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그라드의 해머
재판 마지막 진술에서: "내가 수사에서 아주 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무고히 비방했음을 참작해 주십시오... 저 자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운명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이자 시베리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레닌그라드 NKVD 수장으로 올라선 대숙청의 집행자. 키로프 암살 수사와 '구시대 계급' 1만 1천여 명의 추방을 지휘했고, '벨라루스 민족중앙' 사건을 조작했으며, 라트비아인을 겨냥한 대규모 민족 작전을 조직했다. 1938년 초 예조프의 부내무인민위원 겸 모스크바 NKVD 수장으로 승진했지만 수개월 만에 자신이 속했던 기관에 체포되어 총살됐고, 사후에도 복권이 거부됐다.
경력 연표
- 1913–1917라트비아 볼셰비키 활동, 체포와 유형
- 1918–1921체카 전권대표, 전선 특별부서장
- 1921–1925우크라이나 포돌·오데사 GPU 의장, 몰도바 전권대표
- 1926–1932시베리아·서시베리아 OGPU 전권대표, 특별3인조 의장
- 1932–1934벨라루스 OGPU 전권대표, 벨라루스 NKVD 인민위원
- 1934–1938레닌그라드 NKVD 수장, 키로프 사건 수사·대규모 추방
- 1938.1–1938.4내무부인민위원·모스크바 NKVD 수장
- 1938.4–1938.8해임·체포·총살, 복권 거부
관련 역사 사건
1937년, 레닌그라드의 집행자
본명이 헨리크스 슈투비스인 라트비아인 레오니트 자콥스키는 1917년부터 체카에서 일한 최고참 세대의 요원이었다. 내전기와 1920년대에 오데사, 포돌리아, 시베리아의 보안기관을 거치며 그는 가혹한 심문과 대규모 추방 작전의 실무자로 경력을 쌓았고, 시베리아에서는 농업 집단화기의 「쿨라크 청산」 작전을 지휘했다.
1934년 12월 키로프 암살 직후 그는 레닌그라드주 NKVD 책임자로 임명됐다. 이후 3년여 동안 레닌그라드는 소련에서 탄압이 가장 가혹한 지역 중 하나가 됐다. 옛 귀족과 관리 출신 주민 수천 가구를 도시에서 추방한 1935년의 「옛 사람들」 작전, 1937년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쿨라크 작전의 대규모 처형과 수용소 이송, 라트비아인과 폴란드인을 겨냥한 민족 작전이 모두 그의 서명 아래 집행됐다. 그는 심문에서 구타를 제도처럼 사용했고, 할당량을 채우는 데 열성적인 지방 책임자로 중앙의 신임을 받았다.
흐루쇼프의 1956년 비밀 연설은 자콥스키의 심문실에서 살아남은 옛 당원 로젠블륨의 진술을 인용했다. 자콥스키가 조작된 「레닌그라드 중심」 사건의 각본을 보여 주며 협조하면 목숨을 살려 주고 거부하면 파멸시키겠다고 말했다는 내용이다. 그의 이름은 대숙청의 조작 메커니즘을 보여 주는 사례로 당 문서에 남았다.
1938년, 숙청하는 자의 숙청
1938년 1월 자콥스키는 모스크바로 승진해 NKVD 부인민위원 겸 모스크바주 NKVD 책임자가 됐다. 정점은 짧았다. 석 달 뒤인 4월 그는 모든 보안기관 직책에서 해임돼 수용소 건설 부서로 밀려났고, 4월 30일 체포됐다.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그 자신이 레닌그라드에서 수없이 뒤집어씌운 것과 같은 종류였다. 라트비아 정보기관의 간첩이자 NKVD 내 라트비아 민족주의 조직의 일원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집행한 라트비아인 민족 작전의 논리가 라트비아인인 그 자신에게 되돌아온 셈이다. 1938년 8월 29일 자콥스키는 총살됐다. 예조프 체제의 집행자들을 제거하는 「숙청하는 자들의 숙청」의 일부였다.
전후 재심에서 그의 간첩 혐의는 근거 없는 것으로 판정됐으나, 소련 검찰은 재직 중 저지른 사회주의 법질서의 중대한 침해, 곧 대량 조작과 불법 처형을 이유로 복권을 거부했다. 자콥스키는 오늘날까지 복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의 경력은 대숙청이 집행자 자신도 소모품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