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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 펠리반

Ion Pelivan
민족주의 루마니아 몰도바 1876–1954 ○ 옥사

몰다비아 민주공화국의 외무 총국장으로 루마니아 합병에 앞장선 베사라비아 민족운동의 고참 활동가

1876년 베사라비아 러제니에서 태어나 1898년 키시너우 신학교를, 1903년 도르파트 대학 법학부를 마쳤다. 학생 단체를 만들었다가 체포되었고, 벌치에서 판사 대리로 일하며 그 도시 최초의 민족주의 단체를 꾸렸다. 1917년 몰도바 민족당에 참여했고, 스파툴 처리이 의장 선거에서 처음 과반을 얻었으나 자리는 인쿨레츠에게 돌아갔다. 1917~1918년 에르한·추구레아누 정부의 외무 총국장으로 이아시의 셰르바초프에게 군사 지원을 청했고 합병 운동에 앞장섰다. 합병 직후 바이다보에보드 정부의 법무장관을 지냈고 파리·런던·제네바에서 합병의 국제 승인을 위해 활동했으며, 국민당과 국민농민당 의원을 지냈다. 1950년 공산 당국에 체포되어 1954년 시게트 감옥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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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도르파트 대학 법학부 졸업
  • 1917–1918몰다비아 민주공화국 외무 총국장
  • 1919–1920루마니아 법무장관(바이다보에보드 내각)
  • 1927–1936아스트라 협회 베사라비아 지부장
  • 1950–1954시게트 감옥 수감

이온 안토네스쿠

Ion Antonescu

루마니아를 추축국의 대소 전쟁에 몰아넣고 트란스니스트리아의 학살을 명령한 「지도자」, 1946년 질라바에서 처형되다

1944년 8월 23일 오후, 왕궁에 불려온 안토네스쿠가 국왕의 즉각 휴전 요구를 거부하자 미하이는 미리 정한 신호로 경비병을 불러 그를 체포했다. 그날 밤 국왕의 라디오 연설이 휴전을 알렸고, 루마니아군은 독일군에게 총구를 돌렸다.

피테슈티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기병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로 머러셰슈티 방어전 계획에 참여했고 파리·런던 주재 군사 담당관과 1933~34년 참모총장을 지냈다. 1937~38년 고가 정부의 국방장관을 맡았으나 카롤 2세와 대립해 1940년 비스트리차 수도원에 연금되었다. 1940년 여름 베사라비아·북트란실바니아 상실로 왕정이 흔들리자 9월 4일 전권을 가진 총리가 되어 이틀 뒤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지도자」를 칭했으며, 철위단과 함께 국민군단국가를 세웠다가 1941년 1월 군단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40년 11월 삼국동맹에 가입하고 1941년 6월 독일과 함께 소련을 침공해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되찾고 드네스트르 너머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점령했다. 이아시 포그롬과 오데사 학살,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강제 이송으로 루마니아 관할에서 28만에서 38만에 이르는 유대인과 1만 명이 넘는 로마인이 죽었다고 2004년 비젤 위원회는 결론지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두 개 군을 잃은 뒤 강화의 길을 찾았으나 1944년 8월 23일 미하이 국왕에게 체포되어 소련으로 넘겨졌고, 1946년 5월 부쿠레슈티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6월 1일 질라바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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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제1차 세계대전 참모 장교
  • 1933–1934참모총장
  • 1937–1938국방장관
  • 1940전권 총리, 카롤 2세 퇴위, 「지도자」 칭호
  • 1940–1941국민군단국가, 군단 반란 진압
  • 1941소련 침공, 트란스니스트리아 점령
  • 19448월 23일 체포, 소련 이송
  • 1946인민법정 사형 선고, 질라바 처형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Petre Dumitrescu

동부전선의 루마니아군 지휘관

스탈린그라드 북서쪽 측면이 무너지기 전, 두미트레스쿠는 독일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페트레 두미트레스쿠는 루마니아 왕국의 직업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동부전선에서 루마니아 제3군을 지휘했다. 그는 독일군과 함께 소련을 상대로 부코비나와 우크라이나, 크림, 캅카스 작전에 참여하며 루마니아군의 전쟁 수행을 이끌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에서 제3군의 취약한 측면이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 노출되자 지원을 요청했지만, 군대는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전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46년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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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3포병·공병학교 수학, 소위 임관
  • 1911–1913육군참모대학 수학
  • 1930–1932프랑스 주재 군사 attaché
  • 1935–1937육군참모본부 부참모장
  • 1940–1941루마니아 제1군 사령관
  • 1941–1944루마니아 제3군 사령관
  • 1942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3군 지휘
  • 1944전역, 전쟁범죄 혐의로 조사됨

판 할리파

Pan Halippa
사회혁명당 민족주의 루마니아 몰도바 1883–1979 ○ 사망

스파툴 처리이 부의장·의장으로 베사라비아의 루마니아 합병 운동을 이끈 언론인·정치가

1883년 베사라비아 쿠볼타의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키시너우 신학교를 마치고 유리예프 대학에 들어갔으나 사회혁명당원이라 1905년 혁명 뒤 학업을 그만두었고, 잡지에 「깨어나라, 루마니아인이여!」를 실었다가 수배되어 이아시로 피해 1908~1912년 이아시 대학에서 공부했다. 1913년 신문 「몰도바의 말」을 펴내 합병을 주장했고, 1917년 몰도바 민족당 창당에 참여했다. 스파툴 처리이 부의장을 거쳐 의장이 되었다. 합병 뒤 베사라비아 담당 장관 등을 지내고 국민농민당에 들어갔으며, 1924년에는 루마니아 정부가 베사라비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1950년 체포되어 소련에서 25년 강제노동형을 받았고 1957년까지 갇혀 있다가 1979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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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2이아시 대학 문학·철학부 수학
  • 1913신문 「몰도바의 말」 창간
  • 1917몰도바 민족당 창당
  • 1917–1918스파툴 처리이 부의장, 이어 의장
  • 1919–1920루마니아 베사라비아 담당 장관 겸 국무장관
  • 1927루마니아 공공사업 장관
  • 1950–1957체포·투옥(시게트, 소련 강제노동, 아이우드)

이온 인쿨레츠

Ion Inculeț

스파툴 처리이 의장으로 몰다비아 민주공화국을 이끌고 루마니아 합병을 성사시킨 베사라비아 정치가

1884년 베사라비아 러제니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키시너우 신학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마치고 기상 관측소 물리학자로 일했다. 2월 혁명 뒤 사회혁명당에 들어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이 되었고, 케렌스키가 그를 러시아 임시정부의 베사라비아 대표로 보냈다. 처음에는 베사라비아가 러시아에 남아야 한다고 했으나, 스파툴 처리이 의장이자 몰다비아 민주공화국 대통령으로서 1918년 4월 루마니아와의 합병 결의를 이끌었다. 합병 뒤 베사라비아 담당 국무장관이 되었고, 1923년 자기 계파를 이끌고 국민자유당에 들어가 보건·내무·통신 장관과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1940년 심장마비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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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상트페테르부르크 기상 관측소 물리학자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사회혁명당)
  • 1917러시아 임시정부의 베사라비아 판무관 대리
  • 1917–1918스파툴 처리이 의장, 몰다비아 민주공화국 대통령
  • 1918–1920루마니아 베사라비아 담당 국무장관
  • 1927–1928루마니아 보건·사회보호 장관
  • 1933루마니아 내무장관(두카 내각)
  • 1936루마니아 각료회의 부의장

판텔리몬 에르한

Pantelimon Erhan

몰다비아 민주공화국의 첫 정부인 총국장 위원회를 이끌며 토지개혁을 앞세운 베사라비아 사회혁명당원

1884년 베사라비아 터너타리에서 태어나 키시너우 신학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문학부를 마치고 교사로 일했다. 사회혁명당원으로 1917년 케렌스키의 권유를 받아 인쿨레츠와 함께 베사라비아에 돌아왔고, 현 농민 소비에트 의장과 러시아 제헌의회 의원으로 뽑혔다. 1917년 12월 몰다비아 민주공화국의 첫 정부인 총국장 위원회 의장 겸 농업 총국장이 되어 토지개혁을 앞세웠다. 공화국 이름을 다수 민족의 이름으로 짓자는 그의 주장이 이겼고, 루마니아군 도입 안을 표결에 부쳤으나 지주들이 군대로 토지개혁을 막을까 염려해 주둔에 항의하기도 했다. 합병에 찬성했지만 친러시아적이라는 비난 속에 물러났고, 뒤에 루마니아 상원의원을 지냈다. 1940년 부쿠레슈티로 피해 1971년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베사라비아 현 농민 소비에트 의장
  • 1917러시아 제헌의회 의원
  • 1917–1918몰다비아 민주공화국 총국장 위원회 의장 겸 농업 총국장
  • 1918베사라비아 교육 총국장

미하이 1세

Mihai I
루마니아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루마니아 루마니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왕가) 1921–2017 ↓ 퇴위 강요 후 망명

1944년 8월 23일 안토네스쿠를 체포해 루마니아를 연합국 편으로 돌리고, 1947년 총구 앞에서 퇴위한 마지막 국왕

1947년 12월 30일 아침, 병력이 둘러싼 왕궁에서 그로자와 게오르기우데지는 퇴위 문서를 내밀었다. 거부하면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구금 중인 학생 1천 명이 총살될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미하이는 망명 뒤 증언했다. 그날 오후 의회는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왕가의 카롤 왕세자와 그리스의 엘레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왕위 계승을 포기한 탓에 1927년 여섯 살에 섭정 아래 국왕이 되었고 1930년 카롤 2세가 귀국해 왕위를 되찾자 왕세자로 내려왔다. 1940년 9월 안토네스쿠가 카롤 2세를 퇴위시키자 열여덟 살에 다시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은 안토네스쿠의 독재와 추축국 동맹에 있었다. 1944년 8월 23일 붉은 군대가 국경을 넘은 뒤 그는 궁정 쿠데타로 안토네스쿠를 체포하고 연합국과 휴전해 루마니아를 대독 전선으로 돌렸고, 이 공으로 소련의 승리훈장을 받은 극소수의 외국인이 되었다. 그러나 1945년 3월 비신스키의 압박으로 그로자 정부를 임명해야 했고, 그해 8월부터 법령 서명을 거부하는 「국왕 파업」으로 맞섰으나 1946년 조작 선거와 1947년 마니우 재판을 막지 못했다. 1947년 12월 30일 그로자와 게오르기우데지가 강요한 퇴위 문서에 서명했고 같은 날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48년 국적을 박탈당한 채 영국과 스위스에서 시험 비행사와 증권 중개인으로 살았으며, 1992년 부활절의 첫 귀국 때 부쿠레슈티에 백만 명이 모였다. 1997년 국적을 되찾았고 2017년 스위스에서 죽어 쿠르테아데아르제시의 왕가 묘지에 국장으로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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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30섭정 아래 첫 재위
  • 1930–1940왕세자
  • 1940안토네스쿠의 카롤 2세 퇴위로 재즉위
  • 19448월 23일 궁정 쿠데타, 안토네스쿠 체포·연합국 편 전환
  • 1945소련 승리훈장 수훈, 그로자 정부 임명 강요
  • 1945–1946「국왕 파업」, 법령 서명 거부
  • 194712월 30일 퇴위 강요, 망명
  • 1948국적 박탈
  • 1992첫 귀국 방문
  • 1997국적 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