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이바노비치 칼리닌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Кали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5–1946 ○ 자연사

소련의 장기 공식 국가원수

1921년 3월 1일 크론슈타트 반란 직전, 칼리닌은 아내와 함께 무장 없이 요새로 들어가 앵커광장에서 박수로 맞았으나 수병들의 야유와 고함으로 연설은 중단되었다.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금속 노동자가 된 볼셰비키로, 1919년부터 1946년 사망까지 27년간 소련의 공식 국가원수로 있었다. 대숙청기의 핵심 법령들, 즉 1932년 8월 7일 국가재산 보호에 관한 법령, 1934년 12월 1일 테러 사건 신속처리 법령, 1935년 4월 7일 형사책임 연령을 12세로 낮춘 법령에 서명했다. 벨라루스 제1서기가 3천 명 총살과 9천 8백 명 추방을 제안한 전문에도 '칼리닌 찬성'으로 기록되었고, 1940년 3월에는 폴란드 장교·수감자 2만 5천 7백 명 처형 명령에 서명했다. 그러나 1932년 5월 4일 농민 3만 8천 가구 추방 표결에서는 근거가 없다는 의견을 밝혔고, 2주 뒤 정치국의 결정 번복으로 이미 시작된 조치가 중단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소련 정치국

1946.06 재임 중 사망

관련 역사 사건

‘전연방의 장로’: 민중의 탄원과 서명한 공포

칼리닌은 스탈린 최측근 가운데 드물게 농민 출신이었고, 이 천한 출신은 공식 언론에서 널리 선전되었다. 언론은 그를 마을 공동체의 말에서 온 ‘전연방의 장로’라 불렀으며, 이는 국가원수로서의 직함과 나란히 굳어진 별칭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소련 정부에서 그의 결정권은 명목상의 것이었다.

‘장로’ 이미지는 대규모 탄원 체계를 통해 작동했다. 1920~1940년대 소련 시민들은 감산(쿨라크 축출) 문제, 부당한 체포, 군사학교 입학, 일자리 문제 등으로 칼리닌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는 비서국을 통해 또는 직접 이들 중 다수를 도왔다. 4반세기 동안 약 800만 명이 그의 접견실을 거쳐 갔고, 그 요청 가운데 상당수가 받아들여졌다.

이 이미지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스탈린 개인숭배기에 ‘할아버지 칼리닌’은 국가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예술에서 널리 재현되었고, 그가 탄압 피해자들을 도운 사례들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키로프 암살 뒤 그가 직접 서명한 반테러 법령에 따라 1938년 10월 그의 아내 예카테리나 로르베르크가 체포되었고, 그녀는 1945년 6월에야 풀려났다.

그의 권한은 명목상의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스탈린 시대에 칼리닌이 순전히 명목상의 직위를 맡았고 실질적 영향력은 매우 적었다고 썼다. 연구자들은 아내의 체포 이후 그가 부당하게 탄압받는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여지가 줄었고, 대부분의 경우 가사와 일상 문제에서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었다고 본다.

히비노고르스크 주민들과의 만남에서 기록된 발언은 이 모순을 압축한다. “내게 아무것도 요청하지 마시오. 나는 무권력자요. 몰로토프에게 가시오.” 흐루쇼프의 증언에 따르면 칼리닌은 “모든 법령의 명목상 서명자였고 실제로는 정부 업무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그가 오랫동안 자신의 운명을 스탈린과 묶기를 두려워했다고 기록했다.

충성에도 불구하고 칼리닌이 사적으로 스탈린을 비판한 기록이 있다. 이반 그론스키는 1936년의 대화를 남겼는데, 비판가 표트르 로시코프가 왜 적이 이렇게 많은지, 레닌 아래에서는 체포되지 않았음을 지적하자 칼리닌은 이렇게 답했다. “스탈린은 레닌이 아니다. 레닌 아래에서는 트로츠키도, 지노비에프도, 부하린도 모두 일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다르다. 그는 레닌의 지식도 경험도 권위도 없다. 그는 이 사람들을 잘라내려고 작정했다.”

‘장로’ 이미지의 반대편에는 그가 서명한 탄압 법령들이 있다. 러시아 소련 측 자료는 1932년 5월 4일의 이견에 대한 서술에 이어 곧바로 “동시에 1930년대 대량 탄압기의 악명 높은 법령들은 칼리닌의 서명으로 인증된다”고 적는다. 같은 자료는 칼리닌이 사형 명단 승인에 적극 참여한 정치국원 가운데는 들지 않았음을 기록하는 한편,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의 탄압 확대에 대한 그의 지지와 샤란고비치 전문에 적힌 ‘칼리닌 찬성’ 항목도 전한다.

자신이 서명한 법률로 체포된 아내

1934년 12월 1일 키로프 암살 직후, 칼리닌은 테러 사건 재판 절차를 열흘로 단축하고 피고인의 항소권과 사면 청구권을 박탈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이 법은 대숙청의 핵심 법적 도구가 되었다. 4년 후인 1938년 10월 25일, 칼리닌의 아내 예카테리나 로르베르크(1906년 결혼한 에스토니아계 직조공 출신)가 바로 그 법률에 따라 NKVD에 체포되었다. 혐의는 '반소비에트 활동과 트로츠키주의자·우익과의 연계'. 그녀는 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고문을 받고 1939년 4월 22일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전연방의 장로'로서 매년 수십만 통의 탄원서를 접수하던 칼리닌은 정작 아내를 구할 어떤 힘도 행사하지 못했다. 목격자들은 그가 '내게 아무것도 요청하지 마시오. 나는 무권력자요'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1944년 장암 수술을 앞두고서야 스탈린에게 아내 석방을 간청했고, 예카테리나는 1945년 6월 풀려나 임종하는 남편을 간호했다. 그녀는 1954년 복권되었다. 이 일화는 스탈린 최측근조차 공포에서 예외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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