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게오르기예비치 페르부힌

Михаил Георгиевич Первух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8 ○ 자연사(뇌졸중), 모스크바

첫 원자폭탄 시험의 국가위원회 위원장, 1957년 흐루쇼프에 맞서 좌천된 인물

1942년 2월 26일 화학공업인민위원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스탈린에게 「저는 전기기술자이고 화학은 잘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이 답했다: 「당신은 훌륭한 조직가입니다. 볼셰비키라면 맡은 일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대장간 아들로 태어나 전기기술자로 성장한 소련의 산업 행정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화학공업인민위원으로서 군수 화학물질 생산을 재건했고, 1943년부터는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로 쿠르차토프와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1949년 첫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55년부터 제1부총리를 지냈다. 1957년 흐루쇼프의 일인 독주를 비판한 '반당 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으로 좌천되었으나, 이후로도 고스플란에서 에너지·지역계획 전문가로 일하며 1978년 7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쳤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소련 정치국

1961.10 미재선 · 「반당 그룹」에 동조해 강등

관련 역사 사건

1941년 산업 대피위원회: 소련 공장을 동쪽으로

1941년 6월 24일, 독일의 침공 사흘째에 페르부힌은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산하 대피위원회 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전선이 무너지는 가운데 1941년 7월부터 12월까지 그의 지휘 아래 1,523개의 산업 기업이 우랄, 볼가, 서시베리아, 카자흐스탄, 중앙아시아로 이전되었다. 이는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산업 재배치 작전이었다.

페르부힌은 이전된 공장에 추가 전력 공급원을 조직하는 임무도 맡았다. 대피한 중공업 기업들은 1942년 상반기에만 약 1만 대의 항공기와 5만 4천 문의 화포를 생산했다. 이 성과는 1941년 겨울 모스크바 방어와 이후 스탈린그라드 반격의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

동시에 페르부힌은 국방위원회로부터 붉은 군대의 군사화학방어국 전권대표로 임명되어 화학무기 사용 가능성에 대비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 이중 임무는 페르부힌이 전시 소련의 산업 동원 체계에서 차지한 핵심적 위치를 보여준다.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경제 행정 책임자: 1943–1949

미하일 페르부힌은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서 이고리 쿠르차토프의 과학적 파트너이자 행정·경제적 대응자였다. 1942년 가을, 몰로토프의 지시로 소련 내 핵물리학 연구가 중단된 상태를 조사한 페르부힌은 이오페, 쿠르차토프, 알리하노프, 키코인을 만나 이 분야의 잠재력을 확인했다. 그는 정부에 "즉시 원자핵 물리학 작업을 재개해야 한다"고 보고했고, 며칠 뒤 지도부는 이를 수용했다. 1943년 2월 11일 국방위원회 결정으로 핵물리 연구가 공식 재개되자, 페르부힌은 물자·기술 보급과 건설을 총괄하는 최고 경제 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실무는 광범위했다. 쿠르차토프와 함께 모스크바 포크롭스코예-스트레시네보에 제2연구소(현 쿠르차토프 연구소)를 세워 실험용 우라늄-흑연 원자로를 건설했다. 우라늄 광산 탐사에서부터 초고순도 흑연 생산, 중수 실험로 건설까지 에너지 공급망 전체를 조직했다. 1945년 4월 쿠르차토프와 공동으로 스탈린에게 행정 전담 기구인 과학기술평의회 설립을 건의해 승인을 받았고, 1945년 8월 20일 특별위원회(베리야 위원장)의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공학기술평의회 의장 겸 제1총국 제1부국장으로서 플루토늄 생산 공장(제817공장, 현 마야크)과 우라늄 농축 공장(제813공장, 현 우랄 전기화학 콤비나트)의 건설을 지휘했다.

절정은 1949년 8월이었다. 페르부힌은 세미팔라틴스크 시험장에서 시행된 소련 최초의 핵실험 RDS-1의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시험 성공 후, 1949년 10월 29일 비밀 대통령령으로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을 받았다. 원자폭탄 계획에서 쿠르차토프가 물리학의 얼굴이었다면, 페르부힌은 이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를 현실의 공장과 광산, 전력망과 화학 공정으로 번역한 행정가였다. 그는 이후로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원자력발전소, 원자력 추진 선박과 항공기 구상)을 지지하고 추진했으며, 만년까지 모든 신규 원전 인수 국가위원회에 참여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건과 주동독 대사 시절

1957년 6월 18일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 회의에서 페르부힌은 흐루쇼프가 핵심 정책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다른 간부회 위원들의 의견을 무시하며 레닌주의적 지도 원칙에서 벗어난다고 비판한 다수파에 합류했다. 그는 부서별 부(部) 해체와 기업의 지역 경제평의회 이관, 1960년까지 1인당 육류·우유 생산에서 미국을 추월하자는 구호를 구체적으로 문제 삼았고, 당시 제1부총리였다. 간부회 다수는 흐루쇼프를 제1서기에서 해임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흐루쇼프 해임 시도는 실패했고, 1957년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중앙위 총회에서 「말렌코프·카가노비치·몰로토프 반당 그룹」 결의가 채택되면서 페르부힌은 간부회 정식 위원에서 후보위원으로 강등되었다. 1957년 7월부터 12월까지 그는 소련 대외경제관계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주독일민주공화국 특명전권대사로 일했다.

대사 시절의 배경은 제2차 베를린 위기였다. 1958년 11월 흐루쇼프의 최후통첩은 6개월 안에 서베를린을 자유 비무장 도시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며 일방 조치를 위협했고, 동독의 경제난과 베를린을 통한 대량 탈출이 국경 봉쇄 압력을 키웠다. 페르부힌은 동독 지도부가 서베를린 국경 문제에서 때로 조급하고 일방적으로 접근하며 자유 이동을 최대한 빨리 차단하려 한다고 모스크바에 경고했다. 1958년 12월 5일 발터 울브리히트는 페르부힌에게 「현재가 동독 승인 문제에서 전환점」이라고 말했고, 1961년 7월에는 기습을 극대화하려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밤이 국경을 봉쇄하기에 가장 좋은 시점이라고 말했다. 페르부힌은 대사로서 울브리히트가 모스크바를 압박한 창구였다.

페르부힌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세계 사이의 열린 국경이 베를린 주민에게 도시 양쪽을 비교하게 만들고 그 비교가 동베를린에 불리하게 나온다고 지적했다. 그는 구역 경계 설치에 신중했는데, 그것이 베를린과 독일에서 반소 감정을 키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신 제한 조치와 국경 경비 강화, 자유 이동 중단을 제안했으며, 정치 상황이 악화되면 봉쇄도 가능하다고 인정했다.

1961년 8월 초 바르샤바 조약 지도자 회의를 위해 동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에서 페르부힌은 부관 율리 크비친스키에게 동독의 조치가 동독 단독 계획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서독과 그 동맹이 개입할 명분이 된다는 것이었다.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 전체가 동독 앞에 서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이 모두에게 분명해지도록 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1961년 8월 13일 동독은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의 동의 아래 베를린 장벽을 세웠다. 이는 울브리히트의 집요한 요구에 대한 흐루쇼프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페르부힌의 대사직은 1962년 말 표트르 아브라시모프가 후임으로 오면서 끝났다.

이후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그는 소련 최고국민경제회의 에너지·전력화 관리국장을 맡았고, 1965년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고스플란 위원회 위원, 지역계획·생산 배치 부서장, 신규 원자력발전소 인수 국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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