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 막시밀리아노비치 말렌코프

Георгий Максимилианович Маленков
소련 러시아 1902–1988 ↓ 실각 1957

패자가 죽지 않게 된 시대의 첫 패자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 연단에 선 것은 스탈린이 아니었다. 중앙위원회 사업보고를 한 사람은 말렌코프였다. 홀은 술렁였고, 누구나 신호를 읽었다.

스탈린의 서류를 관리하던 후계 서열 1위. 스탈린 사후 총리가 되어 소비재와 감세를 말한 첫 지도자였지만, 당 기구를 쥔 흐루쇼프에게 밀렸고 1957년 「반당 그룹」으로 몰려 카자흐스탄의 수력발전소 소장으로 좌천되었다. 총살 대신 좌천: 새 규칙의 첫 수혜자로 30년을 더 살았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53년 8월 8일, 최고회의 연단의 새 노선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오렌부르크 출신으로 내전기에 정치사업 요원으로 복무한 뒤 당 기구의 계단을 조용히 올라간 전형적인 기구 간부였다. 1930년대에 중앙위원회 지도당기관부(ORPO)를 이끌며 전국 간부들의 인사 기록을 관장하는 「인사 서류철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 위치에서 대숙청기의 지방 숙청에도 관여했다. 전쟁 중에는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항공기 생산을 담당했고, 전후에는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의 조직자 가운데 하나였다.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사업보고를 한 것은 스탈린이 아니라 말렌코프였다. 후계 구도의 신호였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 말렌코프는 소련 각료회의 의장, 곧 정부 수반이 되었다. 그해 8월 8일 최고회의 연단에서 그는 전후 소련 경제의 방향을 트는 연설을 했다. 중공업 일변도에서 소비재 생산으로 무게를 옮기고, 농업세를 대폭 낮추며, 콜호스 수매 가격을 올리고 미납금을 탕감한다는 내용이었다. 농촌은 이 연설을 기억했다. 「말렌코프가 오니 블린을 먹게 되었다」는 농민들의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1954년 3월에는 소련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핵무기 시대의 세계전쟁은 「세계 문명의 파멸」을 뜻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동료들에게서 이념적 오류라고 비판받고 곧 표현을 후퇴시켜야 했던 이 발언은, 훗날 평화공존 노선으로 정식화될 인식을 앞질러 내놓은 것이었다. 짧았던 말렌코프 시대는 탈스탈린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방향 전환이 준비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57년 6월, 「반당그룹」과 카자흐스탄의 발전소

말렌코프의 총리 재임은 2년을 채우지 못했다. 흐루쇼프가 당 기구를 장악해 가는 가운데 1955년 2월 그는 농업 정책의 실패를 자아비판하며 각료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났고, 부총리 겸 발전소 담당 장관으로 강등되었다. 1957년 6월 그는 몰로토프, 카가노비치와 함께 간부회 다수를 규합해 흐루쇼프 해임을 시도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문제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로 가져가는 데 성공했고, 주코프가 군용기로 실어 나른 중앙위원들이 모이자 형세는 역전되었다. 말렌코프 일파는 「반당그룹」으로 규정되어 지도부에서 축출되었다.

그 뒤의 처분이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말해 준다. 패배한 자들은 총살되지 않았다. 말렌코프는 카자흐스탄으로 보내져 우스티카메노고르스크 수력발전소 소장, 이어 에키바스투스 화력발전소 소장으로 일했다. 한때 초강대국의 정부 수반이었던 사람이 변방의 발전소를 관리하며 1960년대를 보냈고, 1961년 당에서 제명된 뒤 모스크바로 돌아와 연금생활자로 조용히 살다 1988년 1월 사망했다.

말렌코프의 생애는 스탈린 이후 소비에트 정치의 문법 전환을 압축한다. 그 자신이 대숙청레닌그라드 사건에 관여한 기구의 사람이었으나, 그가 패배한 1957년의 권력투쟁은 처형이 아니라 좌천으로 끝났다. 소비재와 평화에 대한 그의 짧은 실험은 흐루쇼프 시대에, 그리고 더 멀리는 개혁기의 경제 논쟁에 계승자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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