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아돌포비치 테오도로비치

Иван Адольфович Теодорович
소련 러시아 1875–1937 ✕ 처형

첫 식량인민위원, 네프 농업마르크스주의로 숙청되다

1917년, 우리 당은 '전시공산주의'로 시작해야 했는가, 아니면 1921년에 '네프'라 불리게 된 길로 갈 수 있었는가. 나는 이미 후자의 견해를 고수했다.

1895년부터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로, 10월 혁명 후 첫 식량인민위원을 지냈다. 소비에트 권력의 초기 식량 정책의 제도적 토대를 놓았고, 1920년대에는 네프를 '강력한 농가'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이행 경로로 이론화한 대표적 농업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농업부인민위원과 국제농업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콘드라티예프를 후원했으나, '콘드라티예프주의' 분쇄 캠페인 속에서 정치적 공격을 받고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1937년 체포되어 대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17년 11월, 연립정부를 위한 사퇴

10월 혁명 직후 구성된 최초의 인민위원회의에서 테오도로비치는 식량인민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10일 만에 그는 다른 볼셰비키 인민위원 여덟 명과 함께 사임했다. 사유는 레닌멘셰비키사회혁명당을 포괄하는 '제정당 소비에트 연립정부' 구성을 거부한 데 대한 항의였다.

1917년 11월 4일(구력), 노긴·리코프·밀류틴·테오도로비치·실랴프니코프 등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한 성명에서 "순수 볼셰비키 정부는 정치적 테러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들은 "그러한 정권은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이탈을 초래하고 혁명과 국가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격분했고, 중앙위원회는 사퇴자들을 '탈영병'이라고 비난했으나 며칠 뒤 좌파 사회혁명당과의 연정이 성사되면서 당의 입장은 사실상 철회되었다.

테오도로비치는 12월까지 실무를 계속했지만, 첫 내각에서 이미 주변화되었다. 이 사건은 훗날 그가 네프기 농업정책에서 소수파로 밀려나고 1930년 '콘드라티예프주의' 연루 혐의로 공격받을 때마다 다시 소환되는 정치적 낙인이 되었다. 스탈린은 1930년 몰로토프에게 보낸 서한에서 테오도로비치를 '악당'이라 부르며 그를 부하린·리코프·톰스키와 연결하는 고리로 지목했다. 1917년 11월의 그 짧은 저항은 그의 경력 전체를 관통하는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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