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트 프리틀렌더

Benedict Friedlaender
독립 활동 독일 유대계 독일인 1866–1908 ✕ 자살

『우라노스적 에로스의 르네상스』로 남성 결사론의 길을 연 독일의 동물학자·성과학자

1906년 히르슈펠트의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와 갈라서 「분리파」를 세우고, 동성애를 여성성이 아닌 남성 사이의 「생리적 우정」으로 내세웠다.

동물학자이자 성과학자. 뒤링을 따르는 자유 사회주의자로 아나키스트 잡지를 후원했다. 1904년 『우라노스적 에로스의 르네상스』에서 남성 사이의 「생리적 우정」을 정상적인 기본 충동으로 내세웠고, 1906년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와 갈라서 분리파를 세웠다. 그의 생각은 블뤼허의 남성 결사론으로 이어졌다.

다른 이름: 베네딕트 프리들랜더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생리적 우정」과 위원회 분리파

베를린에서 국민경제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수학·물리학·식물학·생리학을 공부하고 1888년 동물학으로 박사가 되었다. 오이겐 뒤링을 따르는 「자유 사회주의」의 이론가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책을 냈고, 재력 있는 후원자로서 아나키스트 잡지 《투쟁》을 돕고 《사회주의자》에 글을 실었다.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에도 큰 기금을 댄 회원이었으나, 1904년 『우라노스적 에로스의 르네상스』에서 남성 사이의 「생리적 우정」을 인간의 정상적인 기본 충동이자 남성이 서로 어울릴 자유의 문제로 내세웠고, 1906년 위원회와 갈라서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 분리파」(뒤의 남성 문화 동맹)를 세웠다. 히르슈펠트의 「제3의 성」 이론을 거부한 그의 생각은 아이게네 공동체와 한스 블뤼허의 남성 결사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유대계였으나 숨질 때는 무종교였고, 지병에 시달리다 1908년 베를린 쇠네베르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