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칭거라는 성으로 태어나 루도비카 사관학교와 빈 군사대학을 나왔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 1924년 비테즈 기사단에 들어가며 어머니의 성 야니를 택했고, 1931~1936년 루도비카 사관학교를 이끌었다. 1940년 3월 제2군 사령관이 되었고, 1942년 군을 이끌고 돈강으로 갔다. 1943년 1월 소련 공세 때 후퇴 금지 명령을 고수하다 군이 무너지자 병사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군령을 내렸다. 전후 스스로 귀국해 1947년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고, 1993년 대법원에서 무죄로 복권되었다.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말라츠키에서 독일계 약사 집안에 태어났다. 공학을 공부해 베를린 AEG에서 일한 뒤 부다페스트 근교에서 기계 공장을 운영했다. 1912년 카로이 미하이의 독립당에 들어가 그의 가까운 벗이 되었고, 과꽃 혁명 뒤 국방차관을 지냈으나 점차 우파로 기울어 1919년 2월 해임되었다. 평의회 공화국 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되어 탈출했다. 1919년 8월 우익 단체 「백악관 동지회」와 함께 페이들 정부를 몰아냈고, 8월 7일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어 11월 24일까지 재임했다. 1951년 라코시 정권에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그해 죽었으며, 1990년 복권되었다.
부대 장교들이 『네프서버』 기자 둘을 살해했고 1921년 카를 왕의 복귀 시도에 가담한 헌병 장교
마로시바샤르헤이에서 태어난 장교로,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쇼프론의 헌병 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 2월 17일 그의 장교 부대원들이 『네프서버』의 쇼모지 벨러와 버초 벨러를 살해해 호르티에 반대하는 세력에 경고를 보냈고, 3월 섭정 선거 때는 그의 부대가 국민의회의 「질서」를 지켰다. 1921년 8월 쇼프론 철수를 거부해 이 도시가 헝가리에 남을 길을 열었다. 같은 해 10월 왕정주의 장교들과 함께 카를 왕을 불러들여 장갑열차로 부다페스트로 진군했으나 부더외르시 전투에서 졌고, 사면을 받은 뒤 퇴역했다. 1932년 프로너이 팔과 함께 헝가리 전국 파시스트당을 세웠다.
1927~1945년 에스테르곰 대주교이자 헝가리 수좌대주교로 전시 가톨릭 교회를 이끈 베네딕도회 추기경
오늘날 슬로바키아에 속한 데아키의 슬로바키아계 지붕장이 집안에서 서푸체크 죄르지로 태어나, 1901년 판논헐머의 베네딕도회에 들어가 1908년 사제가 되었다. 1927년 비오 11세가 그를 에스테르곰 대주교에 임명하고 추기경으로 서임했으며, 수좌대주교로서 당연직 상원 의원이 되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뒤 헝가리로 피란한 폴란드인을 위한 교회의 구호를 조직했고. 1944년 봄 개종 유대인을 이송에서 빼 달라고 요구했지만 사제·수도자에 대한 예외만 얻었고, 이송을 공개적으로 규탄하지 않았으며 6월 29일 사목 서한을 내지 않기로 했다. 화살십자당 살러시의 「민족 지도자」 취임을 불법으로 보아 선서식 참석을 거부했고, 1945년 3월 에스테르곰의 방공호에서 숨졌다.
베르트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대소련 참전을 주장하고 유대인 노동봉사를 가혹하게 만든 국방장관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04년 뫼들링 공병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호르티의 국민군에 들어갔다. 1938년 임레디 내각의 국방장관이 되어 1942년까지 자리를 지켰고, 참모총장 베르트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침공 전면 참여와 동부전선 참전을 강하게 주장했으며, 커셔 폭격 뒤에는 소련이 폭격했다고 단정하며 즉시 선전포고를 요구했다. 1942년 노동봉사 대대 징집의 연령 상한을 없앴고, 6월 의회에서 유대인을 인종으로 정의하겠다고 밝혔다. 1942년 9월 지나친 친독 성향 때문에 호르티에 의해 물러났다. 전후 군사법원에서 강등·제적되었고, 베네수엘라로 이주했다가 1964년 오스트리아 린츠를 방문하던 중 숨졌다.
국민군 조직을 주도하고 1932~1936년 총리로서 헝가리를 이탈리아·독일 쪽으로 이끈 우익 급진파 장교
톨너주 무르거에서 마을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나갔다. 1919년 세게드에서 준군사 단체 MOVE를 만들고 호르티의 국민군 조직을 주도했으며, 1921년 카를 왕의 복귀를 무력으로 막는 데 앞장섰다. 1929년 베틀렌 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고 1932년 총리가 되었다. 무솔리니와 손잡고 1934년 로마 의정서에 서명했으며, 히틀러를 찾아간 첫 외국 정부 수반으로서 독일과 무역 협정을 맺었다. 1936년 뮌헨에서 병으로 죽었다.
“헝가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 공화국 붕괴 직전 마지막 연설, 1919년 8월 1일
옛 트란실바니아 출신 유대계 언론인에서 혁명가로 전향한 쿤 벨러는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의 실질적 창설자이자 지도자였다. 유럽사상 두 번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133일간 이끌며 산업 국유화를 추진했으나, 토지 분배 대신 국영농장을 택해 농민의 지지를 잃고 협상국 개입 속에 붕괴했다. 망명 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선전선동부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가로 활동했고, '제3시기' 좌경노선을 지지하다 1935년 인민전선 전환을 놓고 디미트로프와 대립했다. 1937년 대숙청에 휩쓸려 이듬해 총살, 1955년 복권되었다.
1936~1938년 총리로서 죄르 강령을 발표하고 제1차 유대인법을 의회에 낸 굄뵈시의 후임자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09년 페슈트주 공무원으로 출발했고, 혁명 뒤 죄르주·코마롬주의 주지사를 지냈다. 1927년 국회의원이 되었고 1935년 굄뵈시 내각의 농업장관이 되었다. 1936년 10월 굄뵈시의 후임 총리가 되어 베틀렌 노선의 헌정 질서 회복을 내세웠고, 1937년 국민의지당을 금지하고 살러시를 투옥했다. 1938년 3월 죄르 강령을 발표했으나, 오스트리아 병합 뒤 친독 인사를 입각시키고 극우 세력과 협상하다 5월 사임했다. 그의 정부가 낸 제1차 유대인법은 임레디 정부 아래 통과되었고, 그는 1938년 12월부터 죽을 때까지 하원 의장을 지냈다.
인종수호당에서 출발해 노비사드 학살을 의회에서 고발하고 반나치 봉기를 준비하다 처형된 민족 급진주의 정치인
서르버시에서 태어났다. 1923년 굄뵈시와 함께 인종수호당을 세웠으나 차츰 멀어져 1930년 민족 급진당을 만들었고, 1930년대에는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1939년 독립소농당으로 다시 의원이 되었다. 1941년 말 전쟁에 반대하기 시작해 『네프서버』 성탄호에서 전쟁 이탈과 토지개혁, 보통선거를 위한 「독립전선」을 촉구했고, 1942년 1월 노비사드 학살을 앞두고 바르도시에게 경고한 뒤 의회에서 이를 「국가가 조직한 포그롬」이라 고발했다. 1944년 3월 19일 독일 점령 때 체포를 막으려 총을 쏘다 부상한 채 끌려갔고, 10월 풀려난 뒤 11월 헝가리 민족봉기 해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뽑혔으나 다시 체포되어 12월 24일 쇼프론쾨히더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세레겔리에시의 독일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했고, 1차 세계대전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 포로가 되어 톰스크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볼셰비키에 가담해 국제 포로 부대를 이끌었고, 1918년 귀국해 헝가리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의 군사 인민위원을 지냈다. 1922~1936년 소련에서 살았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오토 플라터라는 이름으로 제11국제여단을 지휘했다. 전후 부다페스트 경찰청장과 외교관을 지냈다. 1956년 혁명 중 너지 정부의 내무장관이었으나 11월 카다르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소련 무력 개입을 지지했고, 카다르 정부의 군·공안 장관으로 무장 경찰과 노동자 민병대 조직에 참여했으며 1958~1961년 총리를 지냈다.
노비사드 학살로 번진 바치카 군사 개입을 명령하고, 뒤에 병력 보존과 서방 접촉을 꾀한 참모총장
모손에서 크나우스(크나우즈) 페렌츠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1934년 어머니의 성인 솜버테이이로 바꾸었다. 1941년 카르파티아 집단을 이끌고 소련 침공에 참가했다. 그해 9월 베르트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이 되었고, 1942년 1월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에게 바치카 군사 개입을 명령해 이것이 세르비아인 마을들에 대한 징벌 작전과 노비사드 학살로 번졌다. 1943년 학살 책임자들에 대한 조사와 군사재판을 열었고, 칼러이와 함께 서방 연합국과의 접촉을 이끌었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해임되었고, 전후 인민재판소에서 종신형을 받은 뒤 유고슬라비아로 넘겨져 1946년 페트로바라딘에서 총살되었다.
서볼치 지방의 오랜 젠트리 가문 출신으로 주지사를 거쳐 1932~1935년 농업장관을 지냈고 베틀렌 계열의 보수파였다. 1941년 상원에서 제3차 유대인법에 반대표를 던졌다. 1942년 3월 호르티의 요청으로 총리가 되어 대소련 전쟁을 이어 가면서도 독일의 유대인 이송 요구를 거부하고 서방 연합국과 휴전을 협상했다. 1943년 9월 이스탄불 앞바다에서 비밀 예비 휴전이 맺어졌으나, 1944년 3월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물러나 튀르키예 공사관에 숨었다. 1944년 10월 붙잡혀 다하우와 마우트하우젠에 갇혔다가 1945년 풀려났고, 1946년 망명해 뉴욕에서 숨졌다.
1956년 11월 1일 기자회견에서 소련의 재침공 가능성을 묻자 "그런 비극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개혁교회 목사에서 독립소지주당 창립자·지도자로 헝가리 전후 민주화의 얼굴이 된 정치인. 1945년 총선 승리로 총리에 오르고 이듬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공산당의 살라미 전술로 1948년 사위의 조작된 반역 혐의를 빌미로 사임당하고 8년간 연금되었다. 1956년 10월 너지 임레의 혁명 정부에 합류해 11월 1일 바르샤바조약 탈퇴와 중립 선언에 동참했고, 봉기 진압 후 6년형을 받았다. 1989년 대법원이 형을 무효화하며 복권되었다.
니레지하저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언론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10월 혁명 뒤 모스크바에서 쿤 벨러와 함께 헝가리인 포로 공산주의자들을 조직했고, 1918년 12월 독일 스파르타쿠스단 창립에도 참여했다. 평의회 공화국에서 군사 인민위원 대리와 교육 인민위원을 지냈으며, 그의 무장대는 레닌 소년단으로 불렸다. 반혁명 혐의자를 재판 없이 처형한 적색 테러의 중심인물로, 5월 말에는 모스크바로 날아가 레닌을 만났다. 1919년 8월 2일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다 붙잡혀 죽었는데, 당국은 자살로 발표했다.
솜버테이 출신의 법률가이자 외교관으로, 1922년 외무부로 옮겨 언론국장 등을 지냈다. 1941년 1월 외무장관이 되었고, 4월 텔레키가 자살하자 총리를 겸했다. 트리아농으로 잃은 땅을 되찾으려 친독 노선을 걸어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참여했고, 6월 커셔 폭격 뒤 의회 동의 없이 소련과의 전쟁 상태를 선언했으며, 영국·미국과도 전쟁에 들어갔다. 「외국인」 유대인 추방과 제3차 유대인법을 밀어붙였고, 1942년 3월 호르티에 의해 물러났다. 전후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1월 총살되었다.
트란실바니아의 작센인 가정에서 프란츠 차이드너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병·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전간기에 성을 헝가리식인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로 바꾸었다. 1941년 8월 세게드에 주둔한 제5군단장이 되었다. 1942년 1월 참모총장 솜버테이이가 그를 바치카의 파르티잔 진압에 보냈고, 그의 명령으로 바치카 마을 주민이 학살되었으며 노비사드 학살도 그가 조직했다. 1944년 1월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다른 유죄 장교들과 빈으로 달아났고, 자원해 친위대에 들어갔다. 화살십자당 정권에서 국방차관이 되어 자신을 비판해 온 버이치질린스키 엔드레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전후 헝가리를 거쳐 유고슬라비아로 넘겨져 1946년 11월 처형되었다.
부다페스트의 세케이 가문에서 태어나 1910년 루도비카 사관학교를 마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1933~1936년 베를린 주재 무관, 1942년 10월부터 호르티 섭정의 군사실장을 지냈고 1943년 상급대장이 되었다. 1944년 8월 1일 제1군 사령관이 되어 추축국 이탈을 지지했고, 10월 15일 이탈 시도가 실패하자 이튿날 소련군 쪽으로 넘어가 라디오로 휘하 지휘관들에게 투항을 호소했다. 12월 데브레첸 임시국민의회에서 임시국민정부 총리로 뽑혀 1945년 11월 총선까지 재임했고, 이 정부가 소련과 휴전하고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며 인민재판소를 세웠다. 1947년 헝가리 독립당 의원이 되었으나 의석을 박탈당해 물러났고 1948년 숨져 군의 예우 없이 묻혔다.
케치케메트 일대의 장교 부대를 이끌고 오르고바니 학살과 이자크 포그롬을 저지른 백색테러 지휘관
케치케메트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항공대의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다. 1919년 세게드에서 호르티의 참모장에게 케치케메트 일대의 「질서 회복」을 위임받아 도나우강·티서강 사이 지역의 사실상 군정관이 되었다. 그의 부대는 사람들을 오르고바니 숲으로 끌고 가 고문하고 처형했으며 이자크에서 포그롬을 일으켰고, 희생자의 약 3분의 1이 유대인이었다. 1921년 카를 왕의 복귀를 지지하지 않은 공으로 호르티의 사면을 받았고 1927~1931년 국회의원을 지냈다. 전후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50년 스페인 비고에서 병으로 죽었다.
1944년 8~10월 총리로서 유대인 이송을 멈추고 휴전을 준비했으나 화살십자당 쿠데타로 물러난 장군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10년 루도비카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1919년 헝가리 적군 사령부에서 복무하다 호르티의 국민군에 들어갔다. 1928~1934년 프라하 주재 무관을 지냈고 1943년 제2군, 1944년 4월 제1군 사령관이 되었다. 베틀렌 이슈트반의 천거로 1944년 8월 29일 스토여이의 후임 총리가 되어 은밀히 휴전 준비를 맡았고, 그의 정부는 유대인 이송을 멈추고 책임 차관들을 갈아치웠다. 10월 15일 판처파우스트 작전과 화살십자당 쿠데타로 휴전이 무산되자 밤새 페젠마이어와 협상한 끝에 호르티에게 항복을 권했고, 사임을 강요받고 독일 측에 갇혔다. 전후 기소되지 않았으나 연금과 땅을 빼앗겼고, 1965년 딸이 사는 애들레이드로 건너가 1967년 숨졌다.
백색테러를 비판하는 글을 쓰다 1920년 쇼모지 벨러와 함께 살해된 『네프서버』의 사회주의 작가·기자
커셔(코시체)에서 태어나 그곳의 『커셔이 너플로』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1918년 장편소설 『세프치크 집안』을 냈다. 1919년 『네프서버』의 기자가 되어 프롤레타리아, 농민의 토지 갈망, 이주 문제를 다루었고, 헤이여시 이반·프로너이 팔·오시텐부르그모러베크 줄러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백색테러를 비판했다. 이 때문에 1920년 2월 17일 편집인 쇼모지 벨러와 함께 오스텐부르크 부대에 끌려가 총살되었고, 시신은 도나우강에 버려졌다.
부다페스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재무부에서 일한 경제 전문가로, 1932년 굄뵈시 내각의 재무장관, 1935년 국립은행 총재가 되었다. 1938년 5월 총리가 되어 그해 가을부터 외교를 독일·이탈리아 쪽으로 돌렸고, 그의 재임 중 제1차 빈 중재로 남부 슬로바키아가 헝가리에 돌아왔다. 독재적 개편과 제2차 유대인법을 추진했으나 1939년 2월 정적들이 그의 유대계 조상을 밝혀내 사임했다. 1940년 친파시스트 정당 헝가리 쇄신당을 세웠고, 1944년 독일 점령 뒤 스토여이 내각의 장관을 지냈다. 1946년 인민재판소의 사형 선고로 총살되었다.
부다페스트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구두공으로 일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에서 복무했다.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탈출해 헝가리인 공산주의자 그룹에 들어가 선동가 학교에서 배웠다. 1918년 12월 귀국해 공산당 본부를 지키는 수병 경비대에 들어갔다. 평의회 공화국에서 200명이 넘는 무장대를 이끌며 혁명재판소의 재판도 맡았고, 그의 부하들은 반혁명 혐의자를 재판 없이 체포·고문·처형했다. 4월 말 뵘 빌모시의 해산 명령으로 무장해제되었으나 6월 봉기 뒤 쿤 벨러에게 재무장을 요청해 활동을 이어 갔다. 붕괴 뒤 8월 4일 체포되었고, 살인 9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1919년 12월 1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1940년 10월 30일 석방되어 11월 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라코시는 다음 날 붉은광장 열병식에서 레닌 묘단 위 스탈린 곁에 섰다.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1945–1948)과 노동자당(MDP) 서기장·제1서기(1948–1956)로 1948년부터 1956년까지 헝가리를 지배했다. 1925년 체포되어 1926년 8.5년형과 1935년 종신형을 받고 15년 넘게 복역한 뒤 1940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45년 귀국 뒤 '살라미 전술'로 민주 정당들을 해체하고 사회민주당을 강제 합병해 일당 지배를 세웠으며, 대량 투옥과 강제노동수용소, 러이크 재판의 책임을 졌다. 1953년 총리직을 너지 임레에게 넘긴 뒤에도 개혁을 방해하다 1956년 7월 18일 해임되었고, 1962년 제명 뒤 크라스노다르·토크마크·아르자마스를 거쳐 1971년 2월 5일 고리키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