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저널리즘의 대표적 목소리, 헤밍웨이가 카르코프로 형상화한 인물
헤밍웨이는 프라우다 특파원을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만난 가장 지적인 인간...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두뇌와 내면의 위엄, 겉으로 드러나는 뻔뻔함과 유머를 지녔다."
오고뇨크·크로코딜 등 주요 소비에트 잡지를 이끌고 소비에트 작가동맹 외국부를 맡았던 기자 겸 공론가. 키예프에서 태어나 1917년 혁명과 내전에 참여했고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스페인 내전에 『프라우다』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일기』(1938)를 남겼다.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23–1938『오고뇨크』 편집장
- 1925–1938저널-가제타 연합(주르가즈) 책임자
- 1922–1938『프라우다』 특파원
- 1934–1938『크로코딜』 편집장
- 1932–1938『자 루베좀』 창간자 겸 편집자
- 1936–1937스페인 내전 프라우다 특파원 겸 소련 정치 대리인
- 1934–1938소비에트 작가동맹 외국부장
- 1938러시아 SR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관련 역사 사건
스페인 내전과 이중 역할
스페인 내전(1936–1939)은 콜초프의 경력에서 가장 극적인 장이었다. 그는 『프라우다』 특파원으로 파견되었으나 실제 역할은 이중적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공화파 진영의 최전선을 누비며 기사와 라디오 방송을 송출했고, 이 취재는 『스페인 일기』(1938)로 묶여 소련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콜초프는 '미겔 마르티네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소련의 비공식 정치 대리인이자 군사 고문이었다. 그는 공화파 정부와 직접 접촉하며 스탈린의 노선을 관철했고, 국제여단의 편성과 인사에 관여했으며, 마드리드 방어전에서 공화파 측에 실질적인 군사 조언을 제공했다. 그의 호텔 방에는 크렘린과 직통으로 연결된 전화선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콜초프는 POUM과 무정부주의자들을 격렬히 공격하며 스탈린주의 노선을 충실히 대변했다. 한편으로 그는 에른스트 헤밍웨이를 비롯한 서방 지식인·기자들과 깊이 교류했고, 헤밍웨이는 훗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콜초프를 소련 정보장교 카르코프로 형상화했다. 영국의 공산주의 언론인 클로드 코크번은 콜초프에 대해 '거대한 머리와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표현력 풍부한 얼굴을 지닌 땅딸막한 유대인'이라고 묘사했으며, '위험의 감각을 의심할 여지 없이, 적극적으로 즐겼다'고 회고했다. 콜초프의 스페인 활동은 소비에트 저널리즘이 외교·정보·군사 작전과 한 몸으로 작동했던 시대의 축도였다.
숙청의 회오리와 최후
1937년 11월 콜초프는 스페인에서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적기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귀환한 그를 기다린 것은 승리가 아니라 대숙청의 한복판이었다. 그는 내무인민위원부(NKVD) 수장 니콜라이 예조프의 아내 예브게니야 예조바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1937년 12월 19일에는 숙청의 방식 일부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 글에서 콜초프는 누군가 자신을 감추기 위해 죄 없는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주장하며, 당과 정부와 법원, 그리고 여론이 '소비에트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몰인정한 거짓말쟁이들'을 멈춰 세울 것을 요구했다.
그의 공적 태도는 훨씬 복합적이었다. 1937년 7월 8일 연설에서 콜초프는 소비에트 작가들이 반역과의 투쟁에서 앞장서야 하며, 정부가 '반역자·간첩·인민의 적'에게 취하는 '단호하고 무자비한 조치'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손은 '적을 벌할 때 떨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동생 보리스 예피모프에게 오랫동안 알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인민의 적으로 자백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며 '내가 미쳐 가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1937년 5월 모스크바에 돌아왔을 때 그는 스탈린과 세 시간 동안 스페인 문제를 단독으로 논의했는데, 끝무렵 스탈린이 그를 다시 불러 권총이 있는지, 자살할 생각인지 물었다. 콜초프는 이를 경고로 받아들였다.
1938년 9월 그는 히틀러와 체임벌린의 협상을 취재하러 프라하에 파견되었다. 콜초프는 클로드 코크번에게, 개전 시 소련이 군대와 포병, 항공기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에게 전달할 권한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프랑스·소련이 나치 독일을 맞아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해 단결하기를 바랐고, 이것이 좌절되자 깊은 절망에 빠졌다. 코크번은 콜초프가 자신이 반혁명 혐의로 재판받는 상상 속 장면을 희화화했다고 기록했고, 콜초프는 체포될 위험을 코크번에게 직접 말했다. 파리에서 마리야 오스텐을 만나려던 계획은 소련 대사의 귀국 명령으로 무산되었다.
체포 시점에 대해서는 사료가 엇갈린다. 러시아어 기록은 1938년 12월 13일 『프라우다』 편집부에서 체포영장 없이 체포되었고 영장은 12월 14일자로 소급해 작성되었다고 전한다. 영어 자료는 12월 14일 체포, 즉 예조바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4주 뒤이자 예조프가 NKVD 지위에서 해임된 지 9일 뒤라고 적는다. 또 다른 자료는 12월 12일을 체포일로 제시한다. 어느 날짜도 확정되지 않았으며, 여기서는 이 차이를 그대로 밝힌다.
콜초프는 '반소비에트적 트로츠키주의 활동과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기소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그는 고문을 당했고 70명이 넘는 지인을 끌어들였으며, 그중 다수는 함께 체포되어 나중에 그와 같이 총살되었다. 1940년 1월 16일자 스탈린 처형 명단에는 '당과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음모 가담자'로 지목된 346명 가운데 137번으로 콜초프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 명단에는 예조프를 비롯해 '예조프 시기' NKVD 지도부 전체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0년 2월 1일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가 형을 확정했고 다음 날인 2월 2일 집행되었다. 바실리 울리흐가 재판한 다른 기록에 따르면 콜초프는 법정에서 자백을 모두 번복했으나 유죄 판결을 받고 그날 밤 총살되었다.
체포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경합하며, 어느 것도 단정할 수 없다. 한 견해는 예조프의 아내 예브게니야와의 가까운 관계에 주목한다. 그녀는 1938년 11월 23일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보이는 의문스러운 상황에서 사망했고, 예조프의 심문 기록은 그가 아내와 콜초프 등 작가들의 가까운 관계를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다른 견해는 콜초프가 스페인에서의 비밀 NKVD 작전의 증인이었기에 제거되었다고 본다. 국제여단 사무총장 앙드레 마르티가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콜초프를 POUM과의 연결 및 간접적으로 간첩 혐의로 고발한 것이 직접적 계기였다는 것이다. 1920년대 초 트로츠키에 관한 그의 글도 불리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 이 설은 동생 보리스 예피모프가 회고록에서 밝혔다. 사이먼 세바그 몬테피오레는 스페인에서 활동한 대표자들을 모두 체포하려는 스탈린의 결심을, 도널드 레이필드는 체포된 기자 미하일 프레젠트의 일기가 콜초프를 트로츠키 지지자로 시사한 점을 각각 지목한다.
사후 복권 과정에서 가족에게는 사망일이 1942년 4월 4일로, 사망 장소는 공란으로 된 사망진단서가 발급되었다. 이 조작된 날짜는 1980년대 후반까지 여러 소비에트 백과사전과 편람에 사실로 실렸다. 콜초프는 1954년 12월 18일 사후 복권되었으며, 사건 재심은 D. P. 테레호프가 맡았다. 그의 세 번째 아내 마리야 오스텐도 유죄 판결을 받고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