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프의 강철 부관
해군인민위원 시절 함대에 무지했던 프리놉스키는 회의마다 엉뚱한 훈수를 두며 "내 말이 맞지?"라고 확인받곤 했는데, 한 회의에서 이반 이바노비치 그렌이 일어나 "아닙니다, 인민위원 동지.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셨고 말씀은 틀렸습니다"라고 답했다.
예조프의 제1부인민위원이자 국가보안총국(GUGB)장으로서 대숙청의 대량 작전 실무를 총괄한 체키스트다. 1937년 모스크바 재판과 소련 내 대량 정치 탄압의 조직에 관여했고, 몽골에서 벌어진 대규모 탄압의 조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예조프 몰락과 함께 1938년 9월 해군인민위원으로 전출됐다가 1939년 4월 6일 체포됐고, 1940년 2월 4일 소련 대법원 군사재판부의 사형 선고에 따라 처형됐다. 이후 복권되지 않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9–1926 보안·정보·치안 · 소련 · 국가보안 기관
경력 연표
- 1919–1926체카·GPU 요원
- 1926–1930아제르바이잔 GPU 책임자
- 1933–1936OGPU·NKVD 국가보안총국 부지도부
- 1936–1938내무인민위원 제1부관·국가보안총국장
- 1938–1939해군인민위원
- 1939–1940체포, 재판과 처형
관련 역사 사건
적색 게릴라에서 국경군 사령관까지, 1916–1936
미하일 프리놉스키는 1898년 1월 펜자 현 나로프차트의 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종교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1916년 1월 기병대에 입대했다가 그해 8월 탈영했고, 아나키스트와 연결되어 펜자에서 반전 시위를 진압하던 미하일 안토노비치 베름 소장이 살해되는 사건에 가담했다. 1917년 3월부터 회계 일을 하다 그해 9월 모스크바 하모브니키에서 적위대에 들어가 조를 지휘했으며, 크렘린 공격전에 참가해 중상을 입었다. 두 사료는 이 아나키스트 시기와 베름 살해를 동기와 분리해 사실 관계로만 전한다.
1918년 7월 그는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해 적군에 들어가 중대장, 제1기병군 특무부서장을 지냈고, 1919년 체카로 전출되어 모스크바 체카 특무부서 실무과 부책임자로서 아나키스트 소탕과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반란 부대 해산 작업에 참여했다. 1919년 12월부터 1920년 4월까지 남부전선 특무부서에서, 1920년에는 남서전선 특무부서 실무과장과 제1기병군 특무부서 부책임자를, 1921–1922년에는 우크라이나 전연방 체카 특무부서 부책임자와 작전 분견대 부책임자를 지냈다. 대량 탄압의 조직자가 되기 전의 그 자신이 탄압의 현장 요원이었던 시기다.
1920년대에 그는 행정 관료로 자리를 굳혔다. 1922–1923년 키예프 GPU 책임자를 거쳐 1923년 6월 23일부터 남동부 지역 OGPU 전권대표부 책임자가 됐고, 그해 11월 북캅카스 군관구 특무부서장으로 옮겼다가 1924년 3월 전권대표부 부대표, 1926년 1월 제1부대표 겸 북캅카스 지역 GPU 군대장을 맡았다. 서술상 차이는 1918년 7월 당·적군 입대 시점에 관한 것으로, 두 사료 모두 1918년으로 본다.
1930년 9월 1일 그는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GPU 책임자에 임명되어 쿨라크 청산 작업의 조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됐다. 이는 소련 내 비러시아 공화국에서 수행된 문서화된 탄압 역할이며, 단순한 승진 경로가 아니다. 1933년 4월 8일에는 소련 OGPU 국경수비·군대 총국장에 임명되어 국경군을 지휘했다. 공식 국경군 지휘관 명부는 그를 1계급 집단군사령관 계급으로 1933–1937년 OGPU, 이어 NKVD의 국경수비(1934년부터 국경·내무군) 총국장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후임은 N. K. 크루친스킨이다.
같은 시기 중앙아시아 국경 너머에서도 군사 작전이 벌어졌다. 1934년 신장 침공은 소련 GPU 부대 2개 여단 약 7천 명이 전차·항공기·포와 겨자 가스를 동원해 성스차이를 지원하기 위해 국경을 넘은 작전이었다. 프리놉스키가 이 작전을 편성한 국경군 총국을 지휘한 것은 사료가 확인하지만, 개인적 지휘 주장은 러시아어 사료의 서술로만 전한다.
1936년까지 그는 신참이 아니라 징벌 기구에서 20년 가까이 일한 노련한 간부였다. 예조프 체제가 들어서면서 그는 내무인민위원 부인민위원으로 대숙청의 실무 책상에 앉게 되는데, 그 대량 작전의 일상적 운영과 몽골 파견은 이미 작성된 대숙청 절의 몫이다.
1937년 여름, 대량 작전의 실무 책상
미하일 프리놉스키는 예조프의 제1부인민위원이자 국가보안총국(GUGB)의 장으로서, 1937년과 1938년의 대량 작전을 날마다 굴러가게 만든 실무 총책이었다. 작전명령 제00447호에 따른 지역별 할당의 집계와 증액 승인, 민족 작전의 「앨범 절차」 심사가 그의 책상을 거쳤다. 예조프와 프리놉스키 두 사람의 서명이 곧 수천 명 단위의 처형 승인이 되는 절차였다.
그의 활동은 국내에 머물지 않았다. 1937년 8월 그는 소련 대표단을 이끌고 몽골에 들어가 몽골 지도부에 대규모 숙청을 강제하는 작업을 감독했고, 몽골의 대숙청은 이후 수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국가보안기관의 폭력이 국경을 넘어 수출되는 경로에도 그가 서 있었다.
프리놉스키는 심문실의 구타에 직접 가담한 것으로 다수의 진술에서 지목된 인물이기도 하다. 대숙청의 문서들이 공개된 뒤, 그는 정책으로서의 테러와 폭력으로서의 테러가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로 연구자들에게 주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