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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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에르네스토비치 스텐

Ян Эрнестович Стэ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라트비아 1899–1937 ✕ 처형

스탈린의 철학 교사에서 우익 반대파로 전락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스탈린이 헤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자, 성미 급한 라트비아인 철학자 스텐은 크렘린 사무실에서 제자의 양복 옷깃을 붙잡고 흔들며 가르쳤다. 수업 후 친구에게 남긴 말: '코바는 10년 안에 드레퓌스와 베일리스 재판을 무색하게 만들 짓을 할 거야.'

라트비아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붉은교수양성소 1기 졸업 후 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을 개인교습하며 소비에트 철학 제도화의 중심에 섰다. 1928년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로 돌아선 뒤 193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유배되었고, 잠시 복권되었으나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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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라트비아에서 RSDLP 입당
  • 1921–1924붉은교수양성소 철학과 1기 수학
  • 1925–1928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 개인교습
  • 1927–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선전부 부장
  • 1928–1930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부소장
  • 1932당 제명,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체포·유배
  • 1934–1936석방,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
  • 1937재체포되어 사형

이반 테렌티예비치 클레이묘노프

Иван Терентьевич Клеймё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99–1938 ✕ 처형

로켓 연구를 국가 기관으로 묶은 조직가

1937년 11월 2일, 그가 이끌던 연구소의 수석기사 랑게마크 체포 뒤 클레이묘노프도 체포되었다.

이반 클레이묘노프는 소련의 초기 로켓 기술을 조직한 군사공학자이자 행정가였다. 그는 기체역학연구소와 반응과학연구소를 연결해 연구를 군수 체계에 편입했고, 무연 추진제 로켓탄과 훗날 카튜샤로 이어진 기술 개발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가 세운 연구기관은 대숙청 속에서 핵심 인력의 체포와 함께 붕괴했으며, 클레이묘노프 자신도 처형되었다. 1955년 무혐의로 복권되었고 199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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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RKP(b) 입당
  • 1920–1921붉은군대 군수·보급 복무
  • 1928–1930공군과학연구소 공방장
  • 1930–1932베를린 소련 무역대표부 공학부 부책임자
  • 1932–1933기체역학연구소 소장
  • 1933–1937반응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원장
  • 1937중앙공기유체역학연구소 프로펠러·엔진 부문 부소장
  • 1938처형, 1955년 무혐의 복권

레프 블라디미로비치 쿨레쇼프

Лев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леш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70 ○ 자연사

〈쿨레쇼프 효과〉의 창안자, 편집이 촬영보다 의미를 만든다는 것을 증명한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의 아버지

“우리는 영화를 만든다 — 쿨레쇼프는 영화를 만들었다.” — 1929년 제자들이 스승의 저서 《영화의 예술(나의 경험)》 서문에 바친 헌사

소련 영화감독·이론가·교육자. '쿨레쇼프 효과'로 몽타주의 심리적 원리를 입증했고, 1919년 세계 최초 영화학교(VGIK)를 창설해 에이젠슈테인·푸돕킨으로 이어지는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의 토대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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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한존코프 영화사에서 예브게니 바우에르의 미술감독으로 영화계 입문
  • 1918첫 연출작 〈프라이트 기술사의 계획〉 — 초기 몽타주 실험을 담은 데뷔작
  • 1919국립영화학교(현 VGIK) 설립, 세계 최초의 체계적 영화 교육 시작
  • 1920〈붉은 전선에서〉 — 다큐와 극을 결합한 최초의 소비에트 영화, 쿨레쇼프 워크숍 결성
  • 1924〈볼셰비키 나라의 미스터 웨스트〉 — 쿨레쇼프 집단의 첫 장편으로 소비에트 영화의 국제 경쟁력 입증
  • 1939VGIK 교수 임명, 예술학 후보자 학위 취득
  • 1941저서 〈영화 연출의 기초〉 출간 — 전 세계 영화학교의 표준 교재
  • 1944–1969VGIK 학장(1944), 이후 연출학과장으로 25년간 후진 양성; 노동적기훈장·레닌훈장·인민예술가 수훈

야코프 그리고리예비치 블륨킨

Яков Григорьевич Блюмкин

미르바흐를 쏜 좌파 SR, 소련 비밀공작의 선구자

「제국 대사를 쏜 사내가 군중 속에서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잡고 시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 니콜라이 구밀료프, 「나의 독자들」

오데사 출신 유대인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원으로 1918년 체카 소속일 당시 독일 대사 미르바흐 암살을 주도해 좌파 SR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면 후 OGPU 해외첩보부(INO) 초기 비밀공작원으로 페르시아·팔레스타인·몽골·중동에서 불법 체류하며 소련 정보망을 구축했다. 모스크바 문학계에서 마야콥스키·예세닌 등과 교류한 논란적 인물로, 192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트로츠키를 은밀히 만나 서신을 국내 반대파에 전달하려다 체포되어 OGPU에 의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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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06체카 반국제스파이 분과장 — 좌파 SR 지도부가 배치
  • 1918.07.06니콜라이 안드레예프와 독일 대사 미르바흐 암살 — 좌파 SR 봉기 촉발
  • 1919.05자수 후 VTsIK 사면, 적군·체카 복귀
  • 1920페르시아 파견 — 이란 공산당 합류, 길란 소비에트 공화국 군사참모
  • 1923–1924OGPU INO 비밀체류자 — 팔레스타인(야파) 거점, 세탁소 위장
  • 1926–1927몽골 OGPU 체류자 겸 국가내부경비대(GVO) 수석교관
  • 1928–1929중동 OGPU 체류자 — 콘스탄티노플, 고서적상 위장
  • 1929.10트로츠키 비밀접촉 발각 — OGPU 체포, 콜레기야 사형판결

보리스 게오르기예비치 바자노프

Борис Георгиевич Бажан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러시아 1900–1982 ○ 자연사

스탈린 비서실에서 유일하게 망명한 정치국 기록자

1923년 10월 26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자신의 후계자 역할을 제안했고, 트로츠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 장면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정치국 서기 보리스 바자노프였다.

볼셰비키 당의 기술서기로,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스탈린의 개인 보좌관 겸 정치국 서기를 지내며 모든 정치국 회의의 기록을 담당했다. 레닌 사후 권력 투쟁이 한창이던 시기 정치국의 내부 작동 방식을 직접 목격했으며, 1928년 소련을 탈출한 후 파리에서 회고록을 출간해 스탈린 체제의 의사 결정 구조와 권력 장악 과정을 서방에 최초로 폭로했다. 스탈린의 서기국에서 망명한 유일한 인물로, 그의 회고록은 초기 소비에트 권력의 내막을 전하는 핵심 사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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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0–1922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화학 전공 (중퇴)
  • 1922중앙위 조직지도부 근무, 카가노비치 보좌
  • 1923중앙위원회 조직국 서기
  • 1923–1925스탈린 개인보좌관 · 정치국 서기 — 모든 정치국 회의 기록
  • 1926–1927『재정신문』 편집자, 재무인민위원부 및 체육최고위원회 근무
  • 19281월 1일 소련 탈출 — 이란 · 인도 경유 프랑스 망명
  • 1930–1980회고록 『스탈린의 전 비서의 회상』 출간 및 확대판 간행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 알릴루예바

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32 ✕ 자살

레닌 비서실에서 일하고 스탈린과 결혼한, 자신의 정치적 독립을 추구했던 볼셰비키 여성

1932년 11월 8일 밤 보로실로프의 만찬에서, 스탈린이 그녀에게 오렌지 껍질을 던지며 '이봐!'라고 부르자 알릴루예바는 '나는 당신의 "이봐"가 아니에요!'라고 응수하고 자리를 떠났다.

올드 볼셰비키 가문의 막내딸로, 1917년 7월 봉기 당시 아버지 세르게이 알릴루예프는 자택에 레닌을 은닉했고, 대부는 아벨 예누키제였다. 1918년 당 입당 후 레닌 비서실과 선동선전부에서 일했고, 1929년 산업아카데미에 입학해 합성섬유 공학을 공부하며 니키타 흐루쇼프의 당 셀 동료가 되었다. 스탈린과의 결혼은 그녀를 크렘린 중심에 두었으나, 독립적 정치 주체로 서려는 열망과 아내 역할 사이의 긴장 속에서 1932년 3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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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18–1919민족문제인민위원부 비서
  • 1919–1921V.I. 레닌 비서실 근무 (리디야 포티예바 지휘 하)
  • 1921당 숙청으로 제명, 레닌의 개입으로 후보당원 복권 (1924년 정식 복권)
  • 1924–1929선동선전부 국제농업연구소 보좌관
  • 1929–1932모스크바 산업아카데미 섬유학부 학생 (합성섬유 전공), 니키타 흐루쇼프와 동문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미프

Паве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ф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1–1938 ✕ 처형

28인의 볼셰비키를 키워낸 코민테른의 중국 전문가

1931년 1월, 미프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4차 전원회의에 코민테른 대표로 직접 참석해 왕밍과 그의 그룹을 정치국으로 진입시키며 '28인의 볼셰비키'의 약진을 현장에서 주도했다.

10대 후반에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에 참전한 뒤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중국 노동자 공산대학)의 부총장을 거쳐 1927년 26세의 나이로 총장에 올랐고, 왕밍을 비롯한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리는 중국 유학생 집단을 직접 길러내 초기 중국공산당 내 친소련·정통파 세력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8년부터 1935년까지 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으로서 중국 혁명 노선을 조정했으며, 1935년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을 지냈다. 중국 혁명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긴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중국학의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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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내전 참전, 정치위원
  • 1925–1927중산대학 부총장
  • 1927–1929중국 노동자 공산대학 총장
  • 1928–1935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
  • 1930–1931코민테른 극동부 비서
  • 1935–1937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
  • 1937국제민족식민지문제연구소 소장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차플린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Чапл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2–1938 ✕ 처형

콤소몰을 당의 청년 훈련 기관으로 만든 소년 정치위원

콤소몰 총서기에서 물러난 직후, 그는 가짜 이름으로 원양 화물선 갑판 선원이 되어 독일·영국·벨기에·포르투갈·터키를 돌았다. 함께 갑판을 닦던 선원들은 그가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인 줄 몰랐다.

농촌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에 스몰렌스크 학교에 청년 공산주의자 조직을 세웠다. 1922년 전연방 피오네르 조직의 초대 의장이 되어 소비에트 아동·청소년 대중운동의 틀을 놓았고,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총서기로서 청년 농민학교, 공장견습학교(FZU), 정치교육 체계를 통해 콤소몰을 당의 간부 양성 기구로 전환시켰다. 청년의 교양과 지식을 강조한 그의 노선은 크룹스카야와 루나차르스키의 지지를 받았다. 콤소몰 지도부를 떠난 뒤 상선 선원으로 위장해 유럽을 여행했고, 이후 트란스캅카스 당 기관과 철도 정치부에서 일했으며 1936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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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스몰렌스크 학교 청년 공산주의자 조직 결성
  • 1919스몰렌스크 군·시 콤소몰 위원회 의장
  • 1920–1921튜멘 현·스몰렌스크 현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21–1922콤소몰 중앙위원회 정치교육부장
  • 1922전연방 피오네르 조직 중앙국 초대 의장
  • 1922–1924트란스캅카스 지역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24–1928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총서기
  • 1924–1934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24–1930전연방 공산당 조직국 후보위원
  • 1930–1931트란스캅카스 지역 당위원회 제2서기
  • 1931–1933중앙소비자조합 간부회 위원·전연방급식조합 의장
  • 1933–1937무르만스크·키로프 철도 정치부장
  • 1937남동철도 관리국장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겐딘

Семён Григорьевич Генд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2–1939 ✕ 처형

대숙청기 GRU를 이끌며 조르게 도쿄 거점을 구한 체카 출신 정보장교

1918년, 16세 겐딘은 이렇게 썼다: "나는 주변의 모든 일을 탐욕스럽게 지켜보았고, 물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끈질기게 물었다. 내 자리는 혁명 대열 속에 있다고 굳게 확신했다."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겐딘은 체카·OGPU·NKVD 방첩 장교로 경력을 쌓다 1937년 9월 노농적군 정보총국(GRU) 국장 대리가 된 소련 군사정보 지휘관이다. 1918년 16세에 붉은군대와 볼셰비키당에 합류했고, 내전 후 모스크바 체카 수사관으로 전환해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 작전 '신디카트-2'에 참여했으며, 이후 OGPU 방첩부와 NKVD 특별부·비밀정치부에서 요직을 거쳤다. GRU 국장 대리로서 대숙청이 정보기관을 초토화하는 와중에 리하르트 조르게의 도쿄 비합법 거점을 해체하라는 명령을 막아냈으며, 이는 훗날 소련이 독소전 직전 일본의 전략 방향을 확인하는 결정적 정보선을 보존한 조치였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이듬해 2월 처형되었고 1957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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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붉은군대 입대·RKP(b) 입당
  • 1918–1921남북전쟁: 페트로그라드·카프카스 전선에서 소대장·포대장·노보로시스크 요새지구 포병부사령관
  • 1921–1925모스크바 체카 수사관 → OGPU 방첩부 제6·제7과 부과장·과장
  • 1924보리스 사빈코프 체포 작전 '신디카트-2' 참여
  • 1926–1929OGPU 서부지역 전권대표부 방첩부 부장 (민스크)
  • 1929–1934OGPU 방첩부 과장들 → 특별부 과장
  • 1934–1936GUGB NKVD 특별부 과장 겸 부부장
  • 1936.09–1937.04NKVD 서부주(스몰렌스크) 국장
  • 1937.04–09GUGB NKVD 제4(비밀정치)부 부부장
  • 1937.09–1938.10노농적군 정보국(GRU) 국장 대리 겸 부국장

예브게니 페트로비치 페트로프

Евгений Петрович Петр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42 ✕ 추락사

일리프와 함께 『열두 개의 의자』를 쓴 풍자 작가이자 『오고뇨크』 편집장

세바스토폴 취재 원고의 마지막 줄: "도시가 버텨낼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기적을 믿는 데 익숙해졌다."

일리야 일리프와 함께 소비에트 풍자문학의 대표작 『열두 개의 의자』(1928)와 『황금 송아지』(1931)를 써서 사기꾼 오스타프 벤데르를 탄생시킨 작가. 본명은 예브게니 카타예프로, 작가 발렌틴 카타예프의 동생이며, 오데사 형사국 수사관으로 일한 경험이 그의 초기 글쓰기에 독특한 현장감을 불어넣었다. 1935년 일리프와 함께 미국을 자동차로 횡단하며 『단층집 미국』을 집필했고, 일리프 사후에는 잡지 『오고뇨크』 편집장으로 출판계를 이끌었다. 독소전쟁 발발 후 종군기자로 세바스토폴 포위전을 취재하고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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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오데사에서 교사의 차남으로 출생 (본명: 예브게니 카타예프), 작가 발렌틴 카타예프의 동생
  • 1920–1923오데사 형사국 수사관 — 40건 이상 수사, 소꿉친구였던 도적 코자친스키 체포
  • 1923–1926모스크바 이주, 『크라스니 페레츠』 기자, 후에 『구도크』로 옮기며 필명 '페트로프' 채택
  • 1927일리야 일리프와 공동 집필 시작
  • 1928–1931『열두 개의 의자』와 『황금 송아지』 발표 — 오스타프 벤데르 신화 창조
  • 1935–1936일리프와 미국 자동차 횡단 (25개 주, 16,000km), 『단층집 미국』 집필
  • 1938–1941『오고뇨크』 편집장; 1939년 레닌 훈장·전연방 공산당 입당
  • 1942종군기자로 세바스토폴 포위전 취재, 귀환 중 7월 2일 비행기 추락으로 순직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자볼로츠키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Заболоцкий
소비에트 러시아 1903–1958 ○ 심장마비

아방가르드에서 굴라그를 거쳐 후기 고전적 서정으로 나아간 시인

이 황량한 시대의 사막에, 전쟁과 화재와 맹렬한 파괴 끝에, 우리 고대 영광의 이 외롭고 무엇과도 닮지 않은 성당이 서 있다.

니콜라이 자볼로츠키는 1928년 다닐 하름스, 알렉산드르 브베덴스키와 함께 아방가르드 문학 그룹 오베리우(OBERIU)를 공동 창립한 소비에트 시인이자 번역가이다. 첫 시집 『기둥들』(Столбцы, 1929)은 NEP 시기 소비에트의 그로테스크한 일상을 부조리한 이미지와 풍자로 그려내 혁명 후 러시아 시의 이정표가 되었다. 1938년 대숙청 때 반소비에트 작가조직 결성 혐의로 체포되어 5년간 수감되었고, 유형 중 중세 서사시 『이고리 원정기』의 탁월한 번역을 완성했다. 전후 모스크바로 복귀한 후에는 자연과 인간의 형이상학적 관계를 숙고하는 고전적 서정시로 전환하여 튜체프에 비견될 만한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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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오베리우(OBERIU) 공동 창립
  • 1929첫 시집 『기둥들』(Столбцы) 출간
  • 1933서사시 「농업의 승리」 발표로 비판 공격 촉발
  • 1937두번째 시집 출간
  • 1938–1943대숙청으로 체포·수감, 유형 중 『이고리 원정기』 번역
  • 1946소비에트 작가동맹 복귀, 모스크바 정착
  • 1948세번째 시집 출간
  • 1957마지막 생전 시집 및 연작 「마지막 사랑」 발표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오스트롭스키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Островский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04–1936 ○ 병사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저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범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진다. 죽을 때 '내 모든 삶과 힘을 인류 해방 투쟁이라는 가장 숭고한 대의에 바쳤다'고 말할 수 있도록 살라.

13세에 볼셰비키 활동가가 되고 코톱스키 여단의 붉은군대 기병으로 복무했던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는, 25세에 강직성 척추염으로 시력과 보행 능력을 잃은 후 자서전적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1932~1934)를 집필했다. 받아쓰기와 필사틀로 완성된 이 작품의 주인공 파벨 코르차긴은 소련·중국·조선 공산주의자 세대의 도덕적 전범이 되었다. 3,640만 부 판매로 러시아어 최다 판매 도서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이 소설로 그는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고, 이듬해 3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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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셰페톱카 볼셰비키 지하운동 연락원
  • 1919콤소몰 가입 및 붉은군대 자원입대, 코톱스키 기병여단 복무
  • 1921–1923키예프 철도공장 전기공·콤소몰 서기
  • 1924당 가입, 베레즈디프·이자슬라프 콤소몰 지구위원회 서기
  • 1930–1934시력·보행 상실 상태에서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집필
  • 1935레닌 훈장 수훈
  • 1936『폭풍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 집필 착수, 완성 전 사망

레프 일리치 루시노프

Лев Ильич Руси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07–1960 ○ 자연사

핵분열과 핵이성질체를 탐구한 실험물리학자

1935년 브로민의 방사능을 연구하던 그는 쿠르차토프 형제·미솝스키와 함께 원자핵 이성질체 현상을 발견했다.

레프 루시노프는 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에서 핵물리학의 실험 기반을 넓힌 소련의 물리학자였다. 그는 1939년 게오르기 플료로프와 우라늄 핵분열에서 한 번의 분열마다 둘 이상의 중성자가 나온다는 사실을 입증해 연쇄반응 조건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인공 방사성 핵의 이성질체와 중성자·감마선의 상호작용을 연구했으며, 전후에는 연구용 원자로 건설과 핵물리학 연구 집단의 조직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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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0레닌그라드 공과대학 물리기계학부 학생
  • 1930–1944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 쿠르차토프 연구실 연구자
  • 1939–1940플료로프와 우라늄 핵분열 중성자 실험 수행
  • 1944핵이성질체 연구로 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 1948실험물리학 교수
  • 1946–1960소련 원자 프로젝트 및 연구용 원자로 개발 참여
  • 1950년대고중성자 특성 연구용 원자로 프로젝트 과학책임자

알렉산드르 사포시코프

Александр Сапожков

1920년 징발에 맞서 「진리의 붉은 군대」를 일으킨 붉은 군대 사단장

사마라주 노보우젠스크군의 농민 집안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1917년 소위로 노보우젠스크에 돌아와 군 소비에트 초대 의장이 되었다. 좌파 사회혁명당원이었으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봉기 뒤 공산당에 들지 않은 채 공산주의자를 자처했다. 붉은 군대 제22사단장으로 1919년 우랄스크에서 80일 동안 포위를 버텼지만, 「서툰 지휘와 부대를 해치는 정치」를 이유로 전선에서 물러났다. 1920년 제9기병사단을 편성하다 해임되자 7월 14일 사단을 「제1 진리의 붉은 군대」로 바꾸어 봉기했고, 9월 6일 코임 아울 근처에서 추격대에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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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노보우젠스크군 소비에트 초대 의장
  • 1918사마라주 혁명위원회 위원, 적위대 조직
  • 1919붉은 군대 제22사단장, 우랄스크 80일 방어
  • 1920제9기병사단 편성, 7월 「제1 진리의 붉은 군대」 봉기

표트르 토크마코프

Пётр Токмаков

탐보프 연합 파르티잔 군 사령관이자 근로농민동맹 의장을 지낸 농민 출신 장교

탐보프주 키르사노프군 이노콥카 마을에서 태어나 1904년 러일전쟁 때 징집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장기 복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는 갈리치아에서 싸워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과 메달을 네 등급 모두 받았고, 1915년 장교로 임관해 1917년 중위에 올랐다. 브레스트 강화 뒤 고향에서 민경대원으로 일하다 1918년 유격대를 꾸렸다. 1920년 6월 제2봉기군 사령관, 11월 탐보프 연합 파르티잔 군 사령관이 되었고 근로농민동맹 의장도 겸했다. 러시아어 출처는 그가 1921년 2월 28일 보고슬롭카 마을 근처 교전에서 전사했다고 쓰지만, 영어 출처는 그의 죽음을 6월 무렵으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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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러일전쟁 때 징집, 장기 복무
  • 1915장교 임관
  • 1917중위
  • 1918고향 이노콥카에서 유격대 조직
  • 19206월 제2봉기군 사령관, 11월 탐보프 연합 파르티잔 군 사령관·근로농민동맹 의장

레오니트 페트로비치 세레브랴코프

Леонид Петрович Серебряков

레닌이 '뛰어난 노동자'라 부른 좌익 반대파 서기

그의 딸 조랴의 회고에 따르면 레닌은 그를 '뛰어난 노동자'라 불렀다.

사마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9세부터 일했고, 14세 때 루간스크의 하르트만 기관차 공장에서 금속 세공·선반공으로 일했다.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루간스크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1912년 프라하 당 대회 대표로 레닌을 만난 뒤 체포되어 나림으로 유형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때 코스트로마에서 연대를 이끌고 봉기에 나섰으며, 이후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와 중앙위원(1919–1921), 중앙위 서기(1920–1921)를 지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좌익 반대파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 1927년 제명되어 세미팔라틴스크로 유배되었다가 1930년 복당했고,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쇼재판의 주요 피고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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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5세에 볼셰비키 입당, 루간스크에서 선동 활동
  • 1908–1916반복된 체포와 유형 (볼로그다·나림), 탈출과 재체포
  • 1912프라하 당 대회 대표
  • 1917코스트로마에서 2월 봉기 주도,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
  • 1919–1921중앙위 서기, 조직국 위원,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2–1924혁명군사평의회 정치총국장, 교통부 인민위원 대리
  • 1923–1927'46인 선언' 서명, 좌익 반대파 지도부 — 제명
  • 1928–1937세미팔라틴스크 유형, 복당, 도로·자동차운수 중앙관리국장, 제2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로 처형