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노이만

Franz Leopold Neumann
독립 활동 서구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주의 독일 → 미국 (1943년 귀화) 독일 1900–1954 ○ 교통사고

사회민주당 노동법 변호사 출신 망명 정치학자, 나치 체제를 해부한 『비히모스』의 저자

1942년 노이만은 나치 독일 분석서에 『비히모스』라는 제목을 붙였다. 토머스 홉스가 무법의 ‘비국가’를 가리킨 이름이다. 나치 독일에는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슐레지엔의 카토비츠에서 동화된 유대인 집안에 태어났다. 학생 시절 1918~1919년 혁명에 참여하며 독일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928~1933년 베를린에서 노동법 변호사로 노동조합을 대리하며 사회민주당의 법률 고문을 지냈다. 1933년 영국으로 망명해 런던정치경제대학에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고, 1936년 뉴욕의 사회연구소에서 나치 체제를 분석한 『비히모스』(1942)를 썼다. 전략사무국(OSS)에서 나치 독일을 분석하고 뉘른베르크 재판의 기소 자료를 준비했다. 1948년 컬럼비아대학교 교수가 되고 베를린 자유대학교 설립을 도와 서독 정치학의 창시자로 꼽힌다. 1954년 교통사고로 죽었다.

다른 이름: 프란츠 레오폴트 노이만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비히모스』: 나치 독일을 실제로 움직인 것은 무엇이었나

『비히모스: 민족사회주의의 구조와 실천 1933~1944』는 노이만이 망명지 미국에서 1941~1944년에 쓴 책이다. 1942년 처음 나왔고 1944년 증보판이 나왔으며, 독일어판은 1977년에야 나왔다. 정치사회학과 국가 이론의 표준 저작으로 꼽히며, 나치 체제의 구조를 처음 분석한 책이자 권력 구조 연구의 선구적 저작으로 평가된다.

제목부터 주장이다. 유대 묵시 문학에는 혼돈을 다스리는 세 괴물이 나온다. 땅의 비히모스, 바다의 리바이어던, 하늘의 지즈다. 17세기 영국의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법의 지배가 조금이라도 남은 강제 체계, 곧 국가의 은유로 썼고, 비히모스로는 영국 내전기의 무법 상태, 곧 ‘비국가’를 그렸다. 노이만은 나치 독일을 비히모스라고 불렀다. 그의 명제는 나치 지배가 노동운동에 대한 증오로만 뭉친 여러 권력 집단들 사이의 다툼의 산물이며, 그래서 나치 독일에는 질서와 예측 가능성을 지향하는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없다는 것이다.

책은 먼저 바이마르 공화국이 왜 무너졌는지 묻는다. 바이마르 헌법은 계급투쟁 대신 계급 협력을 내세웠고, 국가를 여러 사회 집단 가운데 하나로 보는 다원주의에 기댔다. 그러나 이 다원주의는 실제 권력의 불평등을 가린 채 사회의 조화를 전제했다. 체제를 떠받친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은 산업·사법·군대의 공세 앞에서 무력했고, 전쟁과 인플레이션을 거치며 경제는 거대 기업 연합으로 집중되었다.

노이만은 나치 경제를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체제는 여전히 자본주의였다. 공황으로 위태로워진 카르텔 체계는 나치 아래에서 강제 카르텔화와 유대인 재산 몰수(‘아리아화’)로 오히려 더 굳어졌다. 그는 이를 ‘전체주의적 독점자본주의’라고 불렀다. 나치당이 대자본의 ‘하인 노릇 하는 도구’였다는 이른바 대리인 이론과도 거리를 두었다. 산업과 나치당은 제국주의적 팽창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졌고, 이윤 원칙은 여전히 경제를 움직였지만 그 추진력은 독일 대자본의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정신이었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은 관료, 당 위계, 국방군, 산업 지도부, 농업 지도부가 함께 이루었다. 책의 핵심 의도는 나치 독일도 지배계급이 모든 사회경제적 장치로 대중을 통제하고 착취하는 계급 사회임을 보이는 데 있었다.

반유대주의에 대해 노이만은 1944년 증보판에서 나치가 유대인을 사회 문제의 희생양으로 삼았을 뿐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나치 반유대주의가 민주적 규범을 전체주의 지배로 바꾸어 가는 길의 시험이었다는 ‘선봉 이론’을 내놓았다. 견해는 갈렸지만, 독일 사료를 다룬 솜씨와 풍부한 실증 자료는 미국 정치학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 책은 젊은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이언 커쇼는 히틀러 전기의 첫머리에 노이만의 문장을 인용했다.

OSS와 뉘른베르크: 망명 법학자는 나치를 어떻게 법정에 세우려 했나

『비히모스』로 이름을 얻은 노이만은 연구소 지도부가 재정난으로 더는 그를 쓸 수 없다고 하자 1942년 워싱턴으로 갔다. 1943년 초까지 경제전쟁위원회의 비상근 자문으로 일한 뒤, 미국의 전시 정보기관인 전략사무국(OSS) 연구분석과의 중부유럽과 부과장이 되었다. 그는 이 자리를 이용해 호르크하이머 주변의 핵심 그룹에서 밀려난 연구소 동료들을 불러들였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오토 키르히하이머와 함께 그는 독일의 정치 경향을 분석했다. 특히 전범 재판에서 책임을 물을 나치 집단과 개인, 전후 재건에 협력할 반나치 집단과 개인을 가려내는 일이 이들에게 맡겨졌다. 공식·군사 정보 보고, 망명자 면담, 점령지 유럽의 요원 정보를 모아 하나하나 믿을 만한지 따진 뒤, 제국의 강점과 약점을 하나의 분석으로 엮었다. 1944년 말에는 점령 당국이 쓸 탈나치화 지침 같은 자료도 준비했지만, 전쟁이 끝나며 떠오른 냉전의 우선순위 때문에 대부분 쓸모를 잃었다. 이 보고서들은 뒤에 『나치 독일에 관한 비밀 보고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전쟁 기여』로 묶여 나왔다.

1945년 그는 OSS 국장 윌리엄 도너번을 도와 전범 재판을 준비했다. 미국 수석 검사 로버트 H. 잭슨 밑에서 그의 팀은 피고 22명과 여러 나치 조직에 대한 분석을 만들었고, 1945년 9월 중순부터 기소장에 쓸 자료를 준비하고 감독했다. 도너번은 그에게 먼저 유대인 이외의 종교 박해를 조사하게 했다. 보고서는 바이마르 헌법의 핵심 조항이 나치 정권 아래에서도 형식상 폐지된 적이 없고, 정권 스스로도 종교 자유의 원칙을 존중한다고 거듭 밝혔음을 짚었다. 교회 박해가 독일법으로도 국제법으로도 범죄임을 보이려는 것이었다. 이 자료는 나치 기구들을 범죄 조직으로 판결하는 증거의 일부가 되었다. 유대인 학살보다 기독교 교회 박해를 앞세운 것은 네 연합국 검찰의 전략적·정치적 결정이었다. 그는 최고위 피고 헤르만 괴링의 개인 책임을 다룬 기소 의견서의 첫 초안을 고치는 일도 맡았고, 1946년 미국 측으로 재판에 참여했다. 노이만 자신은 독일 전범을 바이마르 법에 따라 독일 법정에서 재판해야 하며, 그것이 더 넓은 탈나치화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믿었다. 이언 부루마는 그를 독일 “탈나치화 뒤의 가장 중요한 두뇌”라고 평했다.

이 시기에는 논란도 남아 있다. 영어권 자료에는 그가 1943년 소련 정보기관 요원 옐리자베타 자루비나를 만나 넘겨받는 자료를 전하겠다고 약속했고, ‘러프’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자료는 그해 미국 시민이 된 뒤 그가 정보 전달을 꺼리는 듯했다고 쓰고, 그가 베노나 문서에 나오는 인물일 가능성이 크더라도 그 행동이 그의 저작이나 공적 활동과 이어진다는 주장은 없으며, 소련의 의도와는 거의 상관없는 정치적 이유에서 정보를 주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