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브래들로

Charles Bradlaugh

전국 세속 협회를 세우고 피임 책 재판을 겪은 무신론자 자유당 의원

1877년 애니 베전트와 함께 피임 책 『철학의 열매』를 다시 펴내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뒤집혔고, 이 재판에서 맬서스 연맹이 생겨났다.

런던 혹스턴의 법률 사무원 아들로 태어난 영국의 정치인·무신론 운동가. 열한 살에 학교를 그만두었고, 「우상 파괴자」라는 필명으로 세속주의 글을 썼다. 1860년 《내셔널 리포머》 편집인이 되었고 1866년 전국 세속 협회를 세웠다. 1877년 애니 베전트와 피임 책을 펴내 재판을 받았다. 1880년 노샘프턴의 자유당 의원으로 뽑혔으나 무신론자로서 선서를 거부해 갇히고 거듭 보궐선거를 치렀고, 1886년에야 의석에 앉아 1888년 선서 대신 확약을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1891년 숨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세속주의, 피임 재판, 선서 투쟁

주일학교 교사이던 그는 국교회 39개 신조와 성경의 차이를 문제 삼다가 무신론자로 몰려 쫓겨났고, 집에서도 나와야 했다. 토머스 페인의 책을 찍었다가 갇혔던 리처드 칼라일의 미망인에게 거두어졌고, 「세속주의」라는 말을 만든 조지 홀리오크의 주선으로 첫 무신론 강연을 했다. 군대를 거쳐 1853년 런던에서 법률 사무원으로 일하며 세속주의 글을 썼고, 1858년 런던 세속 협회 회장, 1860년 《내셔널 리포머》 편집인이 되었다. 1868년 정부는 이 신문을 신성모독과 선동 혐의로 기소했지만 그는 모두 무죄를 받았다.

1877년 그와 베전트는 앞서 출판인 찰스 와츠가 외설죄로 처벌받은 찰스 놀턴의 피임 책 『철학의 열매』를 다시 냈다. 찰스 다윈은 피임에 반대한다며 변호 증언을 거절했다. 둘은 무거운 벌금과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기소장에 음란하다는 구절을 정확히 적지 않았다는 이유로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이 재판을 계기로 피임을 알리는 맬서스 연맹이 생겼다. 그는 노동조합, 공화주의, 보통선거를 지지했지만 사회주의에는 반대했고, 이 때문에 사회주의로 돌아선 베전트 같은 동료들이 그를 떠났다.

1880년 노샘프턴에서 자유당의 래부셰어와 함께 당선되었으나, 무신론자로서 선서 대신 확약을 하겠다고 하자 하원은 그를 시계탑 아래 감방에 가두었다. 의석을 잃은 그는 네 차례 연이어 다시 당선되었고, 1883년 의석에 앉아 표결했다가 벌금 1500파운드를 물었다. 글래드스턴과 버나드 쇼, 수십만 명의 청원이 그를 지지했다. 1886년에야 선서하고 의석에 앉았고, 1888년 상·하원 의원과 재판의 증인이 확약을 택할 수 있게 하는 새 선서법을 통과시켰다. 1891년 1월 30일 숨졌고, 장례에는 스물한 살의 간디를 포함해 3000명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