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과학아카데미 회의에서 코마로프는 리센코의 유전학 공격을 공개 지지했고, 회의가 끝난 뒤 바빌로프와 코스토프 앞에서는 리센코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바빌로프는 이런 이중성을 두고 그를 '바실리 슈이스키' 같다고 비꼬았다.
블라디미르 코마로프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를 지낸 식물학자이자 식물지리학자다. 극동·만주·캄차카·중앙아시아를 탐사하며 방대한 표본을 수집했고, 『만주의 식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주도로 편찬된 30권의 『소련의 식물』은 소련 분류학의 금자탑이며, 형태-지리적 방법론을 체계화하고 극동·우랄·캅카스 등지에 분원을 세워 과학의 지방 분산을 추진했다.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하며 아카데미를 이끌었고, 리센코를 공개 지지하면서 사적으로는 바빌로프에게 비판을 털어놓는 이중적 태도로 스탈린기 과학자의 곤경을 상징했다. 전시 자원동원위원회를 이끌었고, 사후 그의 이름은 코마로프 식물연구소에 헌정되었다.
1919년 3월 16일부터 30일까지, 의사 출신 구볼셰비키가 스베르들로프의 급서로 공백이 된 소비에트 국가원수직을 대행했다. 불과 2주였지만 혁명 정권의 초기 권력 계승에서 결정적 틈을 메운 순간이었다.
1895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1905년 12월 무장봉기 등 지하운동을 거쳐, 1919년 3월 스베르들로프 사후 2주간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장 대행으로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러시아 보건인민위원을 지냈고, 1927년부터 사망까지 24년간 중앙감사위원장으로 당의 회계와 규율을 관장했다. 스탈린 노선을 지지하며 숙청기에도 입지를 유지했으나 사위 류틴은 당에서 제명·숙청되는 역설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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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참여 · RSDLP 입당
1896–1905체포·유배·망명 반복, 해방노동 그룹 합류, 이스크라 협력, 베를린·카잔 의학 학위
1905–1907모스크바 당위원 · 소비에트 대의원, 12월 무장봉기 참여, 재차 체포 후 프랑스 망명
1921년 3월 1일, 크론슈타트 반란 직전, 칼리닌은 무장도 없이 아내와 함께 요새로 들어가 수병들을 설득하려 했다. 박수로 시작된 그의 연설은 곧 야유에 묻혔고, 그는 침묵 속에 크론슈타트를 떠났다.
농민 출신 볼셰비키로 1919년부터 1946년 사망까지 소련의 공식 국가원수를 지냈다. '전연방의 장로'로 불리며 민중의 탄원을 받고 문맹 퇴치 운동을 이끄는 등 체제의 인간적 얼굴 역할을 했으나, 대숙청의 법적 토대가 된 테러사건 신속처리법령에 서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실권은 없었지만 27년간 소비에트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공습 중 대피를 거부하며 말했다. "부상자들은 숨을 수 없소. 의사의 자리는 환자 곁이오."
소비에트 신경외과의 창시자이자 대조국전쟁기 적군 주임외과의로, 네 차례 전쟁에서 야전외과를 혁신했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유리예프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러일전쟁에 자원해 부상자 후송 중 총상을 입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았다. 1932년 세계 최초의 중앙신경외과연구소를 모스크바에 창설하고 뇌종양 수술을 대중화했으며 구근절개술을 개발했다. 1937년부터 적군 주임외과의로서 야전의료를 지휘했고, 65세에도 전선에서 수천 건의 수술을 집도하며 페니실린 도입을 주도했다. 그의 지휘 아래 적군 의무대는 부상병 72.3%를 전선에 복귀시켰고 단 한 건의 감염병 유행도 없었다. 1944년 소련 의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로 취임했으며, 3차례 뇌졸중 끝에 1946년 70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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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05러일전쟁 의무병, 부상자 후송 중 총상, 게오르기 십자훈장
1906–1910유리예프 대학 의학부 졸업, 박사학위, 독일·스위스 연수
1910–1917유리예프 대학 외과 교수, 1차대전 북서전선 적십자 외과고문, 2군 외과고문, 주임군사위생감독(1917.3–5)
1918–1923보로네시 대학 외과 교수, 적군 군병원·야전외과 강좌 조직, 피로고프 의학회 창립
1935년 국제연맹 총회 연단에서 리트비노프는 두 단어로 자신의 외교 철학을 요약했다: "Мир неделим" — 평화는 분할될 수 없다. 파시즘의 위협 앞에서 한 지역의 평화만으로는 안전할 수 없으며, 가까운 이웃이든 먼 이웃이든 모두의 평화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 구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볼셰비키 혁명가 출신 외교관으로, 1930년대 외무인민위원 시절 국제연맹에서 반파시즘 집단안보 노선을 주도하고 1933년 미소 국교 정상화를 이끌었다. 파시즘에 맞선 광범한 동맹을 추구했으나, 독일과의 협상으로 방향을 틀려던 스탈린은 1939년 5월 그를 해임하고 몰로토프를 세웠다. 유대인 외무장관의 퇴진 자체가 외교 노선 전환의 신호였다. 독소전쟁 발발 후 복권되어 주미 대사와 외무부인민위원으로 연합국 외교에 복무했다.
"높은 템포를 위해 서 있는 것이 낮은 템포를 위해 앉아 있는 것보다 낫다" — 1920년대 계획방법론 논쟁에서 유전론자들을 향한 스트루밀린의 일갈.
소련 계획경제의 지적 토대를 세운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 세계 최초의 물질수지 체계를 개발하고, 노동생산성의 '스트루밀린 지수'를 정식화했으며, 초등 의무교육의 경제적 수익률을 최초로 계측했다. 1897년 혁명운동에 투신해 멘셰비키로 세 차례 체포·유배되었고, 1923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193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레닌상·스탈린상 수상, 사회주의노동영웅(1967).
1920년대 소련 군사 이론의 대논쟁에서 투하쳅스키는 스베친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스베친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적도, 되려 한 적도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는 제국주의 간섭의 대행자다." 학문적 논쟁은 정치적 공격으로 변질되었고, 스베친은 끝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차르 장군 출신의 소련 최고 군사이론가. 『전략』(1927)에서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미래 전쟁을 경제적 총력전으로 예견했으나, 그의 경고는 외면되었고 1938년 숙청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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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03미하일롭스크 포병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904–05러일전쟁 참전: 제22동시베리아연대 중대장, 제16군단 참모
1914–16제1차 세계대전: 제6핀란드소총연대장, 흑해해병사단장, 소장 진급
1918볼셰비키 편입, 전러시아 주참모부장 역임
1918–31참모본부 아카데미(후일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전략 및 전쟁사 주임 지도관
흐루쇼프의 회고: "당내에서 야로슬랍스키를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렀다." 그가 내건 구호 — "종교에 대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야로슬랍스키는 소비에트 반종교 정책의 최고 이데올로그로, '전투적 무신론자동맹'(1925~1943) 의장으로서 조직적 무신론 운동을 총괄했다. 1898년 RSDLP에 입당,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을 지냈다. 1924년부터 10년간 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로 당내 숙청을 주도했으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성서》 등 방대한 무신론 저작을 남겼다.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이자 공식 당사 해석자였고, 1939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모든 것을 말했다, 어떤 관대함도 바라지 않는다. 완전한 복권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러나 언젠가 내 무죄가 밝혀지거든 사후에 당적을 회복시키고 신문에 복권 소식을 실어 달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의 유대인 멜라메드 집안에서 태어나 1901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 참가와 유형을 거쳐 파리로 망명, 프랑스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했다. 1921년부터 1937년까지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사무총장으로 국제 노동운동의 좌파 축을 조직했다. 1939년 외무부인민위원, 전시에는 소빈포름뷰로를 이끌며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를 감독했다. 1949년 체포되어 1952년 JAC 재판에서 법정 자백을 철회하고 기소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으나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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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08RSDLP 입당, 카잔에서 1905년 혁명 참가, 체포·유형 후 해외 탈출
1929년 대공황을 예측하고도 자본주의의 적응력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연구소가 폐쇄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1920년대 말, 모두가 자본주의 안정화를 확신할 때 대공황을 예측했고, 모두가 자본주의 붕괴를 말할 때 그 종말을 예측하여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1927년부터 20년간 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를 이끌며 코민테른 최고의 경제분석가로 활약했다. 1929년 대공황의 도래와 종료를 정통 노선에 역행하여 정확히 예측해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으나, 전후에는 전시 국가개입으로 자본주의가 적응·안정화될 수 있다고 분석한 저작으로 1947년 연구소 폐쇄와 함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1963년 레닌상을 수상했고, 유언에 따라 사후 공개된 유고에서는 소련 관료제의 변질과 국제주의 포기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나치의 회유에 대한 카르비셰프의 답변: "신념은 이빨과 함께 빠지지 않는다. 나는 군인이며 내 의무에 충실하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내전을 거친 군사공학자로, 100여 편의 논문을 통해 소련 축성학을 정립하고 프룬제 아카데미와 참모본부 아카데미에서 적군 지휘관 세대를 가르쳤다. 브레스트 요새, 스탈린 라인, 만네르하임 선 돌파 등 주요 방어·공세 작전의 공학적 기반을 설계했다. 1941년 포로가 된 후 나치는 그를 '러시아 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세우려 했으나 3년 반 동안 모든 회유를 거부하고 수용소 저항운동을 이끌었으며, 1945년 2월 마우트하우젠에서 영하 12도 얼음물 고문 끝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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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05제1동시베리아 공병대대 전신중대장, 러일전쟁 참전, 5개 훈장
1908–1911니콜라옙스크 군사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1911–1917브레스트 요새 건설, 1차대전 참전(브루실로프 공세), 중령
1918–1920동부·남부전선 방어선 구축, 페레콥·촌가르 공세 공병지원
1923–1934공병위원회 위원장, 프룬제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관, 스탈린 라인 설계
1934–1941참모본부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수, 공병 중장(1940), 군사학 박사(1941)
1943년 5월, 스탈린 앞에서 어느 기관총을 채택할지 묻자 자신의 DS-39가 아닌 경쟁작 고류노프의 SG-43을 택했다: 'SG-43이 의심의 여지 없이 더 우수합니다.'
툴라의 대장장이 집안에서 교구학교 3년만 마친 데그탸료프는 차르 군대의 병사에서 소련 총기설계의 창시자가 되었다. 블라디미르 표도로프의 조수로 자동화기를 배워 1918년 코브로프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화기설계국을 이끌었고, 1927년 붉은군대 주력 경기관총 DP-27을 완성했다. DShK, PPD, PTRD-41, RPD 등 19종이 제식 채택되었고, 그의 설계국은 러시아 최대 군수기업 데그탸료프 공장(ZiD)으로 성장했다. 1940년 스탈린에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노동영웅, 스탈린상 4회, 기술과학 박사, 공병포병소장을 지낸 그는 전간기부터 종전까지 소련 보병화기의 계보를 홀로 그려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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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05오라니옌바움 사관학교 부설 총기작업장 사병 총기수리공
1906–1917V.G. 표도로프의 조수 — 최초의 러시아 자동소총 개발 참여
1918–1931코브로프 기관총공장 시험작업장장, 소련 최초 화기설계국 운영
1927DP-27 경기관총 붉은군대 제식 채택
1930–1939DK/DShK 대구경 중기관총, PPD 기관단총, DS-39 중기관총 개발
1937년 5월 28일, NKVD가 넘긴 붉은 군대 지휘관 26명 명단에 직접 펜으로 썼다: "예조프 동지에게. 모든 악당을 잡아들이시오. 1937년 5월 28일. K. 보로실로프."
차리친 전투에서 스탈린과 맺은 인연으로 소련 최장수 국방수장(1925~1940)이 된 혁명군인이자 원수. 붉은 군대의 현대화·기계화를 진두지휘하는 한편, 대숙청 국면에서 185개 처형 명단에 서명하며 장교단 말살을 직접 승인했다. 겨울전쟁 참패로 국방인민위원에서 물러났으나, 독소전쟁기에는 빨치산 총사령관과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정치국에 34년 반 동안 머물며 최고 기록을 세웠고, 흐루쇼프 축출을 시도한 1957년 반당그룹 사건에도 살아남아 1960년까지 최고소비에트 의장으로 재임했다.
한밤중, 흰 셔츠에 멜빵 차림으로 지도를 들여다보던 샤포시니코프는 젊은 장교의 실수에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았다. "자네, 그게 뭡니까(голубчик)?" 그 부드러운 한마디에 장교들은 땅속으로 꺼지고 싶어했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제정 장교 출신으로 붉은 군대의 작전 교리를 체계화한 군사 이론가. 3권의 『군대의 두뇌』(1927–1929)는 현대전에서 참모본부의 기능과 구조를 분석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오늘날까지 러시아 참모 아카데미 교과 과정에 남아 있다. 스탈린은 그를 유일하게 이름과 부칭으로 부르며 깊이 신뢰했지만, 1937년 투하쳅스키 재판의 특별재판부에 참여해야 했고 NKVD는 샤포시니코프에 대한 공작 파일도 작성 중이었다. 1941년 가을 모스크바 반격의 설계자이며, 폐결핵으로 죽기 직전까지 스탈린의 최측근 군사 고문이었다.
나는 피고인 공산주의자로서, 내 정치적 명예와 혁명가로서의 명예, 그리고 내 공산주의 이상을 변호한다. 내 전 생애의 의미가 이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 있다.
인쇄공·노동운동가로 출발해 1923년 반정부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라이프치히 방화 재판에서 나치에 맞선 법정 변론으로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서기장에 올라 반파시즘 인민전선 노선을 정식화했으며, 전후 불가리아 최초의 공산정부 수반이 되었다.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연방 구상을 추진했으나 스탈린-티토 결별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