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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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아로노비치 로트시테인

Фёдор Аронович Ротштей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71–1953 ○ 자연사

30년 영국 망명 끝에 소비에트 최초의 페르시아 대사가 된 볼셰비키 역사가

레닌은 1920년 7월 로트시테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러시아로 오는 문제에 대해 나는 양면적인 생각이다. 당신은 런던에서의 활동에 대단히 중요하다. 추방당하게 내버려두라 ― 감히 그럴 용기가 있는지 두고 보자."

30년간 영국에서 활동한 볼셰비키 망명가. 1921년 초대 주페르시아 소비에트 대사로 차르의 불평등조약을 폐기했고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를 설립했다. 영국 노동운동과 제국주의를 연구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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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정치적 이유로 러시아 제국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
  • 1895–1911사회민주연맹(SDF) 가입, 1901–1906년 집행위원
  • 1901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가입, 볼셰비키 파벌 지지
  • 1911–1920영국사회당(BSP) 좌파 지도자, 반전 입장 견지; 《The Call》 기고
  • 1914–1918영국 외무성 및 전쟁성에서 러시아어 통번역관으로 근무
  • 1920영국 공산당(CPGB) 창립 기여, 소비에트 러시아로 귀국
  • 1921–1923주페르시아 RSFSR 전권대표, 소련-이란 조약 체결
  • 1923–1930외무인민위원부 collegium 위원, 《국제생활》 책임편집자
  • 1924–1925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IMKhMP) 초대 소장
  • 1927–1945《대소비에트백과사전》 제1판 주필진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45–1946레닌 훈장(1945), 노동적기훈장(1946) 수훈

아론 알렉산드로비치 솔츠

Аро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льц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72–1945 ○ 사망

당의 양심이라 불린 볼셰비키 원로, 대숙청기에 검찰총장과 맞선 법률가

「나는 뜨리포노프를 30년 동안 진짜 볼셰비키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멘셰비키로 알고 있다!」 — 1938년, 체포된 동료를 변호하며 비신스키에게 던진 말.

1898년 입당한 볼셰비키 법률가. 중앙통제위원회에서 당 윤리 체계를 설계해 '당의 양심'으로 불렸다. 1937년 비신스키의 조작 사건을 공개 비판한 뒤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되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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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РСДРП) 입당
  • 1903–1905예까쩨리노슬라브 지하인쇄소 조직 혐의로 체포, 6년형 선고 후 조기 석방
  • 1905–1917뚜멘·뚜린스크·나름에서 유형 생활; 첫 비합법 신문 『뚜멘스끼 라보치』 발행
  • 1917모스크바 당위원회 위원, 『사회민주주의자』『쁘라브다』 편집진
  • 1920–1934중앙통제위원회(ЦКК) 위원 및 상임위원 (1923–1934); 당 윤리·징계 제도 구축
  • 1921–1934러시아·소련 대법원 판사, 노동농민감찰원 법률부장
  • 1935–1938.02소련 부검사 (비신스키 산하), 대법원 법률합의체 의장
  • 1938.02–1945비신스키 비판 후 강제 정신병원 격리; 말년에 민족박물관 기록보관원

아브람 모이세예비치 데보린

Абрам Моисеевич Дебор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81–1963 ○ 자연사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창설자,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정되다

「저는 미코얀에게, 25년 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애썼지만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1956년 10월 미코얀 면담에서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에 답하며. 같은 대화를 전하는 문헌마다 문구가 다르다.)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제도화를 이끈 철학자. 1929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기계론자 논쟁에서 변증법 진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31년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탄받아 주필과 자신이 세운 철학연구소 소장직에서 해임되었으나, 이후 아카데미에서 연구를 이어가며 1940~1941년 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를 지냈다. 1940년대 말 '세계주의' 공세 속에서 부하 직원들이 해임되었고, 흐루쇼프 해빙기까지 살아남아 1956년 이후 저작 복간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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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16세에 마르크스주의 비밀서클 가입, 1903년 경찰 탄압으로 해외 탈출
  • 1903–1908볼셰비키 가담(1903) → 멘셰비키 전향(1907), 베른대학 철학과 졸업(1908), 플레하노프의 제자
  • 1908–1916마하주의·경험비판론 비판,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출간(1916), 철학에서 레닌과 접근
  • 1931「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규탄 — 주필·소장직 박탈, 스탈린주의 철학 전환의 상징
  • 1922–1930적색교수양성소 철학부장(1922~1930)
  • 1922–1930『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편집위원(1922~), 1925년부터 사실상 주필, 1930년 말 해임
  • 1924–1931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과학부소장(1924~1931 초)
  • 1929공산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초대 소장,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5–1963과학아카데미 연구직. 사회과학부 아카데미서기(1937), 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1940~1941), NKVD 특수목적학교에서 강의
  • 1943–1949역사연구소 근대사 분과장. '세계주의' 혐의로 해임되었다가 선임연구원으로 복귀, 1949년 반세계주의 캠페인 지지를 거부
  • 1956미코얀 면담, 1956년 10월 18일 미코얀의 당 간부회 결정 초안 제출, 저작 복간 개시

이에로님 페트로비치 우보레비치

Иероним Петрович Уборевич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96–1937 ✕ 처형

23세에 육군을 지휘한 천재 지휘관, 붉은 군대 기계화의 설계자

주코프 원수의 평가: "그는 작전술을 완벽히 체득한 진정한 소련 군사령관이었다. 완전한 의미에서 군인이었다."

리투아니아 농민 가정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장교로 참전했다. 23세에 14군 사령관이 되어 남북전쟁에서 데니킨군을 격파하고 하리코프·오데사를 점령했으며,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해방했다. 독일 연수에서 기계화전 교리를 흡수하여 투하쳅스키·야키르와 함께 붉은 군대의 기술 현대화를 주도했고, 벨라루스 군관구에서 1936년 대규모 기동훈련을 지휘했다. 1937년 「투하체프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하루 만에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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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7제국군 포병 장교, 중위 계급
  • 1918–191918소총사단장, 북부전선
  • 1919–192014군 사령관 — 데니킨군 격파, 하리코프·오데사 점령
  • 1921–1922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블라디보스토크 입성
  • 1925–1928북캅카스·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29–1931적군 무장부장, 부국방인민위원
  • 1931–1937벨라루스 군관구 사령관, 1936년 기동훈련 지휘
  • 1935제1급 군사령관 칭호 수여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피린

Семён Григорьевич Фир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98–1937 ✕ 처형

‘개조’ 선전을 만든 드미트라크 수용소장

1937년 4월 30일, 피린이 연출한 모스크바-볼가 운하 개통 축제 — 깃발과 오케스트라, 죄수들이 그린 지도자 초상화로 빛났다. 한 달 뒤인 5월 28일 체포, 그해 8월 총살.

적군 정보장교 출신의 굴라크 수용소장. 1932년 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을 거쳐 드미트라크(Dmitlag)를 이끌며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을 총괄했다. 죄수 노동을 '개조'라는 이름의 선전으로 포장해 캠프를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1934년 막심 고리키, 아베르바흐와 함께 찬양 문집 『벨로모르』를 공동 편집했다. 생산성이 낮은 죄수의 배급을 깎는 한편 '개조'를 설파한 모순적 인물. 야고다 측근으로 1937년 체포되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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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적군 정보기관 요원(그리스·터키·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 1932–1933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
  • 1933–1937드미트라크 수용소장(모스크바-볼가 운하)
  • 1937체포와 처형

솔로몬 라파일로비치 밀시테인

Соломон Рафаилович Мильштей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99–1955 ✕ 처형

강제이주의 열차를 조직한 수송총국장

1941년 10월, 밀시테인은 베리야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전쟁 발발 이후 특별부가 지연·탈주 군인 65만 7천여 명을 억류했고 그중 1만 201명을 총살했으며 "3,321명은 부대 앞에서 총살"되었다고 적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 그루지야에서 당 경력을 쌓은 뒤, 1939년 NKVD 수송총국장에 올라 스탈린 시대 강제이주의 철도 기구를 운영했다. 그의 총국은 폴란드인, 카라차이인, 칼미크인, 체첸인, 잉구시인 등 전체 민족 집단의 추방 열차를 편성하고 움직였다. 이 공로로 전투공로훈장인 수보로프 훈장 2급을 받았으나 소비에트 국가는 1962년 이를 취소했다. 1953년 베리야의 체포 직후 함께 체포되어 별도 재판으로 1955년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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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1938그루지야 당 사업, 트빌리시 시당 서기 등
  • 1938–1939NKVD 수사부 부부장
  • 1939–1941NKVD 수송총국장
  • 1941–1942NKVD 특별부관리국 제1부국장
  • 1942–1943NKVD 수송국장
  • 1943–1947NKGB·MGB 제3관리국장(수송)
  • 1951–1953MVD 굴라크 부수장
  • 1953우크라이나 내무 제1부장관
  • 1953–1955체포, 별도 재판과 처형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99–1980 ○ 자연사

리투아니아 소비에트화의 얼굴

1939년 10월 빌뉴스 반환 경축식에서 팔레츠키스는 연단에 올라 스메토나 대통령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그 발언으로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된 그는 불과 8개월 뒤 소련의 후원 아래 리투아니아의 새 지도자가 되어 돌아왔다.

리투아니아의 소비에트화 과정에서 지도자가 되었고, 이후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발트 공화국 대표제의 상징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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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1930년대리투아니아 좌파 언론인·정치인으로 활동
  • 1940소련의 리투아니아 병합 과정에서 인민정부 수반이 됨
  • 1940–1967리투아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공화국의 공식 얼굴
  • 1966–1970민족소비에트 의장, 발트 공화국 대표제의 상징
  • 1970 이후명예직과 회고의 영역으로 물러남

미하일 파블로비치 시레이데르

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Шрейдер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902–1978 ○ 자연사

대숙청기 NKVD의 내부 증언자

1938년 초 노보시비르스크에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형사 요원들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와 호송에 동원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와 한 달 내내 충돌한 끝에 그는 전출되었고, 넉 달 뒤에는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919년부터 체카에서 일한 고참 요원으로, 1935년부터 이바노보주 밀리치야(경찰) 국장을 지냈고 1938년 2월 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이 되었다. 그 직전 노보시비르스크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밀리치야 인력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 업무에 동원하라는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의 요구를 거부해 한 달 만에 자리에서 밀려났다. 1938년 6월 알마아타에서 체포되어 여러 나라의 간첩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했으나 아홉 달 넘게 버텼고, 고문 끝에는 자신이 만주국 황제 푸이의 사생아라는 식의 일부러 터무니없는 진술서를 써서 수사의 조작성을 기록에 남겼다. 1940년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2년 풀려나 사병으로 참전했으며, 1950년대 중반 복권되었다. 만년에 쓴 회고록 「NKVD 내부에서: 체키스트의 수기」(1995년 사후 출간)는 지휘부급 생존자가 대숙청기 NKVD 내부를 증언한 보기 드문 기록으로, 역사가들이 널리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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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체카(전러시아 비상위원회) 입부, 서부전선 사단 특별부 정찰 요원
  • 1922모스크바 주 GPU 비밀정치부 근무, 불라노프의 보좌관
  • 1925–1927외무인민위원부 암호부와 소프키노에서 근무
  • 1930–1931중앙아시아·레닌그라드 군관구 OGPU 전권대표부 근무
  • 1931–1933히비노고르스크 GPU 국장, 이후 타타르 자치공화국 OGPU 근무·카잔 형사수사
  • 1935–1938.01이바노보주 밀리치야 수사부서 책임자, 밀리치야 관리국장(내무인민위원부 부국장 겸임)
  • 1938.02–06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알마아타); 6월 체포

이사크 콘스탄티노비치 키코인

Исаак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ико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908–1984 ○ 자연사

소련 원자폭탄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의 과학 책임자

“과학자라는 것은 직함도 직장도 아닙니다. 연구실에 들어서면서 과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과학자라는 것은 끊임없는, 때로는 괴로운, 때로는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 1984년 사망 직전 콤소몰 상 시상식 연설.

소련의 실험물리학자. 1933년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에서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를 발견했고, 액체 금속의 홀 효과와 초전도체의 자이로자기 비율을 선구적으로 측정했다. 1943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제2연구소에 합류해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를 맡았으며,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에서 단 둘만 이름을 올렸다. 종전 후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1960–1984)을 지내며, 수학자 콜모고로프와 《크반트》를 창간했고 형 아브람과 집필한 물리 교과서는 소련 표준이 되었다. 연구실에 사해문서 영인본을 꽂아둘 만큼 유대 전통과 히브리어에 정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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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연구원
  • 1933M. M.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 발견
  • 1935우랄 물리기술연구소 전기현상부장, 스베르들롭스크 이주
  • 1936물리수학 박사 학위 취득
  • 1937–1944우랄 공업대학 일반물리학 주임교수
  • 1942대전류 측정 장치 발명으로 스탈린상 3급 수상
  • 1943제2연구소 합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 위원
  • 1950원자력연구소(IAE) 부장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0–1984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 1969물리·수학 대중과학잡지 《크반트》 공동 창간, 초대 편집장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리투아니아 1940–2022 ○ 자연사

빌뉴스 1월 사태에서 국가구원위원회를 선포한 모스크바파 리투아니아공산당 이념서기

1991년 1월 13일 소련군 BMP 확성기에서 그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리투아니아 형제들이여, 인민에게 맞섰던 민족주의·분리주의 정부는 전복되었다!」

리투아니아 남부 농가 출신으로 빌뉴스대학과 레닌그라드 고등당학교를 마친 뒤, 20년간 당 역사연구소에서 학자로 일하며 종교·무신론을 연구했다. 1990년 친모스크바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이념부장이 되어 리투아니아 독립에 격렬히 반대했고, 1991년 1월 11일 '리투아니아 국가구원위원회' 창설을 발표해 소련군 작전의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폭력적 정권 전복 선동으로 8년형을 선고받았고, 출소 후 러시아로 이주해 사망할 때까지 소련 체제를 옹호하는 저술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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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소련공산당 입당
  • 1970–1990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당역사연구소 연구원
  • 1990–1991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중앙위원회 이념부장
  • 1994–2002반국가 활동 혐의로 수감 (8년형)
  • 2002–2012러시아국립사회대학 교수, 공산당연합-CPSU 평의회 부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