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을 부르다 새장에 갇힌 바다제비
"인간 — 바로 이것이 진리다!" - 『밑바닥에서』(1902)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목수 막심 페시코프의 아들로 태어난 알렉세이 페시코프는 부두 노동자와 방랑자로 러시아의 밑바닥을 떠돌다 1892년 단편 「마카르 추드라」로 막심 고리키가 되었다. 혁명 전에는 볼셰비키의 최대 후원자였으나 1917~1918년 자신의 신문 『노바야 지즌』에 「때 이른 생각들」을 연재하며 레닌의 폭력을 비판했고, 그 논쟁은 최종 결별이 아니었다. 1921년 결핵 때문에 이탈리아로 떠나 소렌토에 머물렀고, 널리 퍼진 서술은 1932년 10월 귀국으로 보지만 바신스키는 1933년으로 본다. 귀국 뒤 스탈린을 미화하고 집단화와 노동수용소 체계를 옹호했고, 1936년 6월 18일 고르키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독살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892–1917부랑 노동자 출신 작가로 세계적 명성, 볼셰비키 자금 지원
- 1917–1921『노바야 지즌』에 「제때없는 생각들」 — 혁명의 폭력을 공개 비판
- 1921–1933요양 명목의 국외 체류(소렌토)
- 1932–1936귀국, 작가동맹 초대 의장 —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식화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증언자 작가피의 일요일 전야의 대표단에 참여하고 학살을 규탄하는 호소문을 써 체포됐으며, 혁명운동의 자금을 모았다.
- 1917.02–072월 혁명혁명의 기록자1917년 봄 노바야 지즌을 창간해 혁명의 나날을 기록하고 논평했다.
- 1917.10–1918.0110월 혁명비판적 목격자「노바야 지즌」 지면의 「때 이른 생각들」 연재에서 봉기와 새 정부의 초기 조치들을 비판적으로 기록했다.
- 1921–19221921~1922년 대기근공개 구호위원회 설립의 중개자2021년 6월 29일 레닌과 정치국에 공개 구호위원회 결성안을 직접 제안한 중개자였고, 위원회가 해산되자 국제 호소로 방향을 돌렸다.
작품 세계 — 밑바닥의 목소리에서 소비에트 문학의 기념비까지
고리키는 1892년 티플리스 신문에 단편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고리키(쓰라린 자)'라는 필명은 러시아의 현실을 직시하겠다는 선언이었다. 1890년대의 「첼카시」, 「이제르길 노파」 등 초기 낭만주의 단편들은 부랑자·도둑·집시 등 사회 밑바닥 인물들의 내면에서 인간적 긍지를 길어 올려 러시아 문단을 충격에 빠뜨렸다. 첫 창작집 『수필과 단편』(1898)은 즉각 큰 성공을 거두었다.
희곡 『밤주막』(1902)은 몰락한 자들이 모여 사는 지하 숙박소를 무대로 삼아, 체호프와 함께 '새로운 드라마'의 기수로 평가받았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초연은 유럽 순회공연으로 이어졌고, 고리키는 세계적 극작가로 자리 잡았다. 1906년 미국에서 쓴 소설 『어머니』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각성을 다룬 작품으로, 레닌이 '시의적절한 책'이라 평했으며 후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선구로 정전화되었다.
자전 3부작 『유년 시절』·『사람들 속에서』·『나의 대학』(1913~1923)은 개인의 성장과 러시아 민중의 삶을 중첩시킨 걸작으로 꼽힌다. 말년의 『아르타모노프가의 사업』(1925)과 미완의 대하소설 『클림 삼긴의 생애』(1925~1936)는 혁명기 러시아 지식인의 정신을 해부한 야심작으로, 일부 비평가들은 후자를 그의 최고작으로 평가한다. 고리키는 5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소련에서 푸시킨·톨스토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출판된 작가로 남았다.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볼가 강변의 고아 알렉세이 페시코프는 부두 노동자, 빵집 점원, 방랑자로 러시아의 밑바닥을 떠돌며 독학했고, 「쓰라린 자」를 뜻하는 막심 고리키라는 필명으로 러시아 문학의 스타가 되었다. 부랑자들의 세계를 무대에 올린 희곡 『밤주막』(1902)은 유럽을 뒤흔들었다. 그의 명성과 인세는 곧장 혁명 운동의 금고로 흘러들었다.
1905년 1월 22일(구력 1월 9일) 피의 일요일 전야, 고리키는 유혈을 막으려는 지식인 대표단에 참여해 관청을 오갔고, 학살 직후 「러시아의 모든 시민에게」라는 격문을 써서 차르 정부를 살인자로 고발했다. 그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었으나 유럽 전역의 작가와 과학자 들이 벌인 항의 운동으로 한 달 만에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볼셰비키의 최대 재정 후원자가 되어 미국 모금 여행을 다녀왔고, 카프리 섬 망명 시절에는 자기 별장에서 노동자 혁명가들을 위한 당 학교가 열리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때 이른 생각들』, 그리고 귀환
1917년부터 1918년까지 고리키는 자신의 신문 『노바야 지즌』에 「때 이른 생각들」 연재를 이어 가며 10월 봉기의 시기와 방법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오랜 동지 레닌과의 논쟁은 격렬했으나 최종적인 결별은 아니었다. 내전기에 그는 세계문학 출판사와 학자생활개선위원회를 만들어 굶주리는 작가와 과학자 수천 명에게 배급과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그의 집은 페트로그라드 지식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1921년 결핵이 악화되어 이탈리아로 떠났던 그는 1928년부터 소련을 다시 찾았고 1933년 영구 귀국했다. 1934년 제1차 소비에트작가대회를 주재하며 작가동맹의 초대 의장이 되었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식화에 이름을 빌려 주었다. 문학사가들은 이 말년을 두고 여전히 논쟁하지만, 세계 문학과 소비에트 문화 건설을 잇는 다리로서 그가 지닌 권위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다. 1936년 6월 지병으로 사망해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스탈린 시대, 총애받는 계관시인과 감시받는 포로
1928년 5월 스탈린 정부의 초청으로 첫 귀국 방문에 나선 고리키는 샤흐티 재판 시기에 맞춰 소련에 들어왔고, 53명 기술자의 유죄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앞서 탄압받은 전문가들을 변호했던 자신의 개입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이 방문에서 그는 OGPU 부수반장 겐리흐 야고다, 그리고 굴라그의 요직에 있던 OGPU 간부 세묜 피린·마트베이 포그레빈스키와 친분을 맺었다.
모스크바의 리야부신스키 저택과 다차가 그에게 주어졌고 니즈니노브고로드와 그 주는 '고리키'로 개칭되었다. 1932년 창립된 소비에트작가동맹 초대 이사회 의장을 맡았으며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선언되었다. 다만 일부 학자는 그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귀속시키는 것을 부정하는데, 가장 가까운 작품들이 신인(神人) 건설 사상을 지니고 있고 혁명 뒤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작을 쓰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1933년 그는 아베르바흐·피린과 함께 『스탈린 백해-발트 운하』의 책임 편집자였고 서문을 썼지만, 다른 집필자들과 달리 운하 공사 현장을 한 번도 답사하지 않았다. 그는 공사 중 단 한 명의 수감자도 죽지 않았다고 부인했고, 솔제니친은 충분한 거처와 식량이 없어 낮에도 수천 명이 얼어 죽었다고 반박했다. 의뢰받은 르포 「나라와 그 적들」도 그가 쓰지 않았다. 1933년 서문과 관련 글에서 그는 '국가에 유용하게 쓰인' 옛 '인민의 적'의 개조를 예찬했고, 비서 크류치코프에게 백해 운하의 영웅적 사례를 담은 편지를 더 모으라고 지시하며 이 주제에 더 써야 한다고 말했다.
1930년 그는 「적이 항복하지 않으면 적은 파멸된다」를 발표했다. 그 잔혹성에 우려한 작가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항복하지 않는 적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되묻고 무기를 내려놓은 이들을 파멸시키라고 요구한 적은 없다고 부인하면서, 이어 백해 운하 책 서문을 소리 내어 읽으며 옛 '인민의 적'이 변모한 모습을 예찬했다. 로맹 롤랑과의 서신에서 그는 탄압을 정당화하고 고발의 날조 가능성을 부인했다. 역사가 플라토노프의 체포를 그는 플라토노프가 불성실하고 교활한 확신에 찬 군주주의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옹호했고, 1930년 편지에서는 GPU가 오락 기관이 아니라 정치적 필연에 따라 존재한다고 썼다. 롤랑이 기근의 조직자들의 자백이 날조·고문에 의한 것일 수 있다고 반론하자, 고리키는 그런 자백이 가능하며 자신은 진정한 진술을 읽었기 때문에 그렇게 단언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이 편지의 사본을 스탈린에게 보냈다.
1934년 5월 23일 스탈린의 지시로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에 동시에 실린 그의 글 「프롤레타리아 휴머니즘」은 공산주의 대 파시즘의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맥락에서 동성애를 독일 부르주아지의 유해한 속성으로 단정하고, 청년을 부패시키는 동성애를 사회적 범죄로 규정해 처벌하는 나라가 바로 프롤레타리아가 용감하게 일하는 나라라고 했다. 1933년 9월 그는 카타예프에게 기근은 사실이지만 그 원인은 아마도 광범한 파괴 활동에서 찾아야 하며 그것이 우크라이나의 겨울 체포와 흐빌료비·스크리프니크의 자살을 설명해 줄 것이라고 썼다. 그가 집단화에 반대한 대규모 농민 봉기를 알고도 스탈린의 결정을 지지했고 1933년 식량 문제를 쿨라크 탓으로 돌렸다는 점도 같은 기록에 남아 있다.
같은 시기 기록에는 국가와 지식인 사이의 '완충 장치'로서, 그리고 개별 수감자들의 조력자로서의 고리키도 있다. 그의 개입으로 미하일 바흐친의 솔로베츠키 5년형은 6년 유형으로 감형되었고, 빅토르 세르주와 예브게니 자먀친은 국외 이주가 허용되었으며 율리야 단자스 등은 석방되었다. 그는 카를 라데크와 부하린·카메네프의 석방을 위해 애썼다.
1929년 6월 그는 수감자들을 솔로베츠키로 실어 나르던 악명 높은 증기선 '글레프 보키'를 타고 특수목적 솔로베츠키 수용소를 찾아 캠프 책임자의 안내를 받았다. 르포 「솔로프키」에서 그는 이 수용소의 제도와 수감자들의 재교육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며, 과도하게 규제된 생활도 감옥과 닮은 점도 없다고 썼다. 드미트리 리하초프의 회고록에는 14세 수감자가 고문·기아·과로사·즉결 처형에 관한 '모든 진실'을 고리키에게 말했고 고리키가 사람들 앞에서 울며 나왔다는 기록이 전하지만, 이 소년에 관한 이야기는 솔제니친이 처음 전한 것으로 문서가 없어 일부 학자는 전설로 본다.
말년에 고리키는 NKVD의 감시와 후견 아래, 공표되지 않은 불명예 속에서 살았다. 사실상 비공식 가택연금 상태였고 이탈리아 여행도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스탈린과의 관계는 갈등적이었고 연구자들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파올라 초니는 고리키와 스탈린 사이의 실질적 정치적 대립을 확인하는 문서는 없다고 쓰며, 저항이 심리적이었는지 정치적이었는지에 대한 해석은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