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가브릴로비치 실랴프니코프

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Шляпников
볼셰비키에 대한 좌파 비판 소련 러시아 1885–1937 ✕ 처형

노동자 반대파의 지도자. 레닌에게 패배하고 숙청되다

1937년 9월 2일 군사합의회의 비공개 재판에서 테러 음모 혐의를 끝까지 부인하고 다른 사람도 끌어들이지 않았다. 제10차 당대회 강령이 옳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다른 야권과 달리 과거가 아니라 철저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요구했다고 진술했다.

무롬의 가난한 옛의식파 집안에서 태어난 숙련 선반공이었다. 1901년 RSDLP에 입당해 1903년 분열 뒤 볼셰비키로 섰고, 프랑스·독일·영국 공장을 전전하며 유럽 노동운동을 체득했다. 1917년 2월 혁명 때 수도에 있던 최고위 볼셰비키로서 당 중앙위원회 러시아국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0월혁명 후 초대 노동인민위원으로 8시간 노동제의 기초를 놓았고, 내전 말기 콜론타이와 함께 '노동자 반대파'를 이끌며 노동조합의 경제 통제를 주장했으나 1921년 제10차 당대회에서 패배했다. 외교직으로 밀려난 뒤 1933년 출당, 1935년 징역형을 거쳐 1937년 9월 2일 거짓 기소로 처형되었다. 1963년 사법적 복권, 1988년 당적 복권.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17년 2월, 수도의 당을 이끈 금속노동자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는 무롬의 가난한 구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금속 선반공으로 일했다. 숙련공으로서 프랑스, 독일, 영국의 공장을 떠돌며 유럽 노동운동을 안에서부터 익힌 그는, 전쟁 중에는 스칸디나비아를 오가는 당의 비밀 연락망을 운영했다.

1917년 3월(구력 2월) 2월 혁명이 터졌을 때 페트로그라드에 있던 최고위 볼셰비키가 바로 그였다. 몰로토프, 잘루츠키와 함께 당 중앙위원회 러시아국을 이끌며 봉기의 나날에 당의 방향을 잡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볼셰비키 대표로 들어갔다. 10월 이후 첫 노동인민위원이 된 그는 8시간 노동제 법령과 사회보험 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공장의 선반에서 인민위원회의까지, 그의 이력 자체가 노동자 혁명의 축도였다.

인민위원에서 전선으로: 1918년, 노동자 통제의 실천과 첫 반대

1917년 11월 8일(구력 10월 26일) 제1차 인민위원회의 노동인민위원이 되었다. 공식 인민위원 명단은 임기를 1917년 11월 8일부터 1918년 10월 8일까지로 적고 바실리 슈미트가 뒤를 이었다고 하나,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실랴프니코프 항목 정보상자는 종료일을 1918년 12월 8일로 적는다. 두 설을 함께 제시한다.

1917년 11월 그는 모든 소비에트 정당이 참여하는 '동질적 사회주의 정부'를 지지하고 11월 4일 인민위원 성명에 서명했으나, 연립 교섭 중단에 항의하면서도 책임과 직무를 내려놓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고 서면으로 밝히고 자리를 지켰으며 무역·산업인민위원직을 겸했다. 이 겸직의 종료 시점도 자료마다 다르다. 흐로노는 1918년 1월 15일까지로, 러시아어 위키백과 정보상자는 1917년 12월 2일~1918년 1월 27일로 적는다.

노동인민위원으로서 그는 노동자 통제와 기업 국유화에 관한 주요 지침 초안 작성에 참여하고 정부 기구를 노동조합 인력으로 채웠으며, 관료들의 태업과 파업에 맞섰다. 1918년 1월에는 노동자 통제 위원회를 만들어 이를 최고국민경제회의(브SNH)로 전환하는 데 참여했다. 제헌의회 문제에서는 온건파를 밀어내려는 진보에 맞서 볼셰비키 측 준비를 맡았고, 1918년 1월 18~19일 제헌의회 해산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1918년 독일군의 진격에 맞서 페트로그라드 산업 대피를 조직했으며, 브레스트 협상이 결렬된 뒤 대피를 관장하는 중앙위원회를 이끌었다.

1918년 3월 제7차(긴급)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5월 말 스탈린과 함께 러시아 남부에 파견되어 레닌의 표현대로 곡물을 '끌어내는' 임무를 맡았고, 남부전선과 카스피-캅카스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서부전선 제16군 혁명군사평의회에서 일했다. 1920년에는 전노동조합중앙평의회로 복귀했다.

이 시기에 그의 비판이 처음 체계화되었다. 내전 중 그는 산업과 노동자에게 향한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당과 소비에트 정부가 권위주의적 수단에 점점 의존하는 것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노동자에게 경제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1917년 혁명의 목표에서 멀어지는 일이라고 보았다. 이 비판은 1920년 노동자 반대파로 이어졌다.

모순도 함께 남긴다. 노동인민위원으로서 그는 계급 전체가 아니라 당장의 이해를 좇는 노동자들과 맞닥뜨렸고, 노동조합 대표가 참여하던 위원회들이 1인 관리로 대체되는 것을 묵인했다. 노동조합의 생산 관리 장악을 요구하게 될 바로 그 사람이 내전과 붕괴의 압력 속에서 1인 관리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초대 인민위원회 16명 가운데 노동자 출신은 그와 노긴 둘뿐이었고, 같은 기록은 이 구성이 내전 말 노동자 반대파의 등장, 즉 지식인들이 노동자 이름으로 지배한다는 불만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당·소비에트·공장위원회·노동조합 사이의 권력 배분이라는 미해결 문제 한가운데에 있었다.

전기 저자 수하노프는 그를 '경험 많은 음모가, 뛰어난 조직 기술자, 노동운동의 훌륭한 실천가' 그러나 '정치가는 전혀 아니었다'고 평했다.

노동자 반대파, 자백을 거부한 최후

내전 말기 실랴프니코프는 콜론타이, 메드베데프와 함께 노동자 반대파를 이끌었다. 생산 관리를 노동조합과 「생산자 대회」에 맡기라는 이들의 강령은 당과 국가의 관료화에 맞서 혁명의 노동자적 기원을 지키려는 시도였다. 1921년 제10차 당대회는 이 강령을 부결하고 분파 금지를 결의했으나, 실랴프니코프는 당에 남아 금속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계속 대변했다.

그의 회고록 『1917년 전야』와 『1917년』은 2월 혁명의 일급 사료였으나, 1917년 당시 스탈린의 행적을 있는 그대로 적었다는 이유로 공격받았다. 1933년 출당과 1935년 체포로 이어진 탄압 속에서 그는 끝까지 테러 혐의의 자백을 거부했고, 1937년 9월 2일 총살되었다. 바버라 앨런의 전기가 복원했듯, 그는 심문자들 앞에서도 노동자 반대파의 강령이 옳았다고 진술한 드문 옛 볼셰비키였다. 1963년 사법적으로 명예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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