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을 부르다 새장에 갇힌 바다제비
“인간 — 이 말은 자랑스럽게 울린다.” — 『밑바닥에서』(1902)
볼가의 부랑아에서 유럽이 아는 러시아 최고 작가가 되었고, 혁명 전에는 볼셰비키의 돈줄이자 양심이었다. 1917년 이후 레닌의 폭력을 공개 비판하다 사실상 국외로 밀려났지만, 스탈린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소비에트 문학의 간판으로 세웠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교부로 추대된 채 감시 속에 살다 1936년 죽었다. 독살설은 지금도 남아 있다.
경력 연표
- 1892–1917부랑 노동자 출신 작가로 세계적 명성, 볼셰비키 자금 지원
- 1917–1921『노바야 지즌』에 「제때없는 생각들」 — 혁명의 폭력을 공개 비판
- 1921–1933요양 명목의 국외 체류(소렌토)
- 1932–1936귀국, 작가동맹 초대 의장 —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식화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증언자 작가피의 일요일 전야의 대표단에 참여하고 학살을 규탄하는 호소문을 써 체포됐으며, 혁명운동의 자금을 모았다.
- 1917.02–072월 혁명혁명의 기록자1917년 봄 노바야 지즌을 창간해 혁명의 나날을 기록하고 논평했다.
- 1917.10–1918.0110월 혁명비판적 목격자「노바야 지즌」 지면의 「때 이른 생각들」 연재에서 봉기와 새 정부의 초기 조치들을 비판적으로 기록했다.
- 1921–19221921~1922년 대기근공개 구호위원회 설립의 중개자2021년 6월 29일 레닌과 정치국에 공개 구호위원회 결성안을 직접 제안한 중개자였고, 위원회가 해산되자 국제 호소로 방향을 돌렸다.
작품 세계 — 밑바닥의 목소리에서 소비에트 문학의 기념비까지
고리키는 1892년 티플리스 신문에 단편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고리키(쓰라린 자)'라는 필명은 러시아의 현실을 직시하겠다는 선언이었다. 1890년대의 「첼카시」, 「이제르길 노파」 등 초기 낭만주의 단편들은 부랑자·도둑·집시 등 사회 밑바닥 인물들의 내면에서 인간적 긍지를 길어 올려 러시아 문단을 충격에 빠뜨렸다. 첫 창작집 『수필과 단편』(1898)은 즉각 큰 성공을 거두었다.
희곡 『밤주막』(1902)은 몰락한 자들이 모여 사는 지하 숙박소를 무대로 삼아, 체호프와 함께 '새로운 드라마'의 기수로 평가받았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초연은 유럽 순회공연으로 이어졌고, 고리키는 세계적 극작가로 자리 잡았다. 1906년 미국에서 쓴 소설 『어머니』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각성을 다룬 작품으로, 레닌이 '시의적절한 책'이라 평했으며 후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선구로 정전화되었다.
자전 3부작 『유년 시절』·『사람들 속에서』·『나의 대학』(1913~1923)은 개인의 성장과 러시아 민중의 삶을 중첩시킨 걸작으로 꼽힌다. 말년의 『아르타모노프가의 사업』(1925)과 미완의 대하소설 『클림 삼긴의 생애』(1925~1936)는 혁명기 러시아 지식인의 정신을 해부한 야심작으로, 일부 비평가들은 후자를 그의 최고작으로 평가한다. 고리키는 5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소련에서 푸시킨·톨스토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출판된 작가로 남았다.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볼가 강변의 고아 알렉세이 페시코프는 부두 노동자, 빵집 점원, 방랑자로 러시아의 밑바닥을 떠돌며 독학했고, 「쓰라린 자」를 뜻하는 막심 고리키라는 필명으로 러시아 문학의 스타가 되었다. 부랑자들의 세계를 무대에 올린 희곡 『밤주막』(1902)은 유럽을 뒤흔들었다. 그의 명성과 인세는 곧장 혁명 운동의 금고로 흘러들었다.
1905년 1월 22일(구력 1월 9일) 피의 일요일 전야, 고리키는 유혈을 막으려는 지식인 대표단에 참여해 관청을 오갔고, 학살 직후 「러시아의 모든 시민에게」라는 격문을 써서 차르 정부를 살인자로 고발했다. 그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었으나 유럽 전역의 작가와 과학자 들이 벌인 항의 운동으로 한 달 만에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볼셰비키의 최대 재정 후원자가 되어 미국 모금 여행을 다녀왔고, 카프리 섬 망명 시절에는 자기 별장에서 노동자 혁명가들을 위한 당 학교가 열리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때 이른 생각들』, 그리고 귀환
1917년부터 1918년까지 고리키는 자신의 신문 『노바야 지즌』에 「때 이른 생각들」 연재를 이어 가며 10월 봉기의 시기와 방법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오랜 동지 레닌과의 논쟁은 격렬했으나 최종적인 결별은 아니었다. 내전기에 그는 세계문학 출판사와 학자생활개선위원회를 만들어 굶주리는 작가와 과학자 수천 명에게 배급과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그의 집은 페트로그라드 지식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1921년 결핵이 악화되어 이탈리아로 떠났던 그는 1928년부터 소련을 다시 찾았고 1933년 영구 귀국했다. 1934년 제1차 소비에트작가대회를 주재하며 작가동맹의 초대 의장이 되었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식화에 이름을 빌려 주었다. 문학사가들은 이 말년을 두고 여전히 논쟁하지만, 세계 문학과 소비에트 문화 건설을 잇는 다리로서 그가 지닌 권위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다. 1936년 6월 지병으로 사망해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