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과 모세의 차이를 아십니까? 모세는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지만, 스탈린 동지는 유대인들을 정치국에서 데리고 나왔지요." —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정치국에서 축출된 뒤 라데크가 바자노프에게 던진 농담.
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으로 국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오간 저널리스트·외교가였다. 레닌의 측근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과 코민테른 창립에 참여했고, 볼셰비키 중앙위원·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날카로운 논쟁과 비꼬는 유머로 이름난 좌익 반대파 지도자였으나, 1930년 공개 자아비판으로 복당했다. 대숙청 속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중심 피고로 법정에서 연극적 자백을 펼쳐 10년형을 받았고, 1939년 옥중에서 스탈린의 지시로 살해됐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뒤 제명과 유배, 정치격리소, 수용소를 거쳐 처형될 때까지 십오 년을 반대파로 살았다.
폴란드 벤그로프에서 태어나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의 동생으로, 형이 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이자 정치국원으로 올라가는 동안 그는 반대파의 길을 걸었다. 1919년 모스크바 금속노조 지도원, 1920년 제12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과 제14군 정치부 부부장을 지냈고,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전우크라이나 노동조합회의 의장, 1922년부터 1924년까지 노동조합 신문 『트루드』 주필을 맡았다. 1921년 민주중앙집권파에 속했고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뒤 좌익반대파로 활동했다. 1928년 5월 제명되어 볼가 독일인 자치공화국의 포크로프스크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도 활동을 이어가 정치격리소 3년과 미누신스크 유배 5년을 받았다. 1936년 7월 수용소 5년형으로 우흐타-페치라크에 수감되었다가 1937년 12월 다시 체포되어 1938년 3월 30일 보르쿠타에서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