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닝 정부 「묵인」 정책을 변호한 바이마르 사회민주당 의원단 공동 의장
자유주의 언론인으로 출발해 민주연합을 이끌다 1912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다. 1차 대전에 반대해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으로 옮겼고, 1918년 11월 혁명 때 프로이센 내무장관을 지냈다. 1922년 사회민주당에 돌아와 외교 전문가이자 의원단 공동 의장(1928년~)이 되었다. 1930~1932년 나치 집권을 막는다는 이유로 브뤼닝 정부 「묵인」 정책을 변호했다. 1933년 수권법에 반대표를 던지고 프랑스로 망명했으나, 1941년 비시 정권이 게슈타포에 넘겨 1944년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죽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898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 토지정책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08민주연합을 세우고 의장이 되었다.
- 1912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 1917전쟁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으로 옮겼다.
- 1918.11–1919.01프로이센 내무장관.
- 1920–1933제국의회 의원.
- 1922사회민주당에 복귀했다.
- 1928사회민주당 의원단 공동 의장이 되었다.
- 1933.03수권법 표결에 반대하고 4월 망명했다.
- 1941.02힐퍼딩과 함께 게슈타포에 넘겨졌다.
- 1944.08.24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죽었다.
브뤼닝 「묵인」과 바이마르의 끝 (1930~1933)
1930년 브뤼닝 내각이 들어서고 9월 총선에서 나치당이 약진하자, 브라이트샤이트는 공화국의 몰락을 막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히틀러의 입각을 막으려면 사회민주당이 브뤼닝 정부를 떠받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의 파시즘 분석은 당시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섬세한 편이었다. 그는 파시즘을 민주주의 제도를 이용하고 사이비 합법 수단으로 목표를 이루는 반민주 조직으로 보았고, 나치를 원칙 없는 권력 추구자로 규정했으며, 일단 권력을 잡으면 몰아내기 거의 불가능하리라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제국의회의 다른 두 거대 정당인 나치와 공산당이 모두 반헌법 세력인 상황에서 브뤼닝을 무너뜨리면 사회민주당이 반헌법 정부를 불러들이는 책임을 진다고 주장했다.
당내 불만이 커진 1931년 11월에는 공산당이 무장 조직을 해체한다면 협력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공개적으로는 묵인 정책을 계속 지지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힌덴부르크 지지를 받아들였다. 트로츠키는 『다음은 무엇인가?』에서 공산당이 소비에트로 가려면 먼저 「벨스, 힐퍼딩, 브라이트샤이트」와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쓰면서도, 그들을 상대로 한 통일전선 제안을 요구했다. 스탈린주의 언론은 거꾸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브라이트샤이트처럼」 행동한다고 비난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총리가 되었을 때 브라이트샤이트는 철전선의 의회 밖 행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3월 선거에서 다시 당선된 그는 수권법 표결에 반대하고 4월 1일 망명했다. 파리에서 그는 공산당과의 인민전선을 모색하다 사회민주당 동지들과 멀어졌다. 1940년 마르세유로 피신했지만 미국 비자를 얻지 못했고, 1941년 2월 힐퍼딩과 함께 게슈타포에 넘겨졌다. 그는 작센하우젠과 부헨발트를 거쳐 1944년 8월 24일 부헨발트에서 죽었는데, 나치는 연합군 공습으로 죽었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