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세르게예비치 부브노프

Андрей Сергеевич Буб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38 ✕ 처형(1940년 옥사설)

10월혁명 정치국원에서 문맹퇴치를 이끈 계몽인민위원으로

1917년 10월 10일(23일) 정치국원, 10월 16일(29일) 무장봉기를 지휘할 당중심 위원에 선출되었다.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10월 24–25일 철도역 장악을 지도했고, 25일에는 야전참모장으로서 참모부를 지휘했다.

러시아 제정기에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3년 당에 입당했고, 10월혁명을 준비한 정치국원이자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지도부의 한 사람이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에 맞선 좌파공산주의자였고, 1921–22년 민주중앙파에 속했으며, 1923년에는 트로츠키에게 가담했다가 그와 결별하고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다. 1924년부터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으로서 트로츠키 계열 위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1929–1937년 계몽인민위원으로 전면 의무초등교육과 문맹퇴치 운동을 이끌었다. 1937년 10월 해임되어 그해 말 중앙위원에서 제명되었으며, 1938년 8월 1일 처형되었다. 1956년 3월 14일 재활되고 3월 22일 당적이 회복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소련 정치국

1938년 처형

관련 역사 사건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시절과 1928년 '군내 야권' 사건 (1924–1929)

1924년 2월부터 1929년 10월까지 부브노프는 붉은 군대 정치총국(PURKKA) 국장과 소비에트 연방 혁명군사위원회 정치관리부를 이끌면서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책임편집인을 겸했다. 러시아 위키백과는 그 임기를 1924년 1월 17일부터 1929년 10월 1일까지로 적고, 그가 트로츠키 지지자였던 안토노프-오프셰옌코를 대신해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붉은 군대의 적극적인 개혁자로서 군내 정치교육을 조직하고 병사들의 여가를 위한 군 문화센터를 세웠다. 1920년대에는 군사정치 경험을 대외 정책에도 활용했다. 1926년 초 그는 '이바노프스키'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파견된 소비에트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 군부와의 관계가 끊어진 듯한 상황을 조사했으며, 1926년 3월 20일 광둥 쿠데타 이후 국민당의 새 지도자 장제스와 협정을 도출해냈다. 같은 해 11–12월에는 보이틴스키, 라스콜니코프와 함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제출한 「중국 정세에 관한 예비 테제」 작성에 참여했다. 중국 근로자 대학(UTK)도 그의 지도 아래 모스크바에 세워져 중국인 민간·군사 전문가를 양성했다.

1928년에는 '톨마체프파'에 대한 투쟁을 주도했다. 1928년 '군내 야권'은 톨마체프 군사정치대학의 공산주의자들과 벨라루스 군관구 고위 정치장교 일부로 구성되어 있었고, 1938년에는 '반당적 군대 내 벨라루스-톨마체프 집단'으로 개칭되었다. 1929년 중앙위원회가 붙인 '1928년 군내 야권'이라는 규정은 야권을 일장 지휘권과 개인적 권위를 침식하는 원천으로 본 혁명군사위원회 지도부(보로실로프)와 붉은 군대 정치총국(부브노프)의 요청에 따라 나온 것이었다.

부브노프의 역할은 분명했다. 1928년 4월 21일 그는 톨마체프 군사정치대학 전체 당원회의에서 보고를 하며 '톨마체프파'의 입장에 대한 강한 부정적 태도를 표명했고, 6월 7일 특별부가 벨라루스 측 결의를 보로실로프에게 보고했을 때에는 그의 행동이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1928년 10월 30일 정치국 결의 「붉은 군대의 정치·도덕적 상태에 관하여」는 카가노비치, 오르조니키제와 함께 부브노프가 참여한 위원회에서 작성되었고, 그해 말까지 73명이 문책당했다(1명 제명, 6명 엄중 견책, 32명 견책, 9명 제대).

이 시기 부브노프는 트로츠키와 결별하고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으며, 스탈린은 트로츠키 진압 이후인 1924년 초 그를 이 요직에 앉혔다. 그는 정치총국장으로서 트로츠키와 계보가 닿았던 위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1925년 4월부터 12월까지는 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겸했다. 한편 1917년 초의 여러 반체제 경력(1918년 좌파공산주의, 1921–22년 민주중앙파, 1923년 트로츠키 가담)을 거친 그에게서, 자신이 이미 통과한 노선과의 결별을 강요하는 이 강경 노선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함께 기록해 둔다.

계몽인민위원으로서의 교육개혁 (1929–1937)

안드레이 부브노프는 1929년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의 후임으로 러시아공화국 계몽인민위원에 임명된 후, 소비에트 교육사에서 가장 광범위한 제도 개혁을 8년간 주도했다. 그의 핵심 성과는 전면적 의무초등교육의 실현이었다. 1930년 8월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공동 법령 「보편적 의무초등교육에 관하여」에 따라 8~10세 아동의 취학이 의무화되고, 1934년까지 소비에트 연방 전역에서 초등교육이 사실상 전면화되었다. 이어 1937년까지 도시 지역에서 7년제 의무교육이 도입되었다.

부브노프는 문맹퇴치(리크베즈)를 군사작전처럼 조직했다. 1929–1931년 사이 '문화진군(쿨트포호트)' 운동을 통해 노동자·집단농장원·기술자·교사·대학생 등 약 300만 명의 문화군(쿨타르메이츠)을 동원하여 성인 문맹자 교육에 투입했다. 이들은 학습조를 꾸리고, 구호물자 기금을 조성했으며, 학령기 아동의 취학을 독려했다.

그는 교육내용의 통일화에도 주력했다. 전국적으로 단일 교육과정과 교과서 체계를 정비해 소비에트 연방 최초의 통일된 교육 공간을 구축했고, 폴리테크니즘(종합기술교육) 원칙 아래 학교교육과 생산노동의 결합을 시도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노동교육이 축소되었지만, 그가 구축한 보통교육 체계는 이후 소비에트 교육의 제도적 중추가 되었다.

교사 지위 향상에도 힘써 교원 보수의 단일 임률제, 명예직명 제도, 교원의 과도한 사회적 부담 경감을 추진했다. 또한 1933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아동문학 전문 출판사인 아동문학출판사(데트기즈)를 설립하여, 창립 첫해에만 168종, 총 774만 부의 아동도서를 발행했다. 아울러 모스크바 레닌도서관 신축을 주관하고,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소비에트 회화 전시실을 개설했으며, 국립문학박물관 설립을 직접 지도하는 등 문화 인프라 확충에도 깊이 관여했다. 나데즈다 크룹스카야는 부브노프의 임명을 두고 "당은 사업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목표를 향해 집요하게 나아가며, 세부까지 점검할 줄 아는 인물을 계몽인민위원으로 세웠다"고 평가했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