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1949

불가리아: 조국전선에서 코스토프 재판까지

1944년 9월 조국전선 정권에서 1949년 12월 코스토프 재판까지, 불가리아의 권력은 어떤 순서로 공산당에 집중되었고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은 그 사이 무엇을 뜻했는가?

1944년 9월 5일 소련이 불가리아에 선전포고하고 8일 국경을 넘자, 9일 새벽 공산당·농민동맹·즈베노·사회민주당의 조국전선이 소피아에서 정권을 잡았다. 인민재판소는 1945년 2월 1일 섭정과 장관들을 처형했고, 불가리아군은 붉은군대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에서 싸웠다. 농민동맹은 1945년 페트코프의 야당과 조국전선 잔류파로 갈라졌고, 1946년 국민투표로 왕정이 폐지된 뒤 10월 대국민의회 선거에서 공산당이 과반, 야당이 28%를 얻었다. 1947년 페트코프가 국회에서 체포되어 9월 처형되었고, 12월 디미트로프 헌법과 국유화법이 통과되었다. 1948년 사회민주당이 공산당에 합쳐졌으며, 디미트로프는 12월 제5차 당대회에서 인민민주주의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로 규정했다. 1949년 디미트로프가 죽고 부총리 코스토프가 재판을 받아 처형되었다.

1944년 9월: 선전포고와 9일의 정권 교체

1944년 여름 불가리아는 독일의 동맹국이었으나 소련과는 교전 상태가 아니었다. 1943년 8월 국왕 보리스 3세가 죽은 뒤 어린 시메온 2세를 대신해 섭정 세 명이 통치했고, 붉은군대가 8월 말 루마니아를 통과해 다뉴브강에 이르자 정부는 서둘러 움직였다. 8월 26일 이반 바그랴노프 정부는 중립을 선언했고, 9월 2일 들어선 콘스탄틴 무라비에프 정부는 독일과의 관계를 끊겠다고 밝혔다. 9월 5일 소련은 불가리아에 선전포고했다. 명분은 불가리아가 독일군의 철수 통로가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라비에프 정부는 9월 8일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나, 같은 날 표도르 톨부힌의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이 국경을 넘었고 불가리아군은 저항하지 않았다.

9월 8일 밤과 9일 새벽 사이에 소피아에서 조국전선이 정권을 잡았다. 조국전선은 1942년 공산당이 제안해 1943년 결성된 연합으로, 공산당(당시 명칭은 불가리아노동자당), 농민동맹의 플라드네파, 즈베노, 사회민주당이 참여했다. 군 안에서는 즈베노와 연결된 다미안 벨체프 등 장교들이 국방부와 참모본부를 장악했고, 지방에서는 파르티잔과 조국전선 위원회가 관청을 접수했다. 총리는 즈베노의 키몬 게오르기에프였고, 내무장관 안톤 유고프와 법무장관 민초 네이체프를 비롯한 네 자리가 공산당에 갔다. 농민동맹은 니콜라 페트코프를 무임소장관으로 넣어 네 자리, 즈베노 네 자리, 사회민주당 두 자리였다. 9월 9일 아침 게오르기에프는 라디오로 새 정부의 강령을 읽었고, 그날 소피아에서는 총격이 거의 없었다. 무라비에프 정부의 각료들은 체포되었다. 부처의 배분보다 오래 남은 것은 경찰의 재편이었다. 유고프의 내무부 아래 인민민병대가 옛 경찰을 대신했고, 그 간부는 공산당원과 파르티잔 출신이었다.

10월 28일 모스크바에서 불가리아는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맺었다. 협정은 불가리아군의 대독 참전,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점령지에서의 철수, 배상, 그리고 연합국 통제위원회의 설치를 정했다. 위원장은 톨부힌 원수였고, 실무는 부위원장 세르게이 비류조프 상장이 맡아 1947년까지 소피아에 머물렀다. 미국과 영국 대표는 위원회에 참석했으나 결정은 소련 측이 내렸다. 상위 문서가 정리한 대로 이 구조는 헝가리·루마니아와 같았고, 이탈리아의 선례를 뒤집어 적용한 것이었다.

인민재판소와 전선의 군대

정권 교체 뒤 처음 넉 달 동안 두 가지 일이 함께 진행되었다. 하나는 전 정권에 대한 재판이고, 다른 하나는 새 군대의 참전이었다.

1944년 9월 30일 정부는 인민재판소 설치령을 발표했다. 재판소는 헌법 밖에 세워진 특별 법정으로, 1941년 이후의 각료·의원·장교·언론인을 「국민을 전쟁에 끌어들인 죄」로 재판했다. 12월 20일 소피아에서 첫 재판이 열렸고, 1945년 2월 1일 판결이 내려졌다. 섭정 세 명(키릴 공, 보그단 필로프, 니콜라 미호프), 왕실 고문 여덟 명, 장관 스물두 명, 제25대 국회의원 예순일곱 명, 장성과 고위 장교 마흔일곱 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날 밤 소피아 중앙교도소에서 처형되었다. 재판소는 1945년 4월까지 전국에서 135건의 재판으로 11,122명을 기소해 9,155명에게 판결을 내렸고, 그 가운데 사형 선고는 2,730건이었다. 실제 집행 수는 확정되어 있지 않다. 재판소와 별도로 1944년 9~10월 지방에서 재판 없이 살해된 사람의 수는 연구자에 따라 수천 명에서 3만 명까지 갈리며, 공식 문서로 확정된 수는 없다. 무라비에프 전 총리는 종신형을 받았다. 당시 정부는 재판을 파시즘 청산으로 설명했고, 야당과 서방 공사관은 규모와 절차를 문제 삼았다. 1996년 불가리아 대법원은 주요 판결을 파기했고, 2월 1일은 오늘날 추모일이다.

같은 기간 불가리아군은 붉은군대의 지휘 아래 서쪽으로 나갔다. 1944년 10월 제1·2·4군 약 45만 명이 유고슬라비아 남부로 진격해 니시·스코페·코소보 방면에서 독일군 E집단군의 철수를 막았고, 1945년 3월 블라디미르 스토이체프의 제1군은 헝가리 드라바강 전선에서 독일군의 봄 공세를 받아냈다. 5월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까지 진격한 이 군대의 손실은 두 단계를 합쳐 약 3만 2천 명이었다. 참전은 휴전협정의 의무였고, 동시에 조국전선이 파리 평화조약 협상에서 내세운 근거였다.

농민동맹의 분열과 미뤄진 선거

조국전선의 첫 균열은 가장 큰 참여 정당인 농민동맹 안에서 났다. 농민동맹은 전간기 불가리아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이었고, 1944년 9월 시점의 지도자는 게오르기 M. 디미트로프(「게메토」라 불려 공산당의 디미트로프와 구별된다)였다. 그는 1945년 1월 공산당과 내무부의 압력 속에 서기장직에서 물러났고, 5월 미국 공사관에 피신했다가 9월 국외로 나갔다. 후임 니콜라 페트코프는 1923년 쿠데타로 살해된 알렉산다르 스탐볼리스키 정부의 각료였던 페트코 페트코프의 동생이자 조국전선 창설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1945년 5월 농민동맹 대회에서 페트코프는 조국전선 안에서 농민동맹의 독자적 조직과 지방 위원회의 동등한 참여를 요구했고, 알렉산다르 오보프가 이끄는 잔류파와 갈라섰다. 여름에 페트코프와 사회민주당의 그리고르 체시메지에프 등 야당 각료들이 사임했다. 정부는 8월 26일 총선을 조국전선 단일 명부로 치르려 했다. 미국과 영국은 선거가 얄타의 「해방된 유럽 선언」에 어긋난다고 항의했고, 소련은 처음에는 예정대로 치르자고 했으나 8월 24일 연기에 동의했다. 선거는 11월 18일에 치러졌다. 페트코프의 농민동맹과 코스타 룰체프의 사회민주당은 참여를 거부했고, 공식 결과는 조국전선 명부 약 88%였다. 12월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의에서 미·영·소는 불가리아 정부에 야당 인사 두 명을 넣도록 권고하기로 했으나, 정부와 야당은 조건에서 합의하지 못했고 미국과 영국의 승인은 미뤄졌다.

1946년 1월 미국의 요구로 정부와 야당이 다시 협상했으나, 페트코프는 내무부와 법무부의 인사 교체를 조건으로 내걸었고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 시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아직 모스크바에 있었다. 코민테른 서기장을 지낸 그는 1945년 11월 소피아로 돌아와 공산당 지도부와 함께 국회의원이 되었고, 1946년 11월까지는 정부 밖에서 당을 이끌었다.

디미트로프의 귀국, 국민투표, 대국민의회 선거

1946년의 정치는 세 번의 투표로 진행되었다. 3월 국회는 토지 소유 상한을 20헥타르(도브루자 30헥타르)로 정한 토지개혁법과 노동협동농장(TKZS) 법을 통과시켰다. 9월 8일 왕정 폐지 국민투표에서 공식 결과는 찬성 95.6%였고, 9월 15일 국회는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시메온 2세와 왕실은 이튿날 출국했다. 야당도 왕정 폐지에는 반대하지 않았으므로 국민투표는 조국전선과 야당의 대결이 아니었다.

10월 27일 헌법 제정을 위한 제6차 대국민의회 선거는 달랐다. 선거는 정당별 명부로 치러졌고, 야당은 참여했다. 공식 결과는 공산당 53.9%(465석 중 278석), 조국전선 농민동맹 13.4%(68석), 사회민주당 조국전선파 1.9%(9석), 즈베노 1.7%(8석)였고, 페트코프의 농민동맹과 룰체프의 사회민주당이 연합한 야당 명부는 28.4%로 101석을 얻었다. 야당은 100만 표를 넘겼다. 선거 기간 미국 공사관은 야당 운동원에 대한 폭행과 체포를 보고했고, 정부는 야당이 「반동」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11월 22일 디미트로프가 총리가 되었고, 콜라로프는 임시 국가원수를 계속 맡았다. 대국민의회가 열리자 페트코프는 야당의 대표 발언자가 되어 인민민병대와 선거 절차를 문제 삼았다. 디미트로프의 첫 내각에는 즈베노의 게오르기에프가 외무장관, 조국전선 농민동맹의 오보프가 부총리로 남아 연립의 형식이 유지되었다. 1947년 봄까지 야당 신문 「나로드노 제멜레델스코 즈나메」와 「스보보덴 나로드」는 계속 발행되었다.

페트코프 재판과 평화조약

1947년 2월 10일 파리에서 연합국과 불가리아의 평화조약이 서명되었다. 조약은 남도브루자를 불가리아에 남겼고,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배상을 정했으며, 발효 뒤 90일 안에 연합군의 철수를 규정했다. 미국 상원은 6월 4일 조약을 비준했다.

6월 5일 대국민의회는 페트코프의 면책특권을 박탈했고, 그는 회의장에서 체포되었다. 혐의는 군 안의 「중립장교연맹」과 결탁해 무장 쿠데타를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8월 5일부터 16일까지 소피아에서 재판이 열렸고, 페트코프는 혐의를 부인했다. 변호인 선임과 증인 신청은 제한되었다. 8월 16일 사형이 선고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판결 집행을 막아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고, 소련은 내정 문제라고 답했다. 9월 15일 평화조약이 발효했고, 9월 23일 페트코프는 소피아 중앙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정부는 처형 뒤 페트코프가 사면을 청원했다고 발표했으나 문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8월 26일 그의 농민동맹은 해산되었고, 야당 의원 스물세 명의 의원직이 박탈되었다. 영국 하원에서는 10월 27일 이 재판을 두고 토론이 있었다. 10월 1일 미국은 불가리아 정부를 승인했다.

페트코프 재판을 두고 두 서술이 맞섰다. 정부와 공산당은 재판 기록을 근거로 실제 음모가 있었다고 했고, 서방 공사관과 야당은 이를 정적 제거로 보았다. 1990년 불가리아 대법원은 판결을 파기하고 페트코프의 무죄를 선고했다. 룰체프의 사회민주당 야당 의원들은 1948년 11월 재판에서 징역형을 받았다.

헌법, 국유화, 사회민주당 통합

1947년 12월 4일 대국민의회는 새 헌법을 채택했다. 소련 법학자들이 초안 작업에 참여했고, 1936년 소련 헌법을 본뜬 구조에 국민의회와 국가원수 역할의 간부회를 두었다. 「디미트로프 헌법」이라 불린 이 헌법은 1971년까지 유지되었다. 12월 23일 「사영 공업·광업 기업 국유화법」이 통과되어 대기업 1,997곳과 소기업 4,027곳이 국가로 넘어갔고, 12월 27일 모든 사영 은행이 국유화되었다. 1948년 말까지 공업 생산의 약 85%가 국영 부문에서 나왔다.

1948년 2월 2일부터 3일까지 열린 조국전선 제2차 대회는 정당 연합이던 조국전선을 개인 가입의 단일 대중조직으로 바꾸었다. 즈베노는 1949년 2월 자진 해산했고, 조국전선 안의 농민동맹은 남았으나 독자 후보를 내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의 조국전선파는 1948년 6월부터 당원 심사를 거쳐 8월 11일 공산당과의 통합을 결정했고, 심사에서 절반 정도가 공산당원이 되었다. 통합 절차는 그해 말 마무리되었다. 3월 18일 소피아에서 소련과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이 서명되었다.

1949년 5월 즈베노 출신의 전 국방장관 다미안 벨체프가 스위스 공사로 나가 있던 중 귀국을 거부했고, 같은 해 즈베노 계열 장교들이 군에서 물러났다. 농업에서는 노동협동농장이 늘었다. 1949년 말 약 1,600곳의 협동농장이 경작지의 11% 남짓을 차지했고, 대규모 집단화는 1950년 이후의 일이었다.

「인민공화국」의 뜻: 발칸 연방에서 제5차 당대회까지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디미트로프와 불가리아 공산당은 자기 체제를 소비에트 체제와 구별해 설명했다. 디미트로프는 1945~46년의 연설에서 불가리아가 소비에트 공화국이 아니라 인민공화국이 될 것이며, 조국전선의 틀 안에서 의회를 통해 사회주의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1946년 9월 2일 스탈린은 불가리아 대표단에게 소비에트 형태를 거치지 않는 길이 가능하며 그 경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이 노선은 코민포름 창설 이전 각국 공산당의 「자국의 길」 담론과 같은 것이었다.

같은 시기 디미트로프는 유고슬라비아와의 연방을 추진했다. 1947년 8월 1일 블레드에서 디미트로프와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관세동맹과 비자 폐지, 피린 마케도니아와 바르다르 마케도니아의 통합 준비, 서부 변경 지역의 불가리아 반환을 내용으로 하는 협정에 서명했고, 11월 27일 에브크시노그라드에서 우호조약을 맺었다. 피린 지방에서는 마케도니아어 교사와 서적이 들어왔고, 1946년 12월 인구조사에서 이 지방 주민 다수가 마케도니아인으로 등록되었다. 이 등록은 1948년 이후 취소되었고, 1956년 인구조사에서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연방 구상이 불가리아 국내 정치에 남긴 것은 마케도니아 문제를 둘러싼 이 두 번의 번복이었다. 1948년 1월 17일 디미트로프는 부쿠레슈티에서 그리스까지 포함하는 발칸 연방 구상을 기자들에게 말했고, 1월 28일 프라우다는 이를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2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디미트로프·콜라로프·코스토프의 불가리아 대표단과 에드바르트 카르델·밀로반 질라스의 유고슬라비아 대표단을 함께 불러 사전 협의 없는 외교를 질책했다. 디미트로프는 잘못을 인정했다. 6월 코민포름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제명하자 불가리아 공산당은 결의를 지지했고, 피린 마케도니아 정책을 거두었다. 결별 자체는 티토-스탈린 결별 항목이 다룬다.

정의가 바뀐 시점은 문서로 남아 있다. 1948년 12월 18일부터 25일까지 열린 제5차 당대회에서 디미트로프는 19일의 정치 보고에서 「인민민주주의 정권과 소비에트 정권은 같은 권력, 곧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두 형태」라고 규정했다. 대회는 당명을 불가리아공산당으로 바꾸고 5개년 계획을 채택했다. 1946년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아닌 인민공화국」과 1948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는 같은 사람의 말이었고, 그 사이에 코민포름과 유고슬라비아 제명이 있었다. 이 전환을 처음부터의 설계로 읽는 서술과 1947~48년의 정세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읽는 서술은 상위 문서의 해석 절에 정리되어 있다.

1949년: 디미트로프의 죽음과 코스토프 재판

1949년 봄 당 안의 정리가 시작되었다. 트라이초 코스토프는 전쟁 중 국내 지하조직을 이끌었고 1944년 이후 당 서기이자 부총리 겸 경제·재정위원회 의장으로 경제를 관장한 인물이었다. 3월 26일부터 27일까지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그를 「민족주의적 편향」으로 비판했고, 31일 부총리직에서 해임했다. 6월 11일부터 12일까지의 전원회의에서 콜라로프가 그의 「반당 활동」을 보고했고, 코스토프는 당에서 제명되어 6월 20일 체포되었다. 소련과의 무역에서 불가리아 측 정보를 소련 대표에게 숨기라고 지시했다는 것이 비판의 출발점이었다. 같은 봄 부다페스트에서는 러이크가 체포되었고, 두 사건은 코민포름의 유고슬라비아 결의 이후 각국 당이 「티토주의자」를 찾는 흐름 속에 있었다.

디미트로프는 4월 치료를 위해 소련으로 떠나 7월 2일 모스크바 근교 바르비하에서 죽었다. 유해는 소피아로 옮겨져 영묘에 안치되었다. 7월 20일 콜라로프가 총리가 되었고, 당의 실무는 서기 벌코 체르벤코프가 맡았다.

12월 7일부터 14일까지 소피아에서 코스토프와 피고 아홉 명의 재판이 열렸다. 기소장은 영국 정보기관을 위한 간첩 행위와 티토와 결탁한 정부 전복 음모였다. 코스토프는 재판 첫날 예심 자백을 철회하고 간첩과 음모 혐의를 부인했으며, 이 태도를 재판 끝까지 유지했다. 이 점에서 이 재판은 같은 해 9월 부다페스트의 러이크 재판과 달랐다. 12월 14일 사형이 선고되었고, 16일 집행되었다. 정부는 처형 뒤 코스토프가 사면 청원과 함께 자백서를 남겼다고 발표했다. 재판을 참관한 서방 기자들은 법정에서의 부인을 보도했고, 소련과 동유럽 언론은 판결문을 실었다. 1956년 4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코스토프를 복권했고, 같은 해 대법원이 판결을 파기했다. 콜라로프는 1950년 1월 23일 죽었고, 2월 체르벤코프가 총리가 되었다.

1949년 말의 불가리아에는 공산당이 지도하는 조국전선, 1947년 헌법, 국유화된 공업과 은행, 소련과의 조약, 그리고 당 안의 재판이 자리 잡았다. 1944년 9월의 연립에 참여한 네 세력 가운데 즈베노와 사회민주당은 없어졌고 농민동맹은 조국전선 안에 남았다. 페트코프 재판과 코스토프 재판은 각각 1990년과 1956년에 다른 방식으로 뒤집혔으며, 인민재판소 판결은 1996년에 파기되었다. 그 뒤로 이어진 일들은 상위 문서가 정리한다.

결과

1949년 말 불가리아에는 공산당이 지도하는 조국전선 단일 조직, 소련 헌법을 본뜬 1947년 헌법, 국유화된 공업과 은행, 시작 단계의 농업 집단화, 소련과의 1948년 양자조약이 자리 잡았다. 농민동맹은 조국전선 안의 위성 정당으로 남았고 사회민주당은 사라졌다. 발칸 연방 구상과 피린 마케도니아 정책은 1948년 유고슬라비아 결별로 뒤집혔다. 페트코프와 코스토프의 재판은 1956년 이후 각각 다른 방식으로 재검토되었다. 코스토프는 1956년 당에 의해 복권되었고, 페트코프는 1990년 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연표와 지도

모스크바 블레드 바르나 소피아 플로브디프
  1. 1944.09.09불가리아
    조국전선의 정권 장악

    소련의 선전포고(5일)와 국경 통과(8일) 직후 공산당·농민동맹·즈베노·사회민주당의 조국전선이 소피아에서 정권을 잡았다. 즈베노의 키몬 게오르기에프가 총리, 공산당의 안톤 유고프가 내무장관이 되었고, 옛 경찰은 인민민병대로 대체되었다. 무라비에프 정부 각료들은 체포되었다.

  2. 1944.10.28불가리아소련
    모스크바 휴전협정

    불가리아는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맺어 대독 참전, 그리스·유고슬라비아 점령지 철수, 배상, 연합국 통제위원회 설치를 받아들였다. 위원장은 톨부힌 원수, 실무는 부위원장 비류조프가 맡았고 미·영 대표는 통보를 받는 자리에 있었다. 불가리아군 45만 명이 유고슬라비아로 나갔다.

  3. 1945.02.01불가리아
    인민재판소 판결과 처형

    헌법 밖에 세워진 인민재판소가 섭정 3명, 왕실 고문 8명, 장관 22명, 의원 67명, 장성·고위 장교 47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그날 밤 소피아 중앙교도소에서 집행되었다. 4월까지 전국 135건의 재판에서 11,122명이 기소되어 사형 선고는 2,730건이었다. 실제 집행 수는 확정되지 않았다.

  4. 1945.11.18불가리아
    미뤄진 총선

    8월 26일 예정이던 총선이 미·영의 항의와 소련의 동의로 연기된 뒤 치러졌다. 여름에 조국전선을 떠난 페트코프의 농민동맹과 룰체프의 사회민주당은 참여를 거부했고, 조국전선 단일 명부가 공식 집계 약 88%를 얻었다. 미국과 영국은 새 정부의 승인을 미뤘다.

  5. 1946.09.08불가리아
    왕정 폐지 국민투표

    공식 결과 찬성 95.6%로 왕정이 폐지되었고, 9월 15일 국회가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아홉 살의 시메온 2세와 왕실은 이튿날 출국했고, 콜라로프가 임시 국가원수가 되었다. 야당도 왕정 폐지에는 반대하지 않았으므로 이 투표는 조국전선과 야당의 대결이 아니었다.

  6. 1946.10.27불가리아
    대국민의회 선거

    헌법 제정을 위한 선거에서 공식 결과는 공산당 53.9%(465석 중 278석), 조국전선 농민동맹 13.4%(68석), 페트코프와 룰체프의 야당 연합 28.4%(101석)였다. 야당은 100만 표를 넘겼다. 11월 22일 디미트로프가 총리가 되었고, 페트코프는 의회에서 야당의 대표 발언자가 되었다.

  7. 1947.08.01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블레드 협정

    디미트로프와 티토가 관세동맹, 비자 폐지, 피린·바르다르 마케도니아 통합 준비, 서부 변경 지역 반환을 담은 협정에 서명했다. 11월 27일 에브크시노그라드 우호조약이 뒤따랐고, 피린 지방에 마케도니아어 교사가 들어왔다. 1948년 1월 프라우다가 연방 구상을 부인했다.

  8. 1947.09.23불가리아
    페트코프 처형

    6월 5일 면책특권 박탈 뒤 국회에서 체포된 페트코프가 8월 5~16일 재판에서 군 장교들과의 쿠데타 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평화조약 발효(9월 15일) 여드레 뒤 소피아 중앙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농민동맹은 8월 26일 해산되었다. 1990년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9. 1947.12.04불가리아
    디미트로프 헌법

    대국민의회가 소련 법학자들의 참여 아래 1936년 소련 헌법을 본뜬 새 헌법을 채택했다. 23일 공업·광업 국유화법으로 대기업 1,997곳과 소기업 4,027곳이, 27일 모든 사영 은행이 국가로 넘어갔다. 1948년 말 공업 생산의 약 85%가 국영 부문에서 나왔다.

  10. 1948.02.10소련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모스크바 회동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디미트로프·콜라로프·코스토프의 불가리아 대표단과 카르델·질라스의 유고슬라비아 대표단을 함께 불러 블레드 협정과 부쿠레슈티 발언 등 사전 협의 없는 연방 외교를 질책했다. 디미트로프는 잘못을 인정했고, 6월 코민포름 결의 뒤 불가리아는 유고슬라비아에 등을 돌렸다.

  11. 1948.12.19불가리아
    제5차 당대회 보고

    18~25일 열린 대회에서 디미트로프가 정치 보고를 통해 인민민주주의 정권과 소비에트 정권을 「같은 권력, 곧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두 형태」로 규정했다. 1946년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아닌 인민공화국」과 대비되는 정식이었다. 대회는 당명을 불가리아공산당으로 바꾸고 5개년 계획을 채택했다.

  12. 1949.12.16불가리아
    코스토프 처형

    3월 「민족주의적 편향」으로 해임되고 6월 체포된 전 부총리 코스토프가 12월 7~14일 재판에서 예심 자백을 철회하고 영국 간첩·티토 결탁 혐의를 부인했으나 14일 사형을 선고받아 집행되었다. 디미트로프는 7월에 죽었고 콜라로프가 총리였다. 코스토프는 1956년 복권되었다.

관련 인물 12명

참여7

소련 외무장관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

1944년 10월 휴전협정과 1945년 12월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의에서 불가리아 문제를 다루었고, 1948년 2월 모스크바 회동에 배석했다.

블레드 협정의 상대요시프 브로즈 티토1892–1980

1947년 8월 1일 디미트로프와 블레드 협정을, 11월 27일 에브크시노그라드 우호조약을 맺었다. 1948년 6월 코민포름 제명 뒤 불가리아는 그에게 등을 돌렸고, 코스토프 재판의 기소장은 그와의 결탁을 혐의로 들었다.

1948년 2월 모스크바 회동의 유고슬라비아 대표에드바르트 카르델1910–1979

1948년 2월 10일 질라스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불가리아 대표단과 나란히 스탈린의 질책을 받았다. 소련 측이 요구한 소련-유고슬라비아 협의 의정서에 서명했다.

코민포름 창립회의 보고자안드레이 즈다노프1896–1948

1947년 9월 「두 진영」 보고와 1948년 6월 코민포름 결의는 불가리아 공산당이 「자국의 길」 담론을 거두고 유고슬라비아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소피아 당 조직 책임자토도르 지프코프1911–1998

1944년 9월 소피아의 봉기 준비에 참여했고, 1948년부터 소피아 시당 제1서기로 당 조직을 맡았다. 1954년 당 제1서기가 되어 1956년 코스토프 복권을 결정한 전원회의를 이끌었다.

미국 국무장관제임스 F. 번스1882–1972

1945년 8월 불가리아 선거 연기를 요구했고, 12월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의에서 야당 인사의 정부 참여를 조건으로 승인을 논의했다.

영국 외무장관어니스트 베빈1881–1951

1947년 페트코프 재판과 처형에 항의했고, 10월 27일 하원 토론에서 정부의 입장을 설명했다.

출처: Ivo Banac, ed., The Diary of Georgi Dimitrov, 1933–1949, Yale University Press, 2003R. J. Crampton, A Concise History of Bulgaria, 2nd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R. J. Crampton, Bulgaria, Oxford University Press, 2007Vesselin Dimitrov, Stalin's Cold War: Soviet Foreign Policy, Democracy and Communism in Bulgaria, 1941–48, Palgrave Macmillan, 2008Michael M. Boll, Cold War in the Balkans: American Foreign Policy and the Emergence of Communist Bulgaria, 1943–1947,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1984Nissan Oren, Revolution Administered: Agrarianism and Communism in Bulgaria,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3Norman Naimark and Leonid Gibianskii, eds., The Establishment of Communist Regimes in Eastern Europe, 1944–1949, Westview Press, 1997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5, vol. IV; 1946, vol. VI; 1947, vol. IV (Bulgaria)The Trial of Traicho Kostov and His Group, Sofia: Press Department, Ministry of Foreign Affairs, 1949Georgi Dimitrov, Political Report to the Fifth Congress of the Bulgarian Communist Party, 19 December 1948Hansard, House of Commons, 27 October 1947: M. Petkov (Trial and Execution)

← 역사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