 대한 모든 권한을 포기했다. 이 지역의 장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주민과 협의하여」 결정한다고 되어 있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즉시 강화하고 우크라이나에서 군대와 적위대를 철수해야 했으며, 핀란드와 올란드 제도에서도 철군해야 했다. 카르스, 아르다한, 바툼은 주민 투표를 거쳐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갔다. 러시아는 상대국 안에서의 선전과 선동을 금지한다는 조항도 받아들였다. 8월 27일 베를린에서 맺은 추가 조약은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를 러시아에서 완전히 분리하고, 60억 마르크의 배상을 명시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9월에 첫 두 차례 금 인도를 실행했다.

숫자로 보면 러시아는 옛 제국 인구의 약 3분의 1인 5천5백만 명, 경작지의 3분의 1, 철도의 3분의 1, 철광석 생산의 73퍼센트, 석탄의 89퍼센트를 잃었다. 다만 이 조약을 오늘날의 국경을 한 번에 확정한 문서로 읽어서는 안 된다. 조약은 독일이 이 땅을 어떻게 지배할지, 그리고 발트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이 실제로 얼마나 영토를 확보할지에 대해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독일의 우산 아래 놓인 「자결」과 독일이 패망한 뒤의 자결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뒤이은 국경들은 이 조약이 아니라 1919년과 1920년의 전쟁과 조약으로 그려졌다.

두 개의 브레스트: 우크라이나의 별도 강화와 「빵의 평화」

브레스트에서는 두 개의 조약이 맺어졌다. 우크라이나 중앙라다는 12월 말 독자 대표단을 보냈고, 중앙동맹국은 1918년 1월 12일 이 대표단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정식 대표로 인정했다. 러시아 대표단의 지위를 흔드는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곡물을 확보하려는 이중의 계산이었다. 2월 9일 새벽 우크라이나와 중앙동맹국은 조약에 서명했다. 우크라이나는 그해 여름까지 100만 톤의 곡물을 비롯한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기로 했고, 그 대가로 홀름 지역을 얻었으며 오스트리아는 갈리치아 우크라이나인의 별도 자치령을 비밀리에 약속했다. 독일에서는 이 조약을 「빵의 평화」라고 불렀다.

조약이 서명된 바로 그날 밤 무라비요프의 소비에트군이 키예프에 들어갔다. 라다는 지토미르로 후퇴한 채 독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2월 18일부터 우크라이나로 진입해 3월 1일 키예프를 되찾았다. 점령군은 약 45만 명에 이르렀다. 독일군 사령관 아이히호른은 4월 6일 농민에게 지주의 땅에 파종할 것을 명령하고, 4월 25일 독일 군법회의를 우크라이나에 적용했다. 라다의 토지 사회화 법과 점령군의 곡물 요구는 양립할 수 없었다. 4월 28일 독일 병사들이 라다 회의장에 들어와 의원들을 검색했고, 다음 날 4월 29일 지주연합 대회에서 파울로 스코로파츠키가 헤트만으로 선포되었다. 독일군의 뒷받침 속에서 지주 소유와 행정 질서를 복구하려는 정권은 곧 농민 봉기와 부딪쳤고, 7월 30일 아이히호른은 키예프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 돈스코이의 폭탄에 죽었다. 약속된 곡물은 작은 일부만 실려 갔다. 라다에서 헤트만, 디렉토리아로 이어지는 우크라이나의 전개는 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에서 다룬다.

핀란드: 승인된 독립, 내전, 그리고 독일군의 상륙

핀란드 의회는 1917년 12월 6일 독립을 선언했고, 소비에트 정부는 12월 31일 이를 승인했다. 승인은 순조로웠지만 나라 안은 그렇지 않았다. 식량 위기와 실업, 무장한 적위대와 백위대의 대치가 겨울 내내 이어졌다. 1918년 1월 27일과 28일 밤 헬싱키의 적위대가 정부 건물을 점령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쿨레르보 만네르를 수반으로 하고 오토 쿠시넨이 참여한 핀란드 인민대표단이 남부의 공업 도시들을 장악했고,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의 원로원은 바사로 옮겨 카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을 백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독일에서 훈련받은 핀란드 예거 부대가 2월 말 바사에 상륙해 백군의 뼈대가 되었다.

스빈후부드 정부는 독일에 군사 개입을 요청했다.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스스로 이길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3월 7일 독일과 핀란드는 조약을 맺었다. 3월 5일 독일군이 올란드 제도에 상륙했고, 뤼디거 폰 데어 골츠가 지휘하는 약 1만 명의 발트 사단은 4월 3일 항코에 상륙해 4월 13일 헬싱키를 점령했다. 그 사이 4월 6일 백군은 내전 최대의 전투 끝에 탐페레를 함락시켰고, 4월 29일 비푸리가 떨어졌다. 비푸리에서 백군은 러시아계 주민 수백 명을 학살했다. 5월 16일 만네르헤임은 헬싱키에서 승리 행진을 벌였다.

전투로 죽은 사람보다 전투 뒤에 죽은 사람이 많았다. 적색 테러로 약 1,500명, 백색 테러로 약 7,000명 이상이 처형되었고, 8만 명 안팎이 수용소에 갇혔다. 그 가운데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여름 안에 죽었다. 인구 300만 나라에서 3만 6천 명 넘게 죽은 이 전쟁은 독일과 러시아의 대리전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브레스트 조약에 따라 잔류 병력을 대부분 철수시켰고, 발트함대는 4월 헬싱키에서 얼음을 헤치고 크론시타트로 빠져나갔다. 국내의 계급 갈등과 국가권력의 붕괴가 외국의 지원과 결합한 전쟁이었다. 승리한 백군 진영은 독일에 기대었다. 10월 헤센의 프리드리히 카를 공이 핀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독일의 패전으로 그는 12월 왕위를 포기했다. 독일의 우위에 반대해 5월 사령관직을 내놓았던 만네르헤임은 12월 섭정이 되어 나라를 서방 쪽으로 돌렸다. 이후 핀란드 의용군의 에스토니아 참전과 1920년 타르투 강화는 발트 독립전쟁에서 이어진다.

오버 오스트와 발트: 누구의 자결인가

독일은 1915년부터 리투아니아, 쿠를란트, 비아위스토크-그로드노를 「오버 오스트」라는 군정 지역으로 묶어 통치했다. 주민을 등록하고 이동을 통제하며 목재와 식량을 징발하는 한편, 이 땅을 독일 문화가 계몽할 「질서 없는 공간」으로 그리는 선전이 뒤따랐다. 1918년 봄 파우스트슐라크로 독일의 점령은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 전체로 넓어졌다. 이 지역에서 「자결」은 독일의 관리 아래 진행되었다.

리투아니아 평의회(타리바)는 1917년 12월 11일 독일과의 「영원한 동맹」을 전제로 독립을 선언했고, 1918년 2월 16일에는 조건 없는 독립을 다시 선언했다. 독일은 3월 23일 12월 선언을 기준으로만 승인했다. 7월 평의회는 뷔르템베르크의 우라흐 공을 민다우가스 2세로 국왕에 추대했다. 쿠를란트 지방의회는 3월 8일 독일 황제에게 공국의 왕관을 청했고, 4월 12일 리가에서 발트 독일계 귀족이 주도한 지방의회 연합은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 쿠를란트를 합친 「발트 연합공국」을 프로이센과 인적 동맹으로 묶기로 결의했다. 빌헬름 2세는 9월 22일 이를 승인했고, 11월 5일 섭정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모든 계획은 독일의 우산 아래 각기 다른 국가를 세우려는 시도였다.

같은 땅에서 다른 선언도 나왔다. 에스토니아의 구원위원회는 적군이 물러나고 독일군이 들어오기 전 하루의 틈에 1918년 2월 24일 탈린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다음 날 독일군이 도시에 들어와 이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지도자들을 억류했다. 라트비아 임시민족평의회는 독립을 요구했지만 독일 점령 아래에서는 행동할 수 없었다. 러시아 안에서는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이 소비에트 권력의 가장 믿을 만한 부대가 되어 있었다. 발트 독일계 지주층, 각국 민족운동, 볼셰비키 소총병은 저마다 다른 발트를 그렸고, 어느 것이 실현될지는 독일이 전쟁에서 이기느냐에 달려 있었다.

미르바흐 암살과 「숨 돌릴 틈」의 대가

조약 뒤에도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의 관계는 평화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에서 돈 강까지 뻗어 크라스노프의 돈 카자크 정부에 무기를 대었고, 크림과 흑해 연안을 점령했으며, 캅카스에서는 그루지야와 조약을 맺어 보호국으로 삼았다. 오스만군은 바쿠로 향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서쪽에서 독일에, 북쪽의 무르만스크와 동쪽에서는 연합국 개입군에 마주했다. 레닌은 필요하면 연합국에 맞서 독일의 도움을 받는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좌파 사회혁명당은 이 「강화」를 견딜 수 없었다. 7월 6일 체카 요원 야코프 블륨킨과 안드레예프가 모스크바의 독일 대사관에서 미르바흐 대사를 사살했다. 독일과의 전쟁을 다시 불러오려는 시도였다. 좌파 사회혁명당의 봉기는 하루 만에 진압되었고, 레닌은 독일 대사관을 찾아 조의를 표했다. 독일은 모스크바에 자국 병력 1개 대대를 주둔시키라고 요구했다가 철회했다. 8월 27일의 추가 조약과 60억 마르크 배상, 9월의 금 인도는 이 긴장 속에서 소비에트가 지불한 대가였다. 이 사건들은 독일과 소비에트 권력이 서로를 이용하면서도 결코 동맹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11월: 조약의 폐기와 12조가 남긴 독일군

1918년 가을 독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11월 5일 독일 정부는 소비에트 대표부가 혁명 선전물을 들여왔다는 이유로 이오페와 대사관원을 추방했다. 11월 9일 베를린에서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물러났고, 11월 11일 서부전선 정전협정이 서명되었다. 협정 15조는 독일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부쿠레슈티 조약을 포기한다고 정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11월 13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결의로 조약과 추가 조약을 무효로 선언했다. 레닌이 말한 「숨 돌릴 틈」은 여덟 달 만에 끝났고, 그것을 끝낸 것은 소비에트의 무력이 아니라 독일 자신의 패전이었다.

그러나 정전협정 12조는 독일군이 옛 러시아 제국 영토에서 「연합국이 그 지역의 내부 상황을 고려하여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때」 철수하도록 규정했다. 연합국은 볼셰비키가 서쪽으로 밀려오는 것을 막을 방벽으로 독일군을 발트에 남겨 두려 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병사평의회를 만든 독일군이 귀국을 서둘렀고, 헤트만은 11월 14일 장래의 비볼셰비키 러시아와의 연방을 선언한 뒤 12월 14일 독일군과 함께 키예프를 떠났다. 발트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독일군이 빠져나가는 자리로 붉은 군대가 들어왔고, 11월 29일 나르바에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 12월 17일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12월 16일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정부가 선포되었다. 남은 독일군과 새로 모집된 자유군단은 연합국의 승인 아래 라트비아에 머물면서 이듬해 발트 전쟁의 세 번째 진영이 되었다.

브레스트가 남긴 것은 안정된 평화가 아니라 짧은 생존의 시간과 새로운 전쟁의 공간이었다. 독일의 후퇴 뒤에는 적군, 각국 민족정부, 러시아 백군, 독일계 무장 세력이 서로 다른 질서를 세우려 했다. 조약의 폐기가 옛 제국의 자동 복구를 뜻하지도 않았다. 이 충돌의 전체 흐름은 러시아 내전에서, 북서부의 전쟁과 강화는 발트 독립전쟁에서 이어진다.

평가: 브레스트는 배신이었는가, 현실주의였는가

브레스트 조약은 서명한 순간부터 논쟁이었다. 소비에트 공식 서술은 이를 레닌의 통찰이 낳은 걸작으로 그렸다. 유럽 혁명이 올 때까지 소비에트 권력을 살려 두었고, 독일 자신이 패망하면서 조약이 저절로 무효가 되었으니 레닌의 예측이 옳았다는 것이다. 이 서술은 레닌이 실제로 그 결과를 예측했다기보다 어떤 조건이든 권력 유지가 우선이라고 판단했다는 점을 흐린다. 부하린과 좌파 공산주의자들의 반대는 이후 「소아병」으로 정리되었고, 트로츠키의 중간 노선은 1920년대 권력투쟁에서 그를 공격하는 소재가 되었다.

서방의 고전적 연구는 존 휠러-베넷의 『잊힌 평화』(1938)다. 그는 브레스트를 베르사유의 전주곡으로 읽었다. 독일이 동방에서 강요한 평화가 서방에서 독일이 받은 평화보다 가혹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강요된 평화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교훈을 끌어냈다. 프리츠 피셔의 『세계 권력을 향한 손길』(1961)은 브레스트를 독일 지배층이 전쟁 내내 품었던 동방 제국 구상의 실현으로 보았다. 베야스 리울레비치우스의 『동부전선의 전쟁 땅』(2000)은 오버 오스트의 통치 실험이 동방을 「정복하고 정화할 공간」으로 보는 사고를 낳았고, 그것이 다음 세대의 독일 동방 정책에 흔적을 남겼다고 주장했다.

발트와 우크라이나, 핀란드의 역사 서술에서 브레스트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독립의 계기이자 동시에 독일 점령의 시작이었다.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은 「빵의 평화」가 라다에 국가 승인을 주었지만 그 대가로 점령군과 지주 정권을 불러들였음을 지적한다. 핀란드에서는 내전의 테러 규모와 수용소 사망자를 둘러싼 연구가 1990년대 이후 국가 차원의 사망자 조사로 이어졌다. 어느 서술에서도 브레스트는 끝이 아니었다. 독일이 만든 질서가 무너진 뒤 누가 그 땅을 차지할지가 1919년의 전쟁을 결정했다.

결과

조약은 소비에트 권력에 여덟 달의 시간을 주었고, 그 시간에 붉은 군대가 만들어졌다. 대가로 좌파 사회혁명당이 연정에서 떠나 7월 미르바흐 암살과 봉기로 치달았고, 8월의 추가 조약으로 60억 마르크 배상과 금 인도가 이어졌다. 독일이 세운 질서는 자체 무게로 무너졌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헤트만이 독일군과 함께 떠났고 핀란드에서는 친독 군주제 계획이 사라졌으며, 발트에서는 독일군의 잔류가 1919년 자유군단 문제의 뿌리가 되었다. 뒤이은 국경은 이 조약이 아니라 1919년과 1920년의 전쟁과 조약들로 그려졌다.

연표와 지도

탐페레 헬싱키 페트로그라드 항코 탈린 리가 빌뉴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키예프 1 페트로그라드 3 페트로그라드 6 페트로그라드 8 항코 12 리가 5 드빈스크 10 모스크바 13 모스크바 11 베를린 2 브레스트-리토프스크 4 브레스트-리토프스크 7 브레스트-리토프스크 9 키예프
  1. 11917.11.08
    평화 법령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레닌이 기초한 평화 법령을 채택해 모든 교전국에 병합도 배상도 없는 즉각 강화를 제안했다. 연합국 정부는 답하지 않았고, 휴전 제안을 거부한 총사령관 두호닌은 해임된 뒤 12월 초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2. 21917.12.15
    브레스트 휴전

    독일 동부군 사령부가 있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와 중앙동맹국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독일은 동부의 병력을 서부로 돌리고 곡물을 확보하려 했고, 소비에트 정부는 전선을 다시 세울 군대가 없었다.

  3. 1917.12.22
    강화 협상 개시

    이오페가 이끄는 소비에트 대표단이 퀼만, 체르닌, 호프만과 협상을 시작했다. 병합 없는 강화의 6개 원칙에 독일은 조건부로 동의하는 듯했으나, 27일 폴란드·리투아니아·쿠를란트가 이미 「자결」을 행사했다며 분리를 요구했다.

  4. 31918.01.21–24
    당내 표결: 세 노선

    당 활동가 회의에서 부하린의 혁명전쟁 안이 32표, 트로츠키의 「전쟁도 강화도 아니다」가 16표, 레닌의 즉시 강화가 15표를 얻었다. 24일 중앙위원회는 트로츠키의 노선을 9대 7로 채택했다.

  5. 41918.02.09
    우크라이나의 별도 강화, 「빵의 평화」

    중앙라다 대표단이 중앙동맹국과 조약을 맺어 곡물 100만 톤 등 식량 공급을 약속하고 홀름 지역을 얻었다. 같은 날 밤 무라비요프의 소비에트군이 키예프에 들어왔고, 라다는 독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6. 1918.02.10
    「전쟁도 강화도 아니다」

    트로츠키가 러시아는 전쟁을 끝내고 군대를 해산하지만 조약에는 서명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협상장을 떠났다. 독일은 16일 휴전 종료를 통보했다.

  7. 51918.02.18
    파우스트슐라크 공세

    독일군이 발트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전 전선에서 진격했다. 첫날 드빈스크가, 24일 프스코프가 떨어졌고 열하루 동안 약 250킬로미터를 전진했다. 호프만은 「가장 희극적인 전쟁」이라고 적었다. 그날 밤 중앙위원회는 7대 6으로 독일 조건 수용을 결의했다.

  8. 61918.02.23
    레닌의 최후통첩

    더 가혹해진 독일의 48시간 시한 조건 앞에서 레닌은 수용하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선언했다. 트로츠키가 기권해 찬성 7, 반대 4, 기권 4로 수용이 결정되었다. 부하린 등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중앙위원회 직책을 내놓았다.

  9. 71918.03.03
    조약 서명

    소콜니코프가 이끄는 대표단이 조약 내용을 「토론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서명했다. 러시아는 폴란드·발트·핀란드·우크라이나에 대한 권한을 포기하고 카르스·아르다한·바툼을 오스만에 넘겼다. 3월 15일 제4차 소비에트 대회가 784대 261로 비준했고 좌파 사회혁명당은 정부를 떠났다.

  10. 81918.04.03
    독일군의 핀란드 상륙

    폰 데어 골츠의 발트 사단 약 1만 명이 스빈후부드 정부의 요청으로 항코에 상륙해 13일 헬싱키를 점령했다. 6일 백군은 탐페레를 함락시켰고 5월 중순 내전은 백군의 승리로 끝났다. 수용소에서 1만 명 넘는 적군 포로가 죽었다.

  11. 91918.04.29
    키예프의 헤트만 쿠데타

    독일 병사들이 중앙라다 회의장을 수색한 다음 날, 지주연합 대회가 파울로 스코로파츠키를 헤트만으로 추대했다. 독일군의 보호 아래 지주 소유를 복구하려는 정권은 농민 봉기와 부딪쳤고, 7월 30일 독일 사령관 아이히호른이 암살되었다.

  12. 101918.07.06
    미르바흐 암살과 좌파 에스에르 봉기

    체카 요원 블륨킨과 안드레예프가 모스크바의 독일 대사 미르바흐를 사살했다. 독일과의 전쟁을 다시 불러오려던 좌파 사회혁명당의 봉기는 하루 만에 진압되었고, 레닌은 독일 대사관을 찾아 조의를 표했다.

  13. 111918.08.27
    베를린 추가 조약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를 러시아에서 완전히 분리하고 60억 마르크의 배상을 정한 추가 조약이 서명되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9월에 두 차례 금을 인도했다.

  14. 121918.09.22
    발트 연합공국 승인

    빌헬름 2세가 발트 독일계 지방의회가 요청한 「발트 연합공국」을 승인했다. 리투아니아 평의회는 7월 우라흐 공을 국왕으로 추대했고, 핀란드는 10월 헤센의 공을 왕으로 선출했다. 독일 우산 아래의 이 국가 구상들은 두 달 뒤 모두 무너졌다.

  15. 131918.11.11–13
    정전과 조약 폐기

    서부전선 정전협정 15조가 독일에 브레스트 조약 포기를 요구했고, 13일 소비에트 러시아가 조약을 무효로 선언했다. 그러나 12조는 독일군이 연합국이 적절하다고 판단할 때까지 옛 러시아 영토에 남도록 했다. 붉은 군대는 서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관련 인물 16명

지도부10

즉시 강화 지지자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

협상 초기부터 즉시 강화를 주장했고, 1918년 2월 23일 중앙위원회에서 조건 수용이 아니면 사임하겠다는 최후통첩으로 표결을 뒤집었다.

강화 협상 대표레프 트로츠키1879–1940

1918년 1월 대표단장으로 협상을 끌며 「전쟁도 강화도 아니다」 노선을 관철했고, 2월 10일 서명 거부 선언 뒤 독일 공세가 시작되자 기권으로 레닌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독일의 지원을 받은 헤트만파울로 스코로파츠키1873–1945

1918년 4월 29일 독일군의 뒷받침 아래 지주연합 대회에서 헤트만으로 추대되었고, 11월 독일 패전 뒤 러시아와의 연방을 선언했다가 12월 독일군과 함께 키예프를 떠났다.

핀란드 백군 사령관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1867–1951

1918년 1월 핀란드 백군 사령관이 되어 4월 탐페레를 함락시켰고, 독일 개입 요청에 반대했으며 5월 독일의 우위에 항의해 사령관직을 내놓았다가 12월 섭정이 되었다.

핀란드 적색정부 수반쿨레르보 만네르1880–1939

1918년 1월 헬싱키에서 수립된 핀란드 인민대표단(적색정부)의 수반으로 내전을 이끌었고 패배 뒤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했다.

핀란드 적색정부 지도자오토 빌레 쿠시넨1881–1964

핀란드 적색정부의 교육 담당으로 내전에 참여했고, 패배 뒤 모스크바에서 핀란드 공산당 창설을 이끌었다.

핀란드 파병 발트 사단장뤼디거 폰 데어 골츠1865–1946

1918년 4월 3일 발트 사단 약 1만 명을 이끌고 항코에 상륙해 13일 헬싱키를 점령했고, 연말까지 핀란드에 남아 독일의 영향력을 굳히려 했다.

독일 지원을 요청한 핀란드 원로원 수반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1861–1944

백색정부의 수반으로 만네르헤임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에 군사 개입을 요청했고, 1918년 3월 7일 독일과 조약을 맺었다.

중앙라다의 우크라이나 지도자볼로디미르 빈니첸코1880–1951

중앙라다 총서기국 의장으로 우크라이나의 별도 강화 노선을 승인했고, 소비에트군의 키예프 점령 직후인 1918년 1월 말 사임했다.

중앙라다의 우크라이나 지도자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1866–1934

중앙라다 의장으로 브레스트의 별도 강화와 독일군의 진입을 받아들였고, 1918년 4월 29일 헤트만 쿠데타로 권력을 잃었다.

관련 용어

출처: John W. Wheeler-Bennett, Brest-Litovsk: The Forgotten Peace, March 1918 (Macmillan, 1938)Vejas Gabriel Liulevicius, War Land on the Eastern Front: Culture, National Identity and German Occupation in World War I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Fritz Fischer, Germany's Aims in the First World War (Norton, 1967; German original 1961)Anthony Upton, The Finnish Revolution 1917–1918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0)Richard Pipes, The Russian Revolution (Knopf, 1990), ch. 13 「Brest-Litovsk」자료 6자료 7자료 8자료 9자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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