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끈 경제행정가, 스탈린과 기근 사이에서 균열을 드러내다
1932년 6월, 15일간 키예프·빈니차의 굶주린 마을들을 직접 돌아본 추바리는 스탈린에게 100만 푸드의 긴급 구호 곡물을 요청했다. 두 달 뒤 스탈린은 카가노비치에게 썼다: '추바리는 지도자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경제행정가로, 1923년부터 11년간 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공업화와 집단화를 진두지휘했다. 1932~33년 기근 당시 스탈린에게 곡물 긴급 지원을 공식 요청한 몇 안 되는 고위 지도자였으며, 이로 인해 스탈린과 반복적으로 충돌했다. 1935년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으나 대숙청 와중인 1938년 '독일 첩자'라는 날조된 혐의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다.
경력 연표
- 1907제정 노동자구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16세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1–1917크라마토르스크·마리우폴·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 공장 노동자, 지하운동
- 1917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위원, 10월 혁명기 포병총국 정치위원
- 1918–1923국가기계제작공장연합(ГОМЗа) 이사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우크라이나 산업복구 조직국 의장
- 1921–1923우크라이나 SSR 최고경제회의 의장 겸 중앙석탄공업관리국 의장
- 1923–1934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11년간), 공업화·집단화 주도
- 1923–1925, 1934–1938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26–1935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 1935–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7–1938소련 재무인민위원
- 1938.7.4'독일 첩보기관 요원' 혐의로 체포, 정치국 축출
- 1939.2.26군사재판 사형 판결, 당일 총살
관련 역사 사건
- 1917.10–1918.0110월 혁명10월 혁명기 포병총국 정치위원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우크라이나 산업 복구 지도
- 1922.12소련의 결성우크라이나 정부수반, 우크라이나화 시행의 제도적 책임자1923년 7월 라콥스키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우크라이나화 법령의 제도화를 주도했다.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우크라이나 총리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우크라이나 공업화·집단화 행정 책임
- 1932–1933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장, 1932년 6월 스탈린에 기근 구호 요청1932년 6월 굶주린 마을들을 직접 돌아본 뒤 스탈린에게 100만 푸드의 긴급 구호 곡물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카가노비치에게 '추바리는 지도자가 아니다'라고 썼다.
- 1937–1938대숙청표적부총리와 정치국원을 지낸 우크라이나 경제행정가로 1939년 처형됐다.
1932년 기근 보고서와 스탈린과의 충돌
1932년 봄, 우크라이나 농촌에서는 전년도의 과도한 곡물 수탈로 인해 기근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추바리는 5월에서 6월에 걸쳐 15일간 키예프주와 빈니차주의 가장 피해가 심한 지역들을 직접 방문했다. 그가 목격한 광경은 참담했다: "사람들이 곳곳에서 굶주리고 있었다. 여성들은 울고 있었고, 남자들조차 때로는 눈물을 보였다." 농민들은 추바리에게 직설적으로 항의했다: "왜 인위적인 기근을 만들었습니까? 수확은 있었는데 왜 모조리 빼앗아 갔습니까? 옛 체제 아래서도 누구도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추바리는 1932년 6월 10일 스탈린과 몰로토프 앞으로 긴급 서한을 보내 최소 100개 지역이 식량 원조를 필요로 한다고 보고하고, 100만 푸드(약 1만 6천 톤)의 곡물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최고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그리고리 페트롭스키도 별도의 서한을 보냈다. 이 두 서한은 소련 지도부에 기근의 존재를 정식으로 보고한 최초의 최고위급 문서들이다.
스탈린은 카가노비치에게 보낸 6월 15일자 서한에서 이렇게 반응했다: "추바리와 페트롭스키의 편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자는 모스크바에서 수백만 푸드의 곡물을 더 얻어내기 위해 '자기비판'을 늘어놓고 있고, 후자는 곡물 조달 목표치를 낮추기 위해 성인 행세를 하고 있다." 8월 11일에는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추바리는 지도자가 아니다." 그를 해임할 것을 카가노비치에게 제안하면서 한 말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를 즉시 교체하지 않았다. 공개적인 충돌에도 불구하고 추바리는 1934년까지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직을 유지했으며, 이는 스탈린이 당시 우크라이나의 통제 가능한 행정가로서 그의 가치를 인정했음을 시사한다. 이 1932년 6월의 서한은 오늘날 추바리의 행적을 평가하는 데 있어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우크라이나 공업화의 설계자: 돈바스 복구에서 제1차 5개년계획까지
볼셰비키가 우크라이나를 장악한 1920년, 공업은 남북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돈바스 탄전은 침수되고 설비는 철거되었으며, 1920년 석탄 생산량은 전쟁 전의 15%에 불과했다. 추바리는 1920년 1월 우크라이나 산업복구 조직국의 의장으로 임명되어 파괴된 공장과 광산의 재건을 총괄했고, 1921년 12월에는 중앙석탄공업관리국 의장으로서 돈바스 복구를 직접 지휘했다. 그의 지도 아래 돈바스의 석탄 생산은 빠르게 회복되어 우크라이나 공업화의 에너지 기반을 마련했다.
1923년 7월 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에 오른 추바리는 11년간 공화국의 경제를 총지휘했다. 제1차 5개년계획(1928~1932)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는 소련 전체 자본 투자의 5분의 1을 배정받았고, 드니프로 수력발전소(드니프로HES), 하르키우 트랙터 공장, 크리비리흐 및 자포리자 제철소 등 굵직한 중공업 시설이 그의 재임 중 건설되거나 확장되었다. 1930년 6월 하르키우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1차 대회에서 추바리는 공화국 영토 내의 전연방 기업들에 대한 우크라이나 정부의 통제권을 요구하며 모스크바의 중앙집권화 경향에 맞서 우크라이나의 경제적 이익을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그는 소련 전체의 공업화 계획을 충실히 집행하는 행정가이면서도 공화국의 경제적 자율성을 확보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공업화는 막대한 인적 비용을 수반했다. 농민으로부터의 강제 곡물 수탈이 공업화 자금의 원천이 되었고, 추바리는 이 체제의 핵심 집행자로서 그 모순을 온몸으로 짊어졌다. 1932~33년 기근 당시 그가 보여준 곡물 지원 요청은 바로 이 모순의 표현이었다. 자신이 건설한 공업화 체제가 낳은 비극 앞에서, 그는 충실한 행정가와 양심 사이에서 균열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