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페트로비치 프리놉스키

Михаил Петрович Фриновский
소련 러시아 1898–1940 ✕ 처형

예조프의 강철 부관

해군인민위원 시절, 함대에 무지했던 프리놉스키는 회의마다 엉뚱한 훈수를 두며 "내 말이 맞지?"라고 확인받곤 했다. 이반 그렌 제독이 일어나 "아닙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셨고 말씀은 틀렸습니다"라고 답한 뒤로 그의 무능은 더 이상 감춰지지 않았다.

예조프의 제1부관이자 국가보안총국장으로서 대숙청의 대량작전 실무를 총괄한 체키스트다. 보안기관 자체 숙청과 극동 NKVD 숙청을 직접 지휘했으며, 예조프 몰락과 함께 해군인민위원으로 전출됐다가 1939년 체포되어 1940년 총살됐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37년 여름, 대량 작전의 실무 책상

미하일 프리놉스키는 예조프의 제1부인민위원이자 국가보안총국(GUGB)의 장으로서, 1937년과 1938년의 대량 작전을 날마다 굴러가게 만든 실무 총책이었다. 작전명령 제00447호에 따른 지역별 할당의 집계와 증액 승인, 민족 작전의 「앨범 절차」 심사가 그의 책상을 거쳤다. 예조프와 프리놉스키 두 사람의 서명이 곧 수천 명 단위의 처형 승인이 되는 절차였다.

그의 활동은 국내에 머물지 않았다. 1937년 8월 그는 소련 대표단을 이끌고 몽골에 들어가 몽골 지도부에 대규모 숙청을 강제하는 작업을 감독했고, 몽골의 대숙청은 이후 수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국가보안기관의 폭력이 국경을 넘어 수출되는 경로에도 그가 서 있었다.

프리놉스키는 심문실의 구타에 직접 가담한 것으로 다수의 진술에서 지목된 인물이기도 하다. 대숙청의 문서들이 공개된 뒤, 그는 정책으로서의 테러와 폭력으로서의 테러가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로 연구자들에게 주목받았다.

1939년 4월 11일, 집행자의 자술서

1938년 9월, 대량 작전이 종결 국면에 들어서고 예조프 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프리놉스키는 해군 인민위원으로 전보됐다. 함대를 지휘해 본 적 없는 그에게 이 인사는 명예로운 승진이 아니라 보안기관으로부터의 격리였다. 반년 뒤인 1939년 4월 6일 그는 체포됐다.

체포 닷새 뒤 그가 베리야 앞으로 쓴 장문의 자술서는 대숙청 연구의 핵심 문서 중 하나가 됐다. 그 안에서 프리놉스키는 자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내부자의 언어로 서술했다. 심문관들이 먼저 사건의 구도를 짜고, 구타로 서명을 받아 내고, 조서를 「문학적으로」 다듬는 과정이 문서 안에 적혀 있다. 물론 이 자술서 자체도 구금 상태에서 작성된 문서로서 사료 비판이 필요하지만, 작전의 기술적 세부에 관한 한 집행 총책 본인의 증언이라는 무게를 지닌다.

1940년 2월 초 그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됐다. 아내와 열일곱 살 아들도 처형됐다. 프리놉스키는 복권되지 않았다. 대숙청의 기구는 자신의 집행자들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닫았고, 그 마지막 문서들 속에서 기구의 작동 원리가 후대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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