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비아 KGB에서 소련 내무장관까지, 쿠데타가 무너뜨린 질서의 수호자
체포되기 몇 시간 전, 유서에 이렇게 썼다: 「나는 정직하게 살았다 — 평생을.」 아내와 함께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라트비아인 공산주의자 집안 출신으로 라트비아 KGB 의장과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를 거쳐 1990년 소련 내무장관까지 오른 보수 강경파로, 범죄·민족분규 격화 속에서 강경 법질서 노선을 고수했다. 1991년 8월 쿠데타(GKChP)에 가담했고, 실패 후 체포 직전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력 연표
- 1960리가 전기기계공장 기술자
- 1961–1969콤소몰 라트비아 프롤레타르스키 구위원회 서기, 제1서기; 라트비아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70–1974전연방 콤소몰 중앙위 서기; CPSU 중앙위 감찰원
- 1974–1976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리가 시당위 제1서기
- 1976–1980소련 KGB 감찰국 부서장; 라트비아 KGB 제1부의장
- 1980–1984라트비아 SSR KGB 의장 (소장)
- 1984–1988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8–1990CPSU 당통제위원회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1989.9–1990.7)
- 1990–1991소련 내무장관; 안전보장회의 위원 (1991.3–)
- 1991.8GKChP 위원; 쿠데타 실패 후 자살
관련 역사 사건
- 1985–1991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내무장관으로 8월 쿠데타 국면 대응
- 1988–1991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내무장관 · 내무부 병력내무부 병력을 관할했고 발트 지역 강경책의 한 축이었다.
- 1987–1991발트 독립운동과 「발트의 길」라트비아 출신의 내무장관으로 발트 강경책의 한 축이었다.
- 1991노보오가료보 협상과 신연방조약교체 대상7월 29일 회동에서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는 신연방조약 서명 후 푸고를 내무장관에서 교체하기로 합의했고, 이 대화가 도청되어 그에게 전달되었다.
- 1991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GKChP 8인 위원, 쿠데타 실패 후 권총 자살소련 내무장관으로 8월 쿠데타(GKChP)의 8인 위원 중 한 명이었다. 쿠데타 실패 후 검찰 소환을 받고 체포 직전 아내와 함께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라트비아 볼셰비키의 아들, 체키스트가 된 콤소몰 일꾼
보리스 푸고는 1937년 칼리닌(트베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혁명과 내전을 거친 라트비아인 볼셰비키로, 라트비아가 독립국이던 시기에 소련에 남은 라트비아 공산주의자 망명 가계였다. 전후 가족은 소비에트 라트비아로 돌아갔고, 푸고는 리가에서 공학을 공부한 뒤 콤소몰의 사다리를 올라 라트비아 콤소몰 제1서기까지 지냈다.
1977년 그의 경력은 당에서 보안기구로 꺾어졌다. KGB로 옮겨 간 그는 1980년부터 1984년까지 라트비아 KGB 의장을 지냈다. 민족주의와 반체제를 감시하는 자리였고, 그 대상은 아버지의 조국이자 자신의 민족이었다. 1984년 그는 라트비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어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라트비아인으로서 라트비아를 소련에 붙들어 두는 것. 그의 이력 전체를 관통하는 이 역설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가계의 유산이었다. 라트비아 볼셰비키에게 소비에트 연방은 조국의 배신자가 아니라 조국의 완성이었고, 푸고는 그 신념의 마지막 세대였다.
각성하는 라트비아 앞에서, 통제위원회에서 내무부로
푸고가 라트비아공산당 제1서기로 있던 1984년부터 1988년은 공화국이 잠에서 깨어나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글라스노스트가 열어 준 공간에서 1940년 병합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환경운동이 민족운동으로 자라났다. 그는 부패 단속과 경제 실적으로 체제의 신뢰를 되찾으려 했지만, 흐름은 이미 그런 처방 바깥에 있었다. 1988년 그가 모스크바로 옮겨 간 직후 라트비아 인민전선이 결성되었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당중앙통제위원회 의장으로 당 기강과 징계를 맡았고, 1990년 12월 고르바초프의 우선회 국면에서 개혁파 바카틴을 대신해 내무장관이 되었다. 서방과 개혁파는 이 인사를 강경 선회의 가장 뚜렷한 신호로 읽었다. 내무부 소속 특수경찰 오몬, 이른바 「검은 베레」가 1991년 1월 리가에서 유혈 사태를 일으켰을 때, 지휘 계통의 정점에는 라트비아인 장관이 있었다.
발트의 독립운동이 병합의 불법성을 말할 때, 푸고는 병합이 만든 세계 그 자체를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에게 연방의 해체는 정치 노선의 패배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가 무너지는 일이었다. 1991년 8월의 선택과 그 결말은 이 지점을 빼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1991년 8월 쿠데타와 최후
1990년 12월 고르바초프가 개혁파 바카틴을 해임하고 푸고를 내무장관에 임명한 것은 우경화 전환으로 평가되었다. 푸고는 범죄 급증과 민족분규 속에서 강경 법질서 노선을 취했고, 1991년 3월 안전보장회의 위원이 되었다.
1991년 8월 18일 푸고는 국방부에서 야조프·크류치코프와 만나 쿠데타 계획을 통보받았다. 직후 자신의 집무실에서 내무차관 쉴로프와 두비냐크에게 비상사태 도입을 예고하고 내무군과 경찰 체계의 대비태세를 지시했다. 이어 그루슈코 KGB 제1부의장 주재 회의에 이들을 보내 텔레비전 센터·통신시설·역·공항 경비 강화를 조율하게 했다.
8월 19일 새벽 크렘린에서 돌아온 푸고는 모스크바 진입 군 부대의 교통경찰 호송차 15~20대 편성을 명령했다. 오전 9시 중앙기관 간부회의를 소집해 GKChP 결정의 무조건적 이행을 지시했고, 전국 내무기관을 강화근무체제로 전환하는 명령 제066호와 작전참모부 설치 명령 제067호에 서명했다. 같은 날 암호전문 제922호로 전국에 비상사태 행동 지침을 하달했다.
푸고는 언론 통제에도 적극적이었다. 8월 20일 오후 전국 내무기관에 암호전문을 보내 방송 시설 경비 강화와 GKChP 정보통제 결의 위반 사례 즉시 보고를 지시했다. 같은 날 옐친의 러시아 대통령령을 무효화하는 GKChP 결의안 초안을 직접 작성해 볼딘에게 송부했으며, 러시아 내무부가 모스크바로 소집한 경찰특수학교 생도들의 이동을 금지하는 암호전문을 발송했다. 검찰 조사 결과, 푸고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GKChP의 결정을 실현하고 그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고 기록되었다.
8월 21일 쿠데타가 무너지자 검찰은 GKChP 위원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다음 날 아침 러시아 KGB 의장 이바넨코가 푸고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푸고는 "오십시오"라고 담담히 답한 뒤, 아내 발렌티나에게 권총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고 자신의 입에 총구를 물고 발사했다. 15분 뒤 현장에 도착한 관리들은 두 사람이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푸고는 병원 이송 중 사망했다. 아내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다음 날 숨졌다.
현장에서는 푸고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나 자신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실수를 저질렀다. 범죄나 다름없는 실수다. 그렇다, 이것은 실수이지 신념이 아니다. 내가 몹시 믿었던 사람들에게 속았다는 것을 이제 안다.」 검찰은 푸고에 대한 사건을 사망을 이유로 종결했다. 부부의 유해는 화장되어 1992년 2월 모스크바 트로예쿠롭스코예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