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 시험의 국가위원장, 흐루쇼프 반대로 좌천된 기술관료
「화학 공업을 잘 모릅니다」라고 말하자 스탈린이 답했다: 「당신은 훌륭한 조직가입니다. 볼셰비키라면 맡은 일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 1942년 화학공업인민위원 임명 당시
대장간 아들로 태어나 전기기술자로 성장한 소련의 산업 행정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화학공업인민위원으로서 군수 화학물질 생산을 재건했고, 1943년부터는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로 쿠르차토프와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1949년 첫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55년부터 제1부총리를 지냈다. 1957년 흐루쇼프의 일인 독주를 비판한 '반당 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으로 좌천되었으나, 이후로도 고스플란에서 에너지·지역계획 전문가로 일하며 생을 마쳤다.
경력 연표
- 1929–1936모스크바 경제원 졸업 후 카시라 발전소에서 기술자에서 소장까지 승진
- 1937–1939모스에네르고 수석기사, 글라브에네르고 국장을 거쳐 중공업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 1939–1940발전소·전기공업인민위원, 에너지 인프라 확충 지휘
- 1942–1950화학공업인민위원(장관) 겸 부총리, 전시 화학 생산 재건·확대
- 1943–1949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 1949년 8월 RDS-1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
- 1952–1957CPSU 중앙위 간부회 위원·제1부총리, 1957년 반당 그룹 사건으로 강등
- 1958–1962주동독 특명전권대사
- 1965–1978고스플란 부서장·위원, 원자력발전소 인수 국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관련 역사 사건
1941년 산업 대피위원회: 소련 공장을 동쪽으로
1941년 6월 24일, 독일의 침공 사흘째에 페르부힌은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산하 대피위원회 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전선이 무너지는 가운데 1941년 7월부터 12월까지 그의 지휘 아래 1,523개의 산업 기업이 우랄, 볼가, 서시베리아, 카자흐스탄, 중앙아시아로 이전되었다. 이는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산업 재배치 작전이었다.
페르부힌은 이전된 공장에 추가 전력 공급원을 조직하는 임무도 맡았다. 대피한 중공업 기업들은 1942년 상반기에만 약 1만 대의 항공기와 5만 4천 문의 화포를 생산했다. 이 성과는 1941년 겨울 모스크바 방어와 이후 스탈린그라드 반격의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
동시에 페르부힌은 국방위원회로부터 붉은 군대의 군사화학방어국 전권대표로 임명되어 화학무기 사용 가능성에 대비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 이중 임무는 페르부힌이 전시 소련의 산업 동원 체계에서 차지한 핵심적 위치를 보여준다.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경제 행정 책임자: 1943–1949
미하일 페르부힌은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서 이고리 쿠르차토프의 과학적 파트너이자 행정·경제적 대응자였다. 1942년 가을, 몰로토프의 지시로 소련 내 핵물리학 연구가 중단된 상태를 조사한 페르부힌은 이오페, 쿠르차토프, 알리하노프, 키코인을 만나 이 분야의 잠재력을 확인했다. 그는 정부에 "즉시 원자핵 물리학 작업을 재개해야 한다"고 보고했고, 며칠 뒤 지도부는 이를 수용했다. 1943년 2월 11일 국방위원회 결정으로 핵물리 연구가 공식 재개되자, 페르부힌은 물자·기술 보급과 건설을 총괄하는 최고 경제 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실무는 광범위했다. 쿠르차토프와 함께 모스크바 포크롭스코예-스트레시네보에 제2연구소(현 쿠르차토프 연구소)를 세워 실험용 우라늄-흑연 원자로를 건설했다. 우라늄 광산 탐사에서부터 초고순도 흑연 생산, 중수 실험로 건설까지 에너지 공급망 전체를 조직했다. 1945년 4월 쿠르차토프와 공동으로 스탈린에게 행정 전담 기구인 과학기술평의회 설립을 건의해 승인을 받았고, 1945년 8월 20일 특별위원회(베리야 위원장)의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공학기술평의회 의장 겸 제1총국 제1부국장으로서 플루토늄 생산 공장(제817공장, 현 마야크)과 우라늄 농축 공장(제813공장, 현 우랄 전기화학 콤비나트)의 건설을 지휘했다.
절정은 1949년 8월이었다. 페르부힌은 세미팔라틴스크 시험장에서 시행된 소련 최초의 핵실험 RDS-1의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시험 성공 후, 1949년 10월 29일 비밀 대통령령으로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을 받았다. 원자폭탄 계획에서 쿠르차토프가 물리학의 얼굴이었다면, 페르부힌은 이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를 현실의 공장과 광산, 전력망과 화학 공정으로 번역한 행정가였다. 그는 이후로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원자력발전소, 원자력 추진 선박과 항공기 구상)을 지지하고 추진했으며, 만년까지 모든 신규 원전 인수 국가위원회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