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베전트

Annie Besant
독립 활동 사회민주주의자 민족해방·반식민 운동 영국 영국 1847–1933 ○ 사망

피임 책 출판으로 재판받은 세속주의자·페이비언, 인도 국민회의 첫 여성 의장

1877년 브래들로와 함께 찰스 놀턴의 피임 책 『철학의 열매』를 펴내 재판을 받았고, 이듬해 피임을 알렸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양육권을 잃었다.

런던에서 태어나 목사와 결혼했다가 신앙을 잃고 1873년 남편을 떠난 영국의 사회주의자·신지학자·운동가. 전국 세속 협회의 연사로 찰스 브래들로와 함께 1877년 피임 책을 펴내 재판을 받았고, 맬서스 연맹 서기가 되었다. 1885년 페이비언 협회에 들어가 1888년 성냥 공장 여공 파업에 관여했다. 1890년대에 신지학으로 돌아서 1907년 신지학회 회장이 되었고, 인도 자치 운동을 이끌어 1917년 인도 국민회의 첫 여성 의장이 되었다. 1933년 아디야르에서 숨졌다.

다른 이름: 애니 우드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철학의 열매』 재판에서 인도 자치까지

그는 목사 프랭크 베전트와 결혼해 두 아이를 두었지만, 딸이 크게 앓은 1871년부터 신앙에 의문을 품었고 남편이 요구한 성찬 참석을 거부했다. 1873년 남편을 떠나 런던으로 갔고, 법적 별거 합의로 딸을 데려갔다. 1874년 전국 세속 협회에 들어가 찰스 브래들로의 가까운 동료가 되었다. 1877년 둘은 「자유사상 출판사」를 세워, 노동계급 가정은 아이의 수를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며 피임법을 알려 준 미국인 찰스 놀턴의 『철학의 열매』를 다시 냈다. 둘은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법률상의 기술적 이유로 판결이 뒤집혔다.

재판 뒤 그는 브래들로가 만든 이름을 되살린 맬서스 연맹을 세우는 데 앞장서 서기가 되었고, 피임을 알리는 행위에 대한 처벌을 없애자고 했다. 1878년의 『인구의 법칙』은 잘 팔렸다. 그러나 같은 해 남편은 그가 피임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어머니 자격이 없다고 주장해 두 아이의 양육권을 가져갔다. 연맹은 점차 우생학으로 기울었다. 1885년 그는 개인주의자 브래들로와 갈라서 버나드 쇼의 추천으로 페이비언 협회에 들어갔고, 1887년 「피의 일요일」 시위와 1888년 성냥 공장 여공 파업에 관여했으며, 런던 교육위원으로도 뽑혔다.

1890년 헬레나 블라바츠키를 만나 신지학으로 돌아섰고, 1907년 신지학회 회장이 되어 마드라스 아디야르에 본부를 두었다. 인도의 카스트와 조혼을 공격하고 교육에 힘썼으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의 위기는 인도의 기회」라며 1916년 틸라크와 전인도 자치 연맹을 세웠다. 1917년 6월 구금되었다가 풀려나 그해 12월 인도 국민회의 첫 여성 의장이 되었다. 뒤에 간디의 새 지도부와는 거리를 두었고, 1933년 아디야르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