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재판의 검사, 뒤에 유엔에서 강경 외교를 대변한 인물
1947년 9월 18일 유엔 총회에서 당시 외무차관에 불과했던 비신스키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이 구호물자를 "정치적 압력의 도구"로 쓴다고 맹비난하며, 구호물자를 정치적 무기로 써서는 안 된다는 1946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를 인용했다.
폴란드 슐라흐타(귀족) 가문 출신으로 오데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바쿠로 이주했고, 1903년 러시아사민당 멘셰비키파에 들어갔다. 1908년 바일로프 감옥 1년형을 선고받아 그곳에서 스탈린을 만났고, 1913년 키예프대학을 졸업한 뒤 192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러시아연방 검사(1931), 부검찰총장(1933), 소련 검찰총장(1935~1939)을 지냈고 1936~1938년 세 차례 모스크바 재판 모두에서 국가검사를 맡았다. 1939년 5월부터 인민위원회 부의장, 1940~1946년에는 외무인민위원 제1부위원으로 뉘른베르크 소련 대표단을 지휘했다. 외무장관(1949~1953)과 유엔 상임대표(1953~1954)를 지낸 뒤 1954년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9 법률·사법 · 소련
- 1940–1953 외교·국제활동 · 소련 · 외교
경력 연표
- 1949–1953외무장관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52.10–1953.03
1953.03 해임
관련 역사 사건
- 1932–1933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소련 검찰총장, '이삭 세 개 법'의 공적 집행자 겸 해설자1933년 '이삭 세 개 법' 해설 소책자를 발간해 법의 통칭을 만들었고, 1936년 이 법 적용 사건 11만5천 건 중 79%가 잘못되었다고 보고했다.
- 1937–1938대숙청국가 검찰모스크바 재판에서 국가 검찰로 핵심 피고인들을 기소했다.
- 1941–1945대조국전쟁외무 부인민위원으로 전시 외교·선전 활동, 나치 범죄 규탄
- 1945.02–08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외무 부인민위원으로 협상단에 있었다.
- 1944–1949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부쿠레슈티에 파견된 외무부차관1945년 2월 27일 부쿠레슈티에 도착해 국왕 미하이 1세에게 러데스쿠 정부의 해임과 그로자 정부의 수립을 요구했다.
- 1944–1948루마니아: 8월 23일에서 인민공화국까지부쿠레슈티에 파견된 외무부차관1945년 2월 27일 부쿠레슈티에 도착해 이튿날 두 시간 시한으로 러데스쿠 정부의 해임을 요구했고, 국왕이 내세운 슈티르베이를 거부하고 그로자를 지명했다.
- 1947–1948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유엔 외교유엔 무대에서 마셜 플랜을 침략적 도구로 규탄했다.
모스크바 공개재판의 국가검사
1936년부터 1938년까지 비신스키는 세 차례의 모스크바 공개재판 모두에서 국가검사로 활동했다. 첫 재판(1936년 8월)에서는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 16명이, 두 번째 재판(1937년 1월)에서는 퍄타코프, 라데크 등 17명이, 세 번째 재판(1938년 3월)에서는 부하린, 리코프 등 21명이 피고석에 섰다. 비신스키는 법정에서 피고인들을 향해 「조국을 적에게 팔아넘긴 반역자와 간첩들을 더러운 개처럼 쏴 죽여야 한다」고 외쳤으며, 「쓰레기」「미친 개」「썩은 짐승」 같은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수사 단계에서 확보된 자백을 '증거의 여왕'으로 치켜세우며, 피고인들의 과거 볼셰비키 경력 자체가 반혁명 음모의 결정적 증거라는 논리를 폈다. 공개재판 뒤편에서는 예조프와 함께 이른바 '앨범' 방식으로 대량의 비공개 사건을 처리했다. 1937년 12월 29일 하루에만 라트비아계 1천 명의 명단을 검토해 992명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투하쳅스키 원수 사건에서도 예조프와 공동으로 기소장을 작성했다. 비신스키가 세 재판에서 기소한 피고인 전원이 처형되었다.
외교인으로서의 활동, 1940~1954
외교 무대에 서다
1940년 6~8월 비신스키는 당중앙의 라트비아 담당 전권위원으로 파견되어 친소 정부 수립과 소련 편입 작업을 감독했고, 라트비아 공산당 내부의 트로츠키주의자·부하린주의자·외국 첩자 혐의자 숙청에 착수했다. 1940년 9월 6일 외무인민위원 제1부위원이 되어 1946년 3월까지 재임했으며, 외무인민위원부가 쿠이비셰프로 피난했을 때 그 업무를 지휘했다. 전쟁 중에는 독일의 침공 이후 쿠이비셰프에 머물렀고, 1943년 테헤란 회담 당시 지도부 대부분이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국내에 남아 실무를 맡았다.
1941년 7월 12일 독일과의 전쟁에서 공동 행동을 규정한 소련-영국 협정 조인에 참여했고, 1943년 6월 14일 특명전권대사 칭호를 받았다. 1943년 10월 소련·미국·영국 외무장관 모스크바 회의에 참가했다.
전시 외교와 종전 처리
1944~1945년 루마니아·불가리아와의 교섭에 적극 참여했으며, 1945년 2월 얄타 회담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한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같은 해 4월 폴란드·유고슬라비아 등과의 우호·상호원조 조약 조인에도 참석했다. 1945년 5월 30일부터 8월 6일까지는 독일 주둔 소련 군정 최고책임자 주코프 원수의 정치고문을 겸했고, 베를린에 독일 무조건 항복 문서(1945년 5월 8일)를 가져가 주코프에게 법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포츠담 회담에도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스탈린은 그를 이탈리아 문제 연합통제위원회에 임명했고, 그곳에서 귀국을 거부한 이들을 포함한 소련 포로 송환 조직을 시작하고 나폴리에서 이탈리아 공산당과의 연락을 시작했다. 1945년 2월 얄타에 스탈린·몰로토프·베리아와 동행했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 루마니아로 파견되어 1945년 공산 정권 수립을 주선했다. 1946년 2월 26일에는 소련 전차가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부쿠레슈티로 달려가 미하이 왕에게 반공 성향의 러데스쿠 장군을 해임하고 친공산 성향의 페트루 그로자를 임명하도록 강요했다. 이 무렵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소련 대표단을 사실상 지휘하며 매일 정치국에 보고했고, 1945년 11월 10일부터는 옛 독일 군인 공개재판을 위한 상설위원회를 이끌었다.
전후 외교와 마지막 시기
1946년 1월 유엔 총회 제1차 회의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고, 1946년 여름과 가을 파리 강화회의 본회의와 정치·영토 문제 및 경제 문제 위원회에서 발언했다(루마니아, 헝가리,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발칸과 핀란드, 불가리아 강화조약). 1946년 3월부터는 외무부 일반문제 담당 차관이었다.
1949~1953년에는 소련 외무장관을 지냈고 이 시기는 한국전쟁과 겹친다. 1949년 3~6월 외무부 산하 정보위원회를 이끌었고, 1952~1953년에는 당중앙 간부회 외교상설위원회 위원이었다. 스탈린 사망 뒤 외무장관에 몰로토프가 다시 임명되자 비신스키는 유엔 소련 대표로 임명되어 1953년 3월 5일부터 1954년 11월 22일 사망할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평가와 검열
그의 법이론 작업을 사이비과학적으로 대량 탄압에 법적 외피를 씌운 것이라고 비판하며 그를 당대의 수석 심문관, '스탈린의 검사'로 규정하는 러시아어권 평가가 있다(세르게이 홀로바티). 학술원 회원 블라디크 네르세샨츠는 그를 법률 전선의 스탈린 심복이라고 불렀다. 영국 외교관 프랭크 로버츠는 그가 프랑스어를 잘하고 민첩하며 영리하고 유능했고 항상 문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주인의 목소리에 따르기에만 급급한 아첨꾼'이라는 인상을 준다고 보았는데, 이는 로버츠의 평가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