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호프만

Max Hoffmann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69–1927 ○ 뇌졸중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은 독일 동부전선 참모장

"장군은 여러 차례 토론이 진행되던 탁자 위에 자신의 군화를 올려놓았다": 이 협상에서 호프만의 군화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쓴 트로츠키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8군 참모장으로서 타넨베르크와 마수리안 호수 전투의 작전을 입안한 탁월한 전략 참모였다. 1917년 말부터 동부전선 총참모장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를 주도했으며, 1918년 1월 18일 소비에트 대표단 앞에 지도를 펼쳐 놓고 폴란드·발트 3국·우크라이나의 분리를 요구하는 영토 조항을 제시했다. 트로츠키의 '전쟁도 평화도 아닌' 선언 이후 파우스트슐라크 작전으로 무저항 진격을 지휘해 굴욕적인 최종 조약을 강요했으며,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는 무례함으로 혁명적 외교와 제국 군사력의 비대칭을 신체화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전후의 반소 활동과 '호프만 계획' (1919~1927)

전후 호프만은 공화국 체제에서 군복을 벗고도 반소 활동을 계속했다. 1919년에는 폴란드 국경 지역 부대 지휘관을 맡았으나, 전시에 그와 다툰 한스 폰 제크트가 이끄는 새로운 소규모 국방군에서 1920년 3월 예편했고 이후 베를린에 정착해 화가 코리나-이레나 호프만과 함께 살았다. 그는 1922년 처음 정식화된 이른바 '호프만 계획'의 지적 창안자였다. 자본가 아르놀트 레히베르크와 함께 독일이 영국·프랑스와 공동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에 군사 개입하여 소비에트 정부를 전복시키고 '헌법적 러시아 정부'를 세운 뒤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재건한다는 구상을 밀었다. 1926~1927년 런던에서는 네덜란드 자본가 앙리 데터르딩의 주선으로 이 계획과 그 실행 방안이 집중 논의되었고, 데터르딩은 호프만에게 자금을 대기도 했다. 그러나 국방군 지도부는 소련과의 군사 협력을 택해 그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20년대에 그는 레히베르크와 함께 소련 통화를 교란하려는 러시아 체르보네츠 지폐 위조 사건에도 연루되었으며, 레히베르크는 1930년에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저술 활동도 활발했다. 1923년 《놓친 기회의 전쟁》에서 팔켄하인과 루덴도르프를 비판하고 힌덴부르크를 무능하다고 묘사했으며, 1925년 《모스크바의 모든 전선에서》에서는 볼셰비즘 문제를 다루고 1926년 《실제의 타넨베르크》에서는 타넨베르크 전투에서의 자기 기여를 강조했다. 1919~1927년 베를린에 살며 집필한 이 시기의 기록은 1929년 카를 프리드리히 노바크가 펴낸 유고집으로 함께 출간되었고, 생전에 억눌렀던 힌덴부르크 비판 발언도 이때 일부 드러났다. 호프만은 1927년 7월 8일 바트 라이헨할의 요양지에서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으며, 유해는 베를린 인발리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로 이 묘지가 90퍼센트 이상 파괴되었을 때 그의 묘비는 거의 유일하게 제자리를 옮겨 보존되었고, 2002년에는 후원회와 베를린 주 기념물 관리국의 조사에 힘입어 원래 위치의 묘역 위에 다시 세워졌다. 묘비 뒷면에는 타넨베르크, 마수리안 호수, 리크·아우구스투프 동계 전투가 새겨졌고, 측면에는 그가 고향 홈베르크의 명예시민이 되었다는 사실과 부인이 그린 초상화가 시청사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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