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
독립 활동 서구 마르크스주의 독일 → 미국 (1940년 시민권) 독일 1895–1973 ○ 검사 후유증으로 사망

사회연구소를 이끌며 1937년 ‘비판 이론’에 이름을 붙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철학자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9년, 호르크하이머는 파시즘을 자본주의의 위기를 독재로 버티려는 시도로 보며 이렇게 썼다.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파시즘에 대해서도 침묵해야 한다.”

슈투트가르트의 유대계 공장주 집안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 공장에서 일했다.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해 1925년 교수자격을 얻었고, 1930년 프랑크푸르트대학교 사회철학 교수와 사회연구소 소장이 되어 철학과 사회과학을 잇는 학제 간 연구를 이끌었다. 나치 집권 뒤 1934년 연구소를 뉴욕 컬럼비아대학교로 옮겼고 1940년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1937년 연구소의 이론에 ‘비판 이론’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테오도어 W. 아도르노와 『계몽의 변증법』(1947)을 썼다. 1949년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연구소를 다시 열고 대학 총장을 지냈다. 말년에는 비관주의로 기울었고 1973년 죽었다.

다른 이름: 하인리히 레기우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사회연구소 소장: 호르크하이머는 연구소를 무엇을 하는 곳으로 만들려 했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는 펠릭스 바일이 상속 재산으로 좌파 학문을 지원하려 만든 마르크스주의 연구 모임에서 출발했다. 1923년 헤르만 바일과 아들 펠릭스의 기금으로 세워졌고, 1924년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학자 카를 그륀베르크를 소장으로 문을 열었다. 그륀베르크가 곧 병으로 물러나자, 1930년 7월 프랑크푸르트대학교 사회철학 정교수가 된 호르크하이머가 같은 해 10월 소장을 맡았다.

1931년 1월 24일 취임 강연 「사회철학의 현재 상황과 사회연구소의 과제」에서 그는 연구소의 방향을 밝혔다. 철학과 개별 과학이 서로를 끊임없이 꿰뚫는 ‘학제 간 연구’다. 사회학, 심리학, 경제학, 법학, 문학·문화 연구, 정치학의 연구자들이 함께 경험적 사실을 조사하고, 철학이 그 결과를 하나의 이론으로 엮어 ‘현재 사회 전체에 대한 이론’을 세운다는 구상이었다. 그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특정 분과’의 학자였던 전임자와 달리 연구소장이 사회철학 교수를 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철학자가 학제 간 작업을 계획하고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1932~1941년 호르크하이머가 이론적 에너지를 이 ‘학제 간 유물론’, 곧 ‘철학을 사회 이론 속에서 지양하는’ 일에 쏟았다고 정리했다. 지양이란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에서 살려 낸다는 뜻이다.

이 구상을 담은 그릇이 1932년부터 그가 펴낸 《사회연구지》였고, 대표 성과가 1936년 파리에서 나온 공동 연구 『권위와 가족에 관한 연구』였다. 사람들이 왜 권위에 순종하는지를 가족과 성격 형성에서 찾은 이 연구에는 에리히 프롬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함께했다. 이렇게 연구소 주변에 모인 마르크스주의적·프로이트적 학자들을 연구 문헌은 ‘호르크하이머 서클’, 뒤에는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불렀다.

계획은 처음부터 정치 격변에 막혔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연구소는 폐쇄되고 건물은 게슈타포에 압수되었으며, 호르크하이머는 교수직과 소장직을 잃었다. 연구소는 미리 열어 둔 제네바 지부로 옮겼다가, 1934년 7월 컬럼비아대학교가 내준 건물로 뉴욕에 자리 잡았다. 망명 시기에는 프란츠 노이만, 오토 키르히하이머 같은 학자도 한때 연구소에서 일했다. 다만 여러 연구자는 이 학제 간 계획이 실제로는 경험 연구와 이론을 잘 통합하지 못했고, 호르크하이머가 왜 결합해야 하는지는 길게 설명했지만 어떻게 결합할지는 거의 설명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는 1949년 프랑크푸르트대학교로 돌아와 이듬해 연구소를 다시 열었고, 1951년과 1952년에는 대학 총장을 지냈다.

「전통 이론과 비판 이론」: 무엇이 이론을 ‘비판적’으로 만드나

1937년 망명지에서 나온 「전통 이론과 비판 이론」은 호르크하이머가 1930년대에 쓴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널리 읽힌 글이다. 연구소가 해 온 작업의 철학과 방법을 요약한 ‘강령’으로 흔히 불리며, 연구소의 이론이 ‘비판 이론’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이 글에서다. 그전까지 그는 자기 입장을 ‘유물론’이라고 불렀다.

글은 두 가지 이론을 맞세운다. ‘전통 이론’은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서 보듯 논리적으로 이어진 명제들의 체계를 세우고 그것을 경험적 사실에 맞추는 이론으로, 자연과학이 그 본보기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런 이론가를 비꼬아 ‘학자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기 작업이 어떤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가설을 사실에 적용하는 일은 결국 학자의 머릿속이 아니라 산업에서 이루어진다. 무엇을 연구하고 결과를 어디에 쓸지는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가 정한다는 뜻이다. 전통 이론은 그 구조가 낳는 고통도, 과학이 그 억압에 가담한다는 사실도 놓친다. 또 사실들을 보편 개념 아래 ‘부류와 사례’로 집어넣는 형식 논리에 기대어, 사회의 실제 모습을 굳은 틀에 가둔다.

‘비판 이론’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본보기로 삼는다. 그것은 “사회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 인간 활동”이다. 이론이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조건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따져 보고, 그 사회를 비판해 해방에 이바지하려 한다. 출발점은 억압받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붙잡아 현존 사회에 대한 일관된 비판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서술이 그 상황 속에서 변화를 자극하는 힘이 될 때 비판 이론가의 진짜 기능이 드러난다고 그는 썼다.

그러나 이 글에는 1930년대 초의 낙관이 줄어든 흔적도 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처지조차 올바른 인식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쓰고, 비판 이론가의 과제를 자신의 통찰과 그가 섬기는 억압받는 인류 사이의 긴장을 줄이는 일로 보았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을 모르므로, 이론가가 비판적 의식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상품 경제가 처음에는 진보를 가져오지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엄청나게 넓힌 뒤에는 발전을 가로막고 인류를 “새로운 야만”으로 몰아넣는다고 경고했다. 이 주제는 1940년대의 『계몽의 변증법』과 『도구적 이성 비판』으로 이어졌다. 『도구적 이성 비판』에서 그는 목적은 묻지 않고 주어진 목적을 이룰 수단만 따지는 이성이 기술을 자기 목적으로 만들고, 사람을 도구의 노예로 만든다고 경고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1965년 프랑크푸르트대학교 취임 강연 「인식과 관심」의 출발점으로 바로 「전통 이론과 비판 이론」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