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식량인민위원, 네프 농업마르크스주의로 숙청되다
1917년, 우리 당은 '전시공산주의'로 시작해야 했는가, 아니면 1921년에 '네프'라 불리게 된 길로 갈 수 있었는가. 나는 이미 후자의 견해를 고수했다.
스몰렌스크에서 측량기사의 아들로, 반란 전통을 지닌 폴란드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모스크바 '노동자동맹'에 가입하고 스몰렌스크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서클을 조직했으며, 1907년 제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 후 최초의 인민위원회의에서 식량인민위원을 맡았고, 연립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사임했으나 12월까지 실무를 계속했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농업부인민위원을 지내며 네프를 '강력한 농가'를 통한 자금 축적 경로로 해석했고, 경제학자 콘드라티예프를 보호했다. 1937년 6월 11일 체포되어 9월 20일 '모스크바 센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사망 연도에는 1940년설도 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2–1928 농업·토지정책 · 소련 · 농업
경력 연표
- 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가입, 스몰렌스크 최초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 1902RSDLP 모스크바 위원회 위원; 체포되어 야쿠티아 6년 유형
- 1905제네바 《프롤레타리》 편집 서기; 10월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
- 1907RSDLP 제5차 대회 볼셰비키 중앙위원 선출
- 1917첫 소브나르콤 식량인민위원 (10월–12월); 연립정부 불발로 사퇴
- 1922–1928농업부인민위원
- 1926–1930국제농업연구소 소장 겸 농민인터내셔널 사무총장
- 1929–1935《카토르가 이 실카》 편집자, 옛 정치범·유형자협회 출판국장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1905년 10월 볼셰비키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총파업과 소비에트 조직화를 지도했으며, 당 중앙기관지 「노바야 지즌」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 1917.10–1918.0110월 혁명초대 식량인민위원10월 26일(11월 9일) 소브나르콤 초대 식량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요구하며 11월 4일(17일) 중앙위원회와 소브나르콤에서 사퇴 성명에 서명했으나, 12월까지 직무를 계속 수행했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파르티잔 대원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네프 농업마르크스주의자로서 농업경제 정책 수립에 참여
- 1937–1938대숙청1937–1938년 체포·처형
1917년 11월, 연립정부를 위한 사퇴
10월 혁명 직후 구성된 최초의 인민위원회의에서 테오도로비치는 식량인민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10일 만에 그는 다른 볼셰비키 인민위원 여덟 명과 함께 사임했다. 사유는 레닌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을 포괄하는 '제정당 소비에트 연립정부' 구성을 거부한 데 대한 항의였다.
1917년 11월 4일(구력), 노긴·리코프·밀류틴·테오도로비치·실랴프니코프 등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한 성명에서 "순수 볼셰비키 정부는 정치적 테러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들은 "그러한 정권은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이탈을 초래하고 혁명과 국가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격분했고, 중앙위원회는 사퇴자들을 '탈영병'이라고 비난했으나 며칠 뒤 좌파 사회혁명당과의 연정이 성사되면서 당의 입장은 사실상 철회되었다.
테오도로비치는 12월까지 실무를 계속했지만, 첫 내각에서 이미 주변화되었다. 이 사건은 훗날 그가 네프기 농업정책에서 소수파로 밀려나고 1930년 '콘드라티예프주의' 연루 혐의로 공격받을 때마다 다시 소환되는 정치적 낙인이 되었다. 스탈린은 1930년 몰로토프에게 보낸 서한에서 테오도로비치를 '악당'이라 부르며 그를 부하린·리코프·톰스키와 연결하는 고리로 지목했다. 1917년 11월의 그 짧은 저항은 그의 경력 전체를 관통하는 그림자였다.
농업마르크스주의, 콘드라티예프 사건, 그리고 《카토르가 이 실카》 편집 (1926–1935)
1920년대 테오도로비치는 네프를 자본주의적 농업 부문에서 '강력한'(крепкие) 농민 경영을 발전시켜 자금을 축적하는 방식으로 해석했다. 그 축적은 훗날 농촌 자체를 포함한 공업화의 자금 원천이 되고, 따라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자금 원천이 된다는 것이었다. 농업인민위원회에서 그는 농업경제·통계국장인 경제학자 N. D. 콘드라티예프의 업무를 감독하며 그에게 일정한 보호와 후원을 베풀었는데, 러시아어 자료는 그가 1920년 콘드라티예프의 석방에 관여했다고 적는 반면 영어 자료는 그 방향을 뒤집어 서술하므로 이 세부는 확인이 필요하다.
1926년부터 그는 국제농업연구소 소장을, 1928–1930년에는 농민인터내셔널(크레스틴테른) 사무총장을 맡았다. 크레스틴테른은 1923–1933년 활동한 국제 농민 혁명 조직으로, 1923년 10월 창립대회에서 결성되었으며 《크레스티얀스키 인터나치오날》과 《메즈두나로드니 크레스티얀스키 뷰레텐》을 발행했다. 다른 자료들은 사무총장직을 1928년 3월부터로, 연구소 소장직도 같은 시점부터로 적어 1926년설과 차이가 있다. 그는 1923년 창립대회 대표이기도 했고, 1928년 3월 '농민 편향'으로 해임된 알렉산드르 스미르노프를 이어받았으며 제15·16차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대회 대표였다.
1928년 2월 스미르노프가 스탈린의 곡물 징수대 파견에 저항한 '농민 편향'으로 해임된 몇 주 뒤 테오도로비치는 농업부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났으나, 이 단계에서는 공개적으로 비판받지 않았다. 1930년 7월 콘드라티예프가 비합법 '농민노동당' 조직 혐의로 체포되자 스탈린은 그를 '악당'이라 부르며 콘드라티예프와 부하린·리코프·톰스키 사이의 연결고리로 의심했다. 몰로토프에게 보낸 서한에서 스탈린은 콘드라티예프–그로만–사디린 사건 조사를 '철저히' 밀어붙이라며 그 조사가 소콜니코프와 테오도로비치를 거쳐 이들과 우파를 연결하는 직접적 고리를 드러내리라 확신한다고 썼다. '콘드라티예프주의' 타도의 물결은 그 자신에 대한 비난과 함께 그의 직책을 앗아갔고, 그는 옛 정치범·유형자협회의 출판부와 기관지를 맡게 되었다. 1930년 11월 22일 《프라우다》는 그가 자신의 네프 이해가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는 '회개' 편지를 실었다.
1929–1935년 그는 협회 기관지 《카토르가 이 실카》의 편집자였다. 1921년 모스크바에서 창간된 이 역사혁명지의 역대 편집장은 V. D. 빌렌스키시비랴코프(1923–1927), F. Ya. 콘(1927–1929), 테오도로비치(1929–1935)였다. 주요 분야는 러시아 혁명운동사, 감옥·카토르가·유형·이민의 역사, 부고, 서지, 연보였고, 콜론타이·마누일스키·미츠케비치·네프스키·세마시코·야로슬라프스키 같은 볼셰비키와 코민테른 활동가, 피그네르·프롤렌코·야키모바디콥스카야 같은 옛 나로드나야 볼랴 인물들이 기고했다. 기관지는 모두 116호를 냈다.
1935년 6월 25일 전연방 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 결정으로 옛 정치범·유형자협회가 해산되었다. 옛 볼셰비키협회의 종료 시점은 자료마다 다르다. 협회 전용 문서는 1935년 5월 16일 당 지도부의 지시로 자진 해체되었다고 적는 한편, 협회 해산을 다룬 서술은 5월 25일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폐지되었다고 전한다. 중앙집행위 간부회 결정설과 중앙위원회 결정설도 함께 전해지므로 폐간의 형식적 근거는 하나로 단정할 수 없다. 역사가 니콜라 베르트가 전한 혐의에는 협회들이 반대파에 대한 사형 폐지를 청원하고 이전 시기의 혁명 정신을 지나치게 배양했다는 것이 있었고, 로버트 콘퀘스트는 반대파 처형에 반대하는 폴리트뷰로 청원을 위해 영향력 있는 인사들 사이에서 서명을 모은 것을 주된 원인으로 보며, 마르크 융에는 이 해산을 공공단체에 대한 일반적 국가 정책의 틀에 놓는다. 협회 해산 후 구성원 대부분은 총살되거나 스탈린의 수용소에 갔는데, 이러한 운명은 그 자신에게도 기록되어 있다. 1937년 6월 11일 체포되어 그해 9월 20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반소비에트 테러조직 가담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되었으며 모스크바 돈스코예 묘지에 안장되고 1956년 4월 11일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