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 사프로노비치 예누키제

Авель Сафронович Енукидзе
소련 러시아 1877–1937 ✕ 처형

스탈린의 절친이자 17년간 소비에트 국가기구의 중추, 대숙청의 서막을 연 최초의 몰락

「소소, 그들도 나처럼, 너처럼 늙은 볼셰비키야. 늙은 볼셰비키의 피를 흘리지 않을 거지!」 예누키제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재판에 세워 처형하려는 스탈린을 말렸다. 스탈린은 답했다. 「기억해, 아벨.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의 적이다.」

1898년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바쿠 사회민주주의 조직과 코카서스 지하인쇄소 「니나」의 공동 창립자. 1918년부터 1935년까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와 소련 중앙집행위원회(TsIK) 서기로 17년간 소비에트 국가 최고 형식기관의 실무를 관장하며 연방 형성과 제도화를 뒷받침했다. 스탈린의 측근이자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대부였고, 개인으로서는 최초로 레닌 훈장(제3호)을 받았다. 1935년 「크렘린 사건」으로 제17차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 중 처음으로 축출되었으며, 이는 대숙청의 중요한 전조가 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크렘린 사건과 몰락

1934년 12월 키로프 암살 이후, NKVD는 크렘린 직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안 검사를 시작했다. 1935년 초, '크렘린 음모'(Кремлёвское дело)가 발각되었다고 발표되었는데, MIT 유학파 장교 미하일 체르냡스키가 스탈린 암살을 계획한 '테러 조직'의 주모자로 지목되었고, 크렘린 경비의 태만이 이들의 침투를 가능케 했다는 논리였다. 110명이 조사되었고, 그중에는 카메네프의 형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크렘린 보안을 총괄하던 예누키제는 1935년 2월 TsIK 서기직에서 해임되었고, 3월 21일 정치국은 'TsIK 기구와 예누키제 동지에 관한 보고서'를 중앙위원들에게 회람했다. 보고를 맡은 이는 당시 막 CC 서기로 부상한 니콜라이 예조프였고, 예누키제는 '정치적 경계심 상실'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이어진 6월 5~7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예조프는 크렘린 내 5개의 '테러 조직'이 스탈린을 노렸다고 주장하며 예누키제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전원회의는 '정치적·일상적 타락'을 이유로 그를 중앙위원에서 제명하고 출당시켰다. 제17차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 중 최초의 희생자였다.

해임 이후 예누키제는 자캅카스 연방 TsIK 의장으로 발령났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건강을 이유로 오르조니키제보로실로프에게 모스크바 잔류를 탄원했다. 결국 북카프카스 광천수 리조트 관리소장으로 좌천되었으나, 스탈린은 1935년 9월 카가노비치·예조프·몰로토프에게 보낸 암호전문에서 이마저도 '실수'라며 로스토프나 하리코프의 말단직으로 재차 좌천시킬 것을 요구했다. 예누키제는 정치국의 명령을 한동안 무시했으나 결국 하리코프 자동차운송트러스트 소장으로 전임되었다. 1936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기적적으로 당적을 회복했지만, 1937년 2월 11일(오르조니키제가 죽기 정확히 1주일 전) 하리코프에서 체포되었다. 베리야는 이미 1935년 7월 트빌리시 강연에서 예누키제의 저작 『카프카스의 지하 인쇄소들』이 스탈린의 혁명적 역할을 지웠다며 맹비난했고, 예누키제는 『프라우다』 지면을 통해 자신의 '오류'를 공개 사과해야 했다. 그가 스탈린에게서 멀어진 진짜 이유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사형에 처하지 말라는 간청이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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