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학술원 출신으로 유일하게 공산당에 입당해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한 야페트 이론의 창시자
'언어학의 세계 규모적 정립' — 마르가 자신의 이론을 일컫던 표현이다. 그에게 모든 언어는 네 원시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언어는 계급적 상부구조였다.
그루지야 쿠타이시에서 태어난 마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카프카스 언어·고고학으로 명성을 쌓아 1912년 제국 학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혁명 후 언어를 계급적 상부구조로 보며 모든 언어가 네 원시음(sal, ber, yon, rosh)에서 비롯되었다는 '야페트 이론'을 주창, 1930년 공산당 입당과 함께 학술원 부원장이 되어 사망 시까지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했다. 그의 유사과학적 이론은 1950년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로 공식 폐기되었으며, 그 행로는 혁명기 과학과 권력의 길항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코바, 그만둬, 창피한 꼴 당하지 말게. 이론이 자네 분야가 아니란 건 모두 알고 있네.」 — 당 회의에서 스탈린에게 던진 말.
오데사 출신의 유대계 러시아인 마르크스주의자로, 17세부터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ИМЭ)를 창설하여 세계 최고의 마르크스 문헌 컬렉션을 구축했고, 마르크스·엥겔스의 미발표 원고를 직접 발굴·편집하여 《독일 이데올로기》 제1장과 《자연변증법》을 최초로 출판했다. 소비에트 아카데미 정회원(1929)이자 당대 최고의 마르크스 학자였으나, 제헌의회 해산·브레스트 평화·당내 이견 탄압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독립적 성향 때문에 1931년 체포·추방되었고, 1938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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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1889오데사에서 노동자 서클 조직,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 첫 파리 체류, 플레하노프·라브로프와 교류
1891–1899체포·18개월 구금 후 4년 강제노동형, 이후 키시뇨프 유형; 총 5년을 크레스티 교도소에서 복역
1901–1905그룹 「보르바」 이끌며 RSDLP 제2차 대회 참가; 레닌의 당 중앙집권화·분파주의를 공개 비판
1905–1907러시아로 귀국, 페테르부르크 최초 노동조합 조직; 제2두마 사민당 분파에서 활동
1907–1917해외 망명; 독일 사민당 기록보관소 연구, 카우츠키의 학술비서; 마르크스·엥겔스 미출간 원고 다수 발굴·출판
1917–1918귀국 후 메즈라욘카 합류, 볼셰비키와 통합; 제헌의회 의원 당선; 무장봉기·제헌의회 해산·언론탄압에 반대
1918–1920브레스트 평화 반대로 일시 탈당 후 복당; 국가기록관리총국(글라바르히프) 국장, 과학총국장
1921–1931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ИМЭ) 창설·소장; 《독일 이데올로기》 제1장(1924)·《자연변증법》(1925) 최초 출판
1929소비에트 아카데미 정회원 선출(역사학, 27/30표); 적기노동훈장 수훈
1931–1938멘셰비키 연계 혐의로 체포·제명·사라토프 유형; 1937년 재체포, 1938년 1월 21일 총살
그의 이즈베스티야 사설은 '스테클랴슈키'(유리조각)라 불렸고, 레닌은 직접 쪽지를 보냈다: "스테클로프 동지! 당신 사설을 읽었소. 바로 이렇게 써야 하오, 더 많이!" 스테클로프는 이 쪽지를 액자에 넣어 편집실 벽에 걸었다.
오데사 출신의 볼셰비키 언론인이자 역사가.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이 되어 1925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918년 RSFSR 헌법과 1924년 소련 헌법의 공동 기초자였으며 VTsIK 상임간부회 위원을 지냈다. 고리키와 함께 《노바야 지즌》을 편집하고 월간 《노비 미르》 창간을 주도했다. 바쿠닌·체르니솁스키 평전을 비롯해 방대한 사회주의 사상사 저작을 남겼다. 1938년 체포되어 1941년 사라토프 감옥에서 사망, 1956년 복권되었다.
1935년 체포된 뒤 수감자들에게 당 역사와 10월 혁명에 관한 강의를 이어갔고, 끝내 자신의 볼셰비키 신념을 철회하지 않았다고 동료 수감자들이 증언했다.
1897년에 혁명 운동에 뛰어든 올드 볼셰비키.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철도역을 장악했고, 초대 철도인민위원(1918–1919)으로 내전기 수송을 책임졌다. 이후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초대 총장을 거쳐 당 역사 연구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레닌 도서관장을 지냈다. 500편이 넘는 혁명운동사 저술을 남겼으며, 1935년 체포되어 1937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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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903모스크바 대학에서 사민주의 서클 조직, 체포와 유형 반복
1904–1905제네바에서 레닌을 만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복귀, 1905년 혁명기 볼셰비키 조직 건설
1906–1913상트페테르부르크 당 집행위원, 체포·유형 반복, 중앙위원 후보에서 정위원으로
1917.03–10군사기구 창설, 「솔다츠카야 프라우다」 편집, 7월 봉기와 10월 혁명 준비
1923년 7월 18일 《프라우다》 1면 기사 「시간이 비행기를 만든다」에서: "우리는 오늘 회의 시작을 기다리느라 7천 노동시간을 허비했다. 그 정도 노동력이면 비행기 한두 대는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또 '비행기 반 대分'을 더 기다린 뒤에야 회의가 시작됐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시간' 동맹이 창립되었다.
1904년 입당. 프롤레트쿨트 이론가로 '시간' 동맹을 이끌며 노동과학(NOT)을 주도했다. 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1936–38)으로 스탈린기 문화 통제를 구축했고, 《파리코뮌의 역사》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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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볼셰비키 입당, 모스크바대학 퇴학, 타간카 감옥 수감
1905–1912니즈니노브고로드·페테르부르크·키예프에서 지하활동과 볼셰비키 언론 기고
1912–1917런던·파리·뉴욕 망명, 《프라우다》 특파원, 아일랜드 독립운동 취재
1918–1920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즈베스티야》 부편집장·로스타 책임자
1921–1926주스웨덴 전권대표, 노동과학조직(NOT) 연구 주도, 주이탈리아 전권대표
1928–1930볼셰비키 중앙위 선전부 부장·공산주의아카데미 문학예술언어연구소장
1930–1936인민위원회비서국장·전연방 라디오위원회 의장
1936–1938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 — 불가코프·메이예르홀트 탄압, 형식주의 미술 숙청
동시대인들은 사제복을 입은 플로렌스키가 소비에트 정부 부서의 다른 지도자들과 나란히 일하는 모습을 놀라운 광경으로 기억했다.
파벨 플로렌스키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 신학자,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전기공학자로, 20세기 초 러시아 지성사에서 가장 독특한 인물 중 하나다. 대표작 『진리의 기둥과 터』(1914)는 정교회 신정론의 기념비적 저작으로, 합리적 분석을 넘어선 직관적 체험을 통해 신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 후에는 트로츠키의 추천으로 GOELRO 전기화 계획에 참여했으며, 사제복을 벗지 않은 채 소비에트 과학자들 사이에서 일하는 이중적 삶을 살았다. 1922년 에세이 「역원근법」은 이콘의 공간 구성에 대한 선구적 분석으로 타르투 기호학파에 영향을 미쳤으며, 1937년 대숙청 시기 NKVD에 의해 처형되었다.
“사회 분야에서도 정밀한 측정, 공식, 도면, 통제 게이지, 사회적 노르말의 시대가 도래해야 한다. 우리는 정신생리학과 경제학의 완전한 수학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우리의 과제」(1921)
1882년 10월 8일(구력 9월 26일) 블라디미르 주 수즈달에서 교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교사대학 재학 중 1902년 학생 시위를 주도한 일로 제적된 뒤 직업혁명가가 되었고, 1905년 코스트로마 소비에트 의장을 맡았다. 프랑스에서 금속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앙노동연구소(CIT)를 창설해 '사회공학'과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NOT)를 정립했고, 1932~1936년 전연방표준화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38년 9월 반혁명 테러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되어 1939년 4월 15일 코무나르카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3월 복권되었다.
"수하노프는 소부르주아지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 중 한 명이다" — 레닌, 1917년 9월 1일
본명 니콜라이 기메르. 1917년 2월 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창립 위원이 되었으며, 멘셰비키-국제주의자로서 전쟁과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연합을 주장했다. 7권짜리 회고록 『혁명의 기록』은 1917년의 가장 생생한 1차 사료로 남아 있다. 1917년 10월 10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무장봉기를 결의한 역사적 회의가 그의 페트로그라드 아파트에서 열렸다. 1931년 멘셰비키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1940년 거짓 혐의로 총살,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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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05사회혁명당(SR) 입당; 1904년 체포, 타간카 감옥 수감; 1905년 10월 석방 후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 참가
1911–1913아르한겔스크주로 3년 유형; 농업 통계 자료 정리
1914–1917잡지 『소브레멘니크』『레토피시』 편집자; 반전 국제주의자;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창립 위원, 『이즈베스티야』 창간 주도
1917–1918멘셰비키-국제주의자; 『노바야 지즈니』 편집자; VTsIK 2·3·4기 구성원; 1918년 6월 제명
1919–19237권짜리 회고록 『혁명의 기록』(Записки о революции) 집필·출간
1920–1929멘셰비키당 탈퇴; 대외무역 기관·농업경제연구소 근무; 공산주의 아카데미 회원; 1928년 강제 집단화 반대 연설
1883년 오룔의 세습 귀족 장교 집안에서 태어나 니콜라이 군사아카데미를 마치고 참모본부 장교가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단 참모장 직무를 맡았다. 1918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에, 1919년 갈리치아군에 복무했다. 1920년 붉은 군대에 들어가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제10사단과 제3군을 지휘했고, 1921년 투하쳅스키 아래 탐보프 진압군 참모장으로서 독가스 사용을 명한 명령 제0116호에 서명했다. 같은 해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3년 붉은 군대 참모부 내전사 부장이 되어 세 권짜리 내전사를 썼다. 1930년 체포되어 1936년 야로슬라블 감옥에서 숨졌다.
빅토르 세르주의 회고: "회의 중에 언제든 쓰러져 잠들 것 같았지만, 두뇌는 여전히 맑고 통계치로 가득 차 있었다."
볼셰비키 경제 이론가이자 부하린과 함께 『공산주의 ABC』(1919)를 집필한 선전가로, 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내며 초기 소비에트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1923년 '46인 선언'의 발기인이자 좌익 반대파의 핵심 논객으로서, 『새로운 경제학』(1926)에서 농민 부문의 잉여를 공업화 자본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원시축적'론을 정식화해 신경제정책 논쟁을 이끌었다. 1929년 스탈린 노선으로 복귀했으나 곧 집단화 폭력에 반대하며 다시 지하 조직을 결성했고, 1937년 처형됐다.
1919년 말, 에이헤의 제5군은 콜차크군의 후퇴를 토볼강에서 옴스크와 톰스크를 거쳐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밀어붙였다.
겐리흐 에이헤는 라트비아계 노동자 가정 출신의 혁명가이자 적군 지휘관, 군사사 연구자였다. 그는 1919년 동부전선에서 제26소총사단을 이끌어 백군 후방을 찌르는 기동을 펼쳤고, 제5군 사령관으로 콜차크군의 후퇴를 토볼강에서 시베리아 내륙까지 추격했다. 이후 극동공화국의 군사적 통합을 맡았지만, 대숙청기의 허위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1954년 무죄로 재활되었다.
스탈린이 헤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자, 성미 급한 라트비아인 철학자 스텐은 크렘린 사무실에서 제자의 양복 옷깃을 붙잡고 흔들며 가르쳤다. 수업 후 친구에게 남긴 말: '코바는 10년 안에 드레퓌스와 베일리스 재판을 무색하게 만들 짓을 할 거야.'
라트비아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붉은교수양성소 1기 졸업 후 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을 개인교습하며 소비에트 철학 제도화의 중심에 섰다. 1928년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로 돌아선 뒤 193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유배되었고, 잠시 복권되었으나 1937년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