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가 죽지 않게 된 시대의 첫 패자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 중앙위원회 사업보고를 한 사람은 스탈린이 아니라 말렌코프였다. 스탈린은 10월 14일 짧은 폐회 연설을 했을 뿐이다. 홀은 술렁였고, 누구나 신호를 읽었다.
스탈린의 인사 서류를 쥐고 1939년부터 중앙위 서기로, 1948년부터 후계 서열 1위로 올라섰다. 대숙청기의 지방 숙청과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1952년 유대인 작가 13인의 처형에 책임이 있다. 스탈린 사후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총리로 소비재·감세·핵전쟁에 승자 없다는 노선을 폈다. 1957년 「반당그룹」 주모자로 실각해 카자흐스탄 발전소장으로 좌천되었고 1961년 제명되었다. 1988년 1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9 사회운동·조직 · 소련 · 당 서기국 · 조직인사
경력 연표
- 1939–45서기국 간부 인사, 전시 국가방위위원회에서 항공기 생산 총괄
- 1953.3–55총리, 소비재·감세·「핵전쟁에 승자 없다」 발언
- 1957「반당 그룹」 주모자로 실각
- 1957–68카자흐스탄 우스티카메노고르스크 수력발전소장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41.02–1946.03
- 정위원 1946.03–1957.06
1957.06 해임 · 「반당 그룹」 사건
관련 역사 사건
- 1937–1938대숙청지방 숙청 관여대숙청기에 지방 숙청에 관여했다.
- 1941–1945대조국전쟁국방위원회 위원으로 항공기 생산 총괄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숙청 주도즈다노프 인맥과 경쟁한 간부로 사건을 앞장서 몰고 갔다.
- 1952–1953의사들의 음모전환의 참여자스탈린 사후 새 지도부의 일원으로 캠페인의 종결에 참여했다.
- 1950–1953한국전쟁스탈린 사후 종전을 결정한 소련 각료회의 의장스탈린이 죽은 지 2주 만인 1953년 3월 19일 각료회의에서 마오쩌둥과 김일성에 보내는 서한 초안을 승인해 적극적 협상으로의 전환을 지시했다.
- 1953베리야의 몰락주석단 의장정부 수반으로 체포를 주재했다.
- 1953헝가리의 새 노선소련 각료회의 의장크렘린 회담을 주재하며 헝가리 지도부 개편을 요구했고 8월 연설로 새 노선을 뒷받침했다.
- 1955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소련 총리, 1953–1955말렌코프는 핵전쟁이 문명을 파괴하리라고 공개 경고했고, NATO 해체만 노리던 몰로토프와 달리 서방과의 완화를 시험했다. 1955년 2월 실각으로 이 구상은 꺾였다.
- 1956.02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격하에 반대탄압 문서에 서명이 남은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 공개 비판에 반대했다.
- 1957반당 그룹 사건반당 그룹패배 뒤 카자흐스탄의 발전소 소장으로 좌천됐다.
전후 후계 투쟁, 1946–1952
전쟁이 끝난 뒤 말렌코프의 자리는 곧바로 굳지 않았다. 1946년 4월에서 5월 사이 그는 「항공기 사건」으로 중앙위원회 서기국에서 해임되었고 정치국 내 서열도 내려갔다. 항공기를 조직적으로 불량품으로 공급했다는 고발이 빌미였다. 그는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제트 기술 특별위원회를 이끌었고, 1948년에 이르러 스탈린의 주요 부하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위를 회복했다.
전후 그의 주요 경쟁자는 안드레이 즈다노프였다. 즈다노프의 이른바 「즈다노프시치나」는 이념적 순결을 내세웠고, 기술 전문가를 중용하려 한 말렌코프의 실용주의 계열과 충돌했다. 즈다노프는 크렘린이 테크노크라트와 지방 당 간부들을 다시 통제하려 했지만, 말렌코프와 테크노크라트, 지방 당 간부, 핵심 부처들의 연합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예술·문화 분야의 정화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1948년 사망하자 스탈린의 총애는 말렌코프에게로 돌아왔다.
1953년의 미국 해군협회 회보(USNI Proceedings) 자료는 이 전후 후계 투쟁을 독립적으로 뒷받침한다. 전쟁이 끝날 무렵 말렌코프는 스탈린의 총애에서 즈다노프와 몰로토프 바로 아래에 있었고, 1946년 정치국 명단 4위에서 1947년 최하위로 밀린 시점이 즈다노프와의 투쟁 시기와 겹친다. 같은 자료는 그가 1947년 중앙위원회 서기국 제1서기로 임명되었다고 기록한다. 다른 자료들은 그를 1946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1948년 중앙위 서기로 놓는다.
전후 말렌코프는 소련의 전쟁 영웅으로 여겨진 인물들, 무엇보다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를 겨냥했다. 반혁명적 행위와 이기적 「보나파르트주의」라는 비난이었고, 주코프는 강등되어 오데사의 하급 사령부로 좌천되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도 같은 압박을 받았다. 이 공격 뒤 스탈린에 대한 말렌코프의 영향력은 커졌다.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사업보고를 한 것이 말렌코프였다는 사실은 이렇게 준비된 결과였다. 스탈린은 10월 14일 짧은 폐회 연설을 했을 뿐이다. 이 전후 시기의 축적이 그를 후계자로 만들었고, 스탈린 사후 총리 취임으로 이어졌다.
1953년 8월 8일, 최고회의 연단의 새 노선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오렌부르크 출신으로 내전기에 정치사업 요원으로 복무한 뒤 당 기구의 계단을 조용히 올라간 전형적인 기구 간부였다. 1930년대에 중앙위원회 지도당기관부(ORPO)를 이끌며 전국 간부들의 인사 기록을 관장하는 「인사 서류철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 위치에서 대숙청기의 지방 숙청에도 관여했다. 전쟁 중에는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항공기 생산을 담당했고, 전후에는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의 조직자 가운데 하나였다.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사업보고를 한 것은 스탈린이 아니라 말렌코프였다. 후계 구도의 신호였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 말렌코프는 소련 각료회의 의장, 곧 정부 수반이 되었다. 그해 8월 8일 최고회의 연단에서 그는 전후 소련 경제의 방향을 트는 연설을 했다. 중공업 일변도에서 소비재 생산으로 무게를 옮기고, 농업세를 대폭 낮추며, 콜호스 수매 가격을 올리고 미납금을 탕감한다는 내용이었다. 농촌은 이 연설을 기억했다. 「말렌코프가 오니 블린을 먹게 되었다」는 농민들의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1954년 3월에는 소련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핵무기 시대의 세계전쟁은 「세계 문명의 파멸」을 뜻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동료들에게서 이념적 오류라고 비판받고 곧 표현을 후퇴시켜야 했던 이 발언은, 훗날 평화공존 노선으로 정식화될 인식을 앞질러 내놓은 것이었다. 짧았던 말렌코프 시대는 탈스탈린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방향 전환이 준비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57년 6월, 「반당그룹」과 카자흐스탄의 발전소
말렌코프의 총리 재임은 2년을 채우지 못했다. 흐루쇼프가 당 기구를 장악해 가는 가운데 1955년 2월 그는 농업 정책의 실패를 자아비판하며 각료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났고, 부총리 겸 발전소 담당 장관으로 강등되었다. 1957년 6월 그는 몰로토프, 카가노비치와 함께 간부회 다수를 규합해 흐루쇼프 해임을 시도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문제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로 가져가는 데 성공했고, 주코프가 군용기로 실어 나른 중앙위원들이 모이자 형세는 역전되었다. 말렌코프 일파는 「반당그룹」으로 규정되어 지도부에서 축출되었다.
그 뒤의 처분이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말해 준다. 패배한 자들은 총살되지 않았다. 말렌코프는 카자흐스탄으로 보내져 우스티카메노고르스크 수력발전소 소장, 이어 에키바스투스 화력발전소 소장으로 일했다. 한때 초강대국의 정부 수반이었던 사람이 변방의 발전소를 관리하며 1960년대를 보냈고, 1961년 당에서 제명된 뒤 모스크바로 돌아와 연금생활자로 조용히 살다 1988년 1월 사망했다.
말렌코프의 생애는 스탈린 이후 소비에트 정치의 문법 전환을 압축한다. 그 자신이 대숙청과 레닌그라드 사건에 관여한 기구의 사람이었으나, 그가 패배한 1957년의 권력투쟁은 처형이 아니라 좌천으로 끝났다. 소비재와 평화에 대한 그의 짧은 실험은 흐루쇼프 시대에, 그리고 더 멀리는 개혁기의 경제 논쟁에 계승자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