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1953

스탈린 시대의 사람들 448명

전쟁과 공포의 시대를 집행하고, 견디고, 살아 낸 사람들.

파벨 밀류코프

Павел Милюков
제정·백색진영 소련 러시아 1859–1943 ○ 자연사

입헌민주당(카데트)의 지도자: '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1916년 11월 두마 연단에서 그는 정부의 실패를 하나하나 열거한 뒤 매번 같은 후렴구를 던졌고, 의원들은 "반역이다!"라고 외쳐 답했다.

입헌민주당(카데트) 지도자이자 역사가. 1916년 '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연설로 차르 체제를 뒤흔들었고, 외무장관 시절 4월 위기를 촉발했다. 망명 후 파리에서 신문을 발행했으며, 대독소전 때 소련 편에 섰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
  • 1906비보르크 선언 기초 — 의회 해산에 대한 저항 촉구
  • 1907–1917제3·4대 두마 의원, 카데트 원내대표
  • 1915진보블록(Progressive Bloc) 결성 주도
  • 1916.11'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연설 — 슈튀르메르 정부 맹비판
  • 1917.3–5임시정부 외무장관 — 밀류코프 비망록으로 4월 위기 촉발 후 사임
  • 1917.8코르닐로프 사건 — 케렌스키·코르닐로프 대립 속 혼란 가중
  • 1920–1940파리에서 망명 신문 『최신소식』 발행
  • 1941–1943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련 지지 — 스탈린그라드 승리에 기뻐함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크릴로프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рыл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63–1945 ○ 자연사

소련 조선과학의 아버지, 뉴턴 『프린키피아』를 러시아어로 옮긴 수학자

손자 안드레이 카피차가 "왜 혁명 때 장군인 할아버지는 총살되지 않았어?" 하고 묻자, 크릴로프는 짧게 답했다. "장군도 장군 나름이란다."

제정 말기부터 소련까지 활동한 수학자·조선공학자. 마카로프 제독과 선박 불침몰성 이론을 정립했고, 1915년 뉴턴 『프린키피아』를 러시아어로 완역했다. 혁명 후 조선과학 토대를 닦고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884–1887해군 소위·나침반부 근무, 자차 이론 첫 연구
  • 1888–1890니콜라옙스크 해군사관학교 조선학과 수료
  • 1890–1908해군사관학교·해군대학 교수, 조선에 수학을 최초로 체계 응용
  • 1900–1908해군성 실험수조장 — 조선 연구 기초 마련
  • 1908–1911해군기술위원회 위원장·수석 조선감독관
  • 1911–1917해군장관 특별임무 담당 대장, 세바스토폴급 전함 설계
  • 1915뉴턴 『프린키피아』 라틴어 원전 러시아어 최초 완역
  • 1916페테르부르크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수리물리학)
  • 1919–1920해군대학장
  • 1928–1931소련 과학아카데미 물리수학연구소 소장
  • 1938–1941나침반 편차·자이로콤파스 이론 출판, 스탈린상 1급
  • 1943사회주의노동영웅 — 조선과학 평생 공로

블라디미르 레온티예비치 코마로프

Владимир Леонтьевич Комар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69–1945 ○ 자연사

스탈린 시대 과학아카데미를 이끈 식물학자

1939년 과학아카데미 회의에서 코마로프는 리센코의 유전학 공격을 공개 지지했고, 회의가 끝난 뒤 바빌로프와 코스토프 앞에서는 리센코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바빌로프는 이런 이중성을 두고 그를 '바실리 슈이스키' 같다고 비꼬았다.

블라디미르 코마로프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를 지낸 식물학자이자 식물지리학자다. 극동·만주·캄차카·중앙아시아를 탐사하며 방대한 표본을 수집했고, 『만주의 식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주도로 편찬된 30권의 『소련의 식물』은 소련 분류학의 금자탑이며, 형태-지리적 방법론을 체계화하고 극동·우랄·캅카스 등지에 분원을 세워 과학의 지방 분산을 추진했다.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하며 아카데미를 이끌었고, 리센코를 공개 지지하면서 사적으로는 바빌로프에게 비판을 털어놓는 이중적 태도로 스탈린기 과학자의 곤경을 상징했다. 전시 자원동원위원회를 이끌었고, 사후 그의 이름은 코마로프 식물연구소에 헌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4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졸업, 식물학 학위
  • 1895–1897극동·만주·한반도 북부 탐사
  • 1899–1931제국 식물원(후일 식물연구소) 연구원
  • 1920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30–1936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36–1945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41–1945우랄·서시베리아·카자흐스탄 자원 동원 위원회 의장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포툠킨

Владимир Петрович Потёмкин
외교 소련 러시아 1874–1946 ○ 자연사

폴란드 국가의 사망을 선언한 외교관, 교육인민위원이 되다

1939년 9월 17일 새벽 3시, 포툠킨은 폴란드 대사에게 "폴란드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읽어주었다. 소련군은 이미 국경을 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포툠킨은 교사와 지하 마르크스주의 선전원에서 출발해 외교관으로 전환, 1939년 9월 폴란드 대사에게 국가 소멸을 통보한 인물이다. 이후 러시아 교육인민위원으로 교육학 아카데미를 창설하고 3권의 『외교사』를 편찬해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8–1917모스크바·예카테리노슬라프 김나지움 교사, 지하 마르크스주의 선전원
  • 1919–1920제6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남부전선 정치국장
  • 1924–1932주이스탄불 총영사 → 주그리스 전권대표
  • 1932–1934주이탈리아 전권대표 (1933년 소련-이탈리아 우호조약 서명)
  • 1934–1937주프랑스 전권대표 (1935년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 서명)
  • 1937–1940제1외무인민부위원
  • 1940–1946러시아 교육인민위원 · 교육학 아카데미 초대 총재

미하일 표도로비치 블라디미르스키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Владимирский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74–1951 ○ 자연사

4반세기 동안 당의 회계를 감시한 구볼셰비키

1919년 3월 16일부터 30일까지, 의사 출신 구볼셰비키가 스베르들로프의 급서로 공백이 된 소비에트 국가원수직을 대행했다. 불과 2주였지만 혁명 정권의 초기 권력 계승에서 결정적 틈을 메운 순간이었다.

1895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1905년 12월 무장봉기 등 지하운동을 거쳐, 1919년 3월 스베르들로프 사후 2주간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장 대행으로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러시아 보건인민위원을 지냈고, 1927년부터 사망까지 24년간 중앙감사위원장으로 당의 회계와 규율을 관장했다. 스탈린 노선을 지지하며 숙청기에도 입지를 유지했으나 사위 류틴은 당에서 제명·숙청되는 역설을 안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참여 · RSDLP 입당
  • 1896–1905체포·유배·망명 반복, 해방노동 그룹 합류, 이스크라 협력, 베를린·카잔 의학 학위
  • 1905–1907모스크바 당위원 · 소비에트 대의원, 12월 무장봉기 참여, 재차 체포 후 프랑스 망명
  • 1917–191910월 봉기 모스크바당 5인 지도부 · 군사혁명위 · 전러시아 중앙집행위 간부, 1919.3 중앙집행위원장 대행
  • 1922–1926우크라이나 부수상 · 국가계획위원장 · 당 중앙통제위원장 겸 노동자농민감찰 인민위원
  • 1926–1927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27–1951전연방공산당 중앙감사위원회 의장 (24년간, 사망 시까지)
  • 1930–1934러시아 공화국 보건인민위원 (겸임)

예브게니 빅토로비치 탈레

Евгений Викторович Тарле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4–1955 ○ 자연사

나폴레옹 전기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아카데미 사건의 유배에서 스탈린의 비호로 복귀한 역사가

1951년 가을, 반유대주의 캠페인이 한창이던 MГИМО 첫 강의에서 탈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며, 내 성은 탈레다."

키예프 출신 유대인 역사가. ≪대륙봉쇄≫(1913)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아카데미 사건' 유배 후 ≪나폴레옹≫(1936)이 스탈린의 주목을 받아 복권, 스탈린상 3회 수상. 소련 서양사학의 제1인자.

상세 이력 보기
  • 1896키예프대학(성 블라디미르) 역사·문헌학부 졸업, 루치츠키 사사
  • 1900–1903루나차르스키 강연 모임에서 체포, 헤르손으로 유배; 사강사로 페테르부르크대학 강의 시작
  • 1909–1911≪프랑스혁명기 노동계급≫(2권)으로 박사학위 취득; 1913년 ≪대륙봉쇄≫ 출간
  • 1913–1918유리예프(타르투)대학 교수; 런던 국제역사학회의(1913)에서 논문 발표
  • 1918–1927페트로그라드 중앙기록부 지도부; 1921년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1927년 정회원
  • 1929–1932'아카데미 사건'으로 체포; 1931년 8월 알마아타 유배, 1932년 말 레닌그라드 귀환
  • 1936–1939≪나폴레옹≫(1936) 출간 — 스탈린의 주목으로 복권;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1937), ≪탈레랑≫(1939) 출간
  • 1941–1945카잔대학 교수(1941–1943); ≪크림전쟁≫ 1·2권 출간(1941, 1943); 나치 전쟁범죄 조사 국가특별위원
  • 1942–1955스탈린상 1급 3회(1942, 1943, 1946); 소르본·오슬로·프라하·브르노·알제 명예박사; 영국학사원 통신회원(1944); 1955년 1월 사망, 노보데비치 안장

미하일 이바노비치 칼리닌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Калинин
국가원수 소련 러시아 1875–1946 ○ 자연사

소련의 장기 공식 국가원수

1921년 3월 1일, 크론슈타트 반란 직전, 칼리닌은 무장도 없이 아내와 함께 요새로 들어가 수병들을 설득하려 했다. 박수로 시작된 그의 연설은 곧 야유에 묻혔고, 그는 침묵 속에 크론슈타트를 떠났다.

농민 출신 볼셰비키로 1919년부터 1946년 사망까지 소련의 공식 국가원수를 지냈다. '전연방의 장로'로 불리며 민중의 탄원을 받고 문맹 퇴치 운동을 이끄는 등 체제의 인간적 얼굴 역할을 했으나, 대숙청의 법적 토대가 된 테러사건 신속처리법령에 서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실권은 없었지만 27년간 소비에트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2–1946중앙집행위원회 ·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니콜라이 닐로비치 부르덴코

Николай Нилович Бурденко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비에트 러시아 1876–1946 ○ 뇌졸중 사망

소비에트 신경외과의 창시자이자 적군 주임외과의

공습 중 대피를 거부하며 말했다. "부상자들은 숨을 수 없소. 의사의 자리는 환자 곁이오."

소비에트 신경외과의 창시자이자 대조국전쟁기 적군 주임외과의로, 네 차례 전쟁에서 야전외과를 혁신했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유리예프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러일전쟁에 자원해 부상자 후송 중 총상을 입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았다. 1932년 세계 최초의 중앙신경외과연구소를 모스크바에 창설하고 뇌종양 수술을 대중화했으며 구근절개술을 개발했다. 1937년부터 적군 주임외과의로서 야전의료를 지휘했고, 65세에도 전선에서 수천 건의 수술을 집도하며 페니실린 도입을 주도했다. 그의 지휘 아래 적군 의무대는 부상병 72.3%를 전선에 복귀시켰고 단 한 건의 감염병 유행도 없었다. 1944년 소련 의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로 취임했으며, 3차례 뇌졸중 끝에 1946년 70세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4–1905러일전쟁 의무병, 부상자 후송 중 총상, 게오르기 십자훈장
  • 1906–1910유리예프 대학 의학부 졸업, 박사학위, 독일·스위스 연수
  • 1910–1917유리예프 대학 외과 교수, 1차대전 북서전선 적십자 외과고문, 2군 외과고문, 주임군사위생감독(1917.3–5)
  • 1918–1923보로네시 대학 외과 교수, 적군 군병원·야전외과 강좌 조직, 피로고프 의학회 창립
  • 1923–1937모스크바 대학·제1모스크바 의학원 외과 교수, 외과 클리닉 원장, 신경외과 병동 개설
  • 1932세계 최초 중앙신경외과연구소 창설, 소장
  • 1937–1946적군 주임외과의, 소련-핀란드 전쟁·대조국전쟁 야전의료 지휘, 수천 건 수술, 페니실린 도입
  • 1944–1946소비에트 의학아카데미 초대 총재

막심 막시모비치 리트비노프

Максим Максимович Литвинов
외교 소련 폴란드 1876–1951 ○ 자연사

집단안보를 외친 외교관, 1939년에 치워지다

1935년 국제연맹 총회 연단에서 리트비노프는 두 단어로 자신의 외교 철학을 요약했다: "Мир неделим" — 평화는 분할될 수 없다. 파시즘의 위협 앞에서 한 지역의 평화만으로는 안전할 수 없으며, 가까운 이웃이든 먼 이웃이든 모두의 평화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 구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볼셰비키 혁명가 출신 외교관으로, 1930년대 외무인민위원 시절 국제연맹에서 반파시즘 집단안보 노선을 주도하고 1933년 미소 국교 정상화를 이끌었다. 파시즘에 맞선 광범한 동맹을 추구했으나, 독일과의 협상으로 방향을 틀려던 스탈린은 1939년 5월 그를 해임하고 몰로토프를 세웠다. 유대인 외무장관의 퇴진 자체가 외교 노선 전환의 신호였다. 독소전쟁 발발 후 복권되어 주미 대사와 외무부인민위원으로 연합국 외교에 복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1939외무인민위원

스타니슬라프 구스타보비치 스트루밀린

Станислав Густавович Струмили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877–1974

숫자로 사회주의를 설계한 경제학자

"높은 템포를 위해 서 있는 것이 낮은 템포를 위해 앉아 있는 것보다 낫다" — 1920년대 계획방법론 논쟁에서 유전론자들을 향한 스트루밀린의 일갈.

소련 계획경제의 지적 토대를 세운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 세계 최초의 물질수지 체계를 개발하고, 노동생산성의 '스트루밀린 지수'를 정식화했으며, 초등 의무교육의 경제적 수익률을 최초로 계측했다. 1897년 혁명운동에 투신해 멘셰비키로 세 차례 체포·유배되었고, 1923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193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레닌상·스탈린상 수상, 사회주의노동영웅(1967).

상세 이력 보기
  • 1896–1899페테르부르크 전기기술연구소 입학, 혁명운동 참여
  • 1899RSDLP 입당 (멘셰비키), 학생 총파업 참여로 제적·징집
  • 1906–1907RSDLP 제4차(스톡홀름) 및 제5차(런던) 대회 대의원
  • 1914페테르부르크 폴리테크닉 상업과 졸업
  • 1918–1923노동인민위원부·전소비에트노조중앙회의 통계국장
  • 1921–1937고스플란 근무, 부의장 겸 상임위원 (1930년대)
  • 1931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42–1946과학아카데미 우랄·서시베리아·카자흐스탄 자원동원위원회 위원
  • 1943–1951고스플란 과학기술심의회 위원
  • 1947–1952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국민경제사 부문장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스베친

Александр Андреевич Свечин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8–1938 ✕ 처형

「러시아의 클라우제비츠」. 전략과 작전술의 이론가

1920년대 소련 군사 이론의 대논쟁에서 투하쳅스키는 스베친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스베친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적도, 되려 한 적도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는 제국주의 간섭의 대행자다." 학문적 논쟁은 정치적 공격으로 변질되었고, 스베친은 끝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차르 장군 출신의 소련 최고 군사이론가. 『전략』(1927)에서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미래 전쟁을 경제적 총력전으로 예견했으나, 그의 경고는 외면되었고 1938년 숙청으로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5–1903미하일롭스크 포병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904–05러일전쟁 참전: 제22동시베리아연대 중대장, 제16군단 참모
  • 1914–16제1차 세계대전: 제6핀란드소총연대장, 흑해해병사단장, 소장 진급
  • 1918볼셰비키 편입, 전러시아 주참모부장 역임
  • 1918–31참모본부 아카데미(후일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전략 및 전쟁사 주임 지도관
  • 1926–27주저 『전략』 출간 — 작전술 개념 정립, 전략적 소모 이론 제시
  • 1931–32「봄」 사건으로 체포, 5년형 선고 후 1932년 석방
  • 1938/1956대숙청 중 체포되어 총살, 1956년 사후 복권

예멜리얀 미하일로비치 야로슬랍스키

Емельян Михайлович Ярославский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8–1943 ○ 위암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린 당의 수석 무신론자

흐루쇼프의 회고: "당내에서 야로슬랍스키를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렀다." 그가 내건 구호 — "종교에 대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야로슬랍스키는 소비에트 반종교 정책의 최고 이데올로그로, '전투적 무신론자동맹'(1925~1943) 의장으로서 조직적 무신론 운동을 총괄했다. 1898년 RSDLP에 입당,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을 지냈다. 1924년부터 10년간 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로 당내 숙청을 주도했으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성서》 등 방대한 무신론 저작을 남겼다.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이자 공식 당사 해석자였고, 1939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8RSDLP 입당, 트란스바이칼 철도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 1905–1907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군사전투조직 지도, 제4·5차 당대회 대의원
  • 1907–19175년 카토르가형 후 야쿠티아 유형, 야쿠츠크 향토박물관장 역임
  • 1917.10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크렘린 초대 군사위원
  • 1918–1919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
  • 1921RKP(b) 중앙위원회 서기, 조직국 위원
  • 1924–1934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
  • 1925–1943전투적 무신론자동맹 중앙평의회 의장, 반종교위원회 의장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아도라츠키

Владимир Викторович Адоратский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8–1945 ○ 병사

IMEL 소장, 스탈린을 이론가로 공인한 첫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레닌은 내 순진함 때문에 나를 '아두라츠키'라고 놀렸다.」 — 가족 회고록

카잔 출신 볼셰비키 철학자. 1929년 스탈린을 '레닌주의의 이론가'로 찬양한 첫 인물로, 1931년 IMEL 소장이 되어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을 편찬, 공산권의 정전 독법을 수십 년간 결정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7–1903카잔대학 수학과 입학 후 법학과 전환, 1900년 혁명운동 참여, 1903년 졸업 후 해외 망명
  • 1904–1908제네바에서 RSDLP 가입(1904), 귀국 후 체포·아스트라한 유형; 1905년 카잔에서 불법 볼셰비키 신문 『라보치』 발간
  • 1908–1918파리·런던·베를린 망명; 뮌헨에서 1차대전 민간인 포로로 억류, 레닌의 포로교환으로 귀국
  • 1920–1928중앙기록관리국 부국장, 모스크바대학 교수; 『마르크스주의 변증법』(1922) 등 첫 저작 출간
  • 1928–1931레닌 연구소 부소장; 1929년 『이즈베스티야』에 「이론가로서의 스탈린」 발표, 부하린 실각 후 『레닌 전집』 편집 인수
  • 1931–1939IMEL 소장; 마르크스·엥겔스 저작 러시아어판 15권·독일어판 8권 편집, 서한집 발간 준비
  • 1936–1939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겸임; 마르크스-엥겔스 아카이브 매입 위원회 위원장
  • 1939–1945건강 악화로 소장직 사임, IMEL 책임편집자; 대조국전쟁 중 알마아타로 대피, 194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솔로몬 아브라모비치 로조프스키

Соломон Абрамович Лозовский
코민테른 소련 러시아 1878–1952 ✕ 처형

프로핀테른을 이끈 볼셰비키,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와 함께 총살되다

모든 것을 말했다, 어떤 관대함도 바라지 않는다. 완전한 복권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러나 언젠가 내 무죄가 밝혀지거든 사후에 당적을 회복시키고 신문에 복권 소식을 실어 달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의 유대인 멜라메드 집안에서 태어나 1901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 참가와 유형을 거쳐 파리로 망명, 프랑스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했다. 1921년부터 1937년까지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사무총장으로 국제 노동운동의 좌파 축을 조직했다. 1939년 외무부인민위원, 전시에는 소빈포름뷰로를 이끌며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를 감독했다. 1949년 체포되어 1952년 JAC 재판에서 법정 자백을 철회하고 기소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으나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1955년 복권.

상세 이력 보기
  • 1901–1908RSDLP 입당, 카잔에서 1905년 혁명 참가, 체포·유형 후 해외 탈출
  • 1909–1917파리 망명, 프랑스 사회당과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
  • 1918–1921전러시아 섬유노조·철도노조·모스크바 주 노조평의회 책임자
  • 1921–1937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 사무총장
  • 1937–1939국립문학출판사(고슬리티즈다트) 소장
  • 1939–1946소련 외무부인민위원(부장관)
  • 1941–1948소빈포름뷰로 부책임자(1941–1945), 책임자(1945–1948)
  • 1949–1952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사건으로 체포, 재판, 총살

보리스 사빈코프

Борис Савинков
비소련 혁명가 소련 러시아 1879–1925 ✕ 처형/의문사

테러리스트에서 반혁명가로: 혁명의 검은 기사

1924년 재판정에서: '나는 플레베와 세르게이 대공 암살의 사빈코프다. 평생 인민을 위해 일했으나, 이제 노동자·농민 정권에 총을 겨누었다고 기소되었다.'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을 지휘하며 제정 고위관료 암살을 주도한 혁명가·작가. 『창백한 말』로 테러의 심리를 소설화했다. 10월 혁명 후 반볼셰비키 투쟁을 이끌었고, OGPU에 체포되어 루뱐카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3SR 전투조직에 합류
  • 1904플레베 내무장관 암살 기획
  • 1905세르게이 대공 암살 지휘
  • 1909『창백한 말』 출간 — 테러리즘의 심리적 해부
  • 1917.4러시아 귀환, 제7군 정치위원 임명
  • 1917.7임시정부 전쟁차관 — 케렌스키·코르닐로프 중개
  • 1917.8코르닐로프 사건으로 모든 직위에서 해임, SR당 제명
  • 1918조국과 자유수호동맹(SZRiS) 창설, 반볼셰비키 봉기 주도
  • 1920–1921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 측에 서서 반소 군사활동
  • 1924OGPU의 트러스트 작전에 속아 소련 귀환, 체포
  • 1925루뱐카 감옥에서 사망 (공식: 투신자살, 의혹: OGPU 살해)
비소련 혁명가 소련 헝가리 1879–1964 ○ 자연사

1929년 대공황을 예측하고도 자본주의의 적응력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연구소가 폐쇄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1920년대 말, 모두가 자본주의 안정화를 확신할 때 대공황을 예측했고, 모두가 자본주의 붕괴를 말할 때 그 종말을 예측하여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1927년부터 20년간 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를 이끌며 코민테른 최고의 경제분석가로 활약했다. 1929년 대공황의 도래와 종료를 정통 노선에 역행하여 정확히 예측해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으나, 전후에는 전시 국가개입으로 자본주의가 적응·안정화될 수 있다고 분석한 저작으로 1947년 연구소 폐쇄와 함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1963년 레닌상을 수상했고, 유언에 따라 사후 공개된 유고에서는 소련 관료제의 변질과 국제주의 포기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헝가리 사회민주당 입당, 당 기관지 《넵서버》 경제부 편집
  • 1909부다페스트대학 철학박사 — 칸트의 이율배반론 연구
  • 1919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재무인민위원 →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 1920소련 망명,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코민테른 활동 시작
  • 1921–1927코민테른 통계정보연구소(베를린 '바르가 사무소') 소장
  • 1927–1947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 소장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3현대 자본주의 연구로 레닌상 수상

드미트리 미하일로비치 카르비셰프

Дмитрий Михайлович Карбыше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80–1945 ✕ 마우트하우젠에서 고문 살해

나치의 회유를 거부하고 마우트하우젠에서 순교한 소련 최고의 축성공학자

나치의 회유에 대한 카르비셰프의 답변: "신념은 이빨과 함께 빠지지 않는다. 나는 군인이며 내 의무에 충실하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내전을 거친 군사공학자로, 100여 편의 논문을 통해 소련 축성학을 정립하고 프룬제 아카데미와 참모본부 아카데미에서 적군 지휘관 세대를 가르쳤다. 브레스트 요새, 스탈린 라인, 만네르하임 선 돌파 등 주요 방어·공세 작전의 공학적 기반을 설계했다. 1941년 포로가 된 후 나치는 그를 '러시아 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세우려 했으나 3년 반 동안 모든 회유를 거부하고 수용소 저항운동을 이끌었으며, 1945년 2월 마우트하우젠에서 영하 12도 얼음물 고문 끝에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900–1905제1동시베리아 공병대대 전신중대장, 러일전쟁 참전, 5개 훈장
  • 1908–1911니콜라옙스크 군사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11–1917브레스트 요새 건설, 1차대전 참전(브루실로프 공세), 중령
  • 1918–1920동부·남부전선 방어선 구축, 페레콥·촌가르 공세 공병지원
  • 1923–1934공병위원회 위원장, 프룬제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관, 스탈린 라인 설계
  • 1934–1941참모본부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수, 공병 중장(1940), 군사학 박사(1941)
  • 1941–1945포로, 나치 회유 거부, 마우트하우젠에서 순국

바실리 알렉세예비치 데그탸료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еевич Дегтярё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880–1949 ○ 자연사

DP-27·DShK·PTRD를 설계한 소련 소형화기 설계의 창시자

1943년 5월, 스탈린 앞에서 어느 기관총을 채택할지 묻자 자신의 DS-39가 아닌 경쟁작 고류노프의 SG-43을 택했다: 'SG-43이 의심의 여지 없이 더 우수합니다.'

툴라의 대장장이 집안에서 교구학교 3년만 마친 데그탸료프는 차르 군대의 병사에서 소련 총기설계의 창시자가 되었다. 블라디미르 표도로프의 조수로 자동화기를 배워 1918년 코브로프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화기설계국을 이끌었고, 1927년 붉은군대 주력 경기관총 DP-27을 완성했다. DShK, PPD, PTRD-41, RPD 등 19종이 제식 채택되었고, 그의 설계국은 러시아 최대 군수기업 데그탸료프 공장(ZiD)으로 성장했다. 1940년 스탈린에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노동영웅, 스탈린상 4회, 기술과학 박사, 공병포병소장을 지낸 그는 전간기부터 종전까지 소련 보병화기의 계보를 홀로 그려낸 인물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01–1905오라니옌바움 사관학교 부설 총기작업장 사병 총기수리공
  • 1906–1917V.G. 표도로프의 조수 — 최초의 러시아 자동소총 개발 참여
  • 1918–1931코브로프 기관총공장 시험작업장장, 소련 최초 화기설계국 운영
  • 1927DP-27 경기관총 붉은군대 제식 채택
  • 1930–1939DK/DShK 대구경 중기관총, PPD 기관단총, DS-39 중기관총 개발
  • 1940–1949코브로프 공장 특별설계국(OKB) 국장, 기술과학 박사, 공병포병소장
  • 1941PTRD-41 대전차소총 긴급 설계·양산 (스탈린상 2급)
  • 1944RPD 분대지원화기 완성, 공병포병소장 진급

아브람 표도로비치 이오페

Абрам Фёдорович Иоффе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80–1960 ○ 자연사

소비에트 물리학 전체를 키워낸 '파파 이오페'

1905년 뢴트겐이 뮌헨 교수직을 제안했을 때, 25세의 이오페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정치가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오직 과학에서만 만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국이 위기에 처한 지금 돌아가는 것이 나의 의무입니다.」

뢴트겐의 제자로 1918년 물리기술연구소를 설립, 소련 물리학의 산실로 키웠다. 쿠르차토프·카피차 등 핵물리학 세대를 길러내고 반코스모폴리탄 공세로 해임, 스탈린 사후 반도체연구소를 창설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1918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물리학 강사·실험실장
  • 1918–1921국립방사선·방사선학연구소 물리기술부장
  • 1921–195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소장
  • 1926–1929, 1942–1945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32–1942LFTI 내 핵물리학 연구 주도·원자력 계획 추진
  • 1952–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반도체연구소 소장

아브람 모이세예비치 데보린

Абрам Моисеевич Деборин
이념 · 선전 소련 리투아니아 1881–1963 ○ 자연사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창설자,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정되다

「저는 미코얀에게, 25년 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애썼지만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이 무엇인지 묻는 미코얀에게 답하며 (1956년 면담, 네크리치 회고록)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제도화를 이끈 철학자. 기계론자 논쟁에서 변증법 진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1931년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탄받았다. 흐루쇼프 해빙기까지 살아남아 저작 복간을 목격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7–190316세에 마르크스주의 비밀서클 가입, 1903년 경찰 탄압으로 해외 탈출
  • 1903–1908볼셰비키 가담(1903) → 멘셰비키 전향(1907), 베른대학 철학과 졸업(1908), 플레하노프의 제자
  • 1908–1916마하주의·경험비판론 비판,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출간(1916), 철학에서 레닌과 접근
  • 1921–1926적색교수양성소 철학부장(1921), 『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편집위원(1922~),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과학부소장(1924~)
  • 1926–1931『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주필, 공산아카데미 철학부장, 철학연구소 초대 소장(1929),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29)
  • 1931「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규탄 — 주필·소장직 박탈, 스탈린주의 철학 전환의 상징
  • 1935–1963과학아카데미 연구직 복귀, 사회과학부·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1937~1941), 1956년 미코얀 면담 후 저작 복간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

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881–1969 ○ 자연사

스탈린의 원수, 군사적 무능을 정치적 충성으로 버티다

1937년 5월 28일, NKVD가 넘긴 붉은 군대 지휘관 26명 명단에 직접 펜으로 썼다: "예조프 동지에게. 모든 악당을 잡아들이시오. 1937년 5월 28일. K. 보로실로프."

차리친 전투에서 스탈린과 맺은 인연으로 소련 최장수 국방수장(1925~1940)이 된 혁명군인이자 원수. 붉은 군대의 현대화·기계화를 진두지휘하는 한편, 대숙청 국면에서 185개 처형 명단에 서명하며 장교단 말살을 직접 승인했다. 겨울전쟁 참패로 국방인민위원에서 물러났으나, 독소전쟁기에는 빨치산 총사령관과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정치국에 34년 반 동안 머물며 최고 기록을 세웠고, 흐루쇼프 축출을 시도한 1957년 반당그룹 사건에도 살아남아 1960년까지 최고소비에트 의장으로 재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8–1920차리친 방어와 내전 지휘, 스탈린 인맥의 군사 상징으로 부상
  • 1925–1940전쟁·국방인민위원, 붉은 군대의 정치적 충성 노선 대표
  • 1937–1938군 대숙청 국면에서 최고 군사지도부로 숙청을 승인
  • 1939–1940겨울전쟁 실패 뒤 티모셴코에게 국방인민위원 자리를 넘김
  • 1941–1945전시 원로 지휘관이지만 실전 지휘능력 한계를 드러냄
  • 1953–1960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상징적 국가원수로 이동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샤포시니코프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Шапошник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882–1945 ○ 병사

스탈린이 이름과 부칭으로 부른 유일한 장성, 『군대의 두뇌』의 저자

한밤중, 흰 셔츠에 멜빵 차림으로 지도를 들여다보던 샤포시니코프는 젊은 장교의 실수에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았다. "자네, 그게 뭡니까(голубчик)?" 그 부드러운 한마디에 장교들은 땅속으로 꺼지고 싶어했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제정 장교 출신으로 붉은 군대의 작전 교리를 체계화한 군사 이론가. 3권의 『군대의 두뇌』(1927–1929)는 현대전에서 참모본부의 기능과 구조를 분석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오늘날까지 러시아 참모 아카데미 교과 과정에 남아 있다. 스탈린은 그를 유일하게 이름과 부칭으로 부르며 깊이 신뢰했지만, 1937년 투하쳅스키 재판의 특별재판부에 참여해야 했고 NKVD는 샤포시니코프에 대한 공작 파일도 작성 중이었다. 1941년 가을 모스크바 반격의 설계자이며, 폐결핵으로 죽기 직전까지 스탈린의 최측근 군사 고문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3–17제국군 복무, 1차대전 참전, 대령
  • 1918–21붉은 군대 입대, 내전 중 작전국장으로 주요 작전 기획
  • 1925–27레닌그라드 ·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28–31참모총장 (1차), 『군대의 두뇌』 출간
  • 1932–3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원장 겸 교수
  • 1937–40참모총장 (2차), 원수 진급, 겨울전쟁 기획
  • 1941–42참모총장 (3차), 모스크바 반격 설계
  • 1943–45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원장, 스탈린 군사 고문

게오르기 미하일로프 디미트로프

Георги Михайлов Димитров
코민테른 불가리아 불가리아 1882–1949 ○ 자연사

라이프치히 재판의 피고에서 코민테른 서기장으로

나는 피고인 공산주의자로서, 내 정치적 명예와 혁명가로서의 명예, 그리고 내 공산주의 이상을 변호한다. 내 전 생애의 의미가 이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 있다.

인쇄공·노동운동가로 출발해 1923년 반정부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라이프치히 방화 재판에서 나치에 맞선 법정 변론으로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서기장에 올라 반파시즘 인민전선 노선을 정식화했으며, 전후 불가리아 최초의 공산정부 수반이 되었다.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연방 구상을 추진했으나 스탈린-티토 결별로 무산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4–1943서기장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 그레코프

Борис Дмитриевич Грек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82–1953 ○ 자연사

키예프 루스 봉건제론을 정립한 소비에트 중세사의 창시자

1939년, 그레코프는 키예프 루스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세 민족의 공동 요람"으로 규정하며 소비에트 중세사학의 근간을 세웠다.

소비에트 중세사학의 창시자. ≪키예프 루스≫(1939)에서 키예프 루스를 봉건 국가로 규정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공동 요람으로 정립했다. 1936년부터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장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1–1907바르샤바대학에서 페트루셰프스키 사사 후 모스크바대학으로 편입, 류뱝스키 지도 아래 졸업
  • 1910–1916페테르부르크 김나지움 교사, 셰레메테프 가문 도서관장; 플라토노프 지도로 석사논문 방어(1914) 후 페트로그라드대학 사강사
  • 1916–1921페름대학 러시아사 강좌 개설 및 초대 주임(1916–1918); 내전기 타브리다대학 교수 겸 타브리다 학술기록위원회 부위원장
  • 1930'아카데미 사건'으로 체포, 약 한 달 구금 후 톰신스키의 신원보증으로 석방
  • 1934–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1934), 정회원(1935); ≪키예프 루스≫(1939) 출간 — 봉건제론 정립
  • 1936–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소장; 역사·철학부 아카데미 서기(1946–1953) 겸임
  • 1943–1952스탈린상 3회(1943, 1948, 1952), 레닌훈장 2회(1944, 1952); 물질문화사연구소장(1943–1947)·슬라브학연구소장(1947–1951) 겸임
  • 1947–1953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1947–1950) 및 소련 최고소비에트(1950–1953) 대의원; 1953년 9월 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