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원수, 군사적 무능을 정치적 충성으로 버티다
1937년 5월 28일, NKVD가 넘긴 붉은 군대 지휘관 26명 명단에 직접 펜으로 썼다: "예조프 동지에게. 모든 악당을 잡아들이시오. 1937년 5월 28일. K. 보로실로프." 142명 명단에는 더 짧게 "체포하라. K. V."라고 적었다.
예카테리노슬라프현의 철도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금속노동자다. 1918년 스탈린과 함께한 차리친 지휘로 스탈린 인맥의 군사적 상징이 되었고, 1925년부터 1940년까지 전쟁인민위원과 국방인민위원으로 붉은 군대를 이끌며 소련 시기 누구보다 오래 그 자리에 있었다. 대숙청의 책임을 함께 진다. 그의 서명은 185개 처형 명단에 남아 있고 그 명단으로 18,000명 이상이 총살당했으며, 1940년 3월 5일 폴란드 장교와 지식인 약 25,700명 처형 결정에도 서명했다. 겨울전쟁 후 해임되었으나 1941~1944년 국가방위위원회 위원과 빨치산 총사령관으로 일했고, 1960년까지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을 지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8–1920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18–1920차리친 방어와 내전 지휘, 스탈린 인맥의 군사 상징으로 부상
- 1925–1940전쟁·국방인민위원, 붉은 군대의 정치적 충성 노선 대표
- 1937–1938군 대숙청 국면에서 최고 군사지도부로 숙청을 승인
- 1939–1940겨울전쟁 실패 뒤 티모셴코에게 국방인민위원 자리를 넘김
- 1941–1945전시 원로 지휘관이지만 실전 지휘능력 한계를 드러냄
- 1953–1960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상징적 국가원수로 이동
- 1940–1953인민위원회 부의장,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 1945–1947헝가리 연합통제위원회 의장
- 1941–1944국가방위위원회 위원, 북서방면군·레닌그라드 전선 지휘, 빨치산 총사령관
소련 정치국
- 정위원 1926.01–1960.07
1960.07 퇴임
관련 역사 사건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차리친의 지휘관차리친 방어전을 지휘하고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서 정치 지도를 맡아 남부 전선을 누볐다.
- 1919–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제1기병군 혁명군사회의 위원제1기병군 혁명군사회의 위원으로 부됸니와 함께 6월 돌파와 8월 리보프 공세에 참여했다.
- 1936–1939스페인 내전국방인민위원, 「작전 X」 총괄전차·항공기 수송과 군사고문단 인선을 관장했다
- 1937–1938대숙청군 지휘관 숙청 승인1937~1938년 군 대숙청에서 처형 명단에 서명하고 체포를 지시했다.
- 1938–1941소련-일본 국경 전쟁과 중립조약국방인민위원국방인민위원으로서 7월 31일 전투준비태세 명령을 내렸고, 8월 31일 주군사평의회를 주재하여 블류헤르 해임과 극동전선 해체를 결정했다.
- 1939.11–1940.03겨울전쟁국방인민위원 · 참패의 책임개전을 낙관하고 준비 없는 공세를 승인한 국방수장으로, 초기 참패의 책임을 지고 1940년 5월 티모셴코에게 자리를 넘겼다.
- 1941–1945대조국전쟁국가방위위원회 위원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개전 초 레닌그라드 방면을 지휘했고 파르티잔 운동의 조직에도 관여했다.
- 1944–1949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헝가리 연합국 통제위원회 위원장1945년 11월 소농당이 과반을 얻은 뒤에도 연립정부 유지와 공산당의 내무부 장악을 요구했다.
- 1944–1949헝가리: 소농당의 승리에서 러이크 재판까지연합국 통제위원회 위원장1945년 총선 전 공동 명부를 요구했고, 소농당 과반 뒤 연립 유지와 공산당의 내무부 장악을 요구해 관철했다.
- 1957반당 그룹 사건주저한 다수파다수파에 가담했으나 원로 예우로 즉각적 숙청은 피했다.
전간기 국방 수장: 붉은 군대의 건설, 1925~1940
프룬제가 죽은 뒤 보로실로프는 1925년 11월 6일부터 1934년 6월 20일까지 육해군 인민위원 겸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으로, 이어 1934년부터 1940년까지 국방인민위원으로 소련의 군사 부문을 이끌었다. 거의 15년으로, 소련 시기 누구보다 긴 재임이었다. 1926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고 1935년 11월 소련 원수가 되었다.
그의 재임기에 붉은 군대는 새 전차·항공기·포로 재무장했다. 그는 설계자들을 만나고 공장을 찾았으며 신형 화기를 시험하는 전문 위원회를 꾸렸고, 새 계급과 휘장, 군복이 도입되었다. 군은 지역 민병 체계에서 상비군 체계로 옮겨 갔다. 1935년 초 편성의 77퍼센트가 상비 부대, 23퍼센트가 지역 부대였고, 1939년 지역 부대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보로실로프 자신은 민병 체계로는 결속과 규율, 복잡한 장비의 숙달을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군 간부 양성도 중등(군사학교)과 고등(아카데미)으로 나뉘어 재편되어, 1928년 초 소련에는 군사학교 49개, 군사아카데미 6개, 민간 대학의 군사학부 5개가 있었다. 영어권 서술은 이 시기의 주요 업적으로 핵심 군수산업을 우랄 동쪽으로 옮겨 전략적 후퇴 중에도 생산 능력을 지킬 수 있게 한 점을 든다. O. N. 켄의 연구에 따르면 그는 나라의 경제 능력에 맞춘 군의 균형 발전을 주장했고, 『크라스나야 즈베즈다』에 군수 생산의 과도한 긴장이 생산력 저하를 낳는다고 썼다.
많은 「기계화론자」를 군에서 숙청했음에도 그는 기병 의존을 줄이고 현대 무기를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에 이르러 기병의 지위를 지키려는 부됸니와 맞섰다. 다만 1936년 하계 기동 보고에서는 통신 부족, 무력한 참모부, 병과 간 협동 부진, 전차 부대의 초보적 지휘 체계를 스스로 인정했다. 숙청 뒤 그와 쿨리크는 종심 작전 같은 교리와 군의 실상을 조화시키려는 개혁을 주도했으나 필요한 개혁을 이루지 못했고, 그가 실행한 야전 부대 재편은 군 조직을 1936년보다 뒤처진 상태로 되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재임기에는 후원 정치의 면도 있었다. 그는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로 트로츠키와의 투쟁과 1920년대 말 권력 공고화에서 스탈린 편에 섰고, 내전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찬양한 논문과 책 『스탈린과 붉은 군대』를 썼다. 러시아어 자료는 중국 정책과 트로츠키·지노비예프의 즉각 제명을 둘러싼 스탈린과의 충돌도 기록한다.
대숙청 — '모든 악당을 잡아들이라'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는 대숙청 시기 군사 지도부의 최고 책임자였으며, 직접 손으로 숙청을 승인했다. 그가 국방인민위원으로 재직하던 1937–1938년, 붉은 군대 장교단은 말살 수준의 타격을 입었다.
보로실로프의 서명은 185개의 '처형 명단'에 등장한다. 이 명단에 오른 18,000명 이상이 유죄 판결을 받고 총살당했다. 그는 정치국 위원으로서 NKVD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지역별 '숙청 할당량'(리미트)도 승인했다.
가장 악명 높은 것은 1937년 5월 28일의 결재였다. NKVD에서 국방인민위원부로 넘어온 26명의 붉은 군대 지휘관 명단에 보로실로프는 직접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예조프 동지에게. 모든 악당을 잡아들이시오. 1937년 5월 28일. K. 보로실로프.' 또 다른 142명의 지휘관 명단에는 더 짧게 '체포하라. K. V.'라고만 썼다.
이 서명들로 투하쳅스키, 야키르, 우보레비치 등 붉은 군대 최정예 지휘관들이 처형되었다. 보로실로프는 이들 중 다수와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었고 함께 근무한 적도 있었다. 그는 이후 회고록에서 이 시기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책임을 인정한 적도 없다.
1940년 겨울전쟁 패배 후 그가 국방인민위원에서 해임되었을 때, 그가 파괴한 장교단의 공백은 소련군 전체를 약화시킨 상태였다.
겨울전쟁 — 충성심이 전장에서는 통하지 않을 때
1939년 11월 30일, 소련은 핀란드를 침공했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는 국방인민위원으로서 이 작전을 지휘했다. 그의 계산은 간단했다: 핀란드는 작고, 소련군은 무적이며, 전쟁은 2주 안에 끝난다.
현실은 참혹했다. −40도의 겨울, 핀란드군의 유격전, 그리고 깊은 숲. 소련군은 만네르하임 방어선에서 대량 학살당했다. 10만 5천 명 이상의 소련군이 전사하거나 실종된 반면, 핀란드군 사망자는 2만 5천 명이었다. 4개월 후, 소련이 겨우 승리했지만, 국제적 체면은 구겨졌다.
스탈린은 격노했다. 보로실로프는 1940년 5월 국방인민위원에서 해임되었다. 그의 후임은 티모셴코였고, 진정한 후계자는 주코프였다. 그럼에도 보로실로프는 살아남았다. 충성심 하나로 말이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형식적 국가원수)까지 올랐다. 겨울전쟁은 무능한 충성파가 체제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