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기능·활동
국가·세력(선택됨)
정치적 입장
국적
출신 배경
시대(선택됨)

세르게이 레오니도비치 소콜로프

Сергей Леонидович Соко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2012 ↓ 해임 1987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으로 해임된 국방장관

1987년 5월 28일, 19세 서독 조종사 마티아스 루스트가 경비행기로 소련 방공망을 뚫고 붉은 광장에 착륙했다. 이틀 뒤 정치국에서 고르바초프가 소콜로프의 해임을 제안하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55년 복무한 원수는 한 소년의 비행 한 방에 물러났다.

하산 호 전투와 독소전에서 기갑부대를 지휘하며 성장한 소비에트 군사 엘리트로, 1967년부터 17년간 국방부 제1차관으로 군부의 제도적 중추 역할을 했다. 1978년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진급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작전조 책임자로서 소련군의 실질적 지휘를 맡았다. 1984년 국방장관에 올랐으나,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붉은 광장 착륙 사건으로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되었다. 101세까지 생존한 유일한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소련군의 전성기와 종말을 모두 목도한 인물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5독소전 참전, 기갑·기계화 지휘 경험 축적
  • 1960년대–1970년대레닌그라드 군관구와 국방부 제1차관으로 승진
  • 1979–1980년대아프가니스탄 전쟁 지휘·감독에 깊이 관여
  • 1984–1987국방장관, 고르바초프 초기 군부의 보수적 얼굴
  • 1987마티아스 루스트 모스크바 착륙 사건 뒤 해임

뱌체슬라프 이바노비치 코체마소프

Вячеслав Иванович Кочемас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8–1998 ○ 자연사

동독 해체를 지켜본 마지막 소련 대사

1989년 11월 9일 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코체마소프는 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에게 전화 지시를 구했으나 둘 다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소련의 정치인·외교관으로, 1962년부터 21년간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내며 문화·사회 정책을 총괄했고, 전러시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중앙위원회 의장(1966~1983)으로서 문화유산 보존 운동을 이끌었다. 1983년 동독 주재 소련 대사로 임명되어 1990년까지 냉전 최전선인 동베를린에서 근무했으며,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지 못한 채 현장을 지켰다. 1990년 4월 동독의 로타어 드 메지에르 총리에게 독일 통일에 관한 소련의 11개 조건을 담은 비공식 문건을 전달하며 통일 과정에서 소련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6–1948고리키 주 콤소몰 제1서기
  • 1949–1955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55–1960주동독 소련대사관 참사관·공사참사관
  • 1961–1962대외문화교류 국가위원회 부의장·제1부의장
  • 1962–1983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66–1983전러시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의장
  • 1966–1983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83–1990주동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3–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 데멘체프

Викт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Деменцев

국가재정의 경고자

1985년 4월 4일, 데멘체프는 보드카 생산 축소가 1986년 40억 루블, 1990년에는 150억에서 160억 루블의 예산 손실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빅토르 데멘체프는 지방 재정기관에서 출발해 소련 재무 행정의 고위 관료로 성장한 경제 관리자였다. 그는 알코올 판매 수입에 기대던 국가재정의 구조적 긴장을 드러내며,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의 급격한 생산 축소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경고는 재정 수입 감소뿐 아니라 밀주와 설탕 부족이라는 정책 부작용을 함께 계산한 것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4–1939치타·캄차카 지역 회계·재정 담당
  • 1944–1947캄차카주 통제·감사기관 감사관
  • 1949–1962고르노알타이·야로슬라블주 재정 책임자, 집행위 부의장
  • 1962–1965러시아공화국 재무부 국가수입관리국장·차관
  • 1965–1973소련 재무부 차관
  • 1973–1986소련 재무부 제1차관
  • 1986–1987소련 국가은행 이사회 의장

아나톨리 세르게예비치 체르냐예프

Анатолий Сергеевич Черня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1–2017 ○ 자연사

고르바초프의 펜이자 양심: 신사고 외교의 설계자

1989년 11월 10일 일기, 베를린 장벽 붕괴에 대하여: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사회주의 체제 역사의 한 시대 전체가 끝났다. 이것이 고르바초프가 해낸 일이다.」 출처: 고르바초프 재단 문서고, 국가안보문서보관소 번역.

1921년 5월 25일 모스크바(마리나 로샤)에서 태어나 2017년 3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41년 7월 붉은군대에 지원해 북서전선에서 발트 해방 작전에 참전했고 1945년 제대했다. 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58–1961년 프라하에서 『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1961년 중앙위 국제부에 들어가 1986년 3월부터 1991년까지 고르바초프의 외교 보좌관으로 일했고, 1989–1991년 인민대의원을 지냈다. 1992년부터 고르바초프 재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문서 사업을 이끌었다. 학위 연도와 국제부 부부장 재임 시기는 사료 간 차이가 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6붉은군대: 1941년 7월 지원 입대, 제1충격군 소속 북서전선 참전, 부상, 1945–1946년 제대
  • 1938–1950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1938–1941 재학, 1947–1949 복학 후 대학원); 1950년 후보학위 논문 방어
  • 1950–1958모스크바대학 근현대사 강의, 학과장 대리
  • 1958–1961프라하 『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 편집위원
  • 1961–1986중앙위 국제부: 포노마료프 밑의 담당관에서 부부장으로(러시아어 위키백과·RGASPI는 1970–1986년, NSA는 1972–1985년으로 기록)
  • 1986–1991고르바초프 외교정책 보좌관: 정상회담 실무, 연설문, 신사고 외교 설계
  • 1992–2011고르바초프 재단: ‘페레스트로이카 문서사’와 ‘페레스트로이카 외교정책’ 사업; 1992–2011년 재직

세르게이 표도로비치 아흐로메예프

Сергей Фёдорович Ахроме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1991 ✕ 자살

INF 조약을 협상한 소련군 원수, 제국의 종말을 견디지 못하다

INF 사찰 대상으로 플로리다 올랜도의 공장을 제안한 아흐로메예프에게 조지 슐츠가 '거긴 디즈니랜드입니다!'라고 외치자, 그는 '그럼 사찰단이 디즈니랜드도 좀 구경하게 하시죠'라고 답했다.

1923년 러시아 탐보프주 빈드레이 마을에서 태어나 1983년 소련 원수, 1984~88년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을 지낸 군인이다. 레닌그라드에서 생도로 참전해 부상과 동상을 입은 뒤 기갑 병과로 전환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의 작전 계획 수립에 관여했다. 고르바초프의 군사 파트너로서 INF 조약 등 군축 협상을 뒷받침했으나 군사개혁과 일방적 감축에 반발해 사임했고, 이후 대통령 군사고문으로 일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크렘린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유서에는 평생을 바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0–1945모스크바 제1해군특별학교 졸업, 해군생도로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전해 부상·동상. 전쟁 말 SU-76 자주포대대 부지휘관
  • 1945–1967기갑부대 지휘관·참모. 스탈린 기갑아카데미 금메달 졸업(1952), 참모아카데미 졸업(1967), 전차사단장
  • 1967–1974제8전차군 참모장, 제7전차군 사령관(1968~1972), 극동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74–1979참모본부 작전총국장 겸 참모차장. 아프가니스탄 침공 계획 입안
  • 1979–1984참모총장 제1차장. 소련원수 진급(1983). 아프가니스탄 작전 지휘
  • 1984–1988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INF 조약 등 군축 협상 주도. 고르바초프 군사개혁에 반발해 사임
  • 1988–1991국방부 총감독부 감독관 겸 대통령 군사고문. 1991년 8월 GKChP 가담, 쿠데타 실패 후 크렘린 집무실에서 자살

표트르 게오르기예비치 루셰프

Пётр Георгиевич Луш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1997 ○ 자연사

바르샤바 조약군의 마지막 총사령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루셰프 육군대장은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이 되었다" — 1955년 창설된 이 직책은 36년 만에 그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아르한겔스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42년부터 볼호프·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소총소대장으로 참전, 시냐비노 공세에서 두 차례 부상당하며 전투 경험을 쌓았다. 전후 기갑부대로 전환해 동독 주둔 소련군에서 핵심 경력을 쌓았고, 1985년 고르바초프 체제 아래 소련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86년 국방부 제1차관을 거쳐 1989년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91년 조약 해체와 함께 이 직책의 마지막 보유자가 되었다. 소련 영웅(1983)과 육군대장(1981) 칭호를 받았고, CPSU 중앙위원(1981–1990)과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5볼호프·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소대장·중대장으로 참전, 두 차례 부상
  • 1950년대–1960년대기갑부대 장교로 복무, 전차연대장과 전차사단장 역임
  • 1969–1975동독 주둔 제1근위전차군 제1부사령관, 이후 사령관으로 진급
  • 1975–1985볼가·중앙아시아·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차례로 역임
  • 1985–1986소련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
  • 1986–1989소련 국방부 제1차관
  • 1989–1991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 (최종)
  • 1991–1992국방부 감찰장군단 군사고문, 이후 퇴역

레프 니콜라예비치 자이코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Зай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02 ↓ 실각 1990

방산 공장 견습공에서 군산복합체 총괄 정치국원이 된 테크노크라트

위대한 조국전쟁 중 열두 시간 교대 근무를 서던 열여덟 살 자이코프는 세 차례 전선으로 도망쳤다. 매번 공장으로 돌려보내졌지만, 방산 노동자로서의 그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레닌그라드 방산 공장 견습공으로 출발해 소련 군산복합체 전체를 총괄하는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5–1990)까지 오른 산업 관료 출신 당 지도자다. 그리고리 로마노프로부터 방위산업 포트폴리오를 물려받아 핵·재래식 무기 감축 정치국 위원회를 주재했으며, 소련이 금지한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알고 있던 극소수 고위 인사 중 한 명이었다. 1987년 보리스 옐친 축출 후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를 겸임했고, 방산 전자기업 노바토르와 레니네츠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총책임자까지 오른 공장 경력으로 사회주의 노동 영웅(1971) 칭호를 받았다. 이념보다 실무를 중시한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 지도자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940–1945레닌그라드 방산 공장 견습공·자물쇠공, 3차례 전선 탈출 시도
  • 1961–1971레닌그라드 국영 '노바토르' 공장장
  • 1974–1976과학생산연합 '레니네츠' 총책임자
  • 1976–1983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
  • 1983–1985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
  • 1985–1990중앙위 서기(군수공업·기계제조 담당), 정치국 위원(1986–90)
  • 1987–1989모스크바 시 당 제1서기 (겸임)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야코블레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Яковл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05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의 설계자: 이념 담당이 이념을 해체하다

1983년 5월 19일, 온타리오 주 애머스트버그의 유진 웰런 농장. 옥수수와 콩밭 사이 길을 걸으며 야코블레프는 훗날 "조심을 내던졌다"고 말했고, 외교의 어처구니없는 실책들을 털어놓았다. 그 산책 끝에 둘은 개혁의 동지가 되었다.

1923년 12월 2일 야로슬라블현 코롤료보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1년 징집되어 해병여단 소대장으로 볼호프 전선에서 싸우다 1942년 8월 양다리에 중상을 입고 1943년 2월 제대했다. 1944년 당에 입당했고, 1953년 중앙위 기구로 옮겨 1958~59년 컬럼비아대학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다녀왔다. 1972년 11월 국수주의를 비판한 논설로 당 기구에서 밀려나 1973년부터 10년간 캐나다 대사로 있었다. 1983년 8월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이 되었고, 1985년 선전부장, 1987년 정치국원으로서 글라스노스트를 밀어붙였다. 2005년 10월 18일 오랜 지병 끝에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3해병여단 소대장; 1942년 8월 중상, 1943년 2월 제대
  • 1953–1972중앙위 기구에서 성장, 선전부 부부장 대행
  • 1973–1983캐나다 대사 10년
  • 1983–1985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
  • 1985–1990선전부장, 정치국원: 글라스노스트 설계
  • 1989–비밀의정서 조사위원장, 이후 복권위원회 위원장

이반 모이세예비치 트레티야크

Иван Моисеевич Третья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23–2007 ○ 자연사

KAL 007 격추 명령을 내린 소련 방공군 총사령관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 트레티야크는 참모본부로부터 소련 영공을 침범한 여객기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부하 부대에 그대로 하달했다.

소련의 육군대장(1976)으로, 독소전쟁에서 21세에 연대장을 지내며 소련영웅 칭호를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전후 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1967~1976)과 극동군관구 사령관(1976~1984)을 거쳐, 1986년 국방차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방공군 총사령관(1987~1991)으로서 소련 영공방어를 총괄했다.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소련 영공을 침범한 대한항공 007편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본부 명령을 하달하여 269명의 민간인 사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82)에도 선정될 만큼 전후 소련 군사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으나,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해임되며 시대의 종언과 함께 퇴장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5독소전쟁 참전: 제29근위소총사단 소대장·중대장·대대장·제93근위소총연대장
  • 1956–1957제26근위소총사단장
  • 1960–1964주독소련군 제3연합군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64–1967자캅카스군관구 제4군 사령관
  • 1967–1976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
  • 1976–1984극동군관구 사령관
  • 1984–1986극동방면군 총사령관
  • 1986–1987국방차관 겸 국방부 감찰총국장
  • 1987–1991국방차관 겸 방공군 총사령관

발렌틴 이바노비치 바렌니코프

Валентин Иванович Варенни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1923–1991), 1991년 이후 러시아 러시아 1923–2009 ○ 모스크바에서 병사

승전기를 받아든 장군, 쿠데타 법정에 홀로 선 장군

1945년 6월, 근위대장이던 바렌니코프 대위는 모스크바 중앙비행장에 도착한 승전기를 직접 건네받았고, 몇 시간 뒤 그 깃발은 붉은광장 승전 퍼레이드의 선두에 섰다.

소련과 러시아의 육군 대장으로, 조국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참전자다. 1945년 근위대장으로서 승전기를 받았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국방부 관리단을 이끌며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했다.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는 철군이 아니라 1988년 작전 마기스트랄 지휘의 공로로 받은 것이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위원은 아니었으나 1991년 8월 쿠데타를 군부 대표로서 지지했고, 1994년 사면을 거부한 유일한 피고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과 1991년 1월 빌뉴스 사태에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다. 1995년부터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고 이후 국방부 감찰관이 되었다. 2009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아르마비르 군사위원회를 통해 붉은 군대에 징집, 체르카스크 보병학교 입교 (스베르들롭스크로 이전)
  • 1942–1945제138소총사단으로 스탈린그라드 전선 참전, 이후 제35근위소총사단; 드네프르 도하·바그라티온·베를린 작전, 3회 부상, 대위로 종전
  • 195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67참모본부 아카데미를 금메달로 졸업, 제26군단장 (1967–1969)
  • 1969–1971주독 소련군 제3충격군 사령관
  • 1971–1973주독 소련군 제1부총사령관
  • 1973–1979카르파티아 군관구 사령관
  • 1979–1984참모본부 작전총국장 겸 제1부참모총장, 이 직위에서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을 내렸다
  • 1984–1989국방부 관리단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되어 장관 개인 대표를 맡았으며, 유엔 선의사무소와 1988–1989년 철군을 협의했다
  • 1986체르노빌 사고 수습 군사작전 지휘
  • 1989–1991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 1991년 1월 빌뉴스 사태에 참여
  • 19918월 18일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군부 대표로서 GKChP를 지지, 8월 23일 체포
  • 1994GKChP 피고인 가운데 유일하게 사면을 거부, 8월 11일 러시아 대법원 군사합의부에서 무죄 선고, 1995년 2월 3일 대법원 상임위가 무죄를 확정
  • 1995–2003국가두마 의원 (KPRF, 1996–1999년 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 2003년 로디나 블록 합류)
  • 2000년대참전용사 담당 국방부 감찰관

마흐무트 아흐메토비치 가레예프

Махмут Ахметович Гаре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타타르인 1923–2019 ○ 자연사

전쟁 경험을 군사이론으로 조직한 참모장군

1989년 철수 뒤에도 그는 카불에 남아 나지불라 정부의 전쟁 수행을 자문했다.

마흐무트 가레예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참모 업무를 바탕으로 소련군의 작전·교육 체계를 다듬은 군사이론가이자 고위 지휘관이었다. 그는 총참모부 과학·작전 부문에서 군사과학과 훈련을 담당하며 전쟁을 분석하는 실천적 방법을 발전시켰다. 1989년 2월 소련군 철수 뒤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의 수석 군사고문으로 남아, 소련의 원조가 이어지는 동안 정부군 작전과 군사 자문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회고록과 연구서에서 그는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의 전쟁 경험을 군사적·정치적 교훈으로 해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5대조국전쟁 참전, 대대·여단 참모 장교
  • 1947–1950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수학
  • 1965–1970제50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제28군 참모장
  • 1970–1971아랍공화국 군사고문단 참모장
  • 1974–1984총참모부 군사과학국장, 작전총국 부참모장
  • 1984–1989소련군 총참모부 부참모장, 과학·작전훈련 담당
  • 1989–1990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수석 군사고문
  • 1995–2019군사과학아카데미 초대 회장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수하레프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Сухар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21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소련의 마지막 개혁 검찰총장, 스탈린 탄압 피해자 재활을 감독한 법률가

1988년 검찰총장 취임 후 수하레프는 이렇게 말했다: "검사는 민중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가 지휘한 검찰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수십만 명의 정치적 탄압 피해자에 대한 재활 심사를 추진했다.

보로네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항공 공장 선반공으로 일하다 18세에 전선으로 나갔다. 통신장교로 모스크바에서 비스와 강까지 진격하며 4개의 전투 훈장을 받고, 1944년 폴란드 나레프 강 도하 작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전역 후 콤소몰과 당 중앙위원회 기구에서 사법·검찰 분야를 담당하며 법률가로 성장해, 1970년 재창설된 소련 법무부의 제1차관으로 발탁되었다. 1988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어 스탈린 시대 정치 탄압 피해자들의 대대적인 법적 재활을 추진했고, 1990년 퇴임 후에도 러시아 검찰 산하 연구소를 이끌며 법치 강화와 형사사법 개혁에 평생을 바쳤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4제69소총병사단 통신소대장·중대장·연대통신주임, 대위
  • 1947–1950콤소몰 보로네시 철도지구위 서기, 보로네시 주위원회 부장
  • 1950–1959콤소몰 중앙위원회 국제부 지도원·부장·국제부장
  • 1959–1966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지도원·RSFSR 담당 부부장
  • 1966–1970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검찰·법원·사법 부문장
  • 1970–1984소련 법무부 제1차관
  • 1984–1988러시아 SFSR 법무장관
  • 1988.02–05소련 검찰 제1부총장
  • 1988–1990소련 검찰총장
  • 1991–2006러시아 연방 검찰청 산하 합법성 및 법질서 강화 연구소 부소장·소장·주임연구원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딘코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Дин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불가리아 1924–2001 ○ 자연사

소련을 세계 최대 가스 생산국으로 만든 가스·석유공업 장관

1985년 가스공업 장관에서 석유공업 장관으로 전보되자,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내 영혼은 가스맨이야. 어쩔 수 없지."

불가리아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대조국전쟁 정찰병으로 참전, 전후 크라스노다르 콜호스 의장을 지냈다. 아제르바이잔 공업대학 졸업 후 크라스노다르 유전 기술자로 출발해 1981년 소련 가스공업 장관에 올랐다. 재임 중 가스 생산량을 세 배로 끌어올리고 우렌고이-포마리-우주고로드 횡단대륙 가스관(4,450km)을 완공해 서유럽까지 잇는 통합가스공급체계를 완성했다. 1985년 석유공업 장관으로 옮겨 1988년 소련 사상 최대 원유 생산량(연 6억 2,400만 톤)을 기록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단일 국가 최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퇴임 후 가스프롬 이사와 텐더위원장으로 시장경제 이행기의 러시아 가스 산업을 이끌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2–1947소련군 정찰병, 대조국전쟁 참전
  • 1947–1954크라스노다르 콜호스 의장, 아제르바이잔 공업대학 졸업
  • 1954–1962크라스노다르네프티 · 아빈네프티 기술자
  • 1962–1965크라스노다르 가스관리국장 → 쿠반가스프롬 초대 사장
  • 1966–1970소련 가스공업부 가스채취총국(글라브가스도비차) 국장
  • 1970–1981소련 가스공업 차관 → 제1차관
  • 1981–1985소련 가스공업 장관
  • 1985–1989소련 석유공업 장관
  • 1979–1989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투르크멘 SSR)
  • 1986–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유리 파블로비치 막시모프

Юрий Павлович Максим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4–2002 ○ 자연사

아프간 전쟁과 소련 해체 속에서 전략로켓군을 지휘한 군대대장

1943년 7월 17일, 첫 전투에서 기관총 소대를 이끌고 적진에 뛰어들어 백병전 끝에 고지를 탈취한 뒤 7차례의 역습을 막아냈다.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자 가족에게는 전사 통지서가 발송되었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기관총 중대를 지휘하며 세 차례 부상을 입고도 카르파티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종전을 함께한 보병 장교로, 전후 두 개의 참모 아카데미를 금메달로 졸업하고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제40군의 작전을 관할했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소련 핵전력 최전성기인 1,400기 이상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체제를 지휘했고, 소련 붕괴 후에도 전략억지군 사령관으로서 CIS 통합 지휘 체계의 이행을 맡았다. 말년까지 한 번도 당과 군을 떠나지 않고 국가 붕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핵무기에 대한 민간 통제라는 헌법적 원칙을 지킨 군인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43제1모스크바 기관총 사관학교 졸업, 남서전선 배치
  • 1943–1945제187·195근위소총연대 기관총 소대장·중대장, 2·3·4우크라이나전선
  • 1947–1950프룬제 군사아카데미
  • 1950–1953참모본부 작전총국 장교
  • 1957–1961주헝가리 남부군집단 차량화소총연대장
  • 1965참모본부 군사아카데미 금메달 졸업
  • 1965–1968제77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아르한겔스크)
  • 1968–1969예멘 아랍 공화국 주재 최고군사고문
  • 1973–1976투르키스탄 군관구 제1부사령관
  • 1976–1978알제리 주재 소련 군사전문가단장
  • 1979–1984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 아프간 전쟁 관할
  • 1982소비에트연방영웅, 육군대장 진급
  • 1984–1985남부전략방향군 총사령관
  • 1985–1992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CIS 전략억지군 사령관 이임
  • 1993퇴역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크류치코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рюч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4–2007 ↓ 1991년 체포, 1994년 사면

8월 쿠데타를 설계한 KGB 의장

1991년 6월 17일, 최고소비에트 비공개 회의에서 크류치코프는 개혁파 진영에 서방의 '영향력 공작'이 침투했다고 경고하며 내각에 비상대권을 부여하라는 요구에 동참했다. 두 달 뒤 그가 조직한 쿠데타는 사흘 만에 무너졌다.

1924년 2월 29일 차리친(훗날 스탈린그라드, 오늘날 볼고그라드)에서 태어났다. 1941~43년 스탈린그라드 포병 공장에서 일했고, 1949년 법학을 전공으로 졸업해 1946~51년 스탈린그라드 지역 검사로 일했다. 1955~59년 부다페스트 소련대사관 3등서기관으로 1956년 헝가리 사건을 겪었고, 1967년 안드로포프를 따라 KGB로 옮겨 1974~88년 제1총국장을 지냈다. 1988년 10월 1일 KGB 의장에 임명되어 1991년까지 재임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를 주도했으며, 8월 22일 체포되어 1994년 국가두마 사면으로 재판 없이 종결되었다. 2007년 11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6부다페스트 대사관 3등서기관(안드로포프 휘하)
  • 1967–1974KGB 의장 비서실
  • 1974–1988제1총국장: 해외정보 총괄
  • 1988–1991KGB 의장
  • 1991.08국가비상사태위원회 주도
  • 1991–1994수감, 사면

드미트리 티모페예비치 야조프

Дмитрий Тимофеевич Яз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4–2020 ○ 사망 (모스크바)

마지막 소비에트 연방원수, 8월 쿠데타의 국방장관

사면을 받아들인 이유: "아니면 모스크바 거리의 아스팔트를 탱크로 망가뜨린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테니까."

1941년 열일곱에 나이를 속이고 자원입대해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싸우고 두 차례 부상했으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에 비밀 배치된 연대를 지휘했다.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 뒤 국방장관에 기용되었으나 핵 군축의 속도와 범위를 두고 고르바초프와 갈등했고, 1990년 4월 소련 최후의 원수로 진급했다. 아프가니스탄 철수와 일방 감군 50만을 집행했고,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합류해 모스크바에 전차를 투입했다. 옐친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군을 철수시켰으며, 체포되어 498일간 수감된 뒤 1994년 국가두마 사면으로 풀려났다. 2019년 리투아니아 법원이 1991년 1월 사건으로 궐석 중 10년형을 선고했고, 2020년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5어린 장교로 독소전에 참전
  • 1960년대–1970년대극동·중앙아시아 등 군관구 지휘를 거쳐 승진
  • 1987–1991국방장관, 페레스트로이카기 군의 불만을 대표
  • 1991.08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참여하나 군을 결정적으로 움직이지 못함
  • 1991–1994체포·수감 뒤 사면

블라들렌 미하일로비치 미하일로프

Владлен Михайлович Михай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5–2004 ○ 자연사

소련 말기 GRU를 이끈 마지막 군사첩보 수장

1990년 가을, 동유럽 주둔 정보망이 하나둘 접히던 때 한 장교가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겁니까?'라고 묻자 미하일로프가 답했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무너지고 있을 뿐이다.'

전쟁 말기 블라디보스토크 보병학교 교관으로 군 경력을 시작해, 프룬제 사관학교와 총참모부 사관학교를 거쳐 사단장·군단 참모장·참모총장 보좌관을 두루 역임한 정통 군인이다. 1979년부터 베트남 인민군 총참모부 선임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었고, 귀국 후 총참모부 주작전총국장으로서 소련군의 작전기획을 총괄했다. 1987년 7월 GRU 국장에 임명되어 아프가니스탄 철군,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소련 해체라는 격변 속에서 군사첩보를 지휘했으며, 1990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소련 GRU의 마지막 정규 국장으로서 1991년 10월까지 재임한 후 건강상의 이유로 퇴역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2–1949입대 → 블라디보스토크 보병학교 → 소대장 → 중대장
  • 1951–1954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 발트 군관구 소총대대장
  • 1958–1966연대 참모장 → 차량화소총연대장, 발트 군관구
  • 1966–1968총참모부 사관학교 졸업
  • 1969–1979제21차량화소총사단장(GSVG) → 제15군 참모장 → 투르키스탄 군관구 참모장
  • 1979–1980베트남 인민군 총참모부 선임 군사고문
  • 1980–1983총참모부 제7국장 → 주작전총국장
  • 1983–1987극동군 총사령부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87.02–07GRU 제1부국장
  • 1987.07–1991.10GRU 국장 겸 총참모부 차장
  • 1992건강상 이유로 퇴역

구리 이바노비치 마르추크

Гурий Иванович Марчу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러시아 러시아 1925–2013 ○ 자연사

소련 과학아카데미 마지막 총재이자 시베리아 계산수학의 개척자

“과학은 단일한 살아 있는 유기체이지, 자율적 메커니즘들의 덩어리가 아니다. 불행히도 정치인도 과학계도 국내 과학을 구할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 소련 해체 직후, 1991년 12월 17일

시베리아에 계산수학의 중심지를 세우고 소련 과학행정의 정점에 오른 응용수학자다. 핵반응로 계산, 대기·해양 수치모델링, 면역반응의 수리모델을 개척했으며 분할법과 수반방정식 이론으로 계산수학의 기초를 다졌다. 1964년 노보시비르스크에 소련 최초의 대규모 수치모델링 센터인 계산센터를 설립했고, 1980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과학개혁을 주도했다. 소련 해체와 함께 마지막 총재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산수학 연구를 이끌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3–1962피직스에너지연구소 수학부장 (오브닌스크)
  • 1964–1980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 계산센터 소장
  • 1975–1980시베리아 지부 의장 ·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80–1986GKNT 의장 ·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91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91–2013RAS 상임간부회 명예위원 · 계산수학연구소 소장/명예소장

블라디슬라프 그리고리예비치 콜레스니코프

Владислав Григорьевич Колесни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5–2015 ○ 자연사

소련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를 페레스트로이카 말기까지 이끈 마지막 전자공업 장관

그의 지휘 아래 보로네시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가 탄생했고, 로켓·우주·전략핵전력 통제체계에 들어갈 전자장비들이 잇따라 개발되었다.

소련 전자공업의 핵심 인물로, 1960년대 보로네시 반도체소자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를 개발·양산했으며, 1971년부터 1985년까지 전자공업부 제1차관으로서 군수·우주·전략핵무기 체계에 필요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기반을 확충했다.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장관으로 승진하여 몰락 직전까지 소련의 컴퓨터·반도체 산업을 총괄했으나, 서방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소련 해체와 함께 부처도 사라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5툴라 무기공장 · 카스토르나야 기관차 차량기지 정비공
  • 1948–1952보로네시 무선부품공장 기술자 → 연구소장 → 부수석설계자
  • 1952–1954주동독 소련 통상대표부 근무
  • 1958–1969보로네시 반도체소자 공장 수석기술자 → 공장장
  • 1969–1971보로네시 '엘렉트로니카' 생산조합 총책임자
  • 1971–1985소련 전자공업부 제1차관
  • 1985–1991소련 전자공업부 장관

비탈리 이바노비치 보로트니코프

Виталий Иванович Воротни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6–2012 ○ 자연사

러시아를 떼어내지 않으려 했던 RSFSR의 마지막 수반

1989년 10월 당 중앙위원회 RSFSR 정치체제 회의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따로 만드는 것은 소련을 분할하는 길이다." 고르바초프의 구상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항공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쿠이비셰프·보로네시 지역 당 제1서기를 거친 소비에트 제도인. 브레즈네프 말기 쿠바 대사로 좌천되었다가, 안드로포프가 부패 척결을 위해 크라스노다르 지역에 투입하면서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1983년 RSFSR 각료회의 의장(총리)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라 러시아 공화국 정부를 5년간 이끌었고, 체르노빌 사고 직후에는 정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현장 수습에 참여했다. 1988년 RSFSR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국가원수)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가 러시아 분리 공산당 창설을 밀어붙이자 이에 공개 반대하며 소련이라는 틀 안에서의 RSFSR을 끝까지 고수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2–1960쿠이비셰프 항공공장 기술자 → 당위원회 서기
  • 1961–1967쿠이비셰프 주 당 서기 → 제2서기 → 주 집행위 의장
  • 1971–1975보로네시 주 당 제1서기
  • 1975–1979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79–1982주쿠바 소련 대사
  • 1982–1983크라스노다르 변경주 당 제1서기: 부패 척결
  • 1983–1988RSFSR 각료회의 의장, 정치국 정위원
  • 1988–1990RSFSR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브세볼로드 세라피모비치 무라홉스키

Всеволод Серафимович Мурах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6–2017 ↓ 퇴임 1989

고스아그로프롬의 초대 의장

1985년 10월 고르바초프는 6개 농업 부처를 하나로 통합한 국가농공위원회를 구상하며 "몇 년 동안 이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밝혔다. 한 달 뒤 무라홉스키가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반년 만에 스스로 개편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15세에 붉은 군대에 합류해 노보로시스크 방어전과 만주 작전에서 싸운 전쟁 참전자였다. 스타브로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후임 변경주당 제1서기(1978~1985)로 지역 농업과 산업 발전을 이끌며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른 직후 소련 부총리 겸 국가농공위원회 초대 의장으로 발탁되어 6개 농업 관련 부처를 하나로 통합하는 대대적 행정 개편을 단행했으나, 거대 관료 기구의 비효율이 드러나 1989년 기구 폐지와 함께 퇴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85–1989국가농공위원회 의장

발렌틴 미하일로비치 팔린

Валентин Михайлович Фал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6–2018 ○ 자연사

독일 통일 협상에서 고르바초프의 양보에 맞섰던 소련 최고의 독일 전문가

“1980년대 초 서독은 소련군 철수와 동독의 바르샤바조약 탈퇴만으로 1000억 마르크의 무상 차관을 제안했다. 고르바초프는 아르히즈에서 140억 마르크를 받아들였다.” — 독일 통일 협상의 대가에 대해

소련 최고의 독일 문제 전문가로, 흐루쇼프와 그로미코의 연설문 작성자로 외교 경력을 시작해 1971–1978년 서독 대사를 지냈다. 1988–1991년 CPSU 중앙위원회 국제부장으로서 외무부와 나란히 작동하는 평행 외교 기구를 이끌었고, 1990–1991년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독일 통일 협상에서 고르바초프의 성급한 양보에 가장 강력히 반대한 인물로, 1989년 율리 크비친스키와 함께 쇠퇴하는 소련의 군사적 영향력을 에너지 의존으로 대체하려는 팔린-크비친스키 독트린을 정식화했다. 고르바초프가 통일 독일의 NATO 가입을 사실상 무상으로 허용했다고 비판하며, 모스크바가 최대 1000억 마르크까지 요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0–1952독일 내 소련통제위원회 근무
  • 1952–1958소련 외무부 정보위원회
  • 1959–1971외무부 제3유럽(독일)부장, 그로미코 보좌관, 흐루쇼프 연설문 작성
  • 1971–1978주서독 소련 대사
  • 1978–1982CPSU 중앙위 국제정보부 제1부부장
  • 1983–1986『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 (실각기)
  • 1986–1988노보스티 통신사(APN) 이사회 의장
  • 1988–1991CPSU 중앙위 국제부장
  • 1990–1991CPSU 중앙위 서기
  • 1992–2000함부르크대학 평화연구·안보정책연구소 교수
  • 2000–2018모스크바 거주, 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MGIMO) 강의

예프렘 예브세예비치 소콜로프

Яфрэм Евсеевич Сакалоў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로루시아인 1926–2022 ○ 자연사

농업 개발과 말기 개혁을 조율한 벨로루시아 당 지도자

그는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혁신을 위한 혁신에는 제동을 걸었다.

농업 전문가 출신인 예프렘 소콜로프는 벨로루시아의 지역 행정과 당 조직을 거쳐 공화국의 당 지도자가 된 실무형 정치인이었다. 그는 대규모 축산 단지와 도로 건설을 추진해 브레스트 지역의 생산 기반을 확장했으며, 1986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공화국의 소유권과 경제 권한을 더 분명히 하자고 주장하고 체르노빌 방사능 오염 지도의 공개를 지시했지만,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급진적 혁신에는 신중했다. 1990년 벨로루시아 당 제1서기에서 물러났고 그해 잠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4–1950붉은군대 제5독립예비공병연대 복무
  • 1956–1958브레스트주 농업 전문가와 농업감사관
  • 1958–1961이바노보 지구당 제2서기
  • 1961–1965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를류튜프 지구당 제1서기 등
  • 1969–1977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 부부장·부장
  • 1977–1987브레스트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7–1990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라피크 니쇼노비치 니쇼노프

Rafiq Nishonovich Nishonov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즈베키스탄 1926–2023 ↓ 퇴임 1991

소련 말기의 마지막 민족소비에트 의장

그의 이름 '라피크'는 아랍어로 '동지'를 뜻한다. 고르바초프가 그를 민족소비에트 의장으로 발탁하자, 우크라이나 콤소몰 서기 발레리 치부흐는 '고르바초프의 개인 라피크'라는 별명을 붙였다.

우즈베크 농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타슈켄트 시당과 공화국 외무장관을 거쳐 1988년 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라시도프 목화 스캔들 이후 공화국을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듬해 고르바초프의 신임으로 소련 민족소비에트 의장에 발탁되었다. 연방 해체라는 격변 속에서도 다민족 국가의 마지막 의회를 이끈 우즈베크 출신의 최고위 연방 지도자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950년대–1970년대우즈베크 공화국 외교·당 행정에서 성장
  • 1986–1988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 라시도프 이후 공화국 정리 국면 담당
  • 1989–1991민족소비에트 의장, 연방 해체기의 마지막 대표 라인
  • 19918월 쿠데타와 연방 붕괴 속에서 직위가 소멸
  • 1991 이후러시아에서 생활하며 소련 말기 공화국 엘리트로 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