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노동자 정당의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 모델에 맞서 패배한 논쟁
트로츠키 회고: 「악셀로트 집안에는 소박함과 진심 어린 동지적 참여의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1883년 플레하노프·자술리치와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다. 1900년 『이스크라』 편집위원, 1903년 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로서 대중적 노동자 정당을 주장하며 레닌의 전위당을 비판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을 지냈으나 10월 혁명에 반대, 이후 망명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872–74키예프 대학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나로드니키 활동; 「민중 속으로」 참가
- 1876–79「토지와 자유」 → 분열 후 「검은 재분할」 지도부
- 1881–83망명 중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독일 사민당 지도부와 교류
- 1883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노동해방단」 공동 창립
- 1900–03『이스크라』 및 『자랴』 편집위원
- 1903–05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이 자코뱅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최초로 경고
- 1906–14제2인터내셔널 활동; 청산주의 전술 정당화; 비엔나 회의 OK 해외서기국 선출
- 1917귀국,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10월 혁명 반대하고 재망명
- 1918–28멘셰비키 망명 지도부; 반볼셰비키 노선 견지; 베를린에서 사망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멘셰비키 이론가1905년 혁명기 멘셰비키의 대중정당 노선을 대표한 이론가였다.
- 1907–1919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멘셰비키 중간파 국제주의자치머발트 운동에 참여했으나 레닌의 치머발트 좌파에 반대했고, 마르토프와 함께 병합·배상금 없는 강화 문구를 관철했다.
- 1917.02–072월 혁명멘셰비키 OK 의장·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5월 9일 봉인열차로 귀국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이 되었고, 멘셰비키 조직위원회(OK) 의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조건부 지지 노선을 주도했다. 8월 초 스톡홀름-치머발트 회의 준비차 출국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 1917.10–1918.0110월 혁명10월 혁명 반대자1917년 10월 혁명에 반대했다.
레닌의 자코뱅주의적 전위당에 대한 첫 경고 (1903–1904)
RSDLP 제2차 대회(1903)에서 당원 자격을 둘러싼 분열 이후, 악셀로트는 새로운 『이스크라』(1903년 말–1904년 초)에 발표한 일련의 글에서 레닌의 중앙집권적 전위당 모델이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를 자코뱅주의적·음모적 조직으로 변질시킬 위험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경고했다. 그는 레닌의 구상에서 "신권정치적 성격의 유토피아"를 보았고, 이를 러시아의 후진성이 낳은 "소부르주아적 급진주의"가 노동계급의 투쟁을 도구화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악셀로트의 대안은 유럽 사민당들처럼 당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자주활동(самодеятельность) 위에 서는, 광범위하고 민주적인 대중 노동자 정당이었다. 이 논쟁은 볼셰비즘과 멘셰비즘의 이념적 분기점이 되었으며, 악셀로트가 제기한 민주적 정당 대 전위당의 문제는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의 근본적 긴장으로 남았다.
전쟁과 치머발트(1914~1917)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제2인터내셔널이 무너지자 악셀로드는 중간파 국제주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이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보고 반대했지만, 레닌처럼 러시아의 패전을 바라자고 하지는 않았다. 사회주의자의 첫째 임무는 인터내셔널을 되살리고 병합과 배상금 없는 민주적 강화를 위해 함께 싸우는 것이라고 보았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그가 전쟁 초기 협상국에 대한 공감을 숨기지 않았고, 자국 정부를 지지한 유럽 사회민주당들의 태도를 "수백 년 된 애국주의 전통"으로 설명하려 했다고 적는다. 그 뒤 그가 내놓은 "평화를 위한 국제적 투쟁" 계획은 각국 노동자가 당 지도부를 압박해 사회주의자들을 정부에서 불러내고 전쟁공채 찬성을 거두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치머발트 운동에 참여했지만, 제2인터내셔널과 완전히 결별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바꾸자는 레닌의 치머발트 좌파에는 반대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는 1915년 치머발트 회의와 1916년 킨탈 회의를 전쟁으로 갈라진 사회주의 정당들이 다시 가까워지기 위한 "사적인 국제 협의"로 보았고,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에 "레닌의 분열 선전"이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 했다. 마르토프와 함께 "병합과 배상금 없는 전반적 강화 조약"이라는 치머발트 다수파의 핵심 문구를 관철했으며, 레닌은 그를 "러시아 카우츠키주의자들의 지도자"라고 불렀다.
2월 혁명 뒤인 1917년 5월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멘셰비키가 주도하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국제 평화 운동을 이끌라고 촉구하면서도, 독일과의 단독 강화는 협상국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이자 러시아 혁명에 해가 된다며 반대했다. 1917년 8월 스톡홀름 사회주의 회의에 참석하러 러시아를 떠난 뒤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