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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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텔레이몬 니콜라예비치 레페신스키

Пантелеймон Николаевич Лепеши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68–1944 ○ 자연사

당 역사 기록화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이스트파르트의 공동 창립자

어느 날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당시 카멘니 다리 근처 정부 청사(지금의 세라피모비치 거리)에 살고 있었다. 그의 서재 책상 옆 바닥에는 조가 흩어져 있었고, 작은 병아리들이 그것을 쪼아 먹고 있었다. 내 놀란 표정에 그가 말했다. "젊은 생명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지." — 보리스 우를라니스의 회고록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다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1897년 예니세이 유형지에서 레닌과 함께 지냈고, 이후 「이스크라」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10월 혁명 후 계몽인민위원부에서 학교 개혁을 주도했고, 1921년 당 역사 연구를 제도화한 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만년에는 역사박물관과 혁명박물관 관장을 지냈으며, 레닌의 망명 시절을 생생하게 기록한 회고록 『전환점에서』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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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1891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학생 혁명서클 조직, 1890년 제적, 키예프 대학 외부시험으로 졸업
  • 1895–1897「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동맹」 활동, 체포·투옥 후 예니세이 유형 — 레닌과 동일 지역
  • 1900–1905「이스크라」 대리인, 프스코프에서 신문 배포 조직, 망명 중 제네바에서 당 서고·기록보관소 설립
  • 1918–1920계몽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학교개혁 부장 — 통일노동학교 규정 초안 작성, 리트비노비치에 실험적 학교-코뮌 설립
  • 1919–1920투르케스탄 공화국 계몽부인민위원 대리, 타슈켄트에서 교원 양성과 첫 공화국 교육대회 조직
  • 1921–1924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 공동 창립자이자 부의장 — 당 역사의 제도적 연구 기반 구축
  • 1925–1927소련 MOPR(국제혁명투사원조회) 중앙위원회 의장
  • 1927–1930국립역사박물관 관장
  • 1935–1936혁명박물관 관장

표트르 게르모게노비치 스미도비치

Пётр Гермогенович Смидович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74–1935 ○ 자연사

세 혁명을 관통한 이스크라 요원, 비로비잔의 국가건설을 설계한 볼셰비키

1922년 12월 30일,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 소련이라는 국가의 탄생을 공식화한 순간이었다.

1898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제적된 후 파리에서 전기공학을 배우고 벨기에 노동당에서 활동했다. 이스크라 요원으로 세 혁명을 관통했고, 10월 혁명기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자 모소베트 의장을 지냈다. KOMZET 위원장으로 유대인 자치주 비로비잔 실험을, 북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북방 소수민족 정책을 설계했다.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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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RSDLP 입당, 페테르부르크 혁명활동
  • 1902–1905이스크라 요원, 우만 지하인쇄소 공동 조직, 세 혁명 참여
  • 1917–1918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VTsIK 간부,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 1921안토노프 봉기·크론시타트 진압 참여
  • 1924–1935KOMZET 위원장: 유대인 자치주(비로비잔) 기획·추진
  • 1924–1935북방위원회 위원장: 북방 소수민족 행정·경제 기반 수립
  • 1933–1935VTsIK 자연보호구위원회 위원장

로잘리야 사모일로브나 제믈랴치카

Розалия Самойловна Землячк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76–1947 ○ 자연사

지하 암호명 '데몬', 유일한 여성 소브나르콤 부의장

지하 활동 시절 스스로 택한 암호명 '데몬(Демон)'은 레르몬토프의 시를 암호표로 삼았다는 설과 함께 평생 그녀의 혁명적 인격을 상징하는 별칭으로 남았다.

이스크라 대리인 출신의 볼셰비키 핵심 조직가로, 1903년 중앙위원회에 협력되고 1905년·1917년 모스크바 봉기를 지도했다. 내전기 제8군·제13군 정치부장으로 복무하며 여성 최초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0-21년 크림 지방 당 서기 시절 조직한 적색 테러는 오늘날까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다. 1939년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라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이 되었고, 스탈린 시기 숙청을 피한 극소수 구볼셰비키 여성 가운데 하나로 194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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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RSDRP 가입, 키예프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 시작
  • 1901이스크라 대리인 — 오데사·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활동
  • 1903–1904중앙위원회 협력, '다수파 위원회 국' 구성원
  • 1905모스크바 위원회 서기, 12월 봉기 지도
  • 1917모스크바 합법 위원회 서기, 10월 로고슈스코-시모놉스키 봉기 지휘
  • 1918–1920제8군·제13군 정치부장, 루간스크 방어전 참가, 최초의 여성 적기훈장 수훈
  • 1920–1921크림 당 책임서기, 혁명위원회 위원 — 적색 테러 조직
  • 1924–19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교통인민위원부 간부, 페름·모스크바 지구당 서기
  • 1939–1940소비에트 통제 위원회 의장
  • 1939–1943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
  • 1943–1947당 통제 위원회 부의장

아브람 야코블레비치 벨렌키

Абрам Яковлевич Белень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2–1941 ✕ 처형

레닌의 개인 경호를 맡은 체카 창립 멤버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당시 벨렌키는 제르진스키와 함께 체포되었다. 양측 서술은 이 사건을 7월 6일로도, 8월로도 기록한다.

1882년 또는 1883년 벨라루스 스베르줸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2년 1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볼셰비키로 활동하다 1904년 12월 프랑스로 망명했고, 파리에서 구두장이와 인쇄공으로 일하며 롱쥐모 당학교에서 레닌을 만났다. 1917년 5월 귀국해 12월까지 중앙위원회 인쇄소 《트루드》를 관리했고, 같은 해 12월 체카에 배속되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레닌 경호 책임자로 있었고, 1928년까지 당·정부 지도부 경호를 담당하는 특별부서를 이끌었다. 1930년부터 OGPU·NKVD 특별전권위원을 지냈으나 1938년 5월 9일 체포되어 1941년 10월 16일 코뮤나르카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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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04볼셰비키 지하운동, 반복 체포
  • 1904–1917파리 망명: 구두장이·인쇄공, 롱쥐모 당학교 수학
  • 1917.05–12중앙위원회 인쇄소 《트루드》 관리자
  • 1919–1924레닌 경호 책임자
  • 1921–1928ВЧК-ОГПУ 특별부서장 (당·정부 지도부 경호)
  • 1930–1936ОГПУ·НКВД 특별전권위원
  • 1936–1938특별전권위원 보좌역
  • 1938–1941체포·수용소·총살
  • 1917.12–체카 배속, 출판 문제 담당 체카 위원
  • 1921–1928체카 위원회 위원, 체카 프레지디움 특별부서장, 이후 GPU·OGPU 특별부서장
  • 1936–1938NKVD 특별전권위원 보좌역
  • 1938–1941체포·수용소·총살, 1956년 복권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크레스틴스키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Крестинский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3–1938 ✕ 처형

책임서기에서 피고석으로 간 초기 볼셰비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첫날, 크레스틴스키는 피고석에서 일어나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며, 반소비에트 블록의 구성원도 아니었다'고 선언했다. 대숙청기 세 재판 전체에서 법정 자백을 거부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차르 시절 변호사 출신의 볼셰비키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혁명을 이끌고 최초의 정치국원이 되었다. 스베르들로프 사후 1919년부터 2년간 책임서기로서 당을 이끌었으나,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지지하며 레닌과 충돌해 실각했다. 이후 소련 최대의 외교무대인 주독 전권대표로 9년간 활약했고, 대숙청기 모스크바 재판에서 유일하게 법정 자백을 거부한 피고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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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재무인민위원
  • 1919–1921책임서기, 정치국원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 후 처형

미하일 마르코비치 보로딘

Михаил Маркович Бородин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4–1951 ✕ 옥사

쑨원의 정치고문이자 제1차 국공합작의 설계자, 코민테른의 지구적 요원

미국인 KMT 지지자들이 쑨원에게 '보로딘이 가명이며 본명은 그루젠베르크라는 걸 아십니까' 하고 경고하자, 쑨원은 이렇게 답했다. '압니다. 라파예트요.'

쑨원의 정치고문이자 제1차 국공합작을 설계한 코민테른의 지구적 요원.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분트에, 1903년 볼셰비키에 가담했으며, 1905년 혁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서 망명 러시아인 학교를 운영했다. 1919년 멕시코 초대 소비에트 영사로 멕시코공산당 창립을 도왔고, 1923년부터 광저우에서 국민당을 레닌주의 전위정당으로 개조하고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그가 성사시킨 국공합작은 중국공산당이 대중정당으로 성장할 발판이 되었으나, 1927년 장제스의 숙청으로 와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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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가입, 볼셰비키
  • 1905–1907리가에서 혁명 활동, 스톡홀름 제4차 당 대회 대의원
  • 1907–1918미국 망명 — 시카고에서 이민자 학교 운영
  • 1919초대 소비에트 멕시코 영사, 멕시코공산당 창립 지원
  • 1919–1922코민테른 요원으로 유럽·아메리카 순회
  • 1923–1927쑨원 정치고문 — 국민당 재편, 제1차 국공합작, 황포군관학교
  • 1932–1949《모스크바 뉴스》 편집장, 소비에트 정보국 편집장
  • 1949–1951반코스모폴리탄 캠페인으로 체포, 레포르토보에서 사망

즈미체르 질루노비치

Зміцер Жылуновіч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7–1937 구금 중 사망

「치시카 하르트니」라는 필명의 노동자 시인으로 소비에트 벨로루시 첫 정부를 이끈 볼셰비키

1887년 코필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무두장이로 일했고, 1904년 흐라마다에 들어가 『나샤 니바』에 기고했다. 1913년부터 페트로그라드의 공장에서 일하며 「치시카 하르트니」라는 필명으로 시를 썼다. 1918년 벨라루스 민족위원부 비서로서 빌헬름 크노린과 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에 맞서 벨라루스 공화국 수립을 주장해 레닌과 스탈린의 지지를 얻었다. 1919년 1월 1일부터 2월 3일까지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을 지냈다. 뒤에 출판·문화 기관을 이끌고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나 1931년 당에서 제명되었고, 1936년 체포되어 1937년 모길료프의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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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페트로그라드 「불칸」 공장 노동자
  • 1918벨라루스 민족위원부 비서
  • 1919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
  • 1920–1931벨로루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 1928벨로루시 과학아카데미 회원

아르카디 파블로비치 로젠골츠

Аркадий Павлович Розенгольц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9–1938 ✕ 처형

소비에트 공군을 세우고 대외무역을 맡은 볼셰비키

런던 아르코스 급습(1927년 5월 12일) 뒤 로젠골츠는 7쪽 항의각서를 내고 군사스파이 활동을 부인했으나, 5월 24일 볼드윈 수상이 의회에서 압수문서를 공개했고 영국은 5월 25일 국교를 단절하고 그를 추방했다.

1905년 16세로 볼셰비키에 입당한 뒤 내전에서 정치위원으로 카잔 공략과 콜차크전에 참여했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 공군 총책임자를 지냈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런던에서 대리대사로 일하며 아르코스 사건과 영소 단교를 맞았고, 귀국 뒤 좌익 반대파와 결별하고 스탈린 체제에 합류했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대외무역인민위원을 지냈으며, 1937년 해임과 체포 후 1938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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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16세에 볼셰비키 입당, 제4차 당대회 대의원; 비테프스크·키예프 등지에서 보험대리인으로 지하활동
  • 1917모스크바 소비에트 집행위원,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무장봉기 참여
  • 1918–1920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8군·제5군 정치위원, 체크트란 창설
  • 1922–1924공군 총책임자, 독일 정부·군부와 비밀 군사협상, 46인 선언 서명
  • 1925–1927런던 주재 소련 대리대사; 아르코스 급습(5월 12일), 5월 25일 단교와 추방
  • 1927–1930중앙통제위원회 위원·상임위원, 노농감찰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30–1937대외무역인민위원 — 5개년 계획 시기 수출입 총괄, 오르조니키제와 설비 수입 갈등
  • 1937–19386월 14일 해임 후 국가비축관리국장으로 전출, 10월 7일 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레프 니콜라예비치 벨스키

Лев Николаевич Бель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9–1941 ✕ 처형

소비에트 민병대를 관장한 부인민위원

1931년 야고다의 '베스나' 사건 조작에 항의했다 해고된 인물이, 6년 후 예조프 휘하에서 대숙청 트로이카를 조직했다.

체카 출신으로 1934년 소비에트 민병대 총국장, 1936년 예조프 휘하의 내무부인민위원이 되어 대숙청기 지방 트로이카를 조직했다. 1939년 체포돼 1941년 처형됐으며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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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6NKVD 노농민병대 총국장
  • 1936–1938내무부인민위원
  • 1938–1939철도 제1부인민위원
  • 1939–1941체포, 재판과 처형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 체르뱌코프

Александр Григорьевич Червя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2–1937 ✕ 자살

벨라루스 소비에트 국가성의 건설자, 스스로 총구를 겨눈 연방의 설계자

1937년 6월 16일, 당 대회에서 '인민의 적' 색출이 미흡하다고 공개 비난받은 체르뱌코프는 휴회 중 자신의 사무실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당국은 '가정사'라고 발표했다.

1919년 BSSR 수립 선언문에 서명하고 이듬해부터 초대 정부수반 겸 국가원수로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소련 중앙집행위 공동의장, 벨라루스화 정책 주도. 1937년 대숙청 와중 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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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5빌렌스크현에서 농촌 교사로 근무, 빌렌스크 교원대학 졸업 (1915)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복무, 알렉산드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1916), 소위
  • 1917.05RSDLP(볼셰비키) 입당, 벨라루스 사회민주노동당 창당 지도부 참여
  • 1918.01–06러시아 SFSR 민족문제인민위원부 벨라루스 담당 인민위원 (벨나츠콤)
  • 1919.01벨라루스 임시혁명노농정부 위원으로 BSSR 수립 선언문 서명; 리트벨 SSR 교육인민위원
  • 1920–1924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초대) 겸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2–1937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 (칼리닌·페트롭스키·나리마노프와 4인 체제)
  • 1924–1937벨라루스 SSR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야코프 이사코비치 세레브랸스키

Яков Исаакович Серебря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2–1956 ✕ 심문 중 사망

파리에서 백군 장군을 납치한 소련 특수공작 창시자, 자기 기관에 고문당하다

프랑스 경찰 제복을 입은 그들은 거리에서 쿠테포프를 멈춰 세우고 심문을 구실로 차에 태웠다. 쿠테포프는 저항했고, 몸싸움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세레브랸스키가 내게 말했다. — 파벨 수도플라토프, 『특수임무』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23년 OGPU에 영입되어 팔레스타인에 첫 소련 스파이망을 구축했고, 유럽 전역에서 200명 이상을 포섭했다. 1930년 파리에서 프랑스 경찰로 위장해 백군 지도자 쿠테포프 장군을 납치·살해했으며, 트로츠키 아들의 기록보관소 탈취와 스페인 공화파 군용기 밀반입을 지휘했다. 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로 활약했으나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아바쿠모프의 고문으로 거짓 자백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1년 수도플라토프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전시 정보전에 복귀했고, 1953년 베리야 사건에 연루되어 재체포된 후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문 중 사망했다. 1971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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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사회혁명당 맥시말리스트; 투옥(1909); 제국군, 동프로이센 중상(1914); 바쿠 전기기사
  • 1917–1923바쿠 소비에트 사회혁명당 활동가; 페르시아; 모스크바 체카; 사회혁명당 혐의 체포
  • 1923–1929OGPU 팔레스타인·벨기에·프랑스 불법체류자; '야샤 그룹' 간첩망 구축
  • 1929–1934OGPU 특수반장; 쿠테포프 장군 파리 납치(1930); 200명 이상 포섭
  • 1934–1938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 트로츠키 기록보관소 탈취; 스페인 무기 밀반입; 상급소령
  • 1938–1941체포·고문·사형 선고; 독소전 발발 후 사면
  • 1941–1946NKVD 제4국 전시 정보작전; 1946년 퇴역
  • 1953–1956베리야 사건 연루 재체포; 부티르카 심문 중 사망

야코프 사울로비치 아그라노프

Яков Саулович Агр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3–1938 ✕ 처형

체카의 정치수사 설계자

1921년 타간체프 사건으로 페트로그라드 지식인들을 대거 처형한 뒤, 어찌 그리 가혹하냐는 물음에 아그라노프는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지식인의 70퍼센트는 한쪽 다리를 적의 진영에 담그고 있었소. 우리는 그 다리를 불태워야 했소."

1893년 10월 12일 모길료프 현 체체르스크에서 상인 집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2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갔다가 191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같은 해 체포돼 예니세이 현으로 유배됐다. 1918년 인민위원회 서기로 레닌과 제르진스키의 지시를 직접 받았고, 1919년 체카에 들어가 크론슈타트 봉기와 안토노프 농민 봉기, 타간체프 사건을 수사했다. OGPU 비밀부장과 부의장을 거쳐 1934년 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겸 국가보안총국 실질 책임자가 되어 키로프 살해 수사를 지휘했다. 1937년 사라토프로 좌천됐다가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됐고,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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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31체카와 OGPU의 정치수사 요원 겸 특별전권위원
  • 1931–1933OGPU 비밀정치부장, OGPU 위원회 위원
  • 1933–1934OGPU 부의장
  • 1934–1936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국가보안총국 업무 실질 지휘
  • 1936–1937NKVD 국가보안총국장
  • 1937–1938사라토프 NKVD 책임자, 1937년 7월 20일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

니콜라이 마트베예비치 골로데트

Николай Матвеевич Голодед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4–1937 ✕ 심문 중 투신

10년간 벨라루스 공업화를 진두지휘한 정부수반, 아카데미 숙청에 서명하고 같은 심판대에 서다

1937년 6월 21일 민스크 NKVD 5층 심문실에서 '폴란드 간첩' 혐의를 받던 골로데트는 심문 도중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 공식 발표는 자살, 비공식 증언은 구타 살해 후 위장.

일곱 살부터 목동으로 일한 농민 혁명가로, 1927년부터 벨라루스 공화국 정부수반을 10년간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주도하며 공화국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바꾸어 놓고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과학아카데미 학자 추방 결의에 직접 서명한 그 자신도 1937년 '폴란드 간첩'으로 체포되어 민스크 NKVD 심문 중 투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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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5크리보이로크 광산에서 선로 수리공, 자물쇠공, 전기기사로 노동
  • 1917남서부전선 병사위원회에서 볼셰비키 혁명 선전 활동
  • 1918–1921RCP(b) 입당, 적위대 조직 및 독일군·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과 교전; 노보집코프현 소비에트 활동
  • 1921–1924고르키현 집행위원회 의장, 도적 진압 트로이카 의장
  • 1925–192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27–1937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공업화·집단화 주도
  • 193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학자 6인 추방 결의 서명
  • 1937.06.14모스크바에서 체포, 민스크 이송; 6월 21일 NKVD 심문 중 사망
  • 1956사후 복권 및 당적 회복

이사크 일리치 샤피로

Исаак Ильич Шапир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5–1940 ✕ 처형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를 관리한 예조프의 비서실장

1938년 11월, 예조프가 NKVD를 잃은 지 며칠 만에 비서실장 샤피로가 체포되었다 — 대숙청의 모든 수치를 관리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자기 상관을 겨눈 조서의 진술자가 되었다.

재무인민위원부와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당 중앙위 기구를 거친 경제 관료 출신으로, 1937년 1월 예조프를 따라 NKVD에 들어가 비서실 부실장·실장과 제9특별부장을 지냈고, 1938년부터는 작전 기록·등록·통계를 총괄하는 제1특별부장을 맡았다.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가 그의 손을 거쳐 예조프의 책상에 올랐고, 그 공로로 적성훈장과 명예 체키스트 휘장을 받았다.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1월 13일 체포되어 옛 상관에게 불리한 진술을 남기고 1940년 2월 군사법정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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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적군 정치위원 — 여단 코미사르
  • 1922–1929러시아공화국 재무인민위원부·고스플란 근무
  • 1930년대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부장, 당 중앙위 기구 부문장
  • 1937.01–07NKVD 비서실 부실장
  • 1937–1938NKVD 비서실장(겸임) · GUGB 제9특별부장
  • 1938.03–11NKVD 제1특별부장 — 작전 기록·등록·통계 총괄
  • 1937–1938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오를로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Ор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5–1973 ○ 자연사

스페인 공화국의 금을 모스크바로 실어 보내고 POUM을 부순 NKVD 총고문, 그리고 스탈린에게서 달아난 망명자

1938년 7월, 안트베르펜에 정박한 소련 선박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은 오를로프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캐나다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예조프와 스탈린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 자신과 모스크바에 있는 노모를 건드리지 않는 한, 자신이 아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15년 동안 침묵했다.

본명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 내전기 적군과 국경경비대를 거쳐 1926년부터 대외정보부(INO)에서 파리·베를린·빈·런던의 비합법 거점을 맡았고, 1936년 9월 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연락관으로 마드리드에 도착해 이듬해 스페인 NKVD 총책임자가 되었다. 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 510톤을 소련으로 실어 보낸 작전과, POUM을 반역 조직으로 몰아 서기장 안드레우 닌을 납치·살해한 작전이 그의 이름에 남았다. 1938년 7월 소환 명령이 곧 처형을 뜻한다고 판단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달아났고, 스탈린이 죽은 뒤인 1953년 『스탈린 범죄의 비사』를 펴내 대숙청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을 남겼다. 다만 자신을 장성급으로 소개하고 케임브리지 조직 포섭을 자기 공으로 돌린 진술들은 문서고가 열린 뒤 상당 부분 과장으로 평가되며, 그의 실제 계급은 국가보안소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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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보브루이스크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으로 출생
  • 1916–1921모스크바 대학 법학 중퇴 후 제정 육군 징집, 이어 적군과 내전기 정보·유격 임무
  • 1921–1924법학 복귀, 크릴렌코 아래 최고혁명재판소 근무
  • 1924.05국가정치보안부(OGPU) 입직
  • 1926–1930대외정보부(INO) 파리·베를린 파견, 통상대표부 위장 근무
  • 1933–1935빈·코펜하겐·런던 비합법 거점 지휘 (영국에서는 윌리엄 골딘 명의)
  • 1936.09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NKVD 연락관으로 마드리드 부임
  • 1936.10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의 소련 이송 작전 수행, 레닌 훈장 수훈
  • 1937스페인 NKVD 총책임자: POUM 탄압과 안드레우 닌 납치·살해 지휘, 유격전 훈련학교 운영
  • 1938.07소환 명령을 거부하고 가족과 함께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 1938–1953알렉산더 버그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잠적 생활
  • 1953『스탈린 범죄의 비사』 출간, 《라이프》에 연재
  • 1955–1957미국 상원 국내안보소위원회에서 두 차례 증언
  • 1963『방첩·유격전 편람』 출간, 미시간 대학 법학대학원 연구원
  • 1973.03.25클리블랜드에서 사망

파벨 오시포비치 수호이

Павел Осипович Сухо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5–1975 ○ 자연사

Су(Sukhoi) 설계국의 창립자, Su-7, Su-24, Su-27의 아버지

김나지움 시절 고멜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보고 소년 파벨은 숨이 멎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락방으로 올라가 모형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가 아니라 사람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투폴레프의 제자로 항공에 입문한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 1939년 수호이 설계국(OKB-51)을 창립해 Su-2 경폭격기를 전력화했고, 스탈린의 총애를 잃어 1949년 설계국이 해체되는 시련을 겪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재건된 OKB에서 Su-7 전폭기(1960년대 소련 전술항공의 주력), Su-9·Su-15 요격기, 가변익 Su-17·Su-24 등 냉전기 소련 공군의 중추 기종들을 연이어 배출했다. 기술적 예측력으로 동시대 설계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착수한 Su-27은 세계 최상급 전투기로 완성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스탈린상을 수상했고 1958년부터 1974년까지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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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20모스크바 공과대학 입학, 징집으로 중단 → 포병 장교, 제대
  • 1921–1925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MVTU) 복학, 투폴레프 지도하에 졸업
  • 1925–1938TsAGI·투폴레프 설계국 — I-4, ANT-25, ANT-37bis 설계 참여
  • 1939–1949수호이 설계국(OKB) 창립 — Su-2, Su-6(스탈린상), Su-9 제트기
  • 1949–1953OKB 해체; 투폴레프 설계국 부수석 설계자
  • 1953–1975OKB-51 재건 — Su-7, Su-9, Su-15, Su-17, Su-24, Su-27 착수
  • 1958–1974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레프 세묘노비치 비고츠키

Лев Семёнович Выготский
소련 벨라루스 1896–1934 ○ 결핵

문화역사심리학의 창시자, 근위발달영역 개념을 정립한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자

마지막 말: "나는 준비됐다" — 젊은 시절 햄릿 에세이에 쓴 구절: "결심이 아니라 준비 — 그것이 햄릿의 상태다."

사회문화적 상호작용으로 고등정신기능이 형성된다는 문화역사이론을 정립한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자다. 『사고와 언어』를 남기고 37세에 결핵으로 사망했으나, 세계 발달심리학과 교육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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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모스크바대학 법학부 및 샤냡스키대학 역사철학부 졸업
  • 1919–1924고멜에서 교사·연극 평론가·출판 편집자로 활동하며 심리학 연구 시작
  • 1924모스크바 실험심리학연구소 연구원, 루리야·레온티예프와 '비고츠키 서클' 형성
  • 1925–1926『예술심리학』으로 학위 취득, 결핵 악화로 장기 입원
  • 1927–1931결함학연구소 과학지도자, 제2모스크바대학·공산주의교육아카데미 교수
  • 1932–1934『사고와 언어』 집필, 근위발달영역 개념 제안, 하리코프에서 의학 공부
  • 1934전연방실험의학연구소 심리학 부문 초청받았으나 6월 11일 결핵으로 사망

야코프 아르카디예비치 야코블레프

Яков Аркадьевич Яковл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6–1938 ✕ 처형

집단화 행정을 맡은 농업인민위원

1929년 12월, 야코블레프는 전체 농지의 '최소 3분의 1'을 1930년 봄까지 집단화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지나치게 신중하다며 기각했고, 야코블레프는 그대로 물러서 상향된 강행 일정을 충실히 집행했다.

본명 예프스타인. 1913년 볼셰비키 입당, 혁명 후 우크라이나에서 당 활동을 이끌었다. 1923년부터 『농민신문』 편집장을 맡아 농촌 문제 전문가로 부상했고, 1929년 초대 소련 농업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정치국 집단화 위원회를 주도했다. 1930년 1월 5일 포고령을 기초해 주요 곡창지대의 강제 집단화 일정과 '부농 계급 청산' 정책을 설계했으며, 트로핌 리센코를 발탁해 소련 생물학의 반과학적 전환에도 관여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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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4농업인민위원 · 집단화 행정

이즈라일 모이세예비치 레플렙스키

Израиль Моисеевич Лепле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6–1938 ✕ 처형

우크라이나 대량작전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자

GB 소령 우샤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레플렙스키는 자신의 상관인 예조프마저 두려워할 정도로 무자비한 인물이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출신의 체키스트. 벨로루시 NKVD를 거쳐 우크라이나 NKVD 수장으로 대숙청 대량작전을 주도했으며, 예조프의 측근으로서 가장 먼저 숙청된 이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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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6벨로루시 내무인민위원
  • 1936–1937국가보안총국 특별부장
  • 1937–1938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 1938NKVD 제6부장, 이어 제3관리국장(수송·통신)
  • 1938체포와 처형

니콜라이 시도로비치 블라시크

Николай Сидорович Власи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6–1967 ○ 폐암

25년간 스탈린의 그림자였던 경호 책임자

체포된 블라시크는 "나를 체포했다면, 곧 스탈린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한 달 반 뒤 스탈린은 죽었다.

벨라루스 농민 출신으로, 1931년부터 1952년까지 25년간 스탈린의 개인 경호를 책임지며 소련 지도자의 신변 안전과 모든 별장·관저를 총괄했다.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후 스탈린의 자녀들을 사실상 양육했고, 경호 업무를 넘어 스탈린 가문의 집사 구실까지 했다. 중장까지 진급하고 레닌 훈장 3개와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았으나, 1952년 말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실각했다. 1955년 유죄 판결로 계급과 훈장을 박탈당했으며, 사후 2000년이 되어서야 러시아 대법원에 의해 무죄가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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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하사관,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7–1919모스크바 경찰, 이후 체카로 전속
  • 1926–1931OGPU 작전국 선임전권대표
  • 1931–1952스탈린 개인 경호 책임자
  • 1938–1942NKVD 국가보안총국(GUGB) 제1국장
  • 1943NKGB 제6총국장
  • 1946–1952MGB 경호총국(GUO) 국장
  • 1952바제노프 강제노동수용소 부소장으로 좌천

바실리 다닐로비치 소콜롭스키

Василий Данилович Сокол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7–1968 ○ 자연사(모스크바, )

그로드노 현 빈농의 아들, 소련 핵시대 군사교리를 세우다

문서로 확인되는 소콜롭스키의 대표 행보는 1946~49년 소련군정청 최고책임자로서 서베를린 봉쇄를 개시·지휘한 것이며, 스탈린은 이 조치를 높이 평가해 그에게 레닌 훈장을 수여했다.

1897년 그로드노 현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부설 학교와 네벨 사범학교를 마치고 1918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독소전쟁에서 서부방면군 참모장(1941~43)과 사령관(1943~44)을 지냈고, 오르샤·비텝스크 공세 실패로 1944년 4월 해임된 뒤 제1우크라이나 방면군 참모장으로 베를린 공세 준비에 참여했다. 1945년 5월 독일 무조건 항복 조인식의 소련 측 참여자였고,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군정청 최고책임자 겸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서베를린 봉쇄를 지휘했다. 1952~60년 참모총장 겸 국방장관 제1차관을 지낸 뒤 196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방부 총감찰로 재직했고, 1962년 『군사전략』을 주편해 서방에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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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붉은 군대 자원입대(1918), 군사아카데미를 최우수 3인 중 하나로 졸업
  • 1921–1930투르케스탄 전선에서 바스마치와 교전, 전투 중 총상
  • 1941–1942서부방면군 참모장 — 모스크바 반격 계획 주도
  • 1943–1944서부방면군 사령관 — 오르샤·비텝스크 공세 실패로 경질
  • 1944–1945제1우크라이나 방면군 참모장, 제1벨로루시 방면군 부사령관
  • 1946–1949소련군정청 최고책임자 겸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서베를린 봉쇄 지휘
  • 1952–1960참모총장 겸 국방장관 제1차관
  • 1960–1968국방부 총감찰; 1962년 『군사전략』 주편

나움 이사코비치 에이팅곤

Наум Исаакович Эйтинго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9–1981 ○ 자연사, 모스크바

트로츠키 암살과 원자력 첩보를 설계한 소련 최고의 암약 지휘관

1940년 8월 20일 코요아칸에서 메르카데르가 트로츠키를 공격한 동안 에이팅곤과 카리다드 메르카데르는 각각 다른 차에서 대기했고, 메르카데르가 붙잡리자 달아났다.

벨라루스 슈클로프 출신 유대인으로, 어린 시절 포그롬을 겪었고 1917년 사회혁명당에 가담했다가 내전 중 볼셰비키로 전향해 고멜 체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OGPU 외국부 요원으로 중국·터키·서유럽에서 암약했고, 에스파냐 내전기 오를로프의 부관으로 공화국 금 보유분을 소련으로 반출했다. 1940년 수도플라토프와 함께 트로츠키 암살 작전을 설계했으며, 독소전쟁 중에는 제4국 부책임자로서 적 후방의 전략적 기만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종전 후 원자력 첩보 부서를 총괄했으나 1951년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되어 12년간 복역했고, 1964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 1981년 모스크바에서 자연사했으며 1992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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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사회혁명당 입당; 모길료프 노동자·협동조합 활동; 1919년 RKP(b) 입당
  • 1920–1924고멜 체카 — 비밀작전부장 대리, 사빈코프 토벌 중 부상; 군사아카데미 동양부 졸업
  • 1925–1930OGPU 외국부 — 중국·터키 암약; 하얼빈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
  • 1930–1936OGPU 특수작전국 — 세레브랸스키 보좌; INO 불법작전부 책임자
  • 1936–1939에스파냐 내전 — NKVD 부주재관 (Kotov 장군); 공화국 금 보유분 소련 반출
  • 1940수도플라토프와 '오리 작전' 공동 지휘 — 멕시코 트로츠키 암살
  • 1941–1945NKVD 제4국 부책임자 — 기만작전 '수도원'·'베레지노' 지휘
  • 1945–1951NKVD/NKGB 'S' 부서 부책임자 — 원자력 첩보; 발트·서우크라이나 반소 파르티잔 제압
  • 1951–1964'MGB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 12년형; 1953년 베리야에 의해 일시 복직 후 재체포
  • 1964–1981석방, 출판사 선임 편집자; 1992년 사후 복권

블라디미르 예피모비치 고레프

Владимир Ефимович Гор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계 1900–1938 ✕ 처형

마드리드 방어를 조직한 국제주의 군인

1936년 가을, 고레프는 마드리드 방어에서 공화파 민병대를 규율 있는 군대로 재편하는 소련 고문단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블라디미르 고레프는 러시아 내전과 중국 혁명전쟁을 거친 소련 군인이자 군사고문이었다. 1936년 스페인에 파견되어 ‘산초’라는 암호명으로 공화파 군대의 조직과 마드리드 방어를 지원했고, 이후 북부 전선에서도 활동했다. 귀국 뒤 대숙청의 피고가 되어 처형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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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적군, 러시아 내전 참전 및 지휘관
  • 1925–1927중국 국민혁명군 군사·정보 고문, ‘니키틴’·‘고든’
  • 1930–1933미국 비합법 정보원
  • 1933–1935레닌그라드 군관구 자동차·기갑 부대 지휘부
  • 1935–1936제31독립기계화여단장 겸 정치위원, 콤브리그
  • 1936–1937스페인 공화국군 소련 군사고문 및 군사주재관, ‘산초’
  • 1937스페인 북부 전선 군사고문
  • 1938체포·처형, 1956년 복권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 예조바

Евгения Соломоновна Ежова
소련 벨라루스 (유대계) 1904–1938 ✕ 자살

문단 살롱을 열었던 화보지 편집인, 예조프의 아내

1938년 11월, 요양원에 있는 그에게 남편이 루미날을 보냈다. 며칠 뒤 그는 과다 복용으로 숨졌다.

고멜의 상인 가정에서 예브게니야 파이겐베르크로 태어나, 하유틴·외교관 글라둔과의 결혼을 거쳐 1931년 예조프와 결혼했다. 1930년대에는 화보지 《건설 중의 소련》의 부편집인으로 사실상 편집을 이끌었고, 바벨과 숄로호프, 예이젠시테인 같은 문화계 인사들이 드나드는 모스크바 살롱을 열었다. 1933년 딸 나탈리야를 입양했다. 1938년 남편의 몰락이 다가오자 가까운 친구들이 잇따라 체포되었고 그 자신의 과거를 고발하는 진정서도 접수되었다. 심한 우울 상태로 요양원에 들어갔고, 남편이 보내 준 수면제 루미날의 과다 복용으로 1938년 11월 21일 사망했다. 돈스코이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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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출판·언론계 근무
  • 1930년대화보지 《건설 중의 소련》 부편집인 · 사실상 편집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