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과 뉴저지 주지사를 거쳐 1912년 대통령이 되었고, 취임 첫해 연방 관료 조직에 인종 분리를 들여왔다. 1917년 4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전을 이유로 참전을 요청했고, 1918년 1월 14개조로 국제연맹과 민족자결의 구상을 내놓았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연맹 규약 기초를 이끌었지만 연맹을 위해 독일에 대한 여러 요구를 양보했다. 1919년 10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타협을 거부해 상원의 조약 비준이 무산되었다. 같은 시기 파머 습격의 「적색 공포」가 벌어졌다. 191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1924년 죽었다.
1918년 벨리키 우스튜크의 체카 지하실에서 사형을 기다리며 쓴 공개서한에서 소로킨은 사회혁명당 탈당과 정치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러시아 혁명기 사회혁명당의 주요 지도자로, 케렌스키 총리의 비서,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차르 체제에서 세 차례 투옥되었고 볼셰비키 집권 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22년 '철학의 배'로 추방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1930년 하버드대에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사회 계층화·사회 이동성 연구와 『사회문화동학』에서의 순환 이론으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회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 당의 심장을 추방한 셈이었다. 트로츠키가 진지한 젊은 활동가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빈 껍데기만 남았다.” — 1937년 사회당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축출한 뒤
캔자스 출신의 아일랜드계 노동운동가로, 1919년 미국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코민테른 상임간부회에 올랐다. 1928년 모스크바에서 트로츠키의 코민테른 비판문을 접하고 좌익반대파로 전환,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미국 공산주의자동맹을 창립했다. 1934년 미니애폴리스 트럭 운전사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지도했고, 1938년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을 창당하여 초대 전국서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반대 활동으로 스미스법에 따라 18개월간 수감되었으며, 제4인터내셔널의 핵심 지도자로서 국제 트로츠키즘 운동을 이끌었다.
'미국의 사회주의는 투표함을 통해 올 것이다' — 1996년 클리블랜드 플레인 딜러와의 인터뷰에서.
핀란드계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철강 파업 현장에서 성장하여 41년간 미국 공산당을 이끈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다.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하고 스미스법으로 투옥된 후 당권을 장악, 모스크바 노선에 충실히 경도되어 네 차례 대선에 출마한 냉전기 미국 공산주의의 얼굴이었다.
1986년 10월 12일 오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모든 핵무기를 2000년까지 폐기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40분 뒤, SDI 연구를 실험실에 가두라는 고르바초프의 조건을 레이건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무너졌다.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레이거노믹스와 대규모 군비 증강으로 1980년대를 열었다. 취임 초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대결을 고조시켰으나,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진심으로 염원하여 고르바초프와 네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1986년 레이캬비크에서 전면 핵폐기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전략방위구상(SDI)을 양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협상은 막판에 결렬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하여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을 통째로 폐기했고, 냉전은 그가 퇴임한 지 몇 달 만에 막을 내렸다.
미국민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데탕트', 곧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이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로 워싱턴주에서 태어나 40년 넘게 의회에서 활동한 냉전 자유주의자였다. 민권과 환경 정책에는 앞장섰지만 데탕트에는 회의적이어서, 소련의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연결한 잭슨-배닉 수정안을 주도했다. 1974년 키신저·도브리닌과의 비공식 협상이 소련의 거부로 무산되며 잭슨은 1972년 통상협정을 사실상 좌초시킨 인물로 남았다. 그의 매파 보좌관들은 훗날 신보수주의의 핵심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