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여론 재판에서 종신형을 받고 1956년부터 미국 대사관에 피신한 에스테르곰 대주교·추기경
버시주 체히민드센트의 독일계 성을 쓰는 집안에서 나 1915년 사제가 되었고, 1919년 카로이·쿤 벨러 정부에 잇달아 체포되었다. 뒤에 성을 고향 마을 이름을 딴 민드센티로 바꾸었다. 1944년 3월 베스프렘 주교가 되었고, 11월 화살십자당 정권에 체포되었다가 1945년 4월 풀려났다. 1945년 에스테르곰 대주교·수좌대주교, 1946년 추기경이 되어 교회 학교 국유화 등에 맞섰다. 1948년 12월 체포되어 고문 끝에 자백했고, 1949년 2월 여론 재판에서 종신형을 받았다. 1956년 혁명 중 풀려났고 소련군이 들어오자 미국 대사관에 피신해 15년을 지냈다. 1971년 빈으로 떠났고, 1974년 바오로 6세가 대주교좌 공석을 선언했으며 1975년 빈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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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사제 서품
- 1919카로이 정부와 쿤 벨러 정부에 체포됨
- 1944베스프렘 주교, 11월 화살십자당 정권에 체포됨
- 1945–1974에스테르곰 대주교, 수좌대주교
- 1946추기경 서임
- 1948–1949체포, 여론 재판에서 종신형
- 1956–1971혁명 중 석방, 부다페스트 미국 대사관에 피신
- 1971–1975빈에서 망명 생활
평의회 공화국 정치조사국장으로 정치경찰을 이끈 공산주의자
부유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갈릴레이 서클에서 활동했고, 은행원으로 일하며 1918년 반군국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지하조직을 이끌었다.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창립에 참여해 중앙위원이 되었고, 1919년 3월 21일 옥중에서 두 당의 합당 문서를 타자로 쳤다. 평의회 공화국에서 상점 사회화를 맡은 뒤 내무 인민위원부 정치조사국장으로 반혁명 혐의자를 추적했다. 붕괴 뒤 루카치 죄르지와 함께 지하당 재건을 맡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1919년 12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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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갈릴레이 서클·반군국주의 운동 참여
- 1918헝가리 공산주의자당 창립, 중앙위원
- 1919상점 사회화 담당
- 1919내무 인민위원부 정치조사국장
1944년 내무부 차관으로 버키 라슬로와 함께 헝가리 유대인의 게토 수용과 아우슈비츠 이송을 맡은 극우 관료
어보니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경기병 장교로 싸웠고,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MOVE 등 반혁명 단체에 가담해 잔혹함으로 이름났다. 1923년부터 15년 동안 괴될뢰 수석 군수, 1938년 페스트주 부지사를 지내며 반유대법이 미흡하다며 해수욕장 출입 금지 등을 독자적으로 가했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여로시 언도르 밑에서 내무부 차관이 되어 유대인 게토 수용과 이송에 폭넓은 권한을 받았고, 버키 라슬로와 함께 아이히만을 도와 5~7월 40만 명이 넘는 헝가리 유대인을 이송했다. 9월 해임되었으나 화살십자당 집권 뒤 작전 지역 민정 담당 정부위원이 되었다. 1945년 달아났다가 미군에 붙잡혀 넘겨졌고, 1946년 사형 선고를 받아 교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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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1918경기병 장교
- 1919–1921반혁명 단체 활동
- 1923–1938괴될뢰 수석 군수
- 1938–1944페스트주 부지사
- 1944내무부 행정 차관
- 1944–1945작전 지역 민정 담당 정부위원
- 1946인민재판소 사형 선고, 처형
체코슬로바키아의 헝가리계 정치인에서 1944년 스토여이 내각의 내무장관이 되어 유대인 이송을 조직한 인물
헝가리 왕국 코마롬주 코마롬체히(오늘날 슬로바키아 체히)에서 태어나, 1920년대 초 트리아농 조약으로 떨어져 나간 펠비데크의 헝가리계 정치에 뛰어들었다. 1933년 헝가리 국민당 대표, 1935년 프라하 하원 의원이 되었고 통일 헝가리당 서기장을 지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헝가리 정부의 펠비데크 담당 무임소 장관을 지냈고, 1940년 임레디 벨러와 극우 정당 헝가리 쇄신당을 세웠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스토여이 내각의 내무장관이 되어 차관 버키 라슬로·엔드레 라슬로와 함께 유대인 이송을 조직했다. 8월 17일 호르티의 압력으로 물러났다. 전후 서쪽으로 달아났다가 미군에 붙잡혀 헝가리로 넘겨졌고,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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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1933헝가리 국민당 부대표
- 1933헝가리 국민당 대표
- 1935–1938체코슬로바키아 하원 의원
- 1938–1940펠비데크 담당 무임소 장관
- 1940헝가리 쇄신당 창당
- 1944내무장관
- 1946인민재판소 사형 선고, 처형
13일의 총리
1958년 6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을 거부하며 말했다. "유일한 위안은 언젠가 헝가리 민족과 국제 노동계급이 나에 대한 이 중대한 혐의를 벗겨 주리라는 확신이다."
헝가리의 공산주의자.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로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모스크바 망명기에 농업 문제 전문가가 되었다. 1945년 농업장관으로 토지개혁을 집행했으나 1948~49년 집단화 속도를 두고 라코시·게뢰와 맞섰다가 밀려났다. 1953년 7월 총리가 되어 '새 노선'으로 투자 축소, 개인 농가 보장, 억류수용소 폐쇄를 추진했으나 1955년 해임되었다. 1956년 혁명 때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중립을 선언했고, 1958년 비공개 재판 뒤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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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1921러시아군 포로, 적군 가담, 볼셰비키 입당
- 1930–1944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농업 연구
- 1945–1946농업장관, 토지개혁 집행
- 1953–1955총리, 「새 노선」: 수용소 해산, 농민 부담 경감
- 1955실각·출당
- 1956.10–11봉기의 총리, 다당제·중립 선언
- 1958비밀 재판 후 처형
- 1989영웅광장 재매장
1932년 비어토르바지 폭파 사건 뒤의 즉결재판 제도 아래 처형된 헝가리 공산당 지도자
에르되퓔레에서 태어났고 1916년까지 홀렌데르라는 성을 썼다. 금융기관 사무원으로 일하며 제1차 세계대전 중 코르빈 오토와 반군국주의 운동을 조직하다 1918년 체포되었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내무 인민위원부 정치부의 코르빈 대리를 지냈다. 공화국이 무너지자 빈을 거쳐 모스크바로 망명해 국제적색구원회 일을 했고, 쿤 벨러의 제안으로 귀국해 불법 당 출판을 맡았다. 1932년 7월 체포되어 비어토르바지 폭파와 무관함에도 사형을 선고받고 7월 29일 퓌르시트 샨도르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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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반군국주의 운동으로 체포
- 1919내무 인민위원부 정치부 부부장
- 1919–1931빈·모스크바 망명, 국제적색구원회
- 1931–1932귀국, 불법 당 출판 담당
- 1932체포, 즉결재판 후 처형
화살십자당 지도자, 1944년 독일이 세운 「민족 지도자」
커셔(지금의 코시체)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복무했고, 1925년 참모본부에 들어갔다. 1930년대 초 트리아농 이전 국경 회복을 내건 「헝가리주의」를 주창하며 정치에 뛰어들어 1935년 군을 떠났고, 1937년 헝가리 국가사회주의당을 세웠다. 1938년 투옥된 사이 화살십자당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당은 1939년 선거에서 의석 30석을 얻었다. 1944년 10월 독일이 호르티를 끌어내리자 국가 지도자가 되어 중단된 유대인 이송을 재개했고, 그의 민병대는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다. 1945년 5월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에 붙잡혀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 3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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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1차 세계대전 복무
- 1925–1935헝가리군 참모본부 장교
- 1937헝가리 국가사회주의당 창당
- 1938–1940투옥 중 화살십자당 지도자로 추대, 1940년 사면
- 1944–1945「민족 지도자」, 국민통합정부 수반
- 1946인민재판소에서 사형 선고, 처형
헌병대 출신의 국민사회주의자로, 1944년 내무부 차관으로서 엔드레 라슬로와 함께 유대인 이송을 맡은 인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사관학교를 나와 제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싸웠고, 1919년 세게드에서 폭력적인 반혁명 활동으로 이름을 얻은 뒤 헌병대 지도자로 떠올랐다. 1938년 헌병 소장으로 물러나 헝가리 국민사회주의당에 들어갔고, 1939년 의원이 되었으며 독일 자금의 신문 『머저르샤그』 편집인이 되었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내무부 정무 차관이 되어 엔드레 라슬로와 함께 유대인 이송을 맡았고, 4월 4일 아이히만 특무대와의 회의를 주재해 유대인 재산을 빼앗고 도시 게토로 옮긴 뒤 독일로 이송하기로 정했다. 여름에 해임되고 반호르티 쿠데타 모의로 체포되었으나 화살십자당 집권 뒤 국가보안국장이 되었다. 1945년 오스트리아에서 붙잡혀 넘겨졌고, 1946년 교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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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장교
- 1919–1938헌병 장교, 소장으로 퇴역
- 1939–1944국회의원, 『머저르샤그』 편집인
- 1944내무부 정무 차관
- 1944–1945국가보안국장
- 1946인민재판소 사형 선고, 처형
라코시 시대 문화정책의 총감독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라코시의 권력 집중을 비판하고 헝가리 지도부 개편을 논의했다. 레버이는 초청받지 못했고, 그달 정치위원회에서도 제외됐다.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헝가리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4~44년 소련에 살았고, 귀국 뒤 1945~50년 당 기관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헝가리 문화생활 전반을 통제했고 1949년부터 문화장관을 겸했다. 1952년부터 라코시에게 밀려나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고, 몰로토프는 그가 이념 분야의 「모든 것을 한 몸에」 쥐었다고 비꼬았다. 1953년 정치위원회에서 빠졌다가 1956년 잠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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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반전 좌파 잡지 「테트」와 후속지 「마」 편집진에 합류했다.
- 1918헝가리 공산당 창립 모임에 참여하고 당 기관지 「뵈뢰시 우이사그」 편집진에서 일했다.
- 1930–19341930년 체포되어 1931년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석방된 뒤 프라하를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
- 1944–19451944년 헝가리로 돌아와 당 중앙위원회 수립에 참여했고, 1945년 당 선전·언론부장이 됐다.
- 1945–1950당 중앙 일간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 1949–1953공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 1953–1958대통령평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 19567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정치위원회에 복귀했으나, 10월 헝가리 혁명 때 소련으로 이송됐다.
- 1957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임시집행위원회 고문으로 귀국해 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됐고, 6월 당내 논쟁에서 패배한 뒤 다수파의 견해를 수용했다.
소농당 출신의 명목상 국가원수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실권이 거의 없던 도비를 헝가리 대표단에 포함했다. 모스크바의 초청은 그의 국가원수직이나 소농당 경력에 대한 오해, 또는 국가 간 회담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쇠니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년만 마치고 날품팔이로 일했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을 지지했고 농업노동자 운동에 참여했다. 소농당 좌파 지도자로 공산당과 손잡아 1948~52년 총리, 1952~67년 대통령평의회 의장으로 명목상 국가원수를 지냈다.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되었지만, 라이너는 소련 지도부가 그의 실권이나 농민 사이의 권위를 잘못 짐작한 탓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협동조합의 강제 해산을 두려워해 몰로토프의 해산 제안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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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1952헝가리 총리를 지냈다.
- 1952–1967헝가리 인민공화국 대통령평의회 의장으로 국가원수를 지냈다.
단 3개월 만에 혁명을 촉발한 마지막 스탈린주의 제1서기
1956년 10월 23일 밤 게뢰는 라디오 연설에서 학생 시위대를 향해 '우리 청년들에게 쇼비니즘의 독을 주입하려는 자들'이라고 규탄했고, 수 시간 내로 평화 시위는 혁명으로 바뀌었다.
헝가리 공산운동의 핵심 인물로, 1918년 창당과 함께 입당해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활동했다. 코민테른 요원과 NKVD 공작원으로 프랑스·스페인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는 '바르셀로나의 도살자'로 불리며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라코시의 오른팔로 헝가리 경제 스탈린화를 주도했고, 1956년 7월 라코시 후임 제1서기가 되었으나 개혁 요구를 거부했다. 10월 23일 저녁 시위대를 '파시스트'로 규정한 라디오 연설은 봉기를 혁명으로 폭발시켰고, 25일 사임 후 소련으로 도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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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1919헝가리 공산당 창당 가입, 평의회 공화국 청년공산주의자 활동
- 1925–1936코민테른·NKVD 공작원: 프랑스·벨기에·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활동
- 1936–1939스페인 내전: 카탈루냐 통일사회당(PSUC) 배후 지도, 트로츠키주의자(POUM) 숙청 지휘
- 1940–1944모스크바 망명: KPV 해외국 라코시와 공동 지도, 포로·적군 대상 선전
- 1945–1948최고국가평의회 위원, 통상·교통장관
- 1948–1953MDP 정치국원·부서기장, 재무장관: 중공업화·집단화로 경제 스탈린화 주도
- 1953–1956.07내무장관·부총리; 1956년 7월 MDP 제1서기
- 1956–198010월 25일 사임, 소련 도피; 1960년 귀국, 1962년 출당, 은둔 중 사망
셜러이 임레와 함께 비어토르바지 사건을 구실로 한 즉결재판에서 처형된 헝가리 공산당 지도부 일원
룸에서 유대교 신자 부모 사이에 태어났다. 부다페스트의 고무 공장 사무원으로 일하며 사무직 노동자 조합에 속했고, 1926년 헝가리 공산당에 들어갔다. 1928년부터 거듭 체포되었다가 증거 부족으로 풀려났지만 직장을 잃었고, 1930년 당 지도부 일원이 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1932년 비어토르바지 폭파 사건 뒤 선포된 즉결재판 제도 아래 셜러이 임레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헝가리 적색구원회의 구명 운동과 요제프 어틸러 등의 항의에도 7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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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헝가리 공산당 입당
- 1928–1930거듭 체포, 실직
- 1930당 지도부 합류
- 1932체포, 즉결재판 후 처형
소련의 압박에 사임당한 소농 출신 초대 총리
스위스 국경에서 아들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동차 보닛 위에서 사임서에 서명했다.
소농 출신의 정치가로, 소련 점령 하 헝가리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1946~47). 1930년 틸디 졸탄과 소농당을 세워 사무총장을 지내고 1945년 총선 57% 압승 뒤 국회의장을 거쳐 총리에 올라 펭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포린트 도입으로 극복했다. 그러나 라코시 공산당이 「살라미 전술」로 소농당 의원을 제거하자 스위스 휴가 중 아들을 인질로 잡혀 사임당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회고록 「철의 장막 뒤의 투쟁」(1948)은 동유럽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서방 서술의 출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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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1945소농당 공동 창립·초대 사무총장, 반전·반나치 활동
- 1944.04–10게슈타포 투옥, 석방 뒤 화살십자 정권 하 은신
- 1945–1946복구장관·국회의장·국민최고회의 위원
- 1946–1947제2공화국 초대 총리: 포린트 도입, 파리 평화조약 서명
- 1947.06스위스에서 사임 강요, 미국 망명
- 1947–1970망명 정치, 국제농민연합 부회장·회장
라코시 시대 계획청장, 실각 뒤 너지 임레의 사람
1919년 16세에 헝가리 공산당에 들어가 평의회 공화국 적군에서 싸웠고, 호르티 시대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40년 라코시와 함께 석방되어 소련으로 갔다가 1944년 소련군 장교로 귀국했다. 1945년 부다페스트 시장, 경제최고평의회 사무총장(1945~1949), 국가계획청장(1949~1953)을 지내며 5개년 계획을 짰고 당 핵심 「모스크바파」로 꼽혔다. 1953년 2월 모든 직위를 잃은 뒤 너지 임레 노선에 붙어 각료회의 사무국장(1954~1955)을 맡았고, 1955년 1월 소련 간부회는 그를 너지와 함께 비판했다. 1956년 11월 너지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루마니아에 억류되었고, 이후 정치에서 밀려나 글을 쓰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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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헝가리 공산당 입당, 평의회 공화국 적군 복무
- 1925–1940코민테른 임무로 귀국했다 체포, 15년 가까이 복역
- 1945부다페스트 시장
- 1945–1949경제최고평의회 사무총장
- 1949–1953국가계획청장, 노동인민당 정치국원(1951~)
- 1954–1955너지 정부 각료회의 사무국장
- 1956–1958유고슬라비아 대사관 피신, 루마니아 억류
라코시 4인 지도부의 국방장관
1953년 헝가리 지도부 교체 과정에서 소련의 비판을 받고 새 정치위원회에서 밀려났으며, 1956년 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 1961년까지 수감되었다.
아버커우이산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뒤 소련에 머물다 1944년 말 귀국해 1945년부터 헝가리 공산당 정치국·서기국원이 되었다. 1948~53년 국방장관으로 라코시·게뢰·레버이와 함께 「4인」 지도부를 이루었다.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그를 모스크바에 부르지 않았고, 불가닌은 그가 스스로를 대단한 군사령관처럼 내세운다고 비판했다. 새 정치위원회에서 빠진 뒤 1956년 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961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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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정치위원회·서기국원이 되었다.
- 1948–1953헝가리 인민공화국 국방장관을 지냈다.
- 1956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 1961석방된 뒤 부다페스트에서 편집자·출판인으로 일했다.
독립위원회를 이끌어 반전 시위를 조직하다 1942년 처형된 공산당 지하 지도자
커셔(코시체)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공부하던 대학생 시절 노동운동에 들어갔다. 1938년 11월 제1차 빈 중재 뒤 지하로 들어가 헝가리에서 활동하며 공산당 연락원과 손잡았다. 1940년 12월부터 공산당의 반전 투쟁을 조직하고 독립위원회를 이끌어 1941년 10월 6일과 11월 1일의 시위를 열었다. 『네프서버』 1941년 성탄호를 준비했고, 1942년 2월 1일 지하 기관지 『서버드 네프』 창간호의 사설을 썼다. 1942년 7월 6일 체포되어 참모본부 특별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9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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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프라하 대학생, 노동운동 참여
- 1938제1차 빈 중재 뒤 지하로 들어가 헝가리에서 활동
- 1940–1942공산당 반전 투쟁 조직, 독립위원회 지도
- 1942『서버드 네프』 창간호 사설 집필
- 1942체포, 군 특별재판 사형 선고, 처형
지하 기관지 『서버드 네프』의 첫 편집인으로 1942년 체포되어 구금 중 숨진 공산주의자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카를스루에와 드레스덴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했고, 드레스덴 사회주의 학생연맹을 이끌며 나치의 위험을 경고하는 글을 썼다. 1931년 귀국해 형 리하르드의 권유로 지하 공산주의 운동에 들어갔고, 1935년 공산주의 청년동맹 간부가 되었다. 1938년부터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안의 공산당 조직을 만들었고, 1941년 6월 독소전쟁 뒤 지하로 들어가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42년 2월 『서버드 네프』 편집장이 되었다가 6월 1일 체포되었고, 2주 뒤 석연치 않은 상황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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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카를스루에·드레스덴 유학, 사회주의 학생연맹 지도
- 1932헝가리 공산당 입당
- 1935공산주의 청년동맹 지도부
- 1938–1941사회민주당·노동조합 안 공산당 조직 구축
- 1942『서버드 네프』 편집장, 체포 뒤 구금 중 사망
아이히만과 협상해 유대인 1,684명을 「커스트네르 열차」로 스위스에 보낸 시온주의자 변호사
콜로즈바르(클루지나포카)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태어나 15세에 시온주의자가 되어 유대계 신문 『우이 켈레트』 기자와 변호사로 일했다. 1941년 부다페스트로 옮겨 난민을 국경 너머로 들여오던 부다페스트 구호구조위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1944년 여름 아이히만과 협상해 돈과 금, 다이아몬드를 대가로 유대인 1,684명을 아우슈비츠 대신 스위스로 보내는 「커스트네르 열차」를 성사시켰다. 열차는 베르겐벨젠으로 돌려졌다가 8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스위스에 닿았다. 전후 이스라엘에서 정부 대변인이 되었으나 나치 협력 고발을 둘러싼 1955년 재판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판결을 받았고, 1957년 3월 총격을 받아 숨졌다. 1958년 대법원은 혐의 두 가지를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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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시온주의 청년단 가입
- 1930년대『우이 켈레트』 기자, 변호사
- 1941부다페스트로 이주
- 1944아이히만과 협상, 커스트네르 열차
- 1952이스라엘 상공부 대변인
- 1955그루엔발트 명예훼손 재판 판결
- 1957피격, 사망
헝가리 비밀경찰의 창설자이자 그 희생자
1945년 정치경찰 책임자가 된 가보르 페테르는 ÁVO·ÁVH를 이끌며 쇼 재판을 준비하고 진행했다. 1953년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1959년 사면으로 풀려났다.
우이페헤르토의 유대인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1931년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5년 부다페스트 정치경찰 책임자가 되었고, 1945~52년 국가보안기관(ÁVO·ÁVH)의 수장으로 러이크 재판을 비롯한 숙청과 고문을 지휘했다. 1953년 초 라코시는 소련의 「반시온주의」 숙청을 본떠 그를 체포했다. 1953년 6월 베리야는 그의 사건을 재검토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1954년 군사법정에서 시온주의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1959년 개별 사면으로 풀려나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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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후반노동운동에 참여하고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 1931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 1943공산주의 평화당 지도부에 참여했다.
- 1945부다페스트 헝가리 국가경찰 정치보안부 책임자가 되었다.
- 1945–1952ÁVO·ÁVH 비밀경찰 조직을 이끌며 쇼 재판 준비와 진행에 핵심 역할을 했다.
- 1952직위에서 해임되고 헝가리 노동자당에서 제명되었다.
- 19531월 3일 체포되었다.
- 1954군사최고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1957형기가 14년으로 감형되었다.
- 1959개별 사면으로 석방되어 은퇴할 때까지 사서로 일했다.
소련군에 끌려가 소농당 해체의 방아쇠가 된 사무총장
체포되며 남긴 말: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 죄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평생의 일을 배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농 출신의 농민 정치가로, 소학교 네 학년만 마친 뒤 1933년 소농당에 입당해 1945년 사무총장으로 전후 최대 정당을 이끌었다. 틸디·너지 정부의 농업장관으로 지주제 해체와 토지개혁을 밀었고, 공산당의 살라미 전술에 맞서 당의 독립을 지켰다. 1947년 2월 국회가 면책특권 박탈을 거부하자 소련군이 조작된 간첩 혐의로 그를 체포해 굴라크로 끌고 갔고, 이 납치는 너지 페렌츠 총리의 사임과 소농당 해체의 방아쇠가 되었다. 1955년 귀환해 1956년 너지 임레 혁명정부의 농업장관으로 복귀했고, 진압 뒤 카다르 체제에 협력하다 195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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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1944소농당 입당, 버러녀 조직가·반나치 저항
- 1944–1945내무부 정치 차관(데브레첸 임시정부)
- 1945–1946농업장관
- 1945.08–1947소농당 사무총장
- 1947–1955소련군 체포, 굴라크 20년형, 1953년 모스크바 수감
- 1955–1956헝가리 이송, 1956.4 석방
- 1956.10–11너지 임레 혁명정부 농업장관·국가장관
- 1957–1959카다르 체제 협력, 1958 국회의원
내무장관으로 비밀경찰 ÁVH를 창설했으나 라코시의 첫 희생양이 된 공산주의자
재판에서 검사의 사형 구형에 답하며: 「검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법원의 판결을 미리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1949년 9월)
헝가리 공산당 정치인으로, 내무장관(1946~48) 시절 국가보안기관(ÁVH)을 창설하고 초기 숙청을 주도하며 라코시 체제 구축의 핵심 인물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으로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하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라코시가 자신의 인기를 위협으로 간주하자 외무장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49년 티토주의자라는 조작된 혐의로 체포·처형되어 동유럽 최초의 대규모 스탈린식 쇼재판 희생자가 되었다. 1956년 10월 6일 10만 인파가 모인 복권 장례는 3주 후 헝가리 혁명의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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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MP) 및 공산청년동맹(KIMSZ) 입당
- 1935건설노동자 파업 주도, 체포·추방
- 1937–1939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당서기로 스페인 내전 참전, 에브로 전투에서 중상
- 1941–1944헝가리 귀환 후 지하 저항운동, 당 중앙위원회 서기, 헝가리 전선 공동 지도
- 1946.03–1948.08내무장관 — ÁVH(국가보안국) 창설, 초기 쇼재판·숙청 지휘
- 1948.08–1949.05외무장관
- 1949.09–10티토주의 간첩 혐의 쇼재판, 사형 선고 및 집행
- 1956복권 및 10월 6일 국장 재매장, 10만 인파 운집 → 헝가리 혁명의 도화선
민주주의와 국가의 위기를 분석한 정치사상가
소련군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자 그는 남아 타자기로 「자유와 진실을 위하여」를 썼다.
비보 이슈트반은 법학과 정치이론을 바탕으로 헝가리 민주주의와 중동부 유럽의 국가 위기를 분석한 정치사상가였다. 그는 전후 민주적 재편을 위해 행정과 선거 제도 구축에 참여했지만,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학문적 자율성과 발언권을 잃었다.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공격하자 국회의사당에 남은 너지 임레 정부의 마지막 각료로서 「자유와 진실을 위하여」를 썼다.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고 1963년 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말년에는 침묵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윤리와 책임을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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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1935세게드대학교에서 정치학·법학 학위 취득, 빈과 제네바에서 수학
- 1938–1945법무부 관료, 전시에는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한 문서를 발급
- 1945–1946내무부 행정국장, 전후 행정과 1945년 선거 준비를 담당
- 1946–1950세게드대학교 정치학 교수, 헝가리과학원 통신회원
- 1951–1957외트뵈시 로란드대학교 도서관 연구원
- 1956.11.03–12너지 임레 제3차 정부 국무장관, 11월 4일 국회의사당에 남아 성명 작성
- 1957–1963정치 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복역 후 사면으로 석방
- 1963–1971중앙통계청 도서관 연구원
정치재판을 집행한 공산주의 법관
그는 1989년에도 너지 임레를 유죄라고 주장하며 판결을 뉘우치지 않았다.
비더 페렌츠는 불법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뒤 전후 헝가리의 사법·당 관료로 올라선 공산주의 법률가였다. 그는 1956년 혁명 뒤 국가가 조직한 보복 재판에서 가장 많은 사형을 선고한 법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58년 너지 임레 재판에서 대법원 인민법정회의를 주재하며 피고인의 발언과 변호 측 증거 신청을 거듬없이 제한했고, 너지 임레와 기메시 미클로시, 말레테르 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1989년에도 판결의 불법성을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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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세게드 법학원 졸업, 팔레스타인 공산당 창립에 참여
- 1935–1942헝가리 불법 공산주의 운동 참여, 변호사 수습
- 1942–1945쇤헤르츠 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독일로 강제 이송
- 1945–1949헝가리 공산당 지구위원회 서기, 내무부 고문
- 1951–1953법무부 근무
- 1953–1972대법원 법관, 인민법정회의 주재 및 법원 평의회 부의장
- 1958너지 임레 재판 주심 법관, 사형 판결 선고
구야시 코뮤니즘의 설계자, 1956년 진압의 책임자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1961년)
피우메에서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이탈리아식으로 체르마니크로 등록되었고, 1927년 타자기 정비공 견습을 시작해 1929년 직인이 되었다. 1931년 불법 공산청년동맹과 당에 입당해 지하활동과 투옥을 겪었다. 1948~50년 내무장관으로서 러이크 라슬로 숙청에 관여했고,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54년 석방되었다. 1956년 10월 25일 서기장이 되어 11월 1일 소련 측으로 넘어가 진압을 수용하고 너지 임레의 처형을 승인했으며, 수백 명 처형과 수만 명 투옥이 뒤따랐다. 1961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를 제창해 대사면과 개혁을 추진했고, 1988년 사임하고 198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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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PV) 및 공산청년동맹 입당, 지하활동
- 1933–1934체포되어 2년간 투옥, 중형교도소에서 라코시와 마주침
- 1942–1944KPV 중앙위원·서기, 반파시스트 '헝가리 전선' 창설 주도
- 1948–1950내무장관 — 러이크 라슬로 체포 관여, 이후 당 조직부장으로 좌천
- 1951–1954'티토주의자'로 체포, 무기징역 → 1954년 7월 석방
- 1956.10–11너지 내각 장관 → 소련과 협상, 새 정부 수립
- 1956–1988MSZMP 서기장 ― 32년간 헝가리 실질적 국가원수
- 1956–1958총리 겸임
- 1961–1965총리 겸임 — 경제개혁·대사면, '구야시 코뮤니즘' 확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